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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예레미야

예레미야 32장 6-15절 지금은 희망을 사야할 때 입니다 - 이동원 목사

by 재영구리 2023.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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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렘32:6-15    
설교제목 : 지금은 희망을 사야할 때 입니다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오래 전에 저는 보았던 영화의 대사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 마음 속에 진한 감동으로 남아 있습니다. 불란서 영화였는데 나치 독일의 지배 아래 있었을 때 소위 독립운동, 레지스탕스 운동을 하던 일단의 젊은이들의 모임에서 중요한 거사 계획을 했다가 그 계획이 탄로가 납니다. 이 때 한 젊은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동지들 이제 모든 것은 끝장났소. 자폭해 버립시다. 이 때 한 젊은이가 나와서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제가 잊어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니오 동지들 아직은 끝이 아니오 우리가 꿈을 잃어 버릴 때 우리가 꿈을 잃어 버릴 때 그 때 비로소 끝은 올 것이오. 꿈을 잃어 버릴 때 그때 끝은 올 것이오.


오늘 본문이 그려지고 있는 역사의 무대는 유대 민족사에 희망의 끝, 그 희망이 마지막 벼랑에 몰려있던 역사의 무대를 조명해주고 있습니다. 때는 주전 587년, 그러니까 586년에 유다가 바벨론에게서 멸망을 당합니다. 멸망 당하기 1 년전, 불과 7,8개월 전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미 유대의 수도인 예루살렘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서 포위가 되었습니다. 그 때 당년 나이 57세였던 선지자 예레미야는 조국에 다가오는 불길한 미래에 대한 심판의 예언을 하다가 시드기야 왕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감금되었습니다. 그런데 감옥에 갇혀 있던 예레미야에게 친척 한 사람이 찾아 옵니다. 예레미야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 숙부의 아들이니까 촌수가 어떻게 돼요? 사촌이죠. 사촌이 찾아와서 감옥에 있는 예레미야에게 당신도 형편이 어렵지만 내가 지금 너무너무 어려운데 당신이 내 밭을 사달라는 것입니다. 아니 감옥에 들어가 있는 사람 동정은 하지 못할 망정 자기 경제적인 형편이 너무 너무 어려우니까 예레미야 보고 자기 밭을 그 당시에는 친척 사이에서만 밭의 거래가 가능했습니다. 그러니까 내 밭을 사 주시오 그러면 내가 살겠습니다.

여러분 때는 전시입니다. 그 나라를 잃어버리고 외국에 의해 짓밟힐 것이 거의 명확해지는 그런 시점에 서 있습니다. 이런 때가 되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이런 때 무슨 밭이 필요하겠어요? 부동산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런 때가 어려워지면 뭐가 필요할까요? 뭐니뭐니 해도 머니(money)가 필요하죠. cash가 필요합니다. 현금이 필요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은 예레미야가 밭을 사겠다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밭을 사기로 결정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결정이라고 할 수가 있고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것은 희망의 결단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밭을 사는 행위를 미래를 사는, 희망을 사는 행위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레미야가 조국의 미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물론 나라가 어려워지고 심지어는 내 나라를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반드시 회복된다. 그리고 모든 것이 정상화 되는 날 이 밭과 토지는 다시 거래가 정상화될 것이고 그 때 이 밭은 대단히 쓸모가 있을 것이다. 내가 산다. 이것은 단순히 밭을 사는 행위가 아니라 희망을 사는 행위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최근 우리 나라의 정치, 경제 상황을 보면 우리 민족도 희망의 끝에 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어떤 분은 구제 금융을 신청한 그 날을 국치일이라고 부르더라구요. 우리 나라가 경제 신탁통치를 받기로 결정한 날이다. 나라가 부도가 나서 외국에 의해서 법정 관리를 받게 된 날이다. 슬픈 날입니다. 답답한 얘기입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분이 와서 그래요. 목사님 대선이 다가오는데 누구 찍으시겠습니까? 찍고 싶은 인간 하나도 없다 그랬습니다. 제가. 기대할 만한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이런 시기에 교회마저도 심한 정체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교회가 성장하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교회가 지금 계속 줄어가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이 땅의 크리스찬들까지 과거의 부흥이 일어나던 그 시절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 일생을 내어놓고 복음을 위해서 살기로 작정하고 그의 인생을 주 앞에 드리던 헌신적인 크리스찬들의 모습을 눈을 씻고 보아도 보기가 심히 찾기 어려운 시대, 그런 시대가 되어졌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와 같은 때야 말로 오히려 저는 역설적으로 희망을 가져야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희망이 안 보이면 희망을 창조라도 해야할 때라고 저는 믿습니다. 지금은 희망을 사아햘 때입니다.

이런 일에 관해서 예레미야는 모본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희망을 창조해서라도 민족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 했습니다. 우리가 예레미야를, 예레미야 별명있죠? 눈물의 선지자 weeping prophet 눈물의 선지자라고 불리워 집니다. 이것은 예레미야의 한 모습이예요. 다른 모습,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모습은 희망의 선지자입니다. 그는 그 시대에 희망을 주고자 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그는 심판과 동시에 저 건너편에 있는 희망을 외쳤던 선지자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이 절망적인 암울한 이 시대에 희망을 창조하는 자로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희망을 창조하는 자로 어떻게 이 시대를 살아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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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시대일수록 우리는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해야 합니다. 역사가 어려워지면 시대가 어려워지면 제일 빨리 돌아다니는 뉴스는 유비통신이죠. 유비통신. 무슨 통신입니까? 유언비어 통신입니다. 불길한 유언비어가 사람들 사이에 퍼집니다. 큰 일 났어. 이런 때는 달러를 사 두어야 해. 그래서 달러 사재기 운동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보아하니 나라는 미래가 없어 보인다. 우리 빨리 외국으로 보따리 싸자. 이런 불길한 소식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다닐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밭을 사기로 결심한 예레미야, 이 전시에 이 어두운 때에 밭을 사기로 결정한 예레미야를 주변 사람들은 뭐라고 말했을까요? 저 사람 좀 돈 사람이 아닌가. 정신이 좀 이상하지 않은가. 이런 비난 그가 받을 수 있었던 사람들의 손가락질에도 불구하고 감히 이 밭을 사기로, 손해였음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손해를 감수하고서도 이 밭을 사기로 결정할 수 있었던 그 이유는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본문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본문의 6절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예레미야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였느니라 이르시기를" 예레미야에게 뭐가 임했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그는 말씀을 사모했고 늘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말해주는 소리, 뉴스보다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더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실까? 7절 "보라 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느니라 하리라" 하나님이 미리 예고하셨습니다. 드디어 드디어 이제 그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을 통해 듣게 됩니다. 그 다음절 8절 다같이 읽어 보세요. "여호와의 말씀같이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시위대 뜰안 내게로 와서 이르되 청하노니 너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나의 밭을 사라 기업의 상속권이 네게 있고 무를 권리가 네게 있으니 너를 위하여 사라 하는지라 내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 내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 사람의 말을 들었어요. 그러나 사람의 말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고 듣고자 했으므로 드디어 그 말씀을 들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그 시대의 사람들과 전혀 다른 창조적 행동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믿음에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믿음은 어디에서 나며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자 믿음을 주었고 미래에 대한 믿음을 주었고 그는 이런 창조적인 행동을 가능케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 봄이라고 생각되는데요. 우리 교회가 한창 성전 건축 펀드 캠페인을 할 때 어떤 분이 와서 저한테 그러더라구요. 참 이런 교인도 있대요. 어떤 교인인데요? 제가 목사님 설교 듣고 감동을 받아서 참 이렇게 헌금하기로 작정했다고 그러니까 어떤 분이 그러더라구요. 목사 말 듣고 해봐야 나중에 후회해. 그래서 집사님 그런 사람도 있죠. 상처 받아서 그럴 거예요. 과거에 받은 상처가 있어서. 이해해야 돼요. 그런데 제 호기심이 발동해서 집사님 그 분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분의 대답이 저에게 감동을 주었어요.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동원 목사의 설교를 들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이야기하고 비슷한 말이예요.

 

친척을 통해서 들려왔던 말, 친척이 어려워서 나에게 밭을 사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이 친척을 하나님이 부리고 있다. 하나님이 쓰시고 있다. 그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고 그 음성을 분별할 수 있었고 그래서 그는 이런 상식을 깨트리는 행동, 그러나 희망을 사는 행동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희망을 낳을 수가 있는 사람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진정한 희망 그리고 진정한 헌신을 우리 시대에서 어떻게 회복할 수가 있을까요? 우선 먼저 우리는 예레미야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돼요. 사람의 잡다한 소리, 계속 좌절하게 하고 우리를 실망하게 하는 소리들, 그러나 귀를 열어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이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주께서 열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서 믿음의 행동을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우리는 희망의 창조자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까? 두 번째는 개인의 유익이 아닌 공동체의 유익을 추구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희망을 만드는 자로 살아가려면 나 개인의 유익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추구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시대가 어두워지면, 시대가 절망의 때가 되면 사람은 그저 자기 밖에 몰라요. 나 혼자 몸 도사리고 나 혼자 살 길 마련하고.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내 회사를, 그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를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의 무너짐이 내 개인의 몰락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쉽게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우리가 공동체를 살리면 우리가 살아요. 나라를 살리면 내가 사는 것입니다. 민족을 살리면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면 내가 살아요. 이것이 하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까?

주께서 어떻게 가르쳤어요? 마태복음 6장33절에서 너희는 먼저, 우리가 먼저 구할 것이 뭐라구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약속이 뭡니까? 그리하면 이 모든 것, 너에게 필요한 모든 것, 내 개인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너에게 더하시리라.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하고 있잖아요? 우리는 개인의 필요를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희생해 버립니다. 그러나 주님의 나라의 환상이 우리에게서 잃어버려질 때 개인이 크리스찬으로서 살아야 할 무슨 이유가 있겠어요? 우리가 공동체를 살릴 때 우리가 축복 속에 동참할 수 있다는 이 비밀을 함께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예레미야가 밭을 샀던 것, 개인적으로는 희생이예요. 당장은 쓸모도 없어요. 그러나 예레미야는 한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내 행동은 주변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매우 유익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고 판단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예레미야가 밭을 사기 위해서 계약이 체결됩니다. 매매증서를 쓰는데 매매증서를 한 장이 아니라 두 장을 씁니다. 하나는 인봉을 했고 매매증서를 쓴 다음에 잘 인봉을 해 가지고 토기 속에다 집어 넣습니다. 마치 저 유명한 사해 사본의 두루마리가 항아리 속에서 발견된 것처럼 토기 속에 집어 넣습니다. 그것은 영구보존용이예요. 세월이 좋아지는 날 그 때 나는 이 미래를 내다보고 이 밭을 사기로 계약했고 이 문서를 집어 넣었다. 그러니까 인봉을 해서 토기 속에 집어 넣었어요. 그것은 미래용이었고 영구보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매매문서는 인봉을 하지 않았어요. 공개해 놓았습니다. 10절, 11절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의 10절, 11절입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증서를 써서 인봉하고 증인을 세우고 은을 저울에 달아 주고 법과 규례대로 인봉하고 인봉치 아니한 매매 증서를 내가 취하여" 11절을 다시 보시면 법과 규례대로 인봉을 하고 이 인봉하는 것이 custom입니다. 습관입니다. 법칙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매매문서는 인봉치 말고 개봉했습니다.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도록 내가 밭을 샀다 봐라. 여기 문서가 있다. 개봉용으로 그것을 인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증서를 조인하는 그 식을 이 사람이 비록 죄수의 몸으로 있지만 자기를 찾아왔던 그 사촌과 함께 일대일로 조용히 체결한 것이 아니라 그 시위대 뜰 앞에서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 했죠. 12절을 보세요. 12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과 매매 증서에 인 친 증인의 앞과 시위대 뜰 안에 앉은 유다 모든 사람 앞에서 그 매매 증서를 마세야의 손자 네리야의 아들 바룩에게 부치며" 지금 예레미야는 감옥에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가 32장1절부터 보시면 상황을 좀 더 잘 이해할 수가 있는데 "유다 왕 시드기야의 제십년 곧 느부갓네살의 제십팔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2절 읽어 보세요. 32장2절. "때에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 왕의 궁중에 있는 시위대 뜰에 갇혔으니" 감옥에 갇혀 있어요. 그러나 특별 죄수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이 사람이 매매 증서 쓰자고 그러는데 밖에 나가서 쓰면 좋겠다 허락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매매 증서에 도장을 찍습니다.

왜 이런 행위가 필요했을까요? 그가 공개적으로 또 그 하나는 인봉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그렇게 매매 계약을 체결한 이유. 내가 밭을 산다는 것을 선전하고 싶어했습니다. 그 말을 다시 말하면 그는 희망을 선전하고 싶었어요. 그는 희망을 전염시키고 싶어 했습니다. 절망의 시대, 사람들이 모든 것을 포기하는 시대에 그는 희망을 전염하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보라구요 나는 밭을 샀어요. 쓸데 없는 것 같죠. 내게 믿음이 있어요. 하나님이 보여 주셨어요. 이 땅은 회복될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는 다시 건강해 질 것입니다. 이 땅에는 모든 것이 다시 정상화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때 이 밭이 얼마나 필요하다구요. 보세요. 제가 정신병자가 아니예요. 내가 밭을 샀잖아요. 이 하나님의 선지자가 이렇게 이것을 공개적으로 했을 때 그것은 얼마나 상징적인 행동이었을까요? 그것은 희망을 전파하는 symbolical action이었습니다. 상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저는 우리 시대에 이런 상징적인 행동이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을 해요. 모든 사람들이 위축되고 움츠려진 시대에 희망을 선전하는 상징적인 행위는 얼마나 우리 시대에 필요하겠습니까?

세계 제2차대전이 일어났습니다. 영국 런던이 첫 번째 폭격을 받았습니다. 그 이튿 날 새벽 아침에 런던에 있던 모든 신문사의 기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고 합니다. 그 때 한 저널리스트가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영국 언론은 사회에 대해서 아주 예리한 비판적인 안목을 가진 그런 언론으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기자가 지금은 비판의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전시입니다. 지금은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할 때입니다. 비판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이제 우리 잠시동안 희망을 선전하십시다. 희망의 기사를 씁시다. 신문에 희망의 picture를 그림을 사람들에게 보게 하십시다. 우리가 어려워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 우리가 승리할 수 있다는 낙관과 희망을 우리 민족에게 주도록 하십시다. 그들은 합의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언론의 모든 기사의 논조가 달라졌습니다. 전쟁에 대한 긍정적인 메시지가 지금 실려 나오기 시작합니다. 군대에 출정하는 젊은이의 늠름한 기상어린 모습들이 보도되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남편을, 사랑하는 아들을 전쟁터에 내보내면서 그들을 기도하고 있는 예배당을 꽉꽉 채우고 있는 기도하는 성도들의 모습이 신문의 헤드라인에 캐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은 승리할 것이라는 지도자들의 희망에 찬 메시지가 실리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한 순간 영국 국토 전체는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희망을 믿기 시작했고 승리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지금 오늘 우리는 그런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희망을 증거해야 할 시대라고 믿습니다. 부정의 언어 대신에 긍정의 언어를 말해야 할 시각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국민에게 희망의 믿음을 심고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희망을 선전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 때 우리도 살아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행동할 때 우리를 통해서 사랑하는 민족과 교회의 감격은 바로 우리의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희망을 만드는 자가 될 수가 있어요? 나 개인의 유익, 개인의 삶 거기에만 초점을 맞추지 마시고 무대를 넓히세요. 큰 무대를 바라보세요. 역사의 무대를 바라보세요. 그렇습니다. 나 개인의 이익을 뛰어넘어서 역사의 무대를 바라볼 줄 아는 사람,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쓰셔서 역사를 재건할 것입니다. 그들을 통해 주께서는 영광을 거두실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이런 결단과 용기를 가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우리가 희망을 만드는 자가 될 수가 있을까요? 세 번째는 가까운 오늘이 아니라 멀리 있는 내일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가까운 오늘이 아니라 멀리 있는 내일을 바라볼 수가 있어야 합니다. 잠시 후는 지금 이 순간의 연장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불안합니다. 잠시 후도 불안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안하고 초조한 이 현실 저 건너편에 확실히 다가올 빛나는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것을 비전이라고 말합니다. Vision 비전은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나치 독일의 수용소에 갇혀 있었던 유명한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 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 감옥 안에 있는 동료들이 삶을 포기하고 죽어가는 광경을 보면서 감옥 안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친구 여러분, 저 조그마한 창이 보이지 않습니까? 창 바깥을 바라보십시오. 한 죄수가 신경질적으로 대답을 하더래요. 봐야 회색 담벼락 밖에 없잖아요. 아니 회색 담벼락 저 건너편에 있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밤에도 빛나는 저 별을 바라보십시다.

우리는 우리 현실의 차가운 벽, 콘크리트 같은 차가운 벽, 내일이 보이지 않는 우리의 가정, 우리의 사회, 우리의 직장, 우리의 산업 그럼에도 저 건너편에 하나님이 띄어 놓으신 별을 바라볼 수 있는 희망의 눈이 있을까요 우리에게? 그것을 위해서 이 비전을 위해서 그리고 어떤 대가라도 지불하겠다 라는 각오. 예레미야는 희망을 선전하고 희망을 심기 위해서 그는 사람이 보기에 어리석은 일 그리고 자기 희생, 밭을 사는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희망을 그 사회에 전파하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알랙산더 대왕의 일화에 보면 이런 얘기가 있어요. 그가 그리이스에서 이제 큰 전쟁에 출전하기 직전에 그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대대적인 전쟁의 직전에 자기의 창고를 열어서 보물 창고를 열어서 보물을 다 꺼집어 내어서 자기 휘하 참모, 장군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다고 그래요. 한 참모가 말하기를 그 보물을 다 그렇게 나누어 주시면 어떡합니까? 하나도 남겨두지 않으시고. 나는 가장 중요한 것을 남겨 두었네. 무엇을 남기셨습니까? 나는 희망을 남겨 두었네. 희망. 나는 돈과 서로 나누어 지는 이 세계가 나의 꿈으로 하나가 되는 위대한 희망을 나는 가지고 있네. 그리고 이 희망을 위해서라면 나는 이 보물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네. 그가 창고에 가두어 두었던 그 보물보다 더 위대한 보물은 그의 희망이었습니다. 세계를 향한 그의 비전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위대한 비전의 실현을 위해서 그 어떤 것도 지불할 수 있는,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각오와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이 시대 우리가 꿈을 꿀 수가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위대한 일을 벌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역사가 어둡습니다. 시대가 어렵습니다. 이 어두운 시대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세워 주신 목적, 민족과 세계를 가슴에 품고 이 수도권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교회를 만들어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젊은이를 키우고 그리고 세계를 향해서 뛰쳐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양성하는 위대한 교회의 환상을 저는 여러분이 저와 함께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꿈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비전을 갖고 있다면 주께서 인도하시고 주께서 그 길을 열어주실 것을 믿어 보십시다.

아프리카의 선교사 한 분이 선교 대상지역을 답사하는 도중에 정글에서 길을 잃어버렸대요.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지역에 사는 토인 한 사람을 가이드로 고용을 했습니다. 가이드로 고용을 해서 당신이 길을 안내해 보시오. 그런데 이상한 데로 헤매고 다녀요. 그래서 당신 도대체 길을 아시오? 길을 잃어버린 것 아니오? 토인이 웃으면서 하는 소리가 선교사님 정글에는 길이 없어요. 내가 길이요. 내가 길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 같지 않아요? 그 소리 누가 하셨어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주님은 위대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주시고 친히 그 길로 인도하는 안내자가 바로 자신이라고 선포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지금 이 시대에도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가진 자에게 길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 주님을 신뢰하십시다. 그리고 새로운 2000년대의 꿈의 실현을 위해서 이 어두운 시대에 이 암흑한 시대에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비전을 붙잡은 주의 몸된 교회는 더욱 필요하다는 확신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자신을 드리는 사람들, 그들을 통해서 위대한 공동체는 형성되고 이 공동체는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것을 믿어 보십시다. 이 위대한 환상의 내일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주님의 꿈을 내 꿈으로 삼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을까요? 주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꿈과 이런 희망을 이런 소망을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세월이 어둡죠? 답답한 현실들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러나 저 창문 건너편의 희망의 별을 바라보십시오. 참고 견디면 주께서 우리에게 좋은 날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어두움의 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다하라고 주께서 주신 이 날, 우리는 후퇴함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앞으로 나가기를 소원합니다. 이 땅 고쳐주시고 주님 우리를 사용해 주시고 이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 우리를 하나님의 공동체의 한 지체가 되게 하신 그 뜻, 그 꿈, 그 비전 이루어 주시옵소서. 다같이 우리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 주 앞에 나와 이 말씀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꿈을 우리의 꿈으로 삼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주신 빛나는 미래를 바라보며 앞을 향해 나가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위대한 비전을 바라보며 그 길을 향해서 계속해서 나아가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이 꿈을 다시 꿀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쉽게 꿈을 잃어버리는 세대 그리고 미래에 대한 아무런 기대를 갖지 못하는 답답한 오늘의 현실, 예레미야를 통해서 미래를 보게 하셨던 하나님 오늘 우리의 어두운 현실 저 건너편에 있는 그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시옵소서. 그리고 주의 음성 들려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신뢰하겠습니다. 주님을 의지하겠습니다. 오늘의 현실 저 건너편에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그 환상과 비전을 바라보는 눈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그 위대한 비전의 실현을 위해서 자신을 기꺼이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복음을 위해서 자신을 드리는 귀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일으켜 주시옵소서.

어둠 속에 빛을 보게 하시고 절망 속에 소망을 보게 하시는 하나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입혀주시고 변함없는 그 사랑을 확인하시는 성부 하나님 그리고 우리 속에 이 어두운 하늘 아래 미래에 대한 흔들릴 수 없는 희망을 붙잡도록 꿈을 꾸게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가 오늘 이 암울한 하늘 아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개인과 가정과 사업과 민족의 교회의 미래를 하나님의 꿈으로 꿈꾸고자 하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 희망 붙잡고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성령의 권능으로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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