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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마태복음

마태복음 9장 35-40절 예님의 거룩한 습관(7) 제자 삼기 -이동원 목사

by 재영구리 2023.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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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마9장 35~40장1, 28장 19~20
설교제목 : 예님의 거룩한 습관(7) 제자 삼기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이번 달 추천도서인 존 올트버그의 책 “우리는 만나면 힘이 됩니다.”의 제 1장의 제목은 ‘고슴도치 딜레마’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고슴도치를 외로운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고슴도치는 떼로 다니는 법이 없습니다. 늑대와 양, 코끼리, 까마귀마저 떼로 다니지만 고슴도치는 무리를 짓는 일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고슴도치는 늘 홀로 다닙니다. 그러나 고슴도치가 언제나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외로움을 타는 계절이면 그는 이웃에게 다가섭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웃들과 함께 있기 시작하는 순간 그는 이웃들에게 상처를 입히기 시작합니다. 북미산 고슴도치는 약 3만개의 가시를 몸에 지닌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웃들에게 다가서지만 서로에게 너무나 쉽게 상처를 입히고 다시 멀어질 수밖에 없는 숙명-이것이 바로 고슴도치의 딜레마이고 이것이 바로 인간된 우리의 딜레마라고 말합니다.

저자는 우리는 누구나 무수한 작은 가시들을 지니고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거부, 비난, 분노, 오만, 이기신, 시기, 경멸의 가시 등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가시를 잘 숨기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조금만 다가보면 여지없이 그 가시가 드러나 보이기도 합니다. 자상하게 돌아보면 우리 인생의 주변에는 가시투성이 고슴도치들이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들만 고슴도치 인생이 아니라, 나 역시 누군가에게 고슴도치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끊임없이 상처주고 상처받는 인생-이런 인생들도 과연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어 줄 수가 있을까요? 사제 헨리 나우엔은 예수를 만나 주님의 은혜로 상처를 치유받기 시작한 사람들의 소명을 가르쳐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라고 부릅니다. 우리 모두는 나보다 더 상처받은 이웃들의 치유자로 살아가야 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래전에 그것을 ‘제자 삼기’의 사역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공생애의 대부분은 바로 이 한 가지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시고 제자들과 함께 하시고 제자들을 훈련하시고 그리고 3년 동안 함께 하셨던 그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너희들도 나처럼 제자 삼기의 거룩한 습관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부탁하시고 세상을 떠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제자 삼기의 삶’을 우리는 어떻게 모방할 수 있을까요?

1. 상처받은 이웃들을 주목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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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본문 36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목자 없는 양처럼 고생하고 기진한 양들의 모습을 보셨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상처받은 이웃들의 치유자가 되려면 우선 그들의 고생하고 기진하는 모습이 내 눈에 보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 땅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를 포함해서 자신들의 문제 속에만 너무 깊이 빠져 살아감으로 인해 고통 받는 이웃들을 바라보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너무 많습니다. 사실 이웃들이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려면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마음의 여유 곧 스페이스(space)가 있어야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오늘날 이웃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없이 ‘쫓겨 다니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골든 맥도날드(Gordon Mcdonald)목사는 이런 현대인의 삶의 유형을 두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한 유형은 1)‘소명에 의해 살아가는 삶’(called life)이고 또 하나의 유형을 그는 2)‘쫓겨 다니는 삶’(driven life)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을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도 인식하지 못한 채로 그날그날을 충동적으로 쫓겨 다니며 산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고통 받는 이웃들이 보일 리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이웃들은 모두 나를 귀찮게 하는 존재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사람들은 늘 소명의 삶을 살고, 또 어떤 사람들은 늘 충동의 삶을 산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정확한 인생의 그림이 아닐 수가 있습니다. 사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는 이 두 가지 유형의 삶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것이 실제적인 인생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요즘 많은 분들이 읽고 있는 미국의 유명한 정신 의학자인 엘리자베스 쿼블러 로스의 베스트셀러 ‘인생 수업’중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개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분이 한번은 뉴욕에서 1,500여명의 관중 앞에서 강연을 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강연이 끝나자 수백명이 싸인을 받고자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할 수 있는데 까지 싸인을 서둘렀지만 공항 갈 시간이 임박해 싸인 시간을 단축하고 공항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그가 헐떡이며 공항 청사에 들어가 잠시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화장실 문틈으로 누군가가 자기가 쓴 책과 펜을 들이밀며 “박사님, 죄송하지만 싸인을 좀--”하더랍니다.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로스 박사는 서둘러 볼일을 마치며 밖으로 나와 이런 무례한 일을 하는 사람이 누군지 얼굴을 보고자 했는데 뜻 밖에 수녀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런 일을--”하고 말을 시작하려고 했더니 갑자기 그 수녀가 말을 가로채며 “하나님의 은총입니다.”하더랍니다. “하나님의 은총이라니요?”하고 약간 퉁명한 소리로 반문했더니 수녀가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고 합니다. “사실은 박사님, 저의 동료 수녀가 병상에서 죽어가고 있는데요, 박사님을 너무나 만나고 싶어 했고 박사님의 강연장에도 오고 싶었는데 몸이 너무 아파서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친구에게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선물로 박사님의 강연을 녹음해 들려주고자했고 박사님의 친필 싸인이 있는 책을 선물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박사님을 기다리는 줄이 너무 길어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싸인을 받지 못하고 공항으로 왔는데 박사님이 저와 같은 비행기 출구에 같은 화장실에 들어올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겠습니까?” 그때 로스 박사는 약간의 화를 냈던 것을 후회하며 이웃을 치유하는 진정한 힘은 모든 상황을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드리며 그 안에서 이웃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라고 깨우쳤다고 고백합니다. 이웃들에게 거룩한 영향을 끼치는 제자 삼기의 삶-그것은 무엇보다 상처받고 고통 받는 이웃들의 모습을 주목하는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2. 상처받은 이웃들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웃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제자의 삶을 살고자 하면 이웃을을 주목하는 것으로 족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이웃들의 고통을 보고도 그대로 그 곁을 지나칠 수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속의 레위인처럼 제사장처럼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우리를 행동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웃들을 불쌍히 여기는 ‘자비의 마음’인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을 행동하게 한 것도 바로 자비의 마음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0:33을 읽어 보실까요?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그 다음 비로소 그에게 다가가서 그를 섬기는 사마리아인의 자비의 액션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자비의 마음이 바로 주님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본문 마태복음 9:36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바로 이 불쌍히 여기는 주님의 마음이 양을 기르는 목자의 심정이요 제자를 양육하는 멘토의 마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 훈련은 단지 성경을 좀 많이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목자의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목자의 심정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여기 본문 마태복음 9:36에 ‘불쌍히 여기시니’에서 사용된 영어 단어 compassion은 com(함께)란 말고 passion(고통)이란 말의 합성어입니다. 불쌍히 여김은 함께 고통을 나누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함께 고통을 나누려면 내 입장이 아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려는 노력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미국에 잭 하일스라는 전도 많이 하시던 목사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가 한번은 이른 아침에 어떤 식당에 갔는데 얼마나 종업원이 불친절하던지 항의하고픈 마음이셨다고 합니다. 잠시 기도하는데 갑자기 그녀에게 그럴 수밖에 없는 무슨 사정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지나가서 식사를 마치고 나오며 평소에 5불이면 될 팁을 10불을 놓고 나오셨다고 합니다. 막 식당에서 나오는데 그 종업원이 쫓아오며 “손님, 10불이 팁은 아니지요? 잘못 놓고 나오신 것 아닙니까?”하더랍니다. 그래서 “아니, 팁입니다. 당신 얼굴이 안되 보여 용기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하자 갑자기 그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제가 오늘 아침 무례했지요. 죄송합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제가 어제 남편에게 이혼을 당했습니다.”

그날 아침 잭 하일스는 그녀 곁에 앉아 기도하고 복음을 나눌 수 있는 아름다운 시간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제자 삼기의 마음 자리’는 바로 불쌍히 여기는 주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3. 상처받은 이웃 12명을 제자로 섬기셔야 합니다.

자, 이제 우리가 상처 받는 이웃들을 주목하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졌다면 우리는 제자 사역이 출발할 자리가 준비가 되셨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 제자 사역을 달리 표현할 더 합당한 단어가 있다면 목자 사역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한번 세상에 태어나 감당할 수 있는 가장 존귀한 사역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고생하며 기진하는 영혼들을 보듬어 안고 돌보는 목자의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동안 교회는 이런 사역을 안수 받은 목사들만이 할 수 있는 사역이라고 잘못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20세기 말 하나님은 소위 셀 교회 운동을 세계적으로 일으키시며 이런 사역의 주인공이 모든 성숙한 성도들이어야 함을 깨우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대열에 참여하여 우리 교회도 셀 교회 운동을 주도하는 교회로 세워져 가고 있습니다. 자, 이런 하나님의 운동에서 여러분은 어떤 역할을 감당하고 계시는지요? 오늘 우리 교회 안에는 여러 많은 직분들이 있습니다.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여러 팀장님들 다 주님이 주신 귀한 직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만--그러나 좀 제가 오늘 솔직한 고백을 한다면 이 모든 직책중 제가 귀하게 생각하는 것은 단 두가지 밖에 없습니다. 목자들과 목자들을 섬기는 마을장들입니다. 그들이 주님의 의도하신 바로 그 중요한 일을 매주 마다 감당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이야말로 바로 고생하며 기진하는 영혼들과 씨름하며 그들을 돌아보는 일을 하고 계시는 진정한 주의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9:36에서 고생하고 기진한 영혼들 즉 목자 없이 방황하는 영혼들을 불쌍하다고 하신 주님은 37-38절에서 이런 영혼들을 거두어 드리도록 추수한 일군들이 일어나도록 기도하라고 기도를 부탁하신 후 마태복음 10:1에서 어떤 일을 하시고 계십니까?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악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9장의 마지막 부분이 10장 1절에 연결되며 시사하는 교훈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목자 없는 양들처럼 고생하며 기진하는 영혼들을 위하여 제자들을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의 할 일이 무엇입니까? ‘목자하는 것’(shepherding)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이 묻기를, 아니 이 세상에 고생하고 기진해 있는 영혼들이 한 둘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범이 12명만 책임져 보라는 것입니다. 12명도 많아 보이시면 우선 3명만 책임져 보십시오. 누구든지 내 주변에 힘들어하며 인생을 사는 세 분과 만나 기도하며 목장 모임을 시작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3명에게 각각 또 3명만 데리고 오도록 해 보십시오. 그러면 12명이 되지 않습니까? 셀 교회 운동가들은 12명을 가르쳐 기독교 기초 공동체라고 부릅니다. 어쩌면 12명은 우리 인생이 진지하게 책임질 수 있는 최대 인원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님도 12명을 돌보셨는데 그 이상을 책임지겠다는 것은 예수님의 모범을 넘어서려는 만용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남은 인생동안 목장 모임을 통해 12명을 늘 책임져 보십시오. 아니 3명으로 시작해 보십시오. 그들과 함께 고통하며 기뻐하며 말슴과 기도를, 삶을 나누어 보십시오. 거기서 함께 치유를 경험하고 함께 비전을 회복하고 함께 일어나 다시 세상으로 나아갈 때 민족은 치유되고 세상은 변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셀 교회의 비전이요, 우리의 교회의 존재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모든 우리 교회 가족은 목자가 되는 비젼을 가지셔야 합니다. 교회가 나누어 줄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으십니다. 주변에 상처받은 3명과 함께 모이십시오. 그리고 12제자 비젼을 가지십시오. 그리하여 모든 민족이 복음을 받고 변화됨을 보는 것-그것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8:19-20에서 마지막으로 당신의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명령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 너희도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아-멘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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