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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누가복음

누가복음 8장 1-3절 예수님의 VIP(19) 일곱 귀신이 나간 여자 - 이동원 목사

by 재영구리 2023.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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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눅 8장 1-3절
설교제목 : 예수님의 VIP(19) 일곱 귀신이 나간 여자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2003년 12월 8일자 Newsweek지의 커버스토리는 작가 댄 브라운(Dan Brown)의 소설 “다빈치코드”였습니다. 이 책이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밀리언 베스트셀러가 되고 또 영화화되면서 전 세계인의 관심을 모은 성경의 여자가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도대체 그녀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작가 댄 브라운은 비록 픽션이라고 전제하기는 했지만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여자였으며 그녀는 예수님의 자손을 낳았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예수님의 신성을 보호하기 위해 이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진짜 성배는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에서 사용된 칼리스(Chalice)잔이 아니라, 바로 이 잔의 형태인 V자로 상징되는 여인의 자궁 곧 막달라 마리아가 성배의 정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새로울 것도 없는 과거의 작가들의 허구적 픽션을 다시 2000년대의 언어로 정제한 것에 불과합니다. 일찍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자키스가 그의 소설 <그리스도의 최후의 유혹>에서 예수님과 막달라 마리아를 연인관계로 그렸던 것은 유명한 일이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진정한 관심은 이런 허구적 픽션이 아닌 성경이 그리는 진정한 막달라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은 그녀의 과거가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자라고 말합니다. 많은 소설가들이 그리고 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추측한 것처럼 성경은 그녀를 창녀로 묘사한 적이 결코 없습니다. 단지 그녀는 귀신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며 피곤한 인생을 살던 지친 여자 그리고 병든 여자였습니다. 여기 일곱 귀신을 우리는 꼭 그녀 안에 귀신 일곱이 들어갔다고 해석할 필요도 없습니다. 일곱 숫자는 본래 유대인들에게 완전수로 단지 이 여자가 귀신에 의해 완전히 ‘망가진 여자’임을 말한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망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나쁜 의미로만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누군가가 참으로 ‘망가지는 것’은 축복의 시작이라고 하면서 ‘망가’라는 한문 글자로 단어 놀이를 한 글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1)忘假--가면을 버린다, 2)望架--십자가를 바라본다, 3)望可--가능성을 바라본다. 막달라 마리아야 말로 예수 만나 망가진 다음 과거를 벗고 십자가 아래서 새 인생의 가능성을 발견한 변화된 여자였던 것입니다. 신약 성서는 뜻 밖에도 그녀의 과거에 대해서는 그녀의 고향이 갈릴리 호수 서안에 존재하는 막달라 마을 출신으로 귀신 일곱 들린 여자라는 사실 외에는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차라리 성경은 그녀가 예수님을 만나고 어떻게 변화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춰 이 여자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 여인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 만나고 어떻게 변화되었을까요? 여인의 변화에서 배워야 할 예수님을 만난 이들의 변화의 모습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1. 예수 공동체와 함께 하는 삶을 시작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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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절에 보면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실 때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라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12제자만이 주님과 함께 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2절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소개한 후 그 다음 3절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단어가 있습니다. 1절과 3절에 반복적으로 사용된 ‘함께 하여’라는 단어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포함한 여인들이 제자들의 공동체에 ‘함께 하여’ 삶을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를 만난 후 개인적으로 조용히 혼자 주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처음부터 철저하게 공동체적 삶을 강조해 왔습니다. 그들은 핍박을 받아 지하 카타콤으로 숨어 들어가며서도 공동체를 한 번도 포기한 일이 없었습니다.

1세기 갑바도기아의 공동체를 떠나겠다고 선언하는 한 청년에게 공동체의 리더는 잠깐만 있다가 이별의 의식이라도 하고 난후 떠나라고 하면서 모닥불을 피우게 했다고 합니다. 말없이 불타고 있는 모닥불을 지켜보던 리더는 갑자기 나무토막 하나를 불속에서 꺼내며 청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여, 잘 보게. 이 나무토막 하나가 바로 형제의 운명이네. 이 나무토막은 불속의 공동체를 떠나는 순간 불꽃을 잃어버리는 죽음의 순간을 맞이한다는 것을.” 그가 꺼낸 나무토막이 식기를 기다려 리더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제 이 나무토막을 갖고 이곳을 떠나게나. 그러나 자네가 다시 불타기를 바란다면 언제나 이곳으로 돌아오도록 우리는 기도 하겠네” 그 형제는 울면서 자신의 결정을 철회하고 다시 공동체를 향한 헌신을 다짐했다고 합니다. 핍박의 시대가 아닌 오늘날 우리는 교회 공동체에 등록한 후 적어도 주일 예배만은 빠지지 않고 신앙생활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정말 공동체의 살아있는 일원으로 날마다를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사실상 우리 중에는 무교회주의적 의식구조로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얼굴만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면서도 목장교회와 같은 공동체 소속을 거부하고 주일모임만으로 버티려고 할까요? 아마도 그것은 상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의 시작은 서로의 상처를 끌어안고 그 상처를 넘어서서 서로를 세우고 사랑하려는 몸짓이 시작될 그 때부터 일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영성작가 필립 얀시는 교회에 대한 책을 쓰며 책의 제목을 <나의 고민 나의 사랑 교회>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어머니가 때로 나의 부담이고 나의 상처이어도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인 것처럼 우리는 불완전한 인간이 모여 형성하는 교회를 사랑하며 교회를 통해 성숙하고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주님을 만난 그날부터 교회 공동체와 온 마음으로 ‘함께 하는’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금년 한해 지구촌 교회라는 공동체와 얼마나 마음으로 사랑으로 ‘함께’ 하셨나요? 그러지 못하셨다면 아직 기회는 있습니다. 내년 한해 진정 다시 공동체로 돌아오시기를 기도합니다.

2. 예수 공동체의 사역에 물질로 동참하는 일입니다.

다시 한번 3절을 읽겠습니다.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누가 누구를 향해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까? 마리아를 리더로 한 일단의 여인들이 예수님과 예수님 제자들 곧 사도들을 그렇게 섬겼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요? 자신들의 소유 곧 자기들의 물질적 재산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였습니까? 1절의 증거처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였던 것입니다. 한때 정신적으로 망가져 다른 이들의 도움이 없이는 살수가 없었던 여자 막달라 마리아가 이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아직도 그녀에게 남겨진 것으로 예수님과 이웃들을 섬기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막주는 마리아’가 된 것입니다.

일찍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물질을 사용하는 것이 바로 그녀의 마음이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오래전 요한 웨슬레는 “나는 주머니가 회심하지 않은 사람의 회심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와 같은 침례교회에서 한 청년이 침례를 받기 위해 물 속으로 걸어들어 가다가 갑자기 다시 되돌아 나오며 “아 참 제 주머니에 지갑이 든 것을 잊었어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침례식을 주례하던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했다고 합니다. “형제여 그 지갑까지 침례를 받으셔야 합니다.” 우리의 소유가 본질적으로 우리의 소유가 아닌 주님의 소유라면 우리는 우리의 소유의 주인이신 주님을 위해 그 소유를 드리는 구체적인 헌신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물질적 헌신의 출발점이 바로 십일조 헌신입니다. 그리고 십일조가 가능해지시면 지난주일 소개해 드린 바 있던 존 록펠러처럼 이제 ‘십이조’에도, ‘십삼조’에도 도전해 보십시오. 저물어 가는 한해 그동안 우리의 물질적 헌신을 점검해 보실 시간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한해의 물질적 헌신을 계획해 보십시오.

3. 부활하신 예수의 증인된 삶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헌신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과 함께 하며 필요한 물질적 지원을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28:1에서 다시한번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게 됩니다.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 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찾은 원인이 무엇이었을까요? 아니 나를 귀신에서 해방하시고 내게 구원을 주시고 나를 그의 제자로 삼으신 그분의 은혜를 어떻게 그녀가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마리아는 거기서 뜻 밖에 돌아가신 예수가 아닌 다시 사신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주의 천사는 마리아에게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접한 마리아와 그 친구들이 어떻게 응답했습니까? 마태복음 28:8입니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그렇습니다. 이제 막달라 마리아는 주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증인이 된 것입니다. 그녀는 이제 이 기쁨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달음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다음 구절입니다. 달음질하던 그들 앞에 부활하신 주께서 나타나십니다.

우리가 부활의 증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지나간 역사 속에 그가 역사적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증거한다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분이 오늘 이 순간도 여기 살아계셔서 나와 함께 하시는 그분을 경험하는 일입니다. 자, 이 경험이 다가오는 순간 이 여인들이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예배하는 일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8:9을 읽어보실까요?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놓칠 수 없는 그분의 발을 붙잡고 엎드려 경배한 것입니다. 얼마나 감격이었고 얼마나 감동이었을까요? 예배는 주의 앞에 엎드려 주의 발을 만지는 행위입니다. 참된 예배는 살아계신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는 마당입니다. 그리고 참된 예배는 우리로 부활의 증인으로 다시 일어나 살게 하는 마당입니다. 한해의 결산에서 저는 무엇보다 예배 경험을 반성하셨으면 합니다. 예배가 살면 인생이 살 것입니다. 이 예배가 마리아의 인생을 바꾼 것입니다. 예배가 큰 슬픔에 빠져있던 한 여인을, 기쁨을 주체하기 어려운 예수의 제자가 되게 한 것입니다. 예배가 그녀를 위대한 증인의 반열에 두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미켈란젤로가 바티칸 시스틴 천장에 그린 ‘아담의 창조’라는 그림을 기억하십니까? 4년간 천장을 올려다보며 이 그림을 완성했을 때 그는 지쳐 있었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 무렵 무력감에 빠져서 자기 일지에 ‘나는 화가가 아니다’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 저녁 자기가 그린 그림을 올려다 보가다 한 순간 예배자의 마음이 되어 마루에 누운 채 하나님을 찬양하다가 다시 천정을 올려다봅니다. 그때 갑자기 자기가 그린 하나님의 손길이 아담의 손길을 터치하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는 아담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받고 있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소리칩니다. “아! 당신은 거기 계셨군요. 당신은 살아계신 나의 주님이십니다.” 그는 다시 일어나 작가의 길을 갑니다. 아니 소명의 길을 갑니다. 미켈란젤로를 만나주신 살아계신 주님, 망가졌던 여자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주신 주님이 우리를 또한 만나주시기를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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