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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누가복음

누가복음 2장 50-52절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5) 순종 - 이동원 목사

by 재영구리 2023.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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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눅 2장 50-52절, 히 5장 7-10절
설교제목 :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5) - 순종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최 복현님이 쓴 생텍쥐페리의 행복어 사전 시리즈 제2권 “특별한 내 인생을 위한 아름다운 반항”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아름다운’이란 단어와 ‘반항’이라는 단어의 조합이 이 책의 제목에 끌리게 하는 힘을 갖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인간의 역사는 곧 반항의 역사라고 가르칩니다. 반항이란 자유를 찾아가는 일이며, 자유를 찾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의미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특별한 의미의 실현을 위해서 우리의 인생에는 아름다운 반항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반항은 진정한 자유를 찾아가는 인생의 여행이라고 역설합니다. 그가 주장한 반항의 역설은 실제로 지나간 인류역사의 장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들의 실현에 기여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대부분의 소위 인간으로서의 권리들, 노예의 권리, 어린이의 권리, 여성의 권리, 노동자의 권리, 민중이 사회의 주인이 되는 민주화를 위한 정치적 권리등이 모두 아름다운 반항을 통해 이루어진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개신교를 뜻하는 ‘프로테스탄트’라는 말도 ‘저항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아닙니까? 교황의 폭정에 항거한 아름다운 개혁자들의 반항이 신앙의 자유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과연 모든 반항이 다 아름다운 것일까요? 우리가 마땅히 저항해야 할 것들에는 저항해야 하겠지만, 저항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도 습관적으로 저항하는 것이 과연 우리가 추구해야 할 라이프스타일인가 라는 것입니다.오늘 우리 시대의 문화는 문자 그대로 반항의 문화라고 해도 지나친 것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런 반항의 모습은 우리의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학원에서도, 거리에서도, 관공서에서도 심지어 교회에서도 낯선 것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당한 반항이 가지는 의미 있는 가치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일관성 있게 순종의 문화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오늘 우리의 시대에서 순종은 가장 인기 없는 레슨이고 우리 학교가 가르치기를 포기한 구 시대의 가치로 취급되지만, 그것은 우리의 주되신 예수님이 스스로의 삶으로 보여주셨고 그의 제자들이 오늘도 여전히 붙잡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신 가치인 것을 아십니까? 물론 그렇게 살다가는 바보처럼 순종만하고 따라간다고 똑똑한 이웃들에게 ‘왕따’ 당할 수밖에 없다고 항의하실 분들이 적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왕따’의 참 의미를 아시나요? 우리 교회 협동목사로 계시는 박 호근 목사님의 정의에 의하면 ‘왕따’는 ‘왕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여론과 상관없이 성경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왕 되신 주님의 순종의 습관을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자, 그러면 예수님에게 배워야 할 ‘아름다운 반항’이 아닌 ‘아름다운 순종’의 습관은 무엇입니까?

 

1.순종은 어릴 적부터 익혀야 할 습관입니다.모든 아름다운 습관들은 어릴 적에 익히지 아니하면, 성인이 되어 익히기 위해서는 훨씬 더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우리 속담이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아닙니까? 서구 속담에도 “요람에서 배운 것이 무덤까지 간다”(What is learned in the cradle is carried to the grave)는 말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습관을 제2의 천성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의 부당한 반항을 어려서부터 용납하면 우리의 자녀들은 평생을 반항의 자녀로 살아갈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반면에 우리의 자녀들을 어려서부터 순종의 자녀로 키우면 평생을 순종의 자녀로 살아갈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렘22:21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이제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존재하는 이 불순종의 습관대신 아름다운 순종의 습관을 가지시기를 갈망하십니까?다시 예수님의 어려서의 습관을 주목해 보십시오. 분문 눅2:51절에 보면 그는 나사렛에서 그분의 육신의 부모를 향하여 ‘순종하여 받드심’의 삶을 사셨습니다. 여기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는 단어는 희랍어 원문에서 ‘현재 중간태 분사’로 되어 있어서 예수께서 ‘스스로 계속하여 순종하고 사셨음’을 시사하는 말입니다. 주석가 윌리암 헨드릭슨은 이 대목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he)rendered constant obedience to them” “지속적 순종을 드리셨다”는 말입니다. 어쩌다 한번 순종하신 것이 아니라 순종이 그의 삶의 방식 곧 삶의 습관이셨음을 나타내는 대목입니다. 다시 51절을 읽어 보실까요.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12살 먹은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다시 그의 부모를 만나 나사렛으로 돌아오신 후 그의 공생애의 시기까지 그의 육신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하는 삶을 사셨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순종은 노예적 복종의 의미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발적인 기쁨의 순종이었습니다. 보십시오. 그는 예루살렘에서 그의 어머니 마리아로부터 그의 실종의 이유를 추궁 받았을 때에도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대답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그의 순종은 강요된 것이 아닌 자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유로움의 분위기에서 성장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순종의 삶을 사셨기에 그는 52절의 증언처럼 하나님과 사람에게 함께 사랑스러운 존재로 자라가신 것입니다. 반항 속에 창조성은 존재할지 모르지만 반항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종을 배워야 하고 순종을 가르쳐야 합니다.예수께서 30세가 되시던 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그는 요단강에서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그의 침례는 구약의 제사장들이 30세가 되면 전신 침례로 몸을 깨끗이 하고 제사장직을 시작하시듯이 그가 이제 인류를 위한 제사장 곧 메시아의 사명을 수행하시기 위한 순종의 침례였습니다. 그가 물속에서 나오실 때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이 무엇이었습니까? “보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가 아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들의 순종이 하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순종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기쁨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2.순종은 고난을 통해 학습되어야 할 습관입니다.

 

우리 중에 어떤 분들은 나는 이미 어린시절의 인생이 아니기에 순종의 습관을 터득하기에 너무 때가 늦었다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물론 성인이 되어 습관을 고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불순종이나 반항이 학습된 것이라면 순종도 어렵지만 다시 학습될 수 있습니다. 아니, 우리를 진정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면 그는 우리를 순종의 자리에 두시고야 말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우리를 순종의 사람 되도록 훈련하시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의 하나가 고난인 것입니다. 시편119:67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그렇습니다. 고난이 우리의 불순종과 반항을 교정하고 우리를 순종의 자리에 반듯하게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고난이 면제되지 않는 이유인 것입니다. 아직 우리가 배워야 할 순종의 레슨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앤드류 머레이는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는 모두 순종의 학교에 입학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학교에서 우리는 여러 유형의 고난을 통해 마침내 순종하는 것을 배워가는 것입니다.그러므로 고난이 오거든 원망하지 마십시오. 억지로라도 기뻐하십시오. 더 반항하는 자가 되지 마시고, 내가 이 고난속에 배워야 할 순종의 레슨이 무엇인가를 묻고 기도하십시오.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의 또 하나의 본문인 히5:8-9은 심지어 예수님도 이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다고 말합니다.(물론 그의 고난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닌 대속적 고난이었음을 전제해야 할 것입니다.)그리고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그분이시기에 여전히 배움의 필요가 계셨던 것입니다. 자, 읽어 보시지요. “그가 아들이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그렇습니다. 메시아이신 주님 예수께서도 순종을 배워 온전하게 되실 필요가 있었다면 여러분과 저는 얼마나 더 순종을 배워가야 할까요? 중국 문화혁명이 시작되면서 선교사들이 모두 중국 대륙을 떠나가던 때 한 영국 선교사님이 자기의 동역자인 중국 사역자를 이 고난의 현장에 두고 혼자 떠나가는 것이 마음에 걸려 그에게 같이 영국으로 떠나자고 했더니 그는 말없이 티백을 들더니 갑자기 “선교사님, 질문 드리겠으니 용서하고 대답해 주십시오”하더랍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말하라고 했더니 이렇게 묻더랍니다. “선교사님, 이 티 백이 뜨거운 물에 들어가지 않고 차를 마실수 있겠습니까?”말을 잃어버린 선교사에게 그는 말을 이어갔다고 합니다. “선교사님, 저와 저의 가족일랑 염려마시고 속히 선교사님의 고국으로 떠나십시오. 선교사님이 이 땅에 돌아오시는 날 제가 제대로 된 차 맛을 나타내도록 기도나 해주시지요” 그것이 바로 약1:2-4의 교훈이 아닙니까? “(2)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4)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그러면 성도 여러분, 고난이 올 때 우리가 결심할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순종의 사람이 될 것을 결심하십시오. 잘 들으십시오. 순종안하시면 잡종이 되실 뿐입니다.

 

3.순종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습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순종이 이렇게도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순종은 우리를 온전하게 하는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나 순종의 궁극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인 것입니다. 저는 소위 저항이나 불복종이 정당화될 수 있는 유일한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라고 믿습니다. 루터의 종교 개혁은 그런 케이스에 속한다고 믿습니다. 루터는 개혁을 위한 개혁, 저항을 위한 저항을 결코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그가 온 마음으로 사랑했던 주의 몸 된 교회가 오직 성경의 교훈을 따라 하나님의 뜻 안에 바르게 세워지는 것을 보고 싶어 했을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일 그가 농민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것이 그가 비판받는 구실이 되기도 했습니다만 그는 저항을 위한 저항은 결코 성경적이 아니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한 정당한 이유가 존재하더라도 저항의 습관화나 저항의 체질화는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당시의 농민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쟁취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내세우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지지를 거절했습니다.그러므로 저항이나 불복종의 필요가 있을 때 과연 거기에 상대적이 아닌 절대적이고 명백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뜻이 존재하는 가를 먼저 우리는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한 후 행동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었던 그 불복종(정의로운 것이라해도)이 습관이 되어 그 후 나의 일상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한번 반항이나 불복종이 체질화되면 그는 나중에 명분이 분명하지도 않은 사사로운 주관적인 자기 신념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여 매사에 불평하고 매사에 저항하는 불순종의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다보면 그는 결국 하나님의 뜻조차도 저항하고 종내는 하나님을 향해서도 반항하는 자리에 서기 때문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생각해 보겠습니다.예수님에게 있어서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일은 명백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앞두고 그가 얼마나 진지하게 기도하셨는지 기억하십니까? 

 

오늘의 본문 히5:7의 상황은 십자가를 앞두신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의 상황이라고 성경학자들은 생각합니다. 읽어 보실까요?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 밤 그분의 기도의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맞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마침내 하나님 아버지의 인류 구속의 뜻을 이루시고자 기꺼이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게 해서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순종의 삶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어떻게 되셨습니까? 히5:9에 의하면“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절에 의하면 인류를 위하여 중보하시는 시작도 끝도 없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위하여 기도하던 멜기세덱이라는 인물처럼 예수는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끝없이 기도하시는 우리의 영원한 대 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그렇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그 주님의 기도를 힘입어 그 분의 기도를 따라 그리고 그 분의 기대를 따라 진정 순종의 사람으로 사시겠습니까? 이제부터는 진정 그 분의 도우심으로 지난날의 모든 반항의 악습을 버리고 순종의 거룩한 습관을 다시 학습하십시오. ‘권위주의’는 청산되어야 할 비 성경적인 악입니다. 그러나 ‘권위’는 성경적이란 것을 아십니까? 성경은 ‘권위(권세)’는 하나님이 정하신다고 말합니다. 권위의 남용은 경계되어야 하지만, 권위가 무너지면 모든 공동체가 무너집니다. 하나님의 의도하신 질서가 무너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권위에 순종하라고 가르칩니다. 당신은 가정에서 순종의 삶을 사십니까? 당신의 부모님을 예수님처럼 순종하고 받들고 계십니까? 당신과 아버지의 관계는 정상적이십니까? 다가오는 이 구정의 계절 아버지와 형제들과 나의 관계를 바르게 할 필요는 없습니까? 직장에서 나와 나의 보스와의 관계에서 불필요한 적대감과 갈등을 만들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아니, 우리 인생의 궁극적 권위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나의 영적 관계는 어떠신지요? 날마다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QT하시며) 순종하는 기쁨으로 살고 계십니까? 그리고 그분이 정녕 오늘 여러분과 저의 순종의 모습을 바라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까? “보라 내 사랑하는 아들(딸)이요, 내 기뻐하는 자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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