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갈 3:1-3
설교제목 : 마음의 눈
설교자 : 조용기 목사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마음의 눈"이라는 제목으로 은혜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눈은 온 몸의 등불입니다. 눈이 어두우면 몸 전체가 캄캄하고 어둡습니다. 그러나 눈이 밝으면 온 몸 전체가 환하게 밝은 가운데서 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눈은 우리의 육신의 삶만 밝히지 우리 마음에 세계나 영의 세계를 밝힐 수 없는 것입니다. 인류 조상 아담이 처음 지음을 받았을 때는 그들은 육신의 눈만 밝을 뿐 아니라 마음에 눈도 밝았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눈을 가지고는 모든 주위 환경을 다 바라볼 수 있었고 마음에 눈으로써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고 하나님과 대화하며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마귀에 꿰임에 빠져서 자기가 하나님을 반역하자 말자 하나님 심판을 받아 그 영혼이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 마음에 눈은 장님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때로부터 시작해서 아담은 육신의 눈을 가지고서 육신의 만물은 바라볼 수 있지만 마음에 눈이 장님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고 그리고 천국을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그때로부터 시작해서 오늘날까지 아담의 후손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 영이 죽어서 태어나므로 마음에 눈은 장님이 되어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보이는 것은 육신의 세상밖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사람들은 육에 속하게 되고 물질의 노예가 되고 유물주의자가 되고 인본주의자가 되고 하나님의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영원한 천국에 대해서는 캄캄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눈이 장님이 된 사람 속에는 오직 이 세상에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의 자랑 이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가 유물주의적인 세계요. 물질적인 세계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단 이러한 세계 속에서라도 우리 마음에 눈을 뜨기만 하면 순식간에 이 물질적인 육신 적인 세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 위대하고 원대한 창조적인 영적인 세계가 있으며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 하나님이 계신 것을 우리는 밝히 깨달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역사를 볼 때 하나님이 사용한 위대한 사람들은 모두 다 이 영적인 눈을 뜬 사람들이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알아보면 마음에 눈을 뜬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나이 칠십 오 세가 될 때까지 영적인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그는 육신의 눈만 가지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세상일만 근심하고 살았는데 그가 나이 칠십 오 세가 되자 하루는 갑자기 영광의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놀랍게도 그 속에서 영적인 눈이 떠져서 순식간에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여태까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맡고 맛보고 손으로 만지는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세계만 가지고 거기에만 살았는데 순식간에 자기 속에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탄생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세계였습니다.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이 계시고 이 우주를 둘러 쌓여있는 방대한 영적인 세계를 그는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새로운 세계 속에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여태까지 육신의 귀로써 육신의 말만 듣고 있던 아브라함의 귀속에 이제는 영적인 음성이 들려옵니다. 우주에서 들려오는 음성, 하나님의 보좌에서 들려오는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기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내게 복을 주어 내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여태까지 살아온 세계가 아니라 미지에 세계, 영적인 세계가 자기 눈앞에 전개됨을 바라보았습니다. 지금까지는 인간의 지혜나 지식이나 수단과 방법으로 살았는데 이제는 그것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새로운 세계에 대한 눈이 열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육신으로 살아온 모든 과거와 현재 생활을 다 벗어 던져 버리고 이제는 더 이상 인간이 계획하고 인간이 생각하고 인간이 작정한 것이 아닌 하나님이 계획한 이러한 삶을 통해서 그는 출발할 것으로 새로운 탄식을 합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서로 중생했습니다. 그는 새로운 삶을 출발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도 딱 한가지인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에 세계에 있을 때는 육신으로 보고 육신으로 생각하고 육신으로 말하고 육신 적으로 계획하고 육신 적으로 살았지만 온 세계가 전개되고 영의 눈이 열리고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우리의 생애를 위해서 하나님이 준비한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고린도 전서 2장 9절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한 자를 위해서 예비해 놓은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하나님이 예비한 세계는 이 육의 세계를 통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육의 세계를 뛰어넘은 하나의 영의 세계이기 때문에 이것은 마음에 눈으로 보고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보이셨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주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인간의 힘으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수고하는 세계 저 건너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자상스럽게 예비하고 준비하신 새로운 세계가 전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때 다가오는 마음에 희락과 마음에 평안 말로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고 사람들이 눈으로 안 보이는 그 세계, 사람들이 귀로 듣지 못하는 그 세계, 사람들이 손으로 만지지 못한 그 세계지만 우리는 마음으로 그 세계를 보고 그 음성을 듣고 깨닫고 믿음으로 그 길을 따라서 우리는 그 길을 갈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어리석고 바보같이 보이지만 우리는 새로운 세계의 시민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향해서 걸어나가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런 세계를 성경에서 말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했으며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런 세계를 향해서 새로운 삶을 향해서 마음에 눈을 뜨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 만사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대로 다 이루어지고 만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로 아브라함은 이것을 체험했습니다. 그 나이 칠십 오 세가 되어서야 비로써 육의 사람을 벗어버리고 세속적인 삶을 벗어버리고 마음에 눈이 열려서 새로운 영적인 세계를 가득히 가슴속에 안고 그는 영적 세계를 따라서 새로운 인생을 출발해서 신 바람나게 살아갈 수가 잇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다 아브라함 같은 이러한 삶을 출발할 수 있습니다. 우리 속에도 이러한 삶이 터져 나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마음에 눈을 뜬 모세를 보십시다. 모세는 자기가 젊었을 때는 인간의 힘으로 자기 인생을 계획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나이 40세가 되었을 때 모세는 지혜와 지식이 충만하고 그는 웅변이 달통했습니다. 그는 의기 양양한 청년이었습니다. 인간의 계획과 인간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해 보겠다고 혁명적인 사상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그는 광야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 장장 40년 동안 이드로의 사위가 되고 목동이 되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아니하고 아무도 없는 사막에서 양 무리를 거느리고 이곳 저곳으로 다니면서 목동생활을 했었습니다. 언 40년 세월이 지나가서 이제 육신의 눈도 어두워지고 허리도 굽어지고 체력도 쇠하여 졌습니다. 육신에 속한 세상은 점점 멀어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것이 절망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호렙산 곁에 와서 양 무리를 치는데 갑자기 가시넝쿨이 불타기 시작했습니다. 사막에서는 날이 너무 뜨겁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불이 타는 것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가시넝쿨에 불이 불어서 활활 타는데 가시넝쿨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것 참 희한한 일이다. 그래서 그는 양 무리를 두고 광경을 구경하려고 가시넝쿨 앞에 갔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것입니다. 모세야, 모세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 그곳에서 신발을 벗어라. 모세가 신발을 벗어 서 그는 그 생애 속에 새로운 탄생을 체험했습니다. 여태까지 육신의 세계만 있는 줄 알고 육신의 세계만 붙잡고 살았는데 그 육신에 세계가 그에게서 벗어나가면서 영의 새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그는 마음에 눈이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여태까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한 새로운 우주가 그 앞에 전개됩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하나님 음성이 들려오고 하나님의 계획이 그들에게 전개된 것입니다. 모세는 어안이 벙벙했으나 너무나 깜짝 놀랐습니다. 팔십이 되어서야 그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가 마음에 눈을 듣자 말자 그 영의 세계가 온통 그 앞에 전개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도저히 육신으로 생각할 수도 없고 계획할 수도 없는 것을 그에게 지시했습니다. 그가 지팡이만 의지하고 애굽에 건너가서 고통 당하는 삼백만 이스라엘을 구출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가 젊었을 때 육신의 힘으로 이루지 못한 것을 마음에 눈이 뜨자 그 방대한 영의 세계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나아가서 그것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 동안에 세상의 자원을 의지하고 삽니다. 그러나 마음에 눈이 열리면 우리는 하나님 세계를 보면서 방대한 영의 자원이 있는 것을 알게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자원을 의지해서 살지 않고 마음의 눈이 열리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삽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다.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기뻐하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믿음에 세계 방대한 자원의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바로 사십 때 인간의 힘을 의지해서 이스라엘을 독립시키지 못하고 실패한 모세는 팔십이 되어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이제 절망적인 처지에 놓여있는데 이때 그 마음에 눈이 열려서 방대한 영의 세계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그는 지팡이 하나 집고 애굽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서 새로운 마음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를 의지해서 무서운 독재자 바로에게서 삼백만 이스라엘을 구출하여 도저히 사람으로써 상상할 수 없는 홍해바다를 하나님 능력으로 가르고 수 광야를 지나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일로 가나안 복지로 이끌어 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능으로 한 것은 아닙니다. 그가 마음에 눈을 가졌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을 바라볼 수가 있었고 위기에 처할 때마다 마음이 열리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고 뒤로 물러 갈려고 할 때마다 그는 그들을 채찍질하고 인도해서 마음으로 보는 하늘나라의 위대한 법칙과 하나님 능력을 의지해서 이스라엘을 구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살면서 육신의 눈만 가지고 살면은 인간의 삶밖에는 살수 없지만 마음에 눈이 열리면 위대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셋째로, 우리가 성경에 보면 육에 눈을 가진 정탐꾼과 마음에 눈을 가진 정탐꾼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가데스 광야에 이끌고 갔습니다. 그곳에서 열두 정탐꾼을 선택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탐지하고 오라고 했습니다. 열 두명이 같은 자리에 같은 시간에 출발했었습니다. 그는 40주 40야를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왔는데 열 사람은 육신의 눈을 가지고 보았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니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산은 높고 골은 깊은 곳입니다. 성벽은 하늘을 찌를 것 같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네피림의 후손 아낙자손인데 키가 구척입니다. 도저히 자기들은 여치 세계같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에는 절대로 가나안땅을 점령할 수 없습니다. 우리인간의 힘을 의지해서는 이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마음에 눈을 가지고 갔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에 눈을 가지고서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그 하나님께서 가나안땅을 자기들에게 주었다는 약속을 가지고서 그들은 갔습니다. 그들이 보니 산은 높고 골은 깊으나 모두다 젖과 꿀이 흐르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성벽이 높아도 하나님의 발 앞에 있는 것이고 아무리 장대한 사람이 있어도 이것은 하나님 말씀 한 마디 앞에는 총알 같이 날아 갈 인생들밖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음에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니 이거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들어가서 치면 당장 빼앗을 것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곳에 누리고 살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들이 똑같이 기다리고 있는 백성들에게 와서 보고하는데 열 사람은 백성들 앞에서 그들이 육신의 눈으로 본 대로 보고했습니다. 산은 높고 골은 깊다. 그 땅은 거민을 삼킬 것 같더라. 성벽은 너무 높아 쳐들어 갈 수가 없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다 대장부들만 살고 있더라. 우리의 처자가 포로 잡힐 것이요. 우리는 칼날에 죽을 것이다. 이 말을 듣자 온 백성들이 낙심하고 통곡을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이 일어나서 백성들을 안도하면서 일어나기를 그렇지 않다. 우리가 가본 땅은 참으로 젖과 꿀이 흐르더라 .물론 그곳은 산은 높고 골은 깊은 백성들은 키가 크지만은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을 떠났고 그들은 우리들의 밥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계시므로 우리는 능히 들어가서 점령할 수가 있다. 우리 들어가서 점령하자. 그러나 육의 눈으로 들어가 본 사람들의 말을 들은 백성들은 모두다 육에 속에서 그 말에 동의하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나타나서 육의 눈을 가지고 본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멸하고 그 백성은 회진시켜 광야로 돌려보내서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면서 모두 다 그 육체가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마음의 눈으로 본 사람들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사십 년 광야를 살아나서 후손들을 데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마음에 눈을 가지고 모든 것을 바라보고 살아야한다는 것은 절실한 것입니다.
넷째로, 여기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바울이 편지한 편지가 무엇입니까. 어리석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어찌하여 그를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쫓느냐고 한 것입니다. 물론 갈라디아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 십자가에 못 박힌 것 못 보았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못 봤습니다. 여기에 바울이 말한 것은 너희가 마음에 눈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사실을 밝히 밝히 보도록 내가 설교를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눈을 왜 닫아버리고 다시 육신의 눈으로 돌아가느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육신의 눈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쳐다보면 예수님은 하나의 희생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오늘날 소히 말하는 신학자라든지 그렇지 않으면 철학자 세상의 선생들이라는 사람들은 예수를 바라볼 때 그들은 위대한 선생이었다. 위대한 혁명가였다. 비극으로 죽은 역사적인 인물이었다. 그렇게 평합니다. 육신의 눈으로 볼 때는 그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에 눈을 가지고 예수를 바라볼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로 동정녀의 마리아 몸에 태어나서 죄 없이 세상에 사시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전개하시다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희생의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몸을 찢고 피를 흘린 것을 우리는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으로는 그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에 눈으로 우리가 바라보면 영의 세계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할 계획을 세우시고 하나님의 작정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의 희생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그 찢기시고 그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눈으로 볼 때 예수님은 우리 구주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에 묶인 우리들을 보혈로써 그 죄를 속하시고 우리들을 용서하시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게 하시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보배로운 피가 아니면 우리는 옛사람 그대로 살며 부패한 그대로 살며 죽음의 노예가 살겠는데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 죄가 다 용서함 받고 하나님 앞에 영접함을 받아 중생하고 의롭다함을 얻어 새롭게 되는 이 위대한 역사가 예수를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마음에 눈을 통해서 바라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눈을 열어서 보면 예수님은 바로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성결케 하는 역사를 베푸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어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그 죄와 함께 주님은 죽었습니다. 죄를 십자가에 멸해버렸습니다. 죄의 권세를 주님께서 멸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통하여 주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게 만들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모시면 성령께서 예수님 안에 나타나서 우리 속에 있는 죄와 사망의 법을 멸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죄를 짓고 넘어졌다가는 회개하고 돌아오고 또 넘어졌으나 회개하고 돌아옴과 동시에 점점 죄의 세력을 벗어버리고 날로, 날로 그리스도를 닮은 의의 형상을 입어 갈 수가 있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죄를 이길 수 있게 하는 위대한 힘을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는데 우리가 마음에 눈을 가지고서 보게되면 바로 이 사실이 보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넘쳐 나오는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깨끗하게 하시고 성결하게 만들어서 주님의 신부되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 다시 마음에 눈이 열려서 마음에 눈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바라볼 때 예수그리스도는 그곳에서 우리 치료자로 매달린 것을 우리는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셨습니다. 저는 덩어리가 갈기갈기 찢겨져서 선지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저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성경에는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안을 열어보면 바로 예수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질병을 다 청산하기 위해서 갔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저가 우리 모든 병을 고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치료자가 되십니다. 어떠한 병도 예수님은 고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사람도 병들어서 있기를 원치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문둥병자가 내려와서 주께서 원하시면 나를 깨끗이 할 수 있다고 할 때 네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입어라. 둘 말하지 않고 손을 얹어 그 문둥병 자를 깨끗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소원은 여러분이 병 고침 받고 깨끗하게 되는 것이 소원인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주님의 소원은 여러분을 치료하는 것이 주님의 소원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일을 하기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에 눈이 열려서 주님을 바라보게 되면 그 다음 우리 육신의 눈으로 우리 몸을 바라보고 우리 몸에 아무리 무서운 병이 걸렸다 하더라도 그 병이 조금도 겁나지 않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볼 때는 겁나지만 마음에 눈을 열어보니 예수께서 이것다 청산하신 분이라 예수님께서 그 권세와 능력이 청산했으니 내가 마음에 눈을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굳세게 서며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질병을 멸해 버리고 꾸짖어 버리고 주께 기도하고 감사하고 나가면 마치 마른나무 잎사귀 나무에서 떨어지듯이 모든 병들이 여러분 몸에서 우수수 떨어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승리를 가져왔기 때문인 것입니다. 또 우리가 영의 눈을 열어서 예수님 바라보면 예수님이야말로 진실로 우리 축복의 근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복을 얻으려고 동문서주하고 뛰어다니지만 눈물과 고생을 많이 하고 가시밭길을 걸으며 피투성이 되어 살면서 복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복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요. 따로 마음에 눈을 열어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참 복의 근원인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밝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은혜는 너희가 알거니와 저가 부유하신 자로써 너희로 인하여 가난하게 되심을 저희 가나하심으로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참된 영의 부요, 마음에 부요, 생활의 부요의 세계가 열려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잇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였으니 이는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하는 자라 하는 자라 하였음니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선물로 받게 하리라. 하신 것처럼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마음에 눈으로 바라볼 때 그곳에서 모든 가난이 없어지고 모든 저주가 없어지고 모든 절망이 사라지고 그곳에서 하나님이 복이 쏟아지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눈으로 예수를 바라보고 뒤로 물러가지 말고 낙심하지 말고 주님을 감사하고 믿음으로 충성할 때 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복이 우리를 진실로 복되게 하므로 우리가 일어나서 하나님을 위해서 크게 섬기고 수많은 사람을 복되게 할 수 있는 복의 근원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또한 갈리디아 사람들이 잃어버린 마음을 회복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예수님은 바로 그 십자가에서 나의 죽음을 죽으시고 내가 들어갈 장사에 들어가시고 나를 위해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인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눈을 열어서 보면 우리는 예수를 통하여 음부와 사망을 다 이기고 승천하셔서 아버지가 예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밝히 바라볼 수 있고 새 예루살렘을 바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눈물이 없습니다. 근심이 없습니다. 탄식이 없습니다. 이별하는 것이나 고하는 것이나 앓은 것이나 죽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가 산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이요. 말할 수 없는 평안인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예수 믿고 기도하는 동안 순간 순간에 그런 것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예수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예수 안에 있어 한 순간에 그렇게 마음이 평안하고 기쁘고 찬란할 수가 없습니다. 그 순간에 죽음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I야 바울선생이 말한 것처럼 차라리 내가 이 몸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이 바로 이 의미구나 이러한 체험을 여러분 가끔 하실 것입니다. 진실로 예수 안에 있는 것이 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 곡명을 다 준 것보다 더 위대한 것입니다. 세상 뜻은 영원의 깊이 깊이 아름다운 행복과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세상 것은 다 썩어져 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그 영원한 의와 평강과 희락과 그 놀라운 행복이란 말로 다 형원할 수 없습니다. 바로 마음에 눈을 떠서 보면 오직 우리의 참 삶은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 안에서 이미 죽음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우리의 삶이 되십니다. 예수 안에서는 사는 것도 없고 죽는 것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삶만 전개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삶,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 왔다 갔다 하는 자 중에도 충성치 못하여 마음에 눈을 뜨지 못하고 육신의 눈만 가지고 종교적으로 형식적으로 율법적으로 교회에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 항상 교회에 문제 일으키고 분쟁의 불씨를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실로 주님 앞에 나오면 마음에 눈을 떠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마음에 눈을 뜰 수 있을까요. 우리는 죄를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를 어둡게 만들었으므로 진실로 우리는 회개하고 죄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보혈로 죄를 씻고 그리고 진실로 예수를 구주로 모셔야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구주로 모시자 말자 우리는 중생하고 마음에 눈이 떠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자 말자 마음에 눈이 뜨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마음에 눈이 더 밝아지고 기도 생활을 깊이 할수록 마음에 눈은 더 밝아지고 말씀을 공부할수록 마음의 눈은 더 밝아지고 이 마음의 밝은 눈으로 영적인 위대한 삶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한 그 세계를 바라보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진실로 영혼이 잘됨과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위대한 자원을 하나님께 얻어서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수많은 사람들이 이 지구상에 살지만 마음에 눈이 없이 장님이 되어서 육신의 눈만 바라보고 삽니다. 육신의 세계만 의지하고 살다가 그것이 종말이 되면 모든 것이 끝나고 맙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를 보내신 것은 우리의 마음에 눈을 떠서 밝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영원한 창조적인 세계 근원적인 세계, 원천적인 세계인 영의 세계를 깨달아 알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예수 십자가 앞에 나와서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 십자가 보혈로 씻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의 세계가 열려서 우리가 떡으로 살지 아니하고 말씀으로 살고 육신의 힘을 의지해서 살지 말고 믿음으로 살고 천국의 영원한 영광을 가지고 한없는 영광과 기쁨 속에 살아갈 수 있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오늘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 받들어 기도 드렸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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