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사 53장 7절, 마 27장 12-14절
설교제목 :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12) 침묵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수년전 이 정향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국산 명화 ‘집으로’를 ‘침묵’이라는 관점에서 성찰한 영화 평론가가 있었습니다. 주인공 상우라는 아이는 수많은 소음과 말에 둘러싸여 살아가던 도시 아이였습니다. 상우에게 침묵은 무엇보다 낯선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엄마와 떨어져 사는 것은 그렇게 큰일이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엄마가 말하듯 상우는 장사에 바쁜 엄마가 늘 돌봐 주지 않아도 혼자서 잘 하는 아이였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상우에게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TV도 인터넷도 되지 않는 침묵의 산골에서 온 종일 침묵하는 벙어리 할머니와 더불어 살아가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처음 상우는 산골 생활의 초기에 온 종일 오락기기가 내는 그 익숙한 전자음으로 위안을 얻고자 시도합니다. 그러나 이 변화 없는 위안거리에 싫증을 느낀 그는 이제 로봇 그림엽서를 보며 혼자 말을 하는 것으로 침묵을 몰아내려고 애를 씁니다. 이 애절하고 안타까운 어린 상우의 모습은 어쩌면 온갖 소음의 도구에 휩쓸려 살면서도 위로를 얻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이요 곧 여러분과 저의 오늘을 살아가는 모습일수가 있습니다.그러나 이 영화 ‘집으로’가 보여주는 놀라운 하나의 변화는 이런 어린 상우가 침묵을 배우면서 행복한 아이가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영화를 만든 이들의 바램의 하나는 현대인들이 침묵의 미학을 배우기를 원하는 것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침묵의 중요성을 몸으로 가르치고자 하신 분이 예수님이셨던 것을 아십니까? 침묵은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이셨습니다. 오늘의 본문 이사야에서 선지자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침묵으로 받아드리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 그리고 그 예언은 오늘의 또 하나의 본문인 마태 27:12-14에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시면서 한마디도 대답을 안 하시는 그의 침묵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의 전 생애는 우리의 본을 위한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벧전 2:21에서“---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그분의 고난 속에서의 침묵도 우리를 위한 모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예수께서 침묵의 본을 실천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1.침묵은 창조적인 지혜를 모색하는 방편이기 때문입니다.사실, 예수님이 침묵을 하셨다고 해서 일체의 말을 거부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 되도록 말을 아끼셨고, 보다 많은 경우에 침묵하셨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마태27장에서도 대제사장들에게 고발 당하시기에 앞서서 마태 26:62에 보면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읽어 보실까요?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이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그 다음 63절에 보면 예수께서 다시 ‘침묵하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다시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했을 때 그는 마침내 침묵을 깨시고 64절에서 대답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는 결정적인 때에도 대답을 회피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는 해야 할 때에는 분명히 해야 할 말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꼭 필요했던 말은 그의 침묵 속에서 나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성 괴테는 “언어는 성스러운 침묵에 기초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막스 피카르트는 그의 명저 “침묵의 세계”라는 책에서 “침묵은 말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지만 말은 침묵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말에 침묵이라는 배경이 없다면 말은 아무런 깊이를 가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위대한 말, 필요한 말, 참으로 깊이 있는 말은 침묵에서만 나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왜 일까요? 침묵은 우리에게 창조적인 지혜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침묵은 창조적인 하늘의 지혜를 공급받으시는 기도의 시간이셨습니다.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율법은 돌로 치라 명하였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을 받고 예수님은 침묵 속에 허리를 굽히시고 땅에 글을 쓰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일어나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한8:7) 도대체 어떻게 이런 지혜로운 말씀을 하실 수 있었을까요? 그것이 바로 침묵의 은총인 것입니다. 지혜가 필요 하십니까? 예수님처럼 침묵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기독교 심리학자 웨인 오츠 박사는 그의 명저 “침묵의 영성”에서 침묵이 제공하는 창조적 에너지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합니다. “침묵의 영성-그것은 우리의 마음보다 큰 마음을 지니신 하나님 앞에 머무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몸과 마음의 진정한 쉼을 제공한다. 바로 이 침묵의 영성 속에서 하나님의 영은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며 우리 안에 창조적인 사역을 베풀어 가신다. 만일 우리가 이 침묵의 영성을 잃어버리면 성령의 감동은 소멸되고 우리는 삶의 창조적 에너지를 다 잃어버린 채 차갑고 지친 모습으로 혼자 외로이 남게 될 것이다.”
2.침묵은 인간적인 실수를 예방하는 방편이기 때문입니다.얼마나 많은 우리의 인간적인 실수들이 우리가 생각하지 않고 던진 말들 때문에 저질러졌습니까? 사도 야고보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약3:2)고 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언어의 실수에 관한 한 예외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니 기독교가 말씀의 종교라고 주장하는 우리들은 지나치게 말씀을 강조하다 보니까 말에 책임을 못 지는 실수의 굴레에 우리 스스로 빠지는 일들이 너무나 비일 비재하지 않았습니까? 오죽하면 이런 유머가 생겨났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가서 자기 목사님을 찾아보았더니 목사님은 안보이고 목사님 혀(주둥이)만 둥둥 떠 있고, 자기 동료 교인들을 찾았더니 친구 교인들은 안보이고 그들의 귀만 둥둥 떠다니더라는 것입니다. 지혜의 책 잠언의 가장 중요한 교훈의 초점이 바로 우리의 언어생활에 집중하고 있음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잠18장은 특히 우리의 언어생활에 대한 예리한 경고로 가득 차 있지 않습니까? 잠18:7입니다.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의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 18:13은 얼마나 우리 자주 실수하는 부분들입니까?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 21절의 말씀도 기억하십니까?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고. 제가 군대에 가서 미군 부대에 잠시 통역요원으로 근무한 일이 있었는데 밤마다 술에 취하여 내무반에 들어와 자기가 아는 유일한 영어로 “shut-up!(입 닥쳐)”라고 소리치고 다니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한 날 밤 그 친구가 또 소리를 치는데 미군 장교가 마침 그 꼴을 보더니 "너 shut-up이라는 소리 shut-up!"하라고 소리치면서 그에게 그 한 주간 동안 저녁 시간에 내무반에서 말 안하고 살도록 벌을 주었습니다. 그 한 주간 내무반은 천국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시편기자의 기도를 우리의 기도로 삼아야 합니다. 시141:3의 기도를 기억하십시다.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우리 모두 예수님의 침묵의 습관을 배운다면 얼마나 많은 인간적 실수들을 예방할 수 있겠습니까?
3.침묵은 하나님의 섭리를 수용하는 방편이기 때문입니다.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특별히 침묵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십자가를 지심이 명백하게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이를 침묵으로 수용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변명한들 방어한들 그것이 사태의 발전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사실 많은 경우 우리가 구차한 변명과 방어를 포기하고 침묵한다는 것은 우리의 상황을 상황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맡기는 강력한 신앙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53:7에서 주께서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입을 열지 않으시고 털 깍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침묵하신 이유는 바로 다음에 따라오는 10절에서 해명되고 있습니다.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사53:10) 그렇습니다. 그의 침묵은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주의 뜻을 수용하시는 아멘의 침묵이었던 것입니다. 동일한 이유로 마태 27:12-14 본문에 보면 대제사장 앞에서도 빌라도 앞에서도 주께서는 침묵을 지키신 것입니다. 몇 마디의 변명만 하면 예수를 풀어 줄 생각을 했던 빌라도 총독에게 이런 예수님의 침묵은 기이한 침묵이었습니다.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마태27;14) 그러나 예수님 자신은 놀라실 필요가 전혀 없으셨습니다. 그에게 침묵은 하나님의 섭리를 수용하는 방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런 침묵의 실천이 필요하지 않은가요?저는 오늘의 설교를 시작하면서 영화 집으로의 주인공 상우 이야기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던 것처럼 상우가 정말 힘들어했던 것은 엄마와 떨어져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에 대한 적응이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가 산골 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변신하게 됩니까? 침묵은 천천히 상우의 친구가 되어 갑니다.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상우가 철이라는 친구에게 ‘미친 소가 온다’고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상우가 ‘미안하다’는 진심을 전달하면서 그는 이제 벙어리 할머니에게 배운 침묵의 몸짓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상우가 훗날 할머니와의 재회를 약속하는 상징도 아무 글도 없는 백지의 편지였습니다. 할머니와 헤어지는 순간에도 상우는 말없이 내미는 엽서와 할머니에게 배운 몸짓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상우는 마침내 백 마디의 말보다도 더 감동 있는 커뮤니케이숀은 침묵의 몸짓인 것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침묵만으로 이 영화는 우리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끄러운 소음의 시대에서 저와 여러분도 다시 배워야 할 예수님의 몸짓-바로 그분의 침묵의 습관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도 그만 떠들고 좀 침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더욱 우리가 지금 그분의 임재 앞에 서 있다면 말입니다. 가스펠의 작사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초청합니다. “주의 임재 앞에 잠잠해 주 여기 계시네--주의 영광 앞에 잠잠해 주의 빛 비치네--주의 능력 앞에 잠잠해 주 역사 하시네” 이제 구차한 변명도, 화풀이도, 고발도, 원망도 그만 하시고 그분의 임재, 그분의 능력을 신뢰하며 잠잠히 살아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가 잠잠하면 그분이 친히 일하실 것입니다. 자, 그럼 우리 모두 이제 입을 다물어 보십시다. 지금은 우리 모두 침묵을 연습 할 때입니다. 시인 유안진의 ‘그리운 말 한마디’라는 시를 선물해 드리고 싶습니다.“좀 어리석어 보이더라도/침묵하는 연습을 하고 싶다./그 이유는 많은 말을 하고 난 뒤일수록/더욱 공허를 느끼기 때문이다. --많은 말이 얼마나 사람을 탈진하게 하고/얼마나 외롭게 하고 텅비게 하는가?/나는 침묵하는 연습으로/본래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내 안에 설익은 생각이나 느낌일지라도/더욱 지긋히 채워 두면서/향기로운 포도주로/발효되기를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란다.--침묵하는 연습/비록 내안에 슬픔이건 기쁨이건/더러는 억울하게 오해받는 때에라도/해명도 변명조차도 하지 않고/무시해 버리며 묵묵하고 싶어진다/그럴 용기도 배짱도 지니고 살고 싶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을 연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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