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눅24장 13~17 , 30~35
설교제목 :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11) 함께 하심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지금 미국이 이라크 전쟁에 발목이 붙들려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처럼 과거 베트남 전쟁이 지루하게 계속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이 전쟁은 1964년에 시작되어 무려 10년만인 1975년에 끝난 현대사에 어두운 그림자를 남긴 전쟁의 하나였습니다. 이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 1969년 미국인들은 다른 어느 해보다도 추운 겨울을 지나고 있었고, 신학계에는 이런 시대를 반영하듯 소위 “하나님의 죽음의 신학”이 가르쳐지고 있었습니다. 이 무렵 어느 날 미국 중서부 인디애나 주에서 빌과 글로리아라 불리우던 두 고등학교 선생님이 결혼을 하고 아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둘 다 음악을 사랑하던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교회 음악 사역에 헌신하고자 학교를 사임하고 미래의 사역을 설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너무 어두웠던 탓인지 작곡도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고 건강도 여의치 않았고 사역의 길도 열리지 않은 채 1970년 봄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빌과 글로리아가 빌의 아버지를 모시고 자기 사무실 앞에 도착하고 주차하다가 주차장 한 구석 으깨진 아스팔트를 해치고 고개를 내밀고 있는 파란 풀잎을 보고 아버지가 “저 풀잎들을 보라”고 소리칩니다. 아들과 며느리는 "봄이 오는군요“라고 대답합니다. 얼마 안 되어 이 가정에 아들이 태어납니다. 이런 어두운 시대를 자기 가족이 어떻게 헤쳐 가며 살 것인가를 기도하던 글로리아의 마음속에 한 순간 두려움이 사라지고 주님의 임재의 기쁨이 그녀의 마음을 채우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녀는 펜을 들어 노래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빌과 글로리아 게이터(Gaither)의 ”그가 살아계시기에“(Because He Lives)라는 유명한 찬양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다시 부활절입니다. 주님은 정녕 다시 사셨습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 중에 우리 스스로 성도임을 고백하면서도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채로 오늘을 살고 계신 분이 계신가요? 빌과 글로리아에게 함께 하셨던 살아계신 주님의 임재가 왜 우리에게는 그렇게 경험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사실 성경에 보면 주님이 당신의 제자들을 선택하는 순간부터 그가 그의 제자들과 ‘함께 하심’은 그분의 약속이었고 습관이었습니다. 마가복음 3:14을 보십시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그렇습니다. 그의 제자들을 택하심의 목적이 ‘함께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의 지상 생애 마지막 약속이 무엇이었습니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20)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왜 그분의 함께 하심이 경험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과연, 함께 하시는 부활의 주를 경험하고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안식의 여백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엠마오 길을 가던 예수님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화두인 13절은 ‘그 날에’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날이 언제입니까? 안식 후 첫날(24:1) 그러니까 지금의 주일입니다. 본래 유대인의 안식일은 토요일이었습니다. 안식 후 첫 날은 주일 혹은 일요일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 안식일 다음 날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이 그의 저서 ‘부활’에서 이를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처음 제자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고 그들에게 안식일 준수는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금요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제자들에게 여러 복합적인 감정이 있었겠지만 그러나 금요일 저녁부터 안식일을 지키면서 그들은 조용한 침묵 속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이 된 것입니다.
왜 계절이 바뀌어도 봄이 와도 이런 변화에 대한 감동을 느끼지 못하고 살고 있을까요? 저는 그 원인이 우리가 일에 중독되어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가장 불행한 사람들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죽어라고 일하다가 죽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일중독을 심각한 병으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중독은 자신이 빠져 있는 일 외에 모든 것을 상대화시켜 인생의 모든 기쁨과 의미를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직장을 떠나서 집에 와서도 근무시간이 아닌 주말에도 일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신다면 그리고 일 외에는 인생에 아무런 보람과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살고 계신다면 일중독을 의심해 보셔야 합니다. 안식은 인생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관점을 제공하고 인생의 경이를 받아들이게 하는 복된 여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행스럽게 제자들에게는 이런 안식의 여백이 있었고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부활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마도 안식일 준수는 금요일의 사건들이나 제자들의 처참한 기분을 보다 넓은 안목으로 바라보게 해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안식일을 지키고 다음 날 아침 일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섰을 때는 하나님을 향한 감각이 마음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너머 존재하는 신비로움에 경이감으로 응답하는 능력, 이해할 수 없고 예상할 수 없는 것에 놀랄 줄 아는 능력이 준비되었던 것이다.”라고.
창세기 1장이 보여주시는 하나님은 천지만물의 창조사역을 진행하시면서도 한 단계의 창조가 끝날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안식의 미학을 즐기시고 있는 주님이신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엿새의 창조가 끝난 후에는 하루를 온전히 쉬시면서 새로운 한 주간을 준비하는 모범을 보여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런 안식의 여백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경이를 발견하는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부활처럼 놀라운 진리 앞에 감격하지도 감동하지도 못하고 삽니까? 우리 마음에 부활의 사건에 놀랄 수 있는 여유 그 자체를 상실한 까닭입니다. 개혁자 마틴 루터는 아름다운 부활절 이른 아침 집의 창문을 열고 물기 머금고 생명의 기지개를 펴는 꽃들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한 순간 소리를 치며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그렇다. 부활의 주님은 저 소생하는 아름다운 잎사귀마다 부활의 진리를 새겨 놓으셨다.” 부활의 감격을 원하신다면 부활을 부활로 느낄 수 있는 안식의 여백이 내면에서 먼저 회복되셔야 합니다.
2. 믿음의 대화가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는 예수님 십자가 죽으심 이후에 예수님께 대한 모든 기대를 접을 수 밖에 없었던 좌절한 제자들이었습니다. 슬픈 가슴의 제자들이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서더라” 이 두 사람은 모두 슬퍼하고 있었고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포기하지 않은 것 하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 대화를 포기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에 대한 기대를 아직 저버리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비판하고 예수님에 대하여 계속 이야기하는 불신자들은 희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비판조차도 관심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전도하기 제일 어려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예 관심을 끄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전도 대상자가 예수님을 비판하고 교회를 비판하거든 기뻐하십시오. 그들은 포기할 수 없는 관심을 그들의 나름의 방식대로 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 어떤 일이 생깁니까? 한순간 그들이 나누던 대화 속의 성경 이야기가 그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게 됩니다. 그들의 마음속이 말씀으로 뜨거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32절입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저 유명한 요한 웨슬레가 말씀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했을 때 그의 선배는 “그에게 말씀이 믿어질 때까지 말씀을 붙들고 있으라”고 말합니다. 드디어 올더스케이트 스트리트의 작은 교회에서 어느 날 그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로마서 말씀으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저에게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영어 배우고 싶어 참석한 모임에서 갈라디아서 2:21의 말씀이 한 순간 마음에 부딪쳐 오며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이 나를 위한 죽으심으로 믿어지게 된 것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십자가의 죽으심의 사건을 믿지 못하고 목사가 되었던 분으로 쿠퍼라는 분이 있었는데 이분은 어느 고난주간을 앞둔 토요일 자기 교회 주보를 들여다보다가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가 주일 설교 제목으로 잡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누가 예수를 죽였는가?” 그 아래 “월리암 쿠퍼 목사”라고 된 그 주보를 한참 바라보다가 갑자기 자기 죄가 예수님을 돌아가시게 하셨다는 것이 깨달아지자 통곡하며 주님 앞에 엎드려 예수를 자기의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만 마십시오. 예수님에 대하여 물으십시오. 이야기 하십시오. 믿음의 사람들과 대화를 계속하십시오. 그 대화 속에 어느 날 성령께서 임하실 것입니다. 말씀이 당신을 붙잡는 날이 올 것입니다. 믿음의 대화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대화 속에 살아계신 주님이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주께서 주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도구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믿음의 대화를 시작하십시오. 성경을 열고 질문을 시작하십시오. 구하십시오. 찾으십시오. 문을 두드리십시오.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실 것입니다. 오늘이 그날이 되시면 더 좋겠습니다.
3. 일상의 경이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나는 장소를 예배당으로 국한시키는 단견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부활하신 주께서 자주 당신을 나타내 주시는 장소는 일상생활의 현장일수가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결정적으로 경험한 장소가 어디였습니까? 30~31절을 보십시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이들이 결정적으로 부활하신 주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한 곳이 어디였습니까? 식탁이었습니다. 식탁에서 주님의 임재를 느끼고 감격해 본 경험이 있습니까? 눈이 열리면 우리의 식탁에 함께 하신 그분이 보일 것입니다.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로렌스 형제는 식탁은 “내가 주님을 만나는 거룩한 나의 지성소”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식당에 오래 전부터 신앙의 고백으로 이런 고백문을 장식해 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식탁에 보이지 않는 손님이시오. 우리의 대화를 말없이 듣고 계신 분이시다”고. 유진 피터슨은 그의 저서에서 부활 식탁의 회복을 외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아름다운 전통의 하나가 식사 문화라고 그는 증언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의 현장에서 제자들을 만나주셨던 주님, 최후의 만찬의 식탁에서 떡과 잔을 들고 제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던 주님, 갈릴리 해변의 식탁에서 죄책감에 괴로워하던 제자 시몬 베드로를 만나 생선을 건네주시던 주님은 오늘도 식탁에서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영의 눈을 열어서 그분을 보십시오. 유진 피터슨은 이런 일상의 신비를 보는 눈이 열린다면 우리에게 일상의 장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경험하고 증언하는 장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때 우리는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일터에서 날마다 그분을 만나고 그분에게 헌신을 드리는 놀라운 부활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부활절 기념 유머를 하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어느 부활절에 닭과 돼지가 교회 앞을 지나가다가 보니까 “오늘 부활절 날-햄 앤드 에그 샌드위치 파티-를 엽니다.” 라고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닭이 돼지에게 말하기를 우리 이 파티에 인간들의 기쁨을 위해 함께 들어가서 산제물을 되어 헌신하자고 했답니다. 그러니까 돼지가 화를 내며 닭에게 너는 부분적인 헌신만 하면 되지만 나는 전체적인 헌신을 해야 하지 않느냐고 항변합니다. 그러자, 닭이 돼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돼지야, 네가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너야, 눈 딱 감고 한번만 헌신하면 되지만 나는 알을 낳을 때마다 계속 헌신하지 않느냐, 중요한 것은 날마다의 헌신이야”라고 말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날마다의 헌신, 일상의 장에서의 헌신은 우리의 일상의 장에서 우리가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는 일상의 경이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엠마오 도상의 식탁에서 주님을 만난 두 제자는 어떻게 했습니까? 33절에 보면 그들은 다시 소명의 일터인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치기 시작합니다. 34절입니다. “주께서는 과연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살아계신 주님을 경험하는 제자들의 부활의 감격이요, 부활의 메시지입니다.
자, 그러면 외치실 준비가 되어 계십니까? “주께서는 과연 살아나셨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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