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약/마태복음

마태복음 18장 1-6절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14) 어린이 사랑 - 이동원 목사

by 재영구리 2023. 4. 1.
반응형

설교본문 : 마18장 1-6, 10
설교제목 :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14) 어린이 사랑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어느 애완견 훈련사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대부분 한국에서 개를 기르는 분들의 조련양상들을 관찰해 보면 두 가지 유형의 극단으로 갈라져 있다고 그는 지적합니다. 하나의 극단을 그는 과잉보호형이라고 말하고 또 하나의 극단을 그는 방임형 혹은 학대형이라고 말합니다. 한국에서는 개를 기르는 사람들이 과잉으로 보호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방임내지 학대하는 형으로 갈라져 있다는 것입니다. 개가 강아지 시절에 사람을 물면 아프지가 않기에 그것도 오히려 귀엽다고 쓰다듬고 좋아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이런 과잉보호의 경우 성견이 되면 사람들을 무는 개가 되므로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입는 사례들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개 주인이 전혀 관심을 안주다가 시시때때로 자기 기분에 따라 개를 차기도하고 때리기도 하는 등의 방임내지는 학대형으로 기르는 경우도 역시 결과적으로 개와 가족간의 유대가 끊어져 도망갈 기회만 기다리든가 다른 견공이나 사람들에게 분풀이로 역시 물어버리는 비정상적인 개로 자라간다고 합니다.

저는 이런 개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이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좀 철이 지난 유머이기는 하지만 개가 사람을 가르치는 것을 무엇이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정답은 ‘개인 지도’입니다. 우리 모두 개인 지도를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사실 이런 애견 양육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것이 이 땅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부모들의 자녀 양육의 형태와 얼마나 유사한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녀들의 빗나간 욕구에 부모들이 오히려 끌려 다니면서 자녀들의 무질서마저 귀엽다고 맹목적으로 옹호하며 자녀들을 위해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사는 오늘의 부모들이 바로 이런 과잉보호형 부모들이 아닙니까? 그런가하면 자녀들이 어떻게 행동하건 방임해 두었다가 어느날 갑자기 자녀들에게 무분별하게 감정을 폭발시키고 분풀이하는 부모들이 바로 방임형 혹은 학대형 부모들이 아닙니까? 오늘날 “어린이를 사랑하자” 혹은 “자녀를 사랑하자”는 구호적인 호소는 사실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의 과제입니다. 예수님은 가정을 갖지는 않으셨지만 어린이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어린이 사랑은 그분의 거룩한 습관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예수님의 제자로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떻게 자녀 사랑 혹은 어린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진지한 ‘어린이 사랑’-어떻게 실천되어야 할까요?

1.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가르쳐야 합니다.

반응형


오늘의 본문은 ‘그 때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어떤 때를 말하는 것일까요? 본문 마태복음 18장에 선행하는 마태복음 17장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매우 특별하게 취급되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변화산상의 매우 특별한 체험 현정에서 베드로는 주도적으로 예수님과 대화를 하고 있었고, 마태복음 17장 말미에도 세금 문제를 둘러싼 베드로와 예수님의 특별한 대화가 다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제자들이 ‘그 때에’ 예수님께 나아와 질문을 한 것입니다. 본문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아마도 이런 질문의 밑바닥에는 천국에서도 여전히 주께서 베드로의 존재를 크게 인정하시겠는가? 라는 예수님의 생각을 확인하고 싶어한 것입니다. 제자들의 매우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회를 예수께서는 오히려 제자들에게 천국의 가치를 가르치는 기회로 삼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앞에 세우시고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지는 4절을 읽어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다시 말하면 사람들의 인정이나 인기가 아닌 어린 아이의 겸손함, 단순성, 혹은 순종 등의 특성이야 말로 천국에서 가장 귀하게 평가되는 가치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께서 당시의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서 이런 특성들을 강조하셨다면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을 예수님의 제자로서 양육하면서 우리도 여전히 이런 가치들을 우리의 자녀들에게 강조하고 가르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현실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그들이 붙잡고 살아야 할 가치로서 출세와 돈, 성공, 일류 학교 등을 훨씬 더 강조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 않습니까? 언제 우리의 자녀들과 겸손의 가치 혹은 순종의 가치에 대하여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있었단 말입니까? “아빠와 엄마는 네가 미국 가는 것 이상으로 좋은 대학 가는 것 이상으로 네가 이런 일에 정직하고 스승과 친구들 앞에 겸손한 네 모습이 훨씬 더 자랑스럽게 느껴지고 주님이 너로 인해 기뻐하실 것 같구나”--이런 대화를 나누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지난주 미국과 한국 그리고 세계를 뒤흔든 버지니아 텍 조승희 학생이 저지른 참사사건을 지켜보며 느낀 솔직한 소감은 이 사건의 공범은 다름 아닌 저 자신을 포함한 한국의 모든 부모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 부모들이 우리의 자녀들에게 잘못된 가치를 가르친 그 총체적인 사회적 결과가 그런 비극이었다면 좀 지나친 진단일까요? 이 사건에서 특히 우리들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받아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과연 우리의 자녀들에게 천국의 가치를 가르치는 일에 얼마나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 왔을까요? 아니면 이 땅의 그리스도인 부모들조차도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망각한 채 소위 세속적인 가치에 함몰되어 우리의 자녀들에게 출세와 돈, 성공, 일류 대학, 일류 직장만을 가르쳐 온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주기도를 할 때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합니다. 그 뜻을 아십니까?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이 땅에 실현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가치를 먼저 우리가 가정에서 우리의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자녀 사랑, 어린이 사랑-어떻게 실천되어야 할까요?

2. 하나님 나라의 믿음을 갖게 해야 합니다.

본문 5절 이후 6-9절에서의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중요한 키워드로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실족’이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매우 강경하게 작은 자로서의 어린이 실족을 경계하십니다. 6-9절을 같이 읽어보실까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 지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도대체 이 단어의 ‘실족’의 참의미는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한국 교회내에서 이 단어가 피상적으로 이해될 때에 교회 안에서 울고 떠드는 아이들을 교회 섬기시는 분들이 예배 질서를 위해 제지하면 아이들을 실족하게 한다고 항의하는 부모들이 계십니다. 여기서의 실족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이 단어를 이해하는 열쇠는 6절에 ‘나를 믿는’이라는 말에 핵심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이어지는 12-14절에 보면 주님은 믿음을 떠나 잃어버려지지 않도록 누누이 부탁하는 말씀을 접하게 됩니다. 14절을 읽어보실까요? “이와 같이 이 작은 자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믿음의 실족을 경계한 말입니다. 본래 이 단어는 희랍어에서 ‘스칸달리조’(scandalizo)로 영어의 스캔들이 이 말에서 나온 것인데 믿음을 떠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스캔들이라는 말입니다.

핵심은 우리의 자녀들이 정말 믿음을 갖고 자라도록 우리가 최선을 다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선 부모가 믿음의 모범을 보이고 계십니까? “자녀들은 부모 앞에서 배우지 않고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배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의 잔소리는 교육 효과가 없다는 말입니다. 부모가 어떻게 사느냐를 보이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부모가 성경보면 자녀도 성경을 읽게 됩니다. 부모가 기도하면 자녀도 기도할 것입니다. 부모가 QT하면 자녀도 QT할 것입니다. 부모가 정직하면 자녀도 정직할 것입니다. 부모가 이혼하면 자녀도 이혼의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집니다. 부모가 부부 사랑의 모범을 보이면 자녀도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배울 것입니다. 부모가 교회 생활에 신실하면 자녀들도 그렇게 살고자 할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들의 대화에서 믿음에 대한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갖습니까? 부모가 쉽게 세속적 가치와 타협하고 믿음을 버리면 자녀도 그렇게 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것이 바로 실족하게 하는 일입니다. 당신은 부모로서 자녀들의 믿음의 통로가 되고 계십니까? 아니면 실족의 원인이 되고 계십니까?

3. 하나님 나라의 보배가 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녀 사랑 혹은 어린이 사랑의 출발점은 무엇보다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인류에게 기여한 가치 중에 하나가 어린이 가치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기독교 신앙이 이 땅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어린이라는 단어조차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방정환 선생에 의해 처음 어린이 즉 ‘어리신 이’말이 지어졌습니다만 그 전에는 어린이의 일반 호칭이 ‘이 놈’ ‘아 새끼’였습니다. 그런데 2천년 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5절을 기억하십시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어린아이의 가치의 인정이 바로 이런 어린이를 지으신 주님을 영접함이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본문 10절을 읽어보십시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우리의 아이들을 지키고 인도하는 천사(흔히 교회역사에서 수호천사라고 호칭됨)들이 있어서 그들이 늘 아버지 하나님을 뵈옵고 어린이들의 미래를 의논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미래요 하나님 나라의 보배이게 때문입니다. 이 보배들을 보배가 되도록 하는 것-이것이 바로 우리들 부모의 책임인 것입니다.

어떻게 그 막중한 책임을 감당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의 자녀들에게 올바른 방향을 보여 줄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누군가가 지도자는 모든 일을 다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을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우리 자녀들의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유명한 시편 127편에서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시127:1)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시편기자는 자녀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라”(시127:3)고 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말씀에서 경건한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자녀 양육의 지혜를 찾았습니다. 시편 127:4입니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부모는 활을 당기는 사수입니다. 그의 인생의 미래를 향한 올바른 방향 가늠만 잘 도우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저 높이 저 멀리 위대한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향하여 날아 갈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보배들인 자녀들을 위탁받은 우리들 부모의 책임입니다. 이렇게 기도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주님, 저희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자녀들이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가치를 붙들고 사는 자들이 되도록 방향을 보이겠습니다. 이제 주님 당신의 천사들을 보내셔서 주께서 친히 그들이 가야 할 길로 나아가도록 하옵소서.”

레바논의 시인이며 철학자요 화가요 그리스도인이었던 칼 지브란은 그의 유명한 책 ‘예언자’에서 시편 127편을 잘 해석하는 명시를 남겼습니다. 제목이 “아이들에 대하여”입니다. “--그대들의 아이는 그대들의 아이가 아닙니다./아이들은 스스로를 갈망하는 저 위대한 생명의 아들 딸입니다./아이들은 그대들을 통해서 왔지만/그대들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아이들은 그대들과 함께 있지만/그대들의 소유가 아닙니다.--그대들은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수는 있지만/그대들의 생각까지 줄 수는 없습니다./그들에겐 그들의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들은 아이들에게 육신의 거처를 마련해 줄 수는 있지만/영혼의 거처는 마련해 줄 수가 없습니다./아이들의 영혼은 그대들이 결코 찾아갈 수 없는/꿈속에 조차 찾아갈 수 없는 내일의 집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그대들은 활입니다./그대들의 아이들이 살아있는 화살이 되어 앞으로 날아가도록/그들을 쏘는 화살입니다./활을 쏘는 분은/무한의 길 위에서 과녁을 겨누고/자신의 화살이 보다 빨리 보다 멀리 날아가도록/그대들을 힘껏 당겨 꾸부립니다./그러므로 그분의 활이 되어 그분의 손에 당겨 구부러짐을 기뻐하십시오./그는 날아가는 화살을 사랑하는 만큼/흔들리지 않는 활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고통을 구부러지는 활의 보람으로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이제 주님의 보배요 당신의 보배인 당신의 멋진 화살들을 잘 준비시켜 때가 찬 어느 날 보다 빨리 보다 높이 보다 멀리 날아가도록 그들을 이제 축복하며 떠나보내십시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