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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에스겔

에스겔 37장 15-23절 통일 한국의 비전 - 이동원 목사

by 재영구리 2023.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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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겔 37장 15-23절
설교제목 : 통일 한국의 비전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최근 이 땅에는 온 국민의 정치적 관심을 일깨우는 두 개의 사건이 동시에 진행 중입니다. 하나는 다음 주간으로 예정되었다가 10월 초로 미루어진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고, 또 하나는 금년 12월로 예정된 차기 대한민국호의 리더십을 선출하는 정당들의 수순입니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다시 한번 분단 조국의 민족적 과제인 통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통일의 단어를 기억해 내는 순간 우리 모두는 분단 조국에서 태어나 자라난 사람으로서 ‘아리랑’과 함께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 심겨진 민족의 노래를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꿈에도 소원은 통일/이 정성 다해서 통일/통일을 이루자/이 겨레 살리는 통일/이 나라 살리는 통일/통일이여 오라/통일이여 오라” 이 노래를 만든 안병원 선생님은 제가 어려서 다니던 중학교의 음악선생님이어서 개인적으로 이 노래가 주는 의미가 저 자신에게도 각별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민족 통일은 이렇게 우리 민족 최대의 역사적이고 지상적인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2000년 이후의 우리 겨레의 통일 의식 조사 연구를 살펴보면 통일 의식은 세월이 흘러 갈수록 후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물론 통일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당위성에는 아직도 80% 정도의 국민이 지속적으로 동의하고 있습니다만, 되도록 신속하게 통일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2000년에는 69%가 (남북 정상회담의 기대치가 끼친 영향), 2004년에는 30% 정도로, 지냔해인 2006년도 말의 한 통계에는 약 14%의 국민들만이 동의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여기에는 통일비용 부담을 꺼리는 경제의식이 가장 중요한 반통일 의식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과연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소원해야 할 통일은 어떤 통일이며 이런 통일 한국의 비전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의 본문은 에스겔서 37장입니다. 저 유명한 솔로몬 왕이 죽은 후 이스라엘은 우리나라처럼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왕국으로 분열된 분단국가가 되었습니다. 그 후 북방 이스라엘은 앗시리아 왕국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남방 유다는 바벨론 왕국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조국이 멸망하는 이 시점에 유다 왕국에 살면서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에스겔이라는 젊은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때는 주전 약 586년 경의 일입니다. 그는 포로로 끌려간 바벨론에서 자기의 조국 유다가 완전히 망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엎드려 기도하는 이 선지자의 가슴속에서 탄생한 중요한 민족사적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과연 남북분단의 상처를 입고 쓰러진 자기 조국이 다시 통일된 하나의 나라로 부활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던 그는 오늘의 본문에서 두 가지 응답의 메시지를 받습니다. 하나는 19절의 말씀처럼 “--내 손(하나님의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마냥 기다리기만 해야 했을까요? 이때 그가 받은 또 하나의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17절에 이미 계시하신 말씀인데 “--네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 상충되게 들려온 두 개의 상반된 메시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손으로 통일을 이루시지만 여전히 우리 손으로 우리가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질 민족의 통일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 할 일, 그 일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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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화의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이어지는 말씀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통일을 예언하시면서 그 통일된 국가의 비전을 말씀하십니다. 그 통일된 국가는 무엇보다 평화로운 나라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들과 맺을 언약을 화평의 언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화평의 기초 위에서 통일된 선민의 나라가 견고하고 번영하는 나라가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비전이야 말로 지금의 우리 민족이 목말라 하는 내일의 조국의 모습이 아닙니까? 에스겔 37:26의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하게 하며 (내 성소를 그들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 에스겔로 하여금 매우 상징적인 메시지를 그 백성의 시청각적으로 전달하게 하셨습니다. 막대기 두 개를 가져다가 한 막대기에는 유다라고 그리고 다른 막대기에는 에브라임(북 이스라엘을 대표하여)이라고 쓴 다음 그 두 개의 막대기를 하나를 합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 분단을 뛰어넘어 갈라진 민족을 하나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통일은 너희의 소원일 뿐 아니라 바로 내 소원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통일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노력은 언제든지 격려할 만한 성서적 사역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남북 정상회담이 정략적인 이용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많은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정치 이해를 떠나서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평화 사역의 앞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주님의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의 증언을 들어 보십시오. “그(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신다”(엡2:14)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들 자신의 작은 경제적 이익 때문에 반 통일의 자리에는 서지를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군 전쟁의 분위기가 유럽을 지배하던 시절 십자가 앞에 엎드려 그린 성 프치스코의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주여, 우리를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2. 평화의 리더십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민족의 통일을 열망한다면 본문을 통해서 주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책임을 좀더 진지하게 발견해야 합니다. 그 책임의 하나가 통일국가를 책임질 건강한 리더십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 22절의 말씀입니다. “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그 임금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그 대답이 2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행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리라”고 했습니다. 이런 통일 국가의 리더십은 바로 다윗의 리더십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선지자 에스겔이 이 말씀을 받던 이 시점에서 이미 다윗은 역사적으로 과거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다윗은 문자 그대로의 다윗이라기보다도 다윗이 보여준 동질의 리더십 혹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의 리더십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내용입니다.

그러면 다윗의 리더십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그는 남 유다의 힘이 북 이스라엘을 압도할 때에도 힘으로 북 이스라엘을 흡수 통합하지 않고 인내심 있게 섬기며 기다렸습니다. 그는 북의 통치자 사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았고 함께 슬퍼했으며,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에게도 자비를 베풀어 북과 남의 백성들의 마음을 함께 얻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역사의 한 시점에 남과 북이 함께 추대하는 민족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피를 흘리지 않고 민족 통일의 과업을 수행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멋진 지도자입니까? 이런 지도자가 이 땅에도 필요하지 않습니까? 다윗의 리더십은 섬김의 리더십이요, 긍휼의 리더십이요, 평화의 리더십이었던 것입니다. 앞으로 이런 지도자가 세워 지도록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3. 부활의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통일 한국을 말할 때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의 하나는 우리가 희망하는 통일 한국의 이데올로기적 정체가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통일 지상주의자들은 어떤 정체성을 선택하던 상관없이 통일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에스겔 선지자에게 보여 주신 통일 조국은 그냥 단순히 하나 된 조국이 아니라, 성소가 재건되어 하나님을 자유롭게 섬길 수 있는 미래의 조국이었습니다. 다시 37:26의 하반부를 읽어 보십시오. “--내 성소를 그들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하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적어도 우리가 소원하는 미래의 조국은 하나님을 마음껏 섬기고 경배할 자유로운 조국이지, 어떤 측면에서도 신앙의 자유가 위축되고 견제되는 전체주의나 사회주의적 통일 조국은 아닙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욕심을 내자면 37:23 본문의 말씀처럼 우상이 제거되고 죄에서 정결해진 거룩한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슨 방법으로 그런 미래 통일 조국을 만들어 갈 수가 있겠습니까? 사실 그 대답은 에스겔 37장 전반부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해답을 제공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 해답은 말씀과 성령입니다. 선지자 에스겔은 죽은 뼈로 가득찬 민족의 골짜기에 생기가 불어오고 말씀이 대언되는 순간 죽은 뼈들이 거대한 군대가 되어 일어나는 민족 부활의 환상을 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대답은 부활의 복음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통일 조국은 부활의 복음으로 새로워진 조국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통일 한국이 과연 이 땅에 올 수 있을까요?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 우리는 그런 조국을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한때 우리처럼 분단된 조국을 가지고 있던 독일교회의 경험을 배우고자 합니다. 우리가 지금 그리는 미래 한국과 유사한 미래의 통일 독일 비전을 꿈꾸던 독일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1982년 동독 라이프찌히의 한 교회 성 니콜라이 교회에서 그들은 조용하지만 순수한 기도모임을 탄생시킵니다. 월요일 저녁마다 소수의 성도들이 모여 통일 독일, 그리고 마음껏 하나님을 경배하는 미래 동독을 꿈꾸며 기도하기 시작한지 7년 만에 이 모임이 소문나기 시작합니다. 차츰 이 기도회를 찾는 성도들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합니다. 1989년 9월 11일 월요일 저녁 이 교회에는 교회당 안으로 다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을 합하여 약 2만 5천명이 모였습니다. 그들은 통일의 열망을 기도한 후 평화의 침묵행진을 위해 거리로 나섭니다. 바로 이 기도회 그리고 이 평화행진은 약 두 달 후인 11월 9일 마침내 평화적으로 베를린 분단의 장벽을 무너뜨리게 됩니다.

나는 누구보다 한국의 통일을 열망하며 이 나라를 위해 중보기도하시다가 돌아가신 고 대천덕 신부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제 생각에는 한국의 통일을 위해 하나님이 행동하실 기도의 잔이 다 차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잔이 다 채워지기까지 기도할 중보자들이 그 어느 때보다 그 누구보다도 더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중보의 용사들의 중보의 잔이 다 차면, 그리고 마침내 때가 이르면 주께서 일어나실 것입니다. 분단의 벽은 무너지고 평화 통일의 그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피흘림 없이 서로를 안고 통일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여러 해 전 북한을 방문했을 때 우리는 평양에서 묘향산으로 가는 열차를 타고 있었습니다. 우리와 우리를 인도하던 북한 당국의 안내자들, 기차 도우미 북녘 자매들 그리고 소수의 고급관리로 보이는 북한 여행자들의 대화가 무르익어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자 누군가가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일어나 둥그런 원을 만들고 손에 손을 잡고 함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는 남도 북도 없었고 오직 한 겨레, 한 소원, 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꿈에도 소원은 통일/이 목숨 바쳐서 통일/통일을 이루자/이 겨레 살리는 통일/이 나라 살리는 통일/통일이여 어서 오라” 노래가 끝났을 때 우리 모두의 눈시울은 붉게 적셔 있었고 적어도 그 기차 안에서는 통일은 이미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 ‘통일 한국’의 비전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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