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렘 23장 1-8절
설교제목 : 여호와 치드케누(하나님의 이름)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스필버그의 명화 ‘라이언 일병구하기’를 기억하고 계신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이 영화가 사람들을 사로잡은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관객들은 이 라이언 일병에게서 자신의 얼굴과 자신들의 사랑하는 아들들의 운명--더 나아가 인류의 운명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라이언 일병을 구하는 것은 바로 자신과 인류를 구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스필버그는 그의 또 다른 명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거의 동일한 메시지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그 감동적인 라스트 신에서 우리는 쉰들러가 “이 금으로, 이 시계로, 이 옷으로--한 사람이라도 더 구할수 있었는데--더 살릴수 있었는데--”라고 절규하며 그가 더 많은 유대인을 살리지 못한 죄책감을 토해내는 장면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유대인 지도자 이츠하크 스테른이 쉰들러에게 건넨 말을 어떻게 잊을수 있겠습니까? “오스카 당신 때문에 살아있는 사람이 1,100명이나 됩니다.--(건네준 반지에 쓰여진 히브리 말을 해석해주며 이렇게 말합니다)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온 세상을 구하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에서나 참된 지도자에게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면 목자의 심정입니다. 성경은 성경적 리더십의 이상을 그릴 때마다 가장 보편적으로 목자의 리더십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이 아닌 자신을 던져 양을 구하고자 하는 목자의 희생적 영성이야 말로 목자리더십의 핵심 가치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민족의 불행, 그리고 우리 시대의 좌절과 방황은 바로 이런 리더십이 실종되었다는 것입니다. 주전 600년경을 전후한 유다의 역사적 정황이 유사하였습니다. 당시 유다는 주변 강대국들인 이집트, 바벨론의 침공으로 크게 흔들리고 있었는데 불행은 그런 정황 중에서도 소위 지도자들은 민족을 염려하기보다 자신의 안전과 이익만을 좇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처방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처방이 중요한 이유는 동일하게 같은 처방이 오늘 우리 시대를 향한 희망일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 이런 지도자 실종의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처방은 무엇입니까?
1.하나님은 의롭지 못한 지도자를 인해 슬퍼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키워드는 ‘의’입니다. 5절에 보면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그가 세상에서 정의(just)와 공의(right)를 행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6절에 그의 이름이 “여호와 우리의 공의”(여호와 치드케누)라 일컬으리라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본문 5절에 들어가기 전 1-4절까지 예레미야 선지자는 먼저 의롭지 못한 당시의 목자들 곧 지도자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1절에 보면 한마디로 그들은 양떼를 멸하고 흩어지게 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양떼들을 이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당시의 정치 지도자들이 그랬고 종교 지도자들도 다를 바가 없었던 것입니다. 유다의 마지막 왕은 시드기야라는 왕이었습니다. 시드기야의 뜻이 ‘의롭다’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름값을 못하는 왕이었습니다. 이름은 의로운데 그의 삶은 악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렘52:1-2을 보십시오. “---(2)그가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니라”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분노하시고 유다를 버리시기로 작정하십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불의한 지도자들을 인하여 나라를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로운 지도자들로 하여금 나라의 지도자가 되게 해야 합니다. 물론 완전히 자기 이익에서 자유로운 지도자란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보다 백성을 더 생각하고 자신보다 공동체를 더 생각하는 지도자가 세워질 때 그 사회는 미래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잠언기자는 잠14:34에서 “공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처한 역사의 마당을 향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의무는 이미 세워진 지도자들이 이런 의로운 지도자가 되도록 끊임없이 중보 기도를 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당시 자신의 민족을 바라보며 눈물로 기도하다가 눈물의 선지자(weeping prophet)라는 별명을 얻습니다. 그것은 비판보다 더 중요한 일이며 바울사도는 디모데에게 그의 사역에서 지도자들을 위한 중보기도야 말로 모든 사역의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미 세상을 떠나가신 강원도 예수원의 대천덕(아쳐 토레이) 신부님에게 제가 받았던 가장 큰 도전은 그가 날마다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을 위해 하루에 세 번이상 기도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그분이야 말로 정말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 교회를 사랑하는 이 땅의 지도자라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희망의 변화가 없을 때 하나님께서 끝내 망해가는 이 백성을 죄 가운데 버려두실까요? 이런 시대 소위 지도자 실종의 시대에서 주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다음 처방은 무엇입니까?
2.하나님은 의로운 지도자를 세울 것을 언약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한 시대 주의 백성들을 향해 분노하시고 책망하실 때 책망만으로 끝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는 대안을 제시하시고 희망의 미래를 보여 주십니다. 저는 이번 MBC PD수첩의 황우석 교수 검증사건을 지켜보며 안타까웠던 것도 문제 제기 자체는 아니었습니다. 사실 생명 윤리의 문제 제기는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서도 다시 제기되어 질 수밖에 없는 문제였습니다. 문제는 비판 그 자체의 비중에 비교해서 한 과학자를 아끼고 과학의 미래, 인류의 희망의 미래를 열고자 하는 애정의 결핍으로 국민 여론의 질타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던 불균형의 감각이 문제의 단초를 제공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비판은 언제나 비판이상으로 희망의 미래에 초점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당신의 지도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안타까운 분노에 이어 이제 그 대안으로 하나님 자신이 지도자를 세우시겠다고 언약하십니다. 4절입니다. “내가(5절에도--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잃어버리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5-6절에서 구체적으로 이 지도자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그는 지혜롭게 정의와 공의를 구현할 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6절에서 그의 이름이 ‘야웨 치드케누’ 즉 ‘공의로운 여호와 하나님’으로 불리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성경의 기자는 흥미로운 단어 게임을 사용하고 있음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의 유대 나라의 지도자, 유다의 마지막 왕의 이름이 무엇이라 했습니까? 예, 시드기야라고 했지요. 시드기야가 바로 ‘의롭다’는 뜻입니다. 이름의 뜻은 ‘의롭다’인데 의롭지 못한 왕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시드기야와 치드케누가 비슷한 단어로 느껴지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같은 단어의 어근(체덱, tsedeq)에서 나온 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시드기야대신 야웨가 치드케누가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실패한 인간 지도자대신 하나님 자신이 참으로 의로운 지도자가 되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인간 지도자에게 실망해 보셨습니까? 예, 물론이실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 아닙니까? 인간적 지도자가 인간 공동체에서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진정한 희망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희망이십니다. 하나님이 구원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의가 되어주십니다. 그 하나님이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 지도자, 완벽한 지도자이십니다. 그 하나님에게 나아오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3.예수 그리스도는 희망을 실현하는 지도자이십니다. 구약의 예언은 모두 이중의 의미를 담고 있는 특성(이중예언)을 갖습니다. 그 예언들은 현실적인 목적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궁극적인 목적을 겨냥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예레미야의 예언은 에스라 느혜미야같은 지도자들을 일으켜 흩어진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시온의 땅으로 돌아오게 한 것으로 현실적으로 응답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미래적)으로는 본문의 예언은 참 메시야 이신 예수님을 통해 실현될 예언이었습니다. 본문 5절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라” 여기서 ‘의로운 가지(branch)’라는 표현을 어떤 학자는 ‘의로운 싹(shoot)’이라고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 학자도 있습니다. 메시야는 평범한 다윗의 왕가를 계승한자가 아닌 다윗의 혈통을 타고 오시는 아주 특별하게 출생할 지도자일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6절에서 그의 이름이 바로 ‘야웨 치드케누’-우리의 의가 되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분이 바로 예수님이 아니십니까? 모든 지도자를 포함하여 인간이 의롭지 못한 원인이 무엇 때문입니까? 죄 때문이 아닙니까? 한마디로 이 천년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소극적으로는 죄 문제를 해결하고 적극적으로 의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약이 가르치는 복음의 핵심이 아닙니까? 롬3:23은 어떻게 말합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그런데 그 다음절이 약속하는 복음의 소식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속량(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자가 되었느니라”(롬3:24) 우리가 예수님앞에 나아와 그를 믿을 때 죄 사함을 받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를 의롭다고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은혜로 그렇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럴 자격이 없지만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에 근거하여 그렇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고린도 전서1:30을 보십시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느니라” 여기 우리가 예수께 나아올 때 받는 축복의 하나가 무엇이라 했습니까? 예수가 우리의 의로움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이 바로 야웨 치드케누-우리의 의로우심인 것입니다. 의는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속성입니다. 의가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앞으로 나아오는 모든 죄인들에게 의인의 옷을 입혀 주시고 의를 사모하는 인생을 살게 하고자 하십니다. 천로역정에 보면 기독도가 십자가 언덕에 도달했을 때 천사 셋이 등장하여 첫째 천사는 죄인의 누더기 옷을 벗기십니다. 둘째 천사는 새 옷 즉 의인의 옷을 입혀 주십니다. 셋째 천사는 이마에 인을 치시고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에게 먼저 의의 새 옷을 입히신 다음 그 새 옷에 합당한 새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한 청년이 군대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민간인 복장을 벗고 군복을 입게 됩니다. 그리고 일단 군복을 입으면 새로운 신분의식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군인다운 새 인생의 출발점이 되고 그가 좋은 군인됨을 명예롭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제부터 삶의 모든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군인답게 사는 것일까?”를 묻게 되지 않겠습니까? 믿음의 삶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참으로 만나고 믿는 순간 예수안에서 죄사함을 얻고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우리의 의가 되신 예수님의 옷을 선물로 받아 입은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예수님이 나의 의요 나의 자랑이라고 고백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우리 인생의 야웨 치드케누가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정녕 이것이 은혜이고 축복이고 감격이라면 우리네 마음 깊은 곳에는 새 인생의 동기요 기준이 되신 예수님을 따라 그분처럼 살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그분의 의를 주리고 목말라 하는 모든 영혼들마다 영적인 배부름을 경험하게 됩니다. 옥스퍼드의 무신론자였던 C.S.루이스 교수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자신의 구주로 믿게 된 경험속에 들어가면서 그것을 “예기치 못한 기쁨”(surprised by joy)이라고 부릅니다. 이제부터 인생에서 어떤 일이 생기든 아무래도 상관이 없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로 배부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진실로 내 인생의 잠재된 모든 희망을 실현하는 지도자가 되신 것입니다. 아씨시의 성자 프랜치스코도 이 예수님을 만나 더 깊은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구도인생을 위해 자신의 모든 소유를 친구들과 이웃들에게 주고 길을 떠나면서 비슷한 고백의 기도를 남깁니다. “나의 사랑이신 예수여 ,당신은 나의 의, 나의 구원, 나의 전부이십니다. 이제 나는 당신외에 아무것도 구함이 없나이다.” 예수로 배부르게 된 것입니다. 성탄의 계절, 이 천년전 이런 목마름, 배고픔의 인생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이 예수가 오늘 당신의 야웨 치드케누가 되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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