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이사야 40:25-31
설교제목 : 크고 강하신 여호와를 앙망하라
설교자 : 옥한흠 목사님
거룩하신 자가 가라사대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 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 하시느니라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 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 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 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 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 라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 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 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 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 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 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 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 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 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 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 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 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 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 곤치 아니하리로다
우리 모두는 세상을 살아 가는 동안 여러 가지 이유들 로 피곤을 많이 느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그 피곤을 어떻게 푸십니까? 아마 각자 나름대로 피곤을 푸는 방법 들이 다 있으리라고 생각합 니다. 어떤 사람은 머리가 지긋지긋 아플 때면 으레 친 구들과 만나 속에 있는 이야 기를 나눈다고 합니다. 그러 다 보면 금새 피곤이 풀어지 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 람은 몸이 무겁고 말을 잘 안들을 때면 잠깐 동안이라 도 눈을 붙인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내 몸이 가뿐해진 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몸에 조금 무리가 온다 싶으 면 배낭을 메고 등산을 하기 도 하고, 라켓을 들고 운동 을 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방법들은 각자가 몸의 피곤 을 푸는데 나름의 효과가 있 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삶 자체가 주는 본질적인 피곤은 어떻 습니까? 이를테면 실패가 주 는 피곤이나 자주 괴롭히는 질병 때문에 오는 피곤, 남 모르는 고뇌를 안고 가슴앓 이를 할 때 오는 피곤 같은 것들은 어떻게 풀고 있습니 까? 잠을 잔다고 해결됩니 까? 라켓을 들고 코트로 간 다고 풀립니까? 그저 산에 가서 두세 시간 있다가 오면 풀립니까? 몸이 피곤하고 머 리가 복잡할 때 오는 피곤이 라면 아마 이런 방법들로도 얼마든지 풀 수 있을 지 모 릅니다. 그러나 인생의 본질 적인 피곤은 다릅니다. 우리 가 자주 이용하는 그런 방법 들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이 것은 우리 모두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근본적 인 피곤은 어떻게 풀 수 있 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한 가 지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라는 것입니 다. 29절 이하를 보십시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 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 오직 여호와 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 질 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 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 리로다."
쉽게 말해서 하나 님은 자기를 앙망하는 자에 게는 그가 느끼는 피곤이 실 패가 주는 피곤이든, 질병이 주는 피곤이든, 인생의 여러 가지 무거운 짐이 주는 피곤 이든 간에 반드시 그 피곤에 서 벗어나게 하고 새 힘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앙망하다'라는 말은 히 브리어로 '카바'(qavah)입니 다. 이 말은 원래 여러 가지 물건을 비틀어서 하나로 묶 을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저는 어떻게 이 말이 앙망하 다는 뜻을 표현하기 위해 사 용되게 되었는지 자세히 알 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연 유를 짐작해 보기란 그리 어 렵지 않습니다. 너무 기다리 고, 소망하고, 바라보다 보 면 충분히 몸이 비틀리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 다. 시편 25편을 지은 시인 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 다"(5절). 여러분이 종일 누 군가를 바라고 있다고 생각 해 보십시오. 한두 시간 기 다리는 것이라면 누구나 쉽 게 할 수 있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루 종일 눈이 빠져 라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 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 다. 그러다 보면 정말 몸이 뒤틀리는 것 같은 고통을 느 낄 수도 있습니다. '앙망하 다'는 말은 몸이 뒤틀리는 것 같은 고통을 느낄 만큼 누군가를 바라는 바로 그런 상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사야 38장 14절 역시 '앙 망하다'는 말이 가진 이러한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 다.
"나의 눈이 쇠하도록 앙 망하나이다."
오죽 기다리고 바라보았으면 눈에 핏발이 서고 침침해져서 보이지 않 을 정도로 피곤을 느끼겠습 니까? 앙망한다는 것은 그만 큼 간절히 사모하는 것을 의 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누군가를 이처럼 앙망할 수 있기 위해 서는 우리 마음을 끌어 그에 게로 향하게 하는 뭔가가 있 어야 합니다. 마음이 끌리지 않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발 로 차고 소리를 지른다고 해 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사야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몸이 비 틀릴 정도로, 눈이 쇠할 만 큼 하나님을 앙망하기를 원 한다면 한 가지 꼭 알아야 될 것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강하 신가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 지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강 하신 지를 분명히 확인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 을 간절히 앙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이 강 하고 능하시다는 것은 상식 에 속하는 이야기입니다. 안 믿는 사람도 하나님은 대단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인정 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다니 지만 아직 창세기와 요한계 시록이 성경 어디에 붙어 있 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 이라도 하나님이 크고 강하 신 분이시라는 것을 압니다. 그 정도는 누구나 상식적으 로 다 알고 있는 바입니다. 그러나 그런 정도로 알아 가 지고는 절대 여호와를 앙망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는 성령으로 인해서 하나님 의 자녀가 된 거룩한 사람들 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중생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에게는 소위 '친자본능'이라 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네 다섯 살 먹은 사내아이를 데 리고 자주 외출을 한다고 합 니다. 그런데 그 애는 그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느라 서 있노라면 여기저기 다니 면서 사람들을 발로 차는 못 된 버릇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한 동안 그 버 릇을 고치려고 때로는 야단 도 쳐보고, 달래 보기도 했 습니다만 별 소용이 없었습 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아 들이 왜 저렇게 행동할까 하 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고 합니다. 그가 얻은 결론은 이것입니다. '저 놈이 아빠 가 옆에 있으니까 저러는구 나.' 우리가 잘 알다시피 어 린애에게는 아빠가 가장 크 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 아빠보다 더 큰 사람은 아무 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빠가 내 옆에 있는데 넌 뭐냐 하는 식으로 신이 나서 으시대었던 것입니다. 이것 이 바로 친자본능의 한 예라 할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자 녀로 거듭난 우리 역시 마찬 가지입니다. 친자본능 때문 에 하나님 외에는 우리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습니다. 우 리는 하나님이 가장 강하고 크시다는 사실을 신이 나서 감격스럽게 받게 되어 있습 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전적 으로 앙망하는 일은 이런 친 자본능만 가지고는 안됩니 다. 하나님이 오늘 말씀을 통해서 자기가 얼마나 강하 고 크시냐 하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하 나님이 얼마나 크고 강하시 냐 하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 지 전부 말씀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 모든 것을 다 알 수도 없을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 다. 우리가 하나님의 크심을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하나 님의 강하심을 우리가 무슨 재주로 다 인지하면서 이해 를 하겠습니까? 그것은 불가 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얼 마나 크고 강하시냐 하는 것 을 알기 위해서는 중요한 것 한두 가지만으로도 족한 것 입니다.
누구나 한두 번쯤은 풍경 사진을 찍어보신 경험이 있 으실 것입니다. 가을에 설악 산을 가보면 오색찬란한 단 풍으로 수놓은 모습이 얼마 나 장관입니까? 그래서 대부 분의 사람들은 설악산의 이 런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카 메라 셔터를 연방 눌러대느 라 정신이 없습니다. 온 사 방에서 찰카닥 찰카닥 하고 야단입니다. 그런데 막상 사 진을 현상 해 놓고 보면 그 때의 풍경이 아닙니다. 형편 없고 초라한 것이 정말 아니 올시다입니다. 사람 얼굴이 들어간 것이나 남기지, 절경 이라고 감탄을 하며 찍은 사 진들은 대부분 쓰레기통으로 던져질지도 모릅니다. 그 만 큼 실망이 큰 것입니다. 그 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장 엄한 대자연을 35mm 필름에 다가 담으려는 것 자체가 무 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문적인 사진가들은 장엄한 대자연을 다 담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설악의 모습 가운데서 특별히 마음 에 드는 어느 한 부분을 싹 둑 잘라 가지고 그 다음에 그것을 정성껏 묘사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설악의 전부 를 담은 것이 아님에도 그가 찍은 사진을 보고
"야! 설악 산 단풍 아름답다. 우리 나 라 설악산은 정말 명산이 야."라며 감탄을 하는 것입 니다. 설악산의 아름다움을 다 담아서 일일이 살펴볼 필 요가 없습니다. 한 부분만 보아도 우리는 설악산이 아 름답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역시 마찬가지입 니다. 하나님이 크고 강하신 것을 우리가 다 알 필요가 없습니다. 한두 가지만 알아 도 우리는 그를 앙망하지 아 니하면 안될 만큼 마음의 감 동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사야는 이 점에서 오늘 두 가지를 가지고 하나님이 얼 마나 크시냐 하나님이 얼마 나 강하시냐 하는 것을 우리 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것입 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늘 을 보라
먼저, 이사야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늘을 보면 그가 얼마나 크고 강한 분이신가 를 알 수 있고, 또 앙망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눈을 높 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 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 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 짐이 없느니라."
할렐루야! 이 본문을 그대로 읽어도 감 동이 오기는 하지만 좀 어려 운 감이 없지 않습니다. 그 래서 좀더 실감나게 다시 현 대어로 번역하면 이런 내용 입니다. 한번 들어보십시오.
"하늘을 올려다 보라. 누가 저 많은 별들을 창조하였는 가? 여호와께서 그 많은 별 들을 군대처럼 배치해 놓으 시고 하나하나 그 이름을 불 러 점호하신다. 권능이 무한 하시고 힘이 강하신 그분은 별 하나 빠뜨리지 않으신다."
이사야는 하늘을 가르키 며 그 하늘을 지으신 하나님 을 보라고 말합니다.하나님 은 천지 창조 때 하늘을 창 조하시느라고 이틀을 보내셨 습니다. 이틀 동안 말씀으로 하늘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창조 하셨습니다. 우 리는 저 하늘이 얼마나 크고 광대한지 잘 모릅니다. 하루 에 몇 번씩 특별히 하늘이 파랗게 그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낼 때 우리는 자신도 모 르게 하늘을 쳐다 보고 '야, 넓다. 높다.' 이렇게 탄성을 지릅니다. 그리고 아침에 태 양이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 내면서 뽐낼 때 감탄하기도 하고, 밤하늘을 수놓는 수많 은 별들을 올려다보면서 그 어떤 신비감에 젖기도 합니 다. 그러나 하늘이 얼마나 크고 광대한 지에 대해서는 별로 실감하지 못합니다. 심 지어 천문학자들의 말을 듣 고도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 우리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봅시 다. 1977년에 토성 탐색을 위해서 미국에서 우주선 하 나를 쏘아 올렸습니다. 보이 저 1호입니다. 그 우주선은 지구를 떠나면서 하루에 120 만 킬로미터의 속도로 달렸 습니다. 우리가 고속도로에 들어가서 정신없이 달리다 보면 시속 140 킬로미터 정 도 나오지 않습니까? 그래도 우리가 엄청나게 빠르다고 느끼는데 120만 킬로미터라 면 도대체 얼마나 빠른 것입 니까? 도저히 실감이 안 나 는 속도입니다. 그리고 그렇 게 달리기를 무려 3년 2개월 이나 했습니다. 그렇다면 도 대체 토성까지의 거리는 얼 마나 된다는 것입니까? 서울 에서 부산까지가 4백 킬로미 터인 것을 감안하면 토성까 지의 거리 역시 우리가 실감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엄청난 것입니다. 지구에서 토성까지 그 공간이 얼마나 넓은 지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천문학자들의 말 을 빌리면, 우리가 살고 있 는 지구와 토성, 금성이 포 함된 이 태양계도 우리가 볼 때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넓 은 것 같지만 하나님이 만드 신 전 우주에 비하면 그것도 한쪽 모퉁이의 작은 점 하나 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전 우주는 도대체 얼마나 넓다는 말입니까? 우 리가 올려 다 보는 저 하늘 이 얼마나 광대하다는 말입 니까? 우리의 좁은 지식으로 는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 는 공간입니다. 하나님이 만 드신 하늘이 그 만큼 크고 광대한 것이라면 하늘을 만 드신 하나님은 얼마나 크고 광대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자기보다 더 큰 것을 창조하실 리가 만무하 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광대 한 우주 공간을 창조하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셨습니 다. 하나님은 자기가 만드신 모든 우주 만물이 정연한 법 칙에 따라서 움직이도록 질 서를 세우시고 주관하고 계십니다.
천문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우리 지구 주변으로 매일 큰 바윗덩이들이 지나 간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바윗덩이를 일컬어서 '소행 성'이라고 말합니다. 직경이 1킬로미터나 되는 커다란 바 윗덩어리들이 1년에 2천 개 이상 지구를 아슬아슬하게 스쳐서 지나간다고 합니다. 어떤 것은 불덩이가 되어 지 나가다 타버리기도 하고, 어 떤 것은 아예 영원히 공간 속으로 사라지기도 하면서 2 천 개가 지구를 스쳐 가는 것입니다. 이런 바윗덩이 하 나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는 백만 아니 수 백만 메가톤 이상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 러니까 그 중의 어느 하나라 도 궤도를 잘못 들어 지구 어느 모퉁이와 부딪히기라도 하는 날이면 이 지구는 역사 적으로 끝장이 나버린다고 합니다.
직경 1킬로미터 짜 리 소행성은 그만 두고라도 직경 1백 미터 정도의 큰 돌 덩이 소행성도 1년에 30만 개 이상이 지구 주변을 스쳐 지나간다고 합니다. 또 직경 20미터 짜리 작은 돌덩이는 1억 개가 넘을 정도로 많은 수가 지구 옆을 스쳐 지나간 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들 중 하나라도 지구 어느 부분 하고 충돌하면 서울과 같은 대도시가 한순간에 없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합 니다.
그러니 여러분 한번 상상 해 보십시오. 만일 이 우주 를 지배하시는 전능자가 계 시지 않는다면 그런 소행성 이 지나가다가 충돌이 일어 나고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확률은 얼마든지 있잖아요. 직경이 1킬로미터나 되는 돌 멩이 2천 개와 직경 1백 미 터가 되는 30만개, 20미터가 되는 1억 개 이상이 되는 돌 멩이들이 날아가는데 그것이 질서를 안 지키면 어떻게 되 겠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그 런 소행성이 지구와 부딪혀 가지고 사고가 났다는 기록 은 없지 않습니까?
어떤 때 는 천문학자들이
"야, 저 행 성이 지금 우리 지구를 향해 다가온다. 조금만 있으면 몇 킬로미터 거리까지 접근한 다. 잘못하면 지구와 정면충 돌할지도 모른다."
하고 조 마조마해 하며 요란을 떠는 소리를 우리가 신문을 통해 접합니다만 우리는 그런 날 저녁일수록 더 평안히 잠자 고 있잖아요?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다 지켜 주 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 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와 같이 크시고 능력이 많으십니다. 이사야 48장 13절을 보십시 오.
"과연 내 손이 땅의 기 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에 폈나니 내가 부르면 천지가 일제히 서느니라."
하늘을 창조하신 전능하고 크신 하나님, 그분이 누구입 니까? 우리 아버지가 되십니 다. 믿습니까? 그 하나님께 서 자기를 앙망하라고 말씀 하십니다. 우리가 하늘을 보 고 하나님의 크고 능하심을 알 수만 있다면 어찌 그를 앙망하지 않겠습니까? 어찌 그를 찾지 않겠습니까? 어찌 그를 향하여 부르짖지 않겠 습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크 고 능하신 분이신지 잘 모르 니까 마음에 감동이 없는 것 이요,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 니까 그분을 앙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알기만 하면 어떻게 앙망하지 않겠습니까?
인간이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
이사야는 또 하나 우리에 게 하나님의 크고 강하심을 알려 주기 위해서 예를 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비 해서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를 보여줌으로써 하 나님이 크고 강하심을 믿도 록 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40장 15절을 보십시오. 하나 님과 우리 인간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 세상 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보 라. 하나님에게는 열방은 통 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니라."
주님 께서는 세계만민이 두레박에 서 떨어지는 물방울에 불과 하고 저울의 접시 위에 앉은 먼지나 마찬가지라고 말합니 다. 얼마나 크신 하나님이신 가요? 얼마나 능하신 하나님 이신가요? 또 22절을 보십시오.
"그는 땅 위 궁창에 앉 으시나니 땅 위 거민들은 메 뚜기 같으니라."
메뚜기처럼 작아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41장 14절을 보십시오.
"지렁이 같은 너 야곱."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야 곱도 지렁이 같이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얼마나 크신 분이십니까?
한 곳 더 예를 들어봅시 다. 이사야 40장 28절 중간 은 하나님을 '피곤치 아니하 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 철이 한이 없으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토저(A.W.Tozer) 라고 하는 유명한 사람이 말 한 것처럼 전능하신 하나님 은 새로 에너지를 보충해 줄 필요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항상 스스로 충족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기름이 떨어지면 주유소에 가고, 배 가 고프면 식탁에 앉아서 밥 을 먹어야되듯이 그렇게 계 속 에너지를 충전 받아야 힘 이 생기는 그런 분이 아니십 니다. 그분은 줄어들지 않는 충만함 속에 자기가 원하시 는 것을 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언제나 능력 이 많으십니다. 피곤하시거 나 곤비해 하시는 법이 절대 없습니다. 바로 이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반면에 인간은 어떤 존재 입니까? 30절을 보면 그렇게 힘이 펄펄 넘치는 소년이라 도 금방 피곤해지지 않습니 까? 그렇게 모든 것을 갖추 고 지치지 아니할 것 같은 장정이라도, 어른이라도 조 금만 지나면 넘어지고 자빠 지지 않습니까? 능력 많으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란 얼 마나 하찮은 존재인지요? 그 럼에도 우리는 우리를 보고 메뚜기니, 지렁이니 하는 말 을 들으면 괜히 자존심이 상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도 나 름대로 대단한 존재인 것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 님이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자기 가 하나님이라고 착각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까요? 우 리에게 염색체라는 것이 있 잖아요? 그런데 이 염색체 하나에 들어있는 정보량은 2 백억 비트 정도라고 합니다. 2백억 비트 하면 별로 실감 이 안 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하면 쉽습니다. 우리가 컴퓨터로 문서를 만 들 때 A4용지를 사용하지 않 습니까? 그 A4용지에 한 3백 단어를 넣는다고 합시다. 2 백억 비트란 3백 단어를 쓴 A4용지 2백만 장을 찍어낼 수 있는 엄청난 정보량입니 다. 이것을 5백 페이지 짜리 책으로 만든다면 4천 권의 책과 맞먹는 양입니다. 우리 염색체 하나에 4천 권의 도 서관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우리가 인간의 몸을 과학적 으로 분석하면 분석할수록 인간이란 참 대단한 존재구 나 하는 자부심이 생기는 것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 님은 우리 인간을 메뚜기와 지렁이에 비기십니다. 얼마 나 크고 능하신 분이기에 그 러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 리에게 이렇게 질문하십니 다.
"너희가 나를 누구에 비 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 냐?"
하나님은 그 만큼 크고 능하신 분이신 것입니다. 우 리는 이런 크신 하나님을 아 버지로 모시고 살고 있습니 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앙망 하라는 것입니다. 피곤하다 고 짜증내거나 실망하지 말 고 그럴 때마다 이 크고 강 하신 하나님을 앙망하라는 것입니다.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앙망하라는 것입니 다. 이 우주에서 짝할 자가 하나도 없는, 비교할 자가 하나도 없는 저 크시고 광대 하신 하나님을 앙망하면 하 나님이 새 힘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새 힘을 준다'는 말은 '새롭게 한다' 혹은 '재충전 한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 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 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 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이 말씀을 우리 어감에 맞게 다 시 표현하면 다음과 같을 것 입니다.
"오랫동안 여호와를 믿고 기다리는 사람은 언제 나 다시 새 힘을 얻어서 마 치 강풍을 타고 창공으로 치 솟아 오르는 독수리처럼 그 들도 하나님의 영에게 이끌 려 올라갈 것입니다. 그들은 뛰고 달려도 피곤한 줄을 모 르며 아무리 먼길을 걸어도 쓰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 까? 아무리 믿음 없는 사람 이라도, 아무리 성경에 대해 서 잘 모르시는 분이라도 이 말씀을 한번 읽어보십시오. 그리고 집에 가서 외워보십 시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굉장한 힘을 공급해 주는지 체험하게 될 것입니 다.
그런데 이 구절에 나타난 표현법이 흥미롭습니다. 우 리는 보통 작은 것부터 먼저 이야기하고 큰 것으로 발전 시키는 방법을 많이 쓰지 않 습니까? 그런데 이 구절은 거꾸로입니다. 가장 빠르게 날아가는 것을 먼저 이야기 하고 그 다음에 달리는 것과 걷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 니다. 이것은 카타바시스 (Catabasis)라고 하는 표현 법인데 음악으로 말하면 일 종의 디크리센도 (decrescendo)기법입니다. 은혜 안에서 볼 수 있는 성 장의 효과를 나타내기에 적 절한 표현법입니다.
처음 예수 믿으면 우리는 예수님의 첫사랑을 알고 그 분이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신 감격을 알고 그 다음에 하나 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하늘 나라의 영광을 알면 가슴이 터지고 메어질 것 같아서 못 견딥니다. 그래서 기도도 많 이 하게 되고, 안 믿는 사람 을 만나면 그가 지옥 가는 것이 너무 불쌍해서 어떤 때 는 모욕을 당하면서까지 예 수 믿으라고 전도하지 않습 니까? 이런 황홀한 은혜의 때는 우리가 독수리처럼 날 아가는 때입니다. 그런데 문 제는 이렇게 날아가는 때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 입니다. 물론 상당히 오래가 는 사람도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별종이 라 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많이 가봐야 한 3 년에서 5년 사이입니다. 여 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그런 날아가는 힘도 주십니다.
그러나 2단계에 접어들어 서 우리가 진리를 배우면서 신앙이 자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 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그 런 영적인 능력이 자라나는 제2단계가 있지요. 이럴 때 는 날아가는 신앙 생활이 아 니라 달리는 신앙 생활이라 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단계 에 비해 속도가 좀 떨어지긴 하지만 그래도 달음박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은혜를 우리 가 자주자주 맛보게 됩니다. 우리 교회 안에 이런 분들이 굉장히 많이 있어요. 믿기는 늦게 믿었지만 다른 사람보 다 앞서는 그런 일들이 많이 있어요. 그러나 이 사람들은 달리는 거예요. 이 달리는 은혜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어떤 면에는 날아가는 은혜 보다 달리는 은혜의 기간이 더 깁니다. 그러나 달리는 것도 오래 계속 되지는 못합 니다. 제 아무리 마라톤 선 수라도 세네 시간 이상은 못 달리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제 3단계, 곧 좀더 성숙된 자리에 가면 그 때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우 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많은 시험을 당하고 연단도 받습 니다. 그래서 이 때 쯤이면 영적 싸움을 하느라 고생하 다가 얻은 명예로운 상처들 을 꽤 많이 가지게 됩니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이전보 다 더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가게 됩니다. 물론 걸어가는 신앙 생활인지라 속도도 많 이 느려졌고, 겉으로 보기에 힘도 많이 빠진 것 같습니 다. 그러나 이전 단계와는 달리 꾸준한 전진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 인생에 있어 걷는 것은 달리는 것보다 훨 씬 더 중요합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일어서 걷 는 법을 익히기만 하면 종종 걸음으로 달음박질하는 때가 있습니다. 일으켜 놓으면 쪼 르르하고 달려가고, 만사에 촐랑촐랑 뛰는 그런 걸음걸 이를 가지고 행동하는 기간 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간은 많아봐야 4,5년에 불 과합니다. 이 기간이 지나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대부분 의 시간을 걸어야 합니다. 비가 와도 걸어야 되고 ,태 양이 뜨거워도 걸어야 되고, 사막과 같은 황량한 들판도 걸어야 되고, 산을 오를 때 도 걸어야 됩니다. 꾸준히 걷는 자가 인생의 승자입니다.
신앙생활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걷 는 것보다 뛰는 것이 더 능 력 있고, 뛰는 것보다 날아 가는 것이 훨씬 더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 은 그 반대의 경우가 참 많 습니다. 우리가 날아야 할 때는 날아야 될 힘을 하나님 께서 주셔야 합니다. 또 달 려야 할 때에는 하나님이 달 릴 수 있도록 하나님이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힘보다 중요한 힘은 바 로 걸을 수 있는 힘입니다. 찬송가 가사에도 이런 내용 이 있지 않습니까?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 치 아니함은..."
우리가 인 생 길 뿐만 아니라 신앙생 활에서도 승리하기 위해서는 꾸준히 걷는 것이 매우 중요 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종들 가 운데는 십자가의 험난한 길 을 낙심하거나 주저함이 없 이 꾸준히 걸어감으로써 자 기도 승리하고 하나님께 영 광을 돌린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한동안 힘차게 날 아가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다가 제풀에 지쳐 곤두박 칠 치는 사람치고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감당해 낸 사람 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 이 걷는 자에게 피곤치 않도 록 새 힘을 주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 분,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보면 날아야 될 힘을 필요로 할 때도 있습니다. 달려야 할 힘을 필요로 할 때도 있 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꾸준히 걸어가는 것입 니다. 날을 힘도 없고 달릴 힘도 없는 상황에서 그냥 주 저 앉으면 죽어버리게 됩니 다. 그러므로 이런 때는 걸 어야 합니다. 끝까지 걸어야 합니다. 걸을 수 있는 힘을 얻는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 한 것입니다. 가끔 보면 속 으로 수백 번도 이혼을 다짐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 나 아무리 보기 싫고, 함께 살기 싫어도 그 남편하고 끝 까지 걸어가야 합니다. 남편 이 직장에서 쫓겨 나오고 정 말로 무력한 남자처럼 보인 다 할지라도 '주여. 이 남자 와 평생을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하고 기도해 야 합니다. 우리가 이와 같 은 힘을 얻으려면 하나님을 앙망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 나님을 앙망하기만 하면 하 나님이 우리에게 새 힘을 주 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 다.
최근에 저는 저와 친분이 두터운 어느 목사님과 개인 적으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참 은혜로운 간증 하나를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담임하고 있는 인 천에 있는 내리 교회는 우리 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교회 입니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인천에 들어와 전도해서 얼 마 지나지 않아 개척한 교회 로 105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교회입니다. 목사님은 지금 까지 그 교회를 23년째 담임 해 오고 계신데, 처음 부임 해 올 당시에는 교회가 조그 만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동안 목사님이 목회를 잘 하신 덕택에 그 교회는 교인 수 1,300명 정도의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고, 한 십여 년 전에는 구 예배당을 헐어 버리고 지금의 교회당을 아 주 멋지게 잘 지었다고 합니 다.
그런데 교회당을 짓자마 자 교회에 시험이 들어왔습 니다. 그 교회에서 아주 중 심 되는 역할을 하는 평신도 지도자들이 한 20명 정도 있 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터줏 대감처럼 그 교회를 오랫동 안 섬겨온 사람이 10여명 있 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7명이 교회 안에 시험을 일 으킨 것입니다. 교회당을 지 을 때 그들은 경제적으로 여 력이 없어서 그랬는지 건축 헌금을 그렇게 많이 하지 못 했나 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1억도 내고 2억도 내서 건축을 했단 말입니다. 그러 니까 상대적으로 자기들이 이젠 너무 초라해진 모습이 된 것입니다. '교회당이 완 공되었으니 이제 우리의 설 땅이 없어지는구나.'하는 위 기 의식을 느꼈나 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까지 우 리가 이 교회에서 헤게모니 를 쥐고 일을 한 것처럼 일 을 하려면 저 목사 쫓아내야 된다.'고 생각하고 문제를 일으킨 것입니다. 목사를 쫓 아낼 공작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얼마나 어려 워졌겠습니까? 3년 반 동안 그 교회는 그야말로 죽다 못 해 겨우겨우 연명하는 것 같 은 고통을 맛보았다고 합니 다. 심지어 한참 어려웠을 때는 그 일곱 분이 예배 도 중 그 목사님을 강단에서 끌 어내리려고 깡패를 동원하기 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까 참다 못한 어떤 집사님은 강단으로 뛰어 올라 목사님 옆에 서서 칼을 빼든 채
"누 구든지 올라와서 끌어내리기 만 해. 다 찔러 죽인다."고 그들과 대치하는 기가 막힌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습니 다.
여러분, 교회가 그렇게 되었다고 한번 상상해보십시 오. 그 목사님의 입장에서 하루하루가 얼마나 죽을 맛 이었겠습니까? 저녁에 잠자 리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 습니다. 그렇게 며칠 밤을 뜬눈으로 꼬박 새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 밥맛도 없 어지고 몸도 점점 여의어가 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 느 날 목사님은 '야 이러다 가는 내가 완전히 가겠구나. 내가 죽어도 목사처럼 죽어 야지.'하고 생각하고는 넥타 이를 메고 옷을 다시 입었다 고 합니다. 그리고는 교회당 에 있는 자기 기도실로 갔습 니다. 밤중에 엎드려서
"주 여-"
하고 기도했습니다. 이 말 말고 다른 무슨 기도가 나오겠습니까? 그런데 놀랍 게도 그렇게 며칠을 불면증 으로 시달렸었는데 한 30분 이 지나자 자기도 모르게 코 를 드르렁거리며 완전히 잠 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자다가 깜짝 놀라서 깨어 보니 한 시간쯤 지났더 랍니다. 그 잠이 어떻게나 단지 그렇게 쌓였던 피곤이 금방 확 날아가 버리고 힘이 솟구치는데 그 시간부터 새 벽 시간까지 하나님 앞에 기 도하고 찬양했다고 합니다.
첫날밤에 그렇게 재미 보 고 나서는 그 문제가 다 해 결될 때까지, 7명이 다 교회 를 떠나기까지 1년 반 동안 저녁에 옷을 한번 벗은 일이 없다고 합니다. 저녁때면 기 도실에 엎드려
"주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오냐. 잘 자라. 내가 새 힘 을 주노라."하시며 그에게 한 시간 정도의 단잠을 주셨 습니다. 그렇게 한 잠을 푹 자고 활동을 하니까 몸이 점 점 좋아졌습니다. 그 뒤로 목사님은 피곤하고 힘들면 하나님 앞에 가서
"주여"하 고 앙망하면 끝난다고 합니 다. 그래서 제가 그 이야기 를 듣고 '나보다 한 수 더 뜨는구나.'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 분, 시시때때로 밀려드는 피 곤에 시달리고 계십니까? 특 히 형제들 요즘 얼마나 피곤 합니까? 하나님은 피곤한 자 에게 자기를 앙망하면 새 힘 을 주신다고 분명히 약속하 셨습니다. 이 약속을 주신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십니 까? 저 크고 높은 하늘을 창 조하신 크고 광대하고 전능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 나님이 자기를 앙망하는 자 에게는 독수리처럼 날 수도 있고, 어린 소년처럼 달릴 수도 있고, 저 험한 사막 길 을 꾸준히 걸어갈 수도 있는 새 힘을 주신다고 약속하시 는데 우리가 왜 하나님을 앙 망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을 앙망합시다. 앙망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맡기는 것입 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그분이 내 모든 문제를 해결 해 주실 것을 추호도 의심하 지 않고 주야로 하나님을 바 라보는 것입니다. 우리 눈이 쇠하도록 하나님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앙망합 시다. 그럴 때 하나님이 주 시는 새 힘을 얻어 그 모든 피곤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 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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