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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마태복음

마태복음 11장 28-30절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16) 안식 - 이동원 목사

by 재영구리 2023.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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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마11장 28-30, 막6장 30-32
설교제목 :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16) 안식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박귀영 님이 쓴 온라인 수필집 “하루에 한번은 하늘을 보며”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칠 때마다 공통적인 현상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음표는 한 박자씩 잘 지키는데 쉼표는 아예 무시하고 지나치는 경우이다. 이런 아이들에게 쉼표의 박자를 정확히 지키게 하는 일이란 여간 쉽지가 않다. 흔히 음표는 연주 시에 음가만큼의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이기에 쉽게 느낄 수 있지만, 쉼표는 그렇지 않기에 무던히 그 시간을 기다리지 못함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하긴 나도 작곡을 하면서 쉼표는 박자를 기준대로 쉬어주는 것으로만 생각했지 뚜렷한 개념 정립이 없었고, 그저 노래하다가 편리에 의해 잠시 적어두는 기호 아니면 연주자들이 호흡하기에 적당한 곳에 적어놓는 음표 보다 조금 못한 부수적인 숨표(숨표와 쉼표는 엄연히 다르다) 정도로만 인식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대학에 들어가서 레슨 시간에 “너는 어떤 의미로 여기에다 쉼표를 썼지? 하는 교수님의 질문을 받고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나는 궁색한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쉼표도 음표와 마찬가지로 음악이야. 음표를 쓰는 의미만큼 쉼표도 의미 있게 써야 한다.“는 교수님의 설명이 있은 후 쉼표에 대한 인식전환이 이루어졌다.}

이 글을 쓴 저자가 배워야 했던 ‘쉼표의 레슨’은 바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고자 한 레슨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마가복음 6장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막 전도여행에서 돌아온 후 미쳐 숨고르기도 하지 못한 채 헐레벌떡 전도 보고를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전도 보고를 중단하시며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가복음 6:31입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그리고 이어서 본문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쉼을 취하게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쉼은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이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쉼을 추구하면서도 진정한 쉼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그 원인이 영적인데 있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쉼을 상실한 원인이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영적인 해결 없이는 진정한 쉼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인생이 그렇게도 갈망하는 참된 쉼, 곧 안식의 처방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익숙한 또 다른 본문인 마태복음 11:28-30이 그 대답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참된 안식의 처방은 무엇입니까?

1. “내게 오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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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28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께서 여기에 언급하신 수고의 짐은 죄의 짐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수고는 죄와 더불어 인류의 삶의 장에 주어진 결과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첫 사람 아담에게 “네가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3:17)고 했고, 하와에게는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라”(창3:16)고 했습니다. 타락이후 러시아의 기독교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처럼 “이제 죄인에게는 산다는 것 자체가 수고로운 짐이 된 것”입니다. 누가 우리의 이 수고로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 인간이 만일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 수고로운 인생의 짐을 벗을 수 있었다면 예수님은 오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어떤 노력으로도 해결이 불가능한 이 수고로운 인생 짐을 해결하시고자 하나님은 메시아(구세주)의 오심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일찍이 선지자 이사야는 오실 메시아의 사역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다”(사53:4). 바로 그분 우리의 죄와 수고의 짐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께서 오늘도 수고의 짐을 지고 안식을 모르는 인생들을 초대하십니다. “내게로 오라”(Come to Me).

여기서 우리가 “주께 온다”는 것은 단순히 기독교를 나의 종교로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종교를 갖는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종교는 또 다른 짐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당시의 바리새 종교를 신랄하게 비판하신 이유이시기도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3:4에서 그는 당시의 대표적 종교인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성경이 증거 하는 복음적 신앙은 종교에의 예속이 아닌 한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는 짐을 지워주시는 분이 아닌 자유를 약속하시는 분이십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한복음 8:32,36)

유명한 작가 톨스토이가 기독교를 인류를 억압하는 하나의 종교 시스템으로 오해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짐으로서의 신앙을 떠나가 있었던 긴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나이 55세 되던 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나서 그가 얻은 참 마음의 안식에 대하여 그의 책 ‘신앙론’에서 이런 고백을 남깁니다. “나는 55년 나의 인생동안 최초의 15년의 소년기를 제외하고는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왔다. 내 나이 18세가 되던 해 나의 친구가 내게 찾아와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든 것이라고 한 말에 설득되어 나는 어릴 적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떠났다. 나는 종교를 포기하는 것이 자유를 얻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있어서 종교는 속박 그 이상이 아닌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내 나이 55세 나는 내가 스스로 버린 어머니 같은 신앙의 품으로 돌아왔다. 나는 단순히 종교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나의 구주인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그 안에서 나는 처음으로 참된 안식을 발견한 것이다.” 당신에게도 이런 안식, 영혼의 쉼이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그러면 당신은 무엇보다 먼저 인생의 구주요 주님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오셔야 합니다.

2. “내게 배우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29의 말씀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내게 배우라”(Learn from Me). 여기 ‘배우라’는 말이 다시 여러분에게 스트레스를 느끼게 하지 않습니까? 아니 예수님 앞에 왔으면 되었지 다시 배워야만 합니까? 물론 예수님에게 나아온 모든 사람에게 영혼의 안식인 구원이 선물로 주어지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4:3에 보면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고 했습니다. 이런 영적 안식은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죄 사함을 얻고 영생을 선물로 받음으로 주어진 마음의 평화요 안식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그 안식이 우리 안에서 계속 유지되는 일입니다. 우리 안에 주어진 안식의 선물이 지켜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영적 훈련입니다. 이것이 바로 ‘배움’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배움을 노동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것은 나의 행복을 위한 즐거운 여가선용이어야 합니다. 영어로 여가를 ‘Leisure'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본래 희랍어의 ’Schole‘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기서 또한 영어의 ’School‘이 이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나아와 즐겁게 놀이하듯 학습하는 사람들-주님은 그들에게 마음의 쉼을 누리는 평생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가 이런 학습이나 훈련을 힘든 또 하나의 수고로 오해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첨부하신 말씀이 마태복음 11:30입니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새는 날개를 짐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지한 예수의 제자들은 그래서 그분에게 배우는 훈련을 짐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즐거운 특권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 구절을 언급하면서 “예수님에게서 배우는 일은 무거운 짐이 아닌 날을 수 있는 날개가 된다”고 했습니다. 소 두 마리가 한 멍에를 메게 될 때 유능한 소에게 다른 한 마리의 소가 그 의지를 복종시키고 따르면 그는 미션을 쉽고 즐겁게 성취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최소한의 훈련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진정한 안식은 없습니다. 누가 즐겁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까? 주일만 땡하고 나왔다가 사라지는 분들입니까? 아니면 성경공부하고 훈련받고 섬기는 사람들입니까? 금번에 우리 교회에서는 좀더 효율적인 안식의 누림을 위해 가평에 영성 센터/전원 교회를 건립하게 됩니다.

저는 우리 지구촌 성도들이 좀 더 자연 친화적인 환경에서 인생을 쉬어 가며 영성 훈련으로 주께서 허락하신 아름다운 안식을 누리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고도원의 아침 편지에 이런 글이 실린 일이 있었습니다. “자동차로 말하자면 가장 위험한 차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찬입니다. 멈춰야 할 때 멈추지 못하면 사고가 납니다. 인생의 쉼표는 인생의 브레이크입니다.” 이 수양관은 우리가 멈추고 싶을 때 멈추어 가며 동시에 보다 행복한 미래의 삶을 설계하는 우리들의 영혼의 치유 센터가 될 것입니다. 인터넷 서핑하다가 밀라노 한마음교회의 성도 이현주 님이 쓰신 아름다운 묵상 “잠시 쉼표가 주는 여유”라는 글을 접한 일이 있었습니다. 들어 보실까요?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서도 소리만 들릴 뿐 마음에 감동이 흐르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식구들 얼굴을 마주 보고도 살짝 웃어 주지 못한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아침에 눈을 떴을 때 창문을 비추는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아름다운 자연을 보면서도 마음에 아무런 감동이 흐르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기 위해 한 번 더 뒤 돌아보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약속하는 쉼은 단순한 활동의 중지만이 아닌 그 이상의 것입니다. 본문 마태복음 11:29에서의 ‘쉼’은 희랍어에서 ‘아나 포신’(anapausin)인데 ‘아나’(ana)는 ‘다시’라는 뜻이고 ‘포신’(pausin)은 영어의 ‘pause' 다음 단계의 행동을 위한 ’멈춤‘이란 뜻입니다. 쉬고 나면 새로운 창조를 위한 새 힘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안식은 새로운 창조인 것입니다. 최근에 많이 읽히는 시중 책 중에 ’행복한 멈춤‘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본래의 제목은 ’행복한 멈춤‘이 아닌 ’능력 있는 멈춤‘(Power Pause)입니다. 저자는 우리가 하루에 단 3분이라도 멈추어 서서 행복한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이 이루어진 것을 믿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경이적으로 달라질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제가 미국 워싱턴에서 목회할 때 워싱턴 시내에 ’구세주의 교회‘(The Church of the Saviour)라는 독특한 교회가 있어서 가끔 방문하곤 했습니다. 이 교회는 교인 숫자는 많지 않은 교회이지만 미국 내에서 매우 영향력이 있는 교회요 사회봉사의 모델 교회로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교회입니다. 한 열 개의 공동체로 흩어져 각 모임마다 백 명 전후로 모이는 교회인데(합해도 천명 미만의 교회) 이 교회가 감당하는 사역은 이 교회를 방문하는 모든 이들을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이 크지 않은 교회가 감당하는 대표적인 사역들을 한번 열거해 보겠습니다.

1.The Potter`s House/카페와 서점 사역
2.Jubilee Housing/저임금 가족을 위한 주택 보급 사역(350세대가 입주한 아파트 운영)
3.Jubilee Jobs/직업 및 직장 알선 사역(매년 1,000여명 훈련)
4.Columbia Road Health Care Center/저임금 가족들을 위한 진료 사역
5.Christ House/노숙자 병원 사역
6.Good Shepherd Ministries/방과 후 아동 지도 사역
7.The Family Place/학령전 유아 탁아 사역
8.Sarah`s Circle/노인 사역
9.Samaritan`s Inn/알콜 및 마약 중독 치유 사역
10.Festival Center/교회 섬김 훈련 총괄 행정 사역

그런데 우리를 더 놀라게 하는 것은 이들이 적은 인원으로 이렇게 많은 자원 봉사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 이상으로 이 교회 봉사자들은 모두가 이런 봉사 그룹에서 대부분 20년, 30년 이상을 섬기고 있는 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섬김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나이 많은 할머니 대답이 “우리는 매일 한 시간의 기도와 한 달에 한 번씩 방문하는 데이 스프링스(Daysprings)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새 힘을 공급 받습니다”고 대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데이 스프링스가 무엇하는 곳이냐?”고 물었더니, ‘침묵 수양관’이라고 하면서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한 달에 한번 그곳에 가서 엎드리면 주님의 손이 그들을 다시 일으켜 주신다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곳을 방문하여 그분들이 누리는 안식의 영성을 함께 경험해 보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가평 수양관이 바로 우리들의 이런 데이 스프링스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진정한 영적 쉼을 필요로 하는 인생 순례자들, 피곤하고 지친 나그네들에게 일년 후 오픈 될 ‘가평 지구촌 필그림(Pilgrim) 하우스’가 우리 교회와 한국 교회의 진정한 영혼의 쉼터가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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