설교본문 : 삿 6장 19-24절
설교제목 : 여호와 샬롬(하나님의 이름)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들이 늘 자주 사용하면서도 여전히 신비스런 단어,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우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말이 무엇인가고 묻는다면 그들은 만장일치로 ‘샬롬’(shalom)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물론 이 단어의 가장 간결한 사전적 정의는 ‘평화’입니다. 그러나 히브리 학자들은 예외없이 이 단어는 평화이상의 보다 심오하고 보다 광범한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라고 지적합니다. 우리는 보통 평화하면 전쟁이 끝난다든지 갈등이 조정된 상태를 가르쳐 평화라고 부르지만 샬롬은 그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히브리어 단어입니다. 본래 이 단어는 “완전하다, 건강하다, 성취하다”는 말의 명사형입니다. 한 신학자는 샬롬을 정의하기를 “우리를 둘러싼 모든 삶의 마당, 모든 인간 관계속에서 통전적으로 궁극적으로 경험될수 있는 충만하고도 온전한 은혜의 상태”(John Durham)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샬롬을 영어로 번역할 때 보통은 ‘peace'라고 하지만 이 단어의 기술적 의미를 담아낼수 있는 영어 단어로는 요즈음 많이 사용하는 웰빙-’wellbeing' 혹은 ‘wholeness'(충만함), ’integrity'(건강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오늘 ‘샬롬’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를 말씀드리는 것으로 이 설교를 시작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금은 소위 성탄절(대강절)시즌입니다. 이천년 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천사들은 베들레헴 지경 밖에서 양 치던 목자들에게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며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이 땅에 샬롬으로 오셨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 보다 더 오래된 옛날 주전1,200년을 전후로 한 소위 사사시대에 기드온이라는 한 농부가 이스라엘 민족을 국난에서 구출하는 지도자로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도 역시 샬롬이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샬롬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이름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삿6:24에 기드온은 그가 하나님을 만나 지도자로 부르심을 받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여호와 샬롬’(평화이신 하나님)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그가 샬롬이신 하나님을 만났다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베들레헴에서 양 치던 목자들도 그리고 농부 기드온도 진정한 샬롬이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순간 그들의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도 이런 샬롬이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그렇다면 우리는 농부 기드온이 살았던 시대정황을 관찰하면서 지금의 우리에게 샬롬이 필요한 상황은 무엇인가를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진정한 샬롬을 필요로 할까요?
1.우리의 삶의 터전이 무너져 내릴 때입니다. 본문의 배경을 형성하는 삿6:1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년동안 그들을 미디안에 넘겨주시니” 이스라엘의 범죄로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징계를 불렀고 그 결과가 이웃 부족인 미디안 족속의 침략을 초래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미디안 족속의 침략행태는 매우 독특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을 국가적으로 점령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파종때마다 낙타같은 짐승들을 타고 메뚜기처럼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삶의 터전을 초토화시켜 놓고 후퇴해 버리는 방식으로 고통을 주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칠년간 고통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의 삶의 마당은 기초부터 무녀져 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우리중에는 지난 한해 혹은 지난 수년간 이런 고통의 시간을 지내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샬롬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필요한 샬롬의 은혜는 다른 말로 하면 회복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런 회복의 은혜는 한가지 전제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7년의 고통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한 죄의 결과로 말미암은 징계였다면 죄로부터의 돌이킴 곧 회개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삿6:6-7에 보면 이에 이스라엘은 다시 여호와께 부르짖기 시작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많은 경우 우리의 삶의 터전이 흔들리는 시련을 경험할 때 우리는 그것이 새로운 내일을 향해 일어서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채찍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일종의 하나님의 창조적 파괴공작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인생을 새롭게 빚어 만드시고자 우리를 흔들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터전이 무너져 내릴때 그 마당에 엎드려 우리가 토해낼 기도는 꼭 한가지 입니다. “주여, 회개하오니 이제는 샬롬의 은혜를, 회복의 은혜를 주옵소서”입니다. 우리가 언제 또 하나님의 샬롬을 필요로 할까요?
2.새로운 삶의 소명이 힘겹게 느낄 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회개를 확인하시면서 그들을 구원하는 지도자인 사사(위기의 시대를 위한 일종의 군사적 지도자-혁명 사령관, 쇼패팀, judge)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가 바로 기드온 사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밀 타작 마당에서 일하던 가난한 농부에 불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쓰시겠다고 하실 때 제일 놀란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기드온 자신이었습니다. 기드온의 반응을 보십시오. 삿6:15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여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쉽게 말하면 “주님, 내가 무슨 통뼈라고 이스라엘을 구출하는 그런 어마아마한 일을 감당하란 말입니까? 저는 못합니다”는 뜻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날 갑자기 내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보이는 숙제가 주어질 때 그런 소명이 임할 때 우리가 이때 구할 것, 또한 하나님의 샬롬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샬롬은 우리로 인생의 소명을 감당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비전이요 능력일 것입니다. 자, 하나님께서 농부 기드온에게 어떻게 샬롬의 은혜를 부어주시는가를 주목해 보십시다. 맨 처음 기드온에게 주께서 천사의 모습으로 등장하셔서 주신 말씀이 무엇이었나요? 6:12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계시도다” 얼마나 놀랐을까요? 무명의 농부에게 큰 용사라니요? 그러나 그것이 그를 부르신 하나님의 기대요 비전이었던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너와 함께 함으로 너를 큰 용사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동일하신 분이 후일 시몬을 베드로로 부르신 분이시기도 합니다. 시몬이라는 이름에는 ‘앞사귀’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그는 실로 이름처럼 잎사귀처럼 가볍게 변하고 흔들리던 연약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를 만나자 마자 그를 “네가 게바라 하리라, 베드로라 하리라”고 하십니다. 아람어로 게바, 희랍어로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연약하고 흔들리던 그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는 기초로 반석으로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분에게 드릴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주여, 주께서 원하시면 하실수 있사오니 뜻대로 쓰시옵소서”가 아니겠습니까?
기드온의 응답이 바로 그것이 아니었습니까? 6:17을 보십시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여 만일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이가 주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그리고 마침내 그가 얻어낸 응답이 무엇이었습니까? “여호와 샬롬”이었던 것입니다. 평화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 것입니다. 오늘 당신이 감당해야 할 인생의 짐이, 소명이 너무나 힘겹고 무겁게 느끼십니까? 그러면 속히 그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의 평강을 구하십시오. 그분의 이름이 평강이십니다. 우리는 또 언제 하나님의 샬롬을 필요로 할까요? 3.의외로 주의 임재가 두렵게 느낄 때입니다. 인간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보편적인 딜레마는 하나님의 실존이나 임재가 쉽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예배중이나 혹은 개인 기도중에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가 체험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그렇게 그리워지고 경험하고 싶었던 하나님의 임재가 갑자기 두렵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기드온이 바로 그런 경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기드온은 자기를 부르시고 찾아오신 분이 정말 하나님이시라면 그 증거를 보여 달라고 요청합니다. 하나님은 간단한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시기로 작정하십니다.
우선 기드온에게 그가 가져온 고기와 무교병을 바위위에 올려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가 손 하나 대지 않았음에도 불이 바위틈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병을 불살라 버리게 됩니다. 기드온은 그 순간 그가 하나님의 목전에 있었음을 깨닫자 두려움으로 엎드립니다. 그때 기드온의 고백이 본문 22절입니다.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줄을 알고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당시에 죄인인 인생이 하나님의 현존을 목격하는 것은 죽음의 경험이어서 기드온은 더욱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십니까? 2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바로 그때 기드온이 깨달은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두려움만의 대상이 아닌 개인적인 친근함으로 인생에게 접근하시고 친히 자신을 열어 보여주시는 평화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기드온이 부른 하나님이 바로 ‘여호와 샬롬’이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런 하나님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기드온과 같은 케이스가 아니더라도 피조물인 인생 모두에게는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존재합니다. 어쩐지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내 정체가 탄로 날 것 같은 그런 느낌말입니다. 마치 누군가가 투시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것이 겁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싶어 하면서도 또 하나님을 피하고자 하는 역설적인 존재이기도 합니다. 물론 인생은 자신의 죄문제의 해결없이는 진정한 하나님과의 평화의 관계를 가질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친히 그가 우리의 죄문제를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를 평강으로 만나고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가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이 십자가의 복음과 함께 시작된 것입니다.
말틴 루터의 종교개혁도 이 복음의 은혜가 임함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루터는 21세의 대학생 시절 시골 길을 걷다가 폭풍과 천둥을 만나 두려움에 사로잡혀 “주여, 저를 살려 주시면 수도사가 되겠나이다”고 소리칩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수도사가 됩니다. 매우 엄격한 규율을 가지고 있던 어거스틴파 은둔 수도원에 들어간 그는 금식하며 잠도 자지 않고 자신의 몸을 채찍으로 때리며 수행에 열중했지만 그는 여전히 죄책에 시달리며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저 멀리 계신 두려운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날 그의 이런 내면의 고통을 털어놓자 수도원장이었던 요한 슈타우피츠(Johannes von Staupitz)는 그에게 성경공부를 권합니다. 루터는 본격적으로 로마서를 공부하면서 비로소 목마른 사슴처럼 말씀과의 사랑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롬1:17을 통해 금욕을 통해서도 아니고 기도를 통해서도 아니고 성례전을 통해서도 아니고 오직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자신의 생명을 버려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만 하나님앞에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의 마음에서는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기쁨이 샘솟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때의 감격을 이렇게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대면한 하나님은 나를 벌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이었고 나는 그런 하나님을 사랑할수 없었다.--그러나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이 말씀으로 나는 참 복음을 이해하게 되었다.--이제 나는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로 오직 믿음으로 나를 의롭다하시는 은혜속에 들어간 것이다. 나는 지금 진실로 다시 태어난 것을 느낀다. 믿음의 문이 활짝 열렸고 나는 낙원으로 들어섰다.” 이제 진실로 그에게 하나님의 평강이 임한 것입니다. 오늘 당신에게는 이런 평안이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성탄은 인류가 기다려온 이런 존재의 평화를 위해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야웨 샬롬’으로 오신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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