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약/마태복음

마태복음 1장 18-25절 진리로 오신 예수님 - 안영혁 목사

by 재영구리 2023. 2. 25.
반응형

설교본문 : 마태복음 1장 18-25절
설교제목 : 진리로 오신 예수님
설교자 : 안영혁 목사님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ㄱ)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사 7:14
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마1:18-25> 진리로 오신 주님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셨다는 말입니다.
저는 잠언의 한 말씀을 빌어서 단번에 이 사건의 인상을 전하고 싶습니다.
잠29:18에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 했습니다.
깊이가 있는 참된 진리를 묵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진리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고 그 갈 길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그렇습니다.
그가 없다면 백성이 진심으로 살 길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방자히 행하는 백성들에게 길을 주신 것입니다.

수원지검 강력계에서 일하던 31세 젊은 나이의 정재윤검사가 과로사를 했다고 합니다.
나이는 죽은 예수님의 나이보다 더 젊습니다.
수원 지방 검찰청의 초임 검사였습니다.
그는 노무현 정부 때부터 시끄러웠던 투기성 오락 바다 이야기 불법 영업을 막기 위해서 화성 연합파를 검거해 들였다고 합니다.
법원 경매를 방해하는 부산 칠성파와 대구 동성로파들도 검거했습니다.
자주 국가 고위층, 권력층의 부조리를 보게 되지만,
이런 검사 앞에서는 정말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단호하고 부지런하지 않으면 절대로 하지 못할 일을 그는 했습니다.
그는 나라를 위해서 검사 취임 첫해에 몸을 바친 것입니다.
저는 대전역에 서 있다가 조폭들이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정말 살벌했습니다.
두려워 떨 뿐 정말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그래도 이런 조폭들을 저런 젊은 검사들이 검거를 해주니까 우리가 사는 거죠.
그래서 죽은 정재윤 검사에게서 하나의 진심을 봅니다.

예수님의 탄생에서 보이는 것도 진심입니다.
정말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되는 일 때문에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꼭 오셔야 되는데,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진리로 오셨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진리란 결국에는 아주 절실하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첫째는 못을 박기 위해서는 망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처럼 명백한 사실을 말합니다.
그리고 둘째는 그 명백함과 함께 거기에 인간의 운명이 걸려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운명이 걸린 명백한 사건이 바로 그리스도의 탄생이고,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진리로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사건을 말씀합니다.

 

1. 예수의 나심

성경연구의 기본 구조는 관찰 해석 적용입니다.
본문 이해의 첫 단계로 오늘 말씀을 관찰하기로 한다면,
실제 사건의 핵심 내용은 18절과 25절에 있습니다.
본문의 첫 절과 마지막 절입니다.
본문 첫 절은 잉태되었다는 것이고, 마지막 절은 나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한 많은 수사들을 제쳐두고 이 사실 자체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정말 잉태되었고, 정말 태어났습니다.

잉태부터 말씀하자면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창1:2에서 성령은 원래 아무 것도 없는 세상에 창조를 이루는 영으로 역사하셨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혼돈만 흩어져 있는데 때깔과 생명을 직접 주신 이가 원래 성령입니다.
역사가 혼탁해져서 다시 구원이 필요할 때, 성령께서 또 움직이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성령께서 마리아의 몸에 예수님이 잉태되도록 했습니다.
태초에 혼란을 넘어 세계를 조성하신 것처럼 성령께서 다시 혼탁한 역사를 바로잡는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성령으로 주님이 잉태된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은혜 받을 일은 우리 가운데도 성령님을 모시자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혼돈 가운데 세상을 세우셨습니다.
또 구원이 망가져버린 세상에 구원의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우리 삶에 혼란과 죄의 혼탁함이 있다면 성령께서 치유하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치유하셔야 하고 치유할 수 있습니다.
매일, 성령의 역사로 살아가는 예본교회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아멘)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후’하고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 했습니다.
제가 감히 예수님 흉내를 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옮기겠습니다.
여러분, 성령을 받으십시오.
여러분의 삶과 미래와 내면에 성령이 역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전체가 성령으로 가득한데,
잉태부터 성령충만의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25절에서는 드디어 예수께서 나셨습니다.
예수님 탄생의 감격을 전한 것은 마태복음보다는 역시 누가복음입니다.
눅2:25에서 시므온은 이제야 하나님께서 나를 놓아주신다고 했습니다.
눅2:38에서 안나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찬양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 사람들이 평생 기다린 아기가 예수였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지쳐버린 이스라엘의 상징일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지친 모습도 그리스도 앞에 내려 놓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친 삶, 평화가 없는 세태, 그런 것이 있을지라도
오늘 본문은 구속자 예수께서 분명 태어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진리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예수의 나심은 과학자들이 늘 입증하려는 역사성보다 더 강합니다.
백성이 그것을 원하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이루셨습니다.
역사적 입증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구원자 예수의 탄생을 원하셨고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예수께서 나셨습니다.

2. 임마누엘의 예언

그냥 투박하게 물어봅시다.
예수님은 왜 오셨습니까?
선지자 이사야는 그것이 임마누엘의 실현이 될 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단어는 성경 전체에서 겨우 3번 나오는데,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예수님이 직접 불린 곳은 마태복음 이곳 밖에 없습니다.
이사야서에 두 번 나오는 임마누엘은 예언이었고,
실제로 오신 예수님께 임마누엘이란 이름이 적용된 것은 이 한 곳뿐입니다.
그러나 의미상 아주 가까운 것이 더러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오셔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마치 처음과 끝을 맞추는 수미상관법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처음 태어날 때에 백성과 함께 하는 하나님을 몸소 보여 주었고,
다시 모든 사역이 끝나고 부활까지 하신 후에는,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지 예수님의 의지가 확고한 것을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말씀은 전체적으로 그런 의지에 감싸여 있고, 그것은 은혜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하나님의 뜻은 시작부터 종결까지 확고합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에 다니엘 학교라고 장애인 생활 공동체에 가서 설교를 했는데,
그 때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정말 말 한마디 제대로 못 알아 듣는 그 아이들에게 무슨 가장 쉬운 말을 할까?
순간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살려고 이 땅에 오셨다!” 했습니다.
좀더 기회가 있었다면 그 다음에는 예수님이 우리를 천국에 데리고 가실 거라고 했어야 했는데, 그 말은 잘 하지 못했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살려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함께 살기 위해서 다시 우리를 데리러 오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혹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삽니다.
여러분, 동행의 삶은 그냥 우리가 소원하는 바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삶을 어떻게든 잘 정리하지 못할 때,
주께서 직접 오셔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정리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동행하는 삶입니다.

제가 우리교회를 돌아볼 때 그렇습니다.
시험이다 사업이다 해서 삶의 관문을 넘어가기를 원하는데 안 될 때가 많습니다.
청소년들 가운데 공부가 잘 되지 않아서 혹은 유도를 하고, 혹은 에니메이션을 하고 그럽니다.
젊은 날들을 돌아볼 때 곡절이 많았던 어른들도 있습니다.
모두 어느 정도는 불안하고, 또 어느 정도는 부족하고,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 말씀은 그 모든 조건에도 불구하고 말씀합니다.
‘임마누엘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와 동행한다.’(아멘)

여러분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내의 손을, 혹은 남편의 손을 잡아 보셨습니까?
그 손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얼마나 정겨운 것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그렇게 주께서 우리 손을 붙잡고 가는 그것이 바로 임마누엘의 은혜입니다.

늘 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또 누군가의 손도 좀 잡아주면 좋겠습니다.
우리 토요일 찬양을 좀 바꾸자고 찬양 선생님에게 부탁했습니다.
기타도 배우고 피아노도 배우는데, 시작할 때는 함께 찬양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러자고 했습니다.
1월에는 우리도 토요찬양모임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여러분 모두 오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좋은 것만 아니라,
이런 찬양을 할 수 있으면, 나중에 어딘가로 가서 우리도 다른 사람의 동행이 되어주면 좋겠습니다.
동행의 방법은 많겠지만
그렇게 살이 닿는 동행도 우리가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3. 예수로 나심 – 죄에서 구원할 자

오늘 본문은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더 궁극적인 의미를 가르쳐 줍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자주 불리지 않은 이름과는 달리,
자주 불린 실제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이 예수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헬라 이름이고, 히브리식으로 하면 예수아이고,
조금 길게 쓰면 여호수아가 됩니다.
이 말은 “여호와께서 구해주신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사실 많은 것에서 구원받고 싶습니다.
사람이 벗어나고 싶은 고통은 많습니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왜 아픈지도 모르는 통증이 많아져서 통증 클리닉이 있습니다.
몸이 그런 것처럼 마음도 또한 원인 모를 많은 고통을 안고 있습니다.
도시 사람의 사회적 고통을 가장 포괄적으로 표현한 말은 스트레스입니다.
영원이라는 개념은 있는데 영원의 경험은 없는 것도 고통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통을 넘어가 보려고 노력한 사람들에게 늘 마지막 장벽은 죄였습니다.
죄에서 풀려야 다 풀리거나 고통을 벗어날 진정한 실마리를 얻습니다.
롬1:28 이하를 오늘 다시 보겠습니다.
성경은 죄에 대해서 매우 구체적입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구원하시는데, 명확하게 죄에서 구원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눌리고, 헬라에 눌리고, 다시 로마에 시리아에 눌려서 울분으로 가득한 이스라엘을 향해서 오히려 죄에서 구원을 말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에서 구원이 오신 목표였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는 죄를 말씀합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
이것이 죄이며 또 사람에게는 고통입니다.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것,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것, 수군거리는 것, 비방,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것, 사람에게 모욕을 주는 것, 교만, 자랑, 악을 계획하는 것, 부모 거역, 우매한 것, 약속을 어기는 것, 무정한 것, 무자비한 것.

이것이 다 죄이고,
이런 것은 우리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런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기관입니다.
우리는 그 역할을 다 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죄를 바라보는 원칙은 용서입니다.
죄에 대한 예수님의 특별한 방식이 마18:21, 22에서 발견됩니다.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형제의 죄를 몇 번이나 용서할까요? 일곱번이면 많이 참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라.
이 말은 끝없이 용서하라는 말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 말에는 죄가 지독하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죄라는 것이 일곱 번 정도 오면 올 만큼 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는 일어나고, 또 일어나고, 또 일어나고, 끝이 없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예수님은 죄는 용서하는 길 밖에 없다는 입장이 견고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끝없이 용서하실 것이고,
주님은 이 땅에서 그 길을 닦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리라는 말은 마태복음 18장 말씀의 해석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절에 들어가서 땅 밟기를 하는 기독교인은 미신을 믿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식으로는 세상에서 죄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를 쌓아갈 겁니다.

장기려 박사님 이야기 잠깐 하겠습니다.
근래에 나온 통계 가운데
암으로 죽을 확률이 가난한 사람이 더 높다고 합니다.
암 발병률은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가 별로 차이가 없는데,
부자들은 조기발견을 해서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발병률이 비슷하다는 것만 해도 위안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속이 문드러져서 암이 더 많이 생기지 않겠나 했는데,
그렇지는 않답니다.
그러고 보면 암 발병은 참 경제적으로 평등한 병입니다.
그런데 그 치료는 빈부에 따라 확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이런 데서도 벗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존경하는 장기려 박사께서 의료보험제도를 처음 시도를 했다는데,
성자 같았던 그 분의 삶에 참 의미 있는 행보였습니다.
여러분 삶의 모든 자리에서 여러분의 구원의 자리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좋은 것이라 해도 불편과 결함이 있는 세상 가운데서,
주의 구원의 의미를 알고 깨닫고 그래서 구원을 늘 체험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와 함께 사는 삶입니다.

4. 그것은 우리가 정말로 선할 것을 요청하는 사건이다

 

이제 마지막 한 가지 제 묵상을 덧붙이려고 합니다.
성경은 너무나 순수하고 정직하고 평화만 추구하는데,
세상의 악은 얼마나 독하고, 덩달아 사람들도 얼마나 영악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성경을 지키며 삶을 사는 것은 늘 마음을 다치게 됩니다.
그리고 때로는 내가 이렇게 살다가 종국에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닐까?
이 교묘한 세상에서 나는 오히려 촌티가 풀풀 나는 촌놈이 되는 것은 아닐까?
요즈음 드라마든 영화든 보면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다들 얼마나 흉측스럽고 악한지,
순진한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 모르고 온실에 사는 것 같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순수하다는 평을 더러 듣곤 하는데,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조금 인정을 하는 것이지만,
더 많은 부분에서는 세상을 모른다는 비아냥이기도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저는 그것은 용납이 잘 안됩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삶은 그런 것입니다.
정말로 정말로 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로 정말로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장기려 박사를 보고 춘원 이광수가 당신은 성자가 아니면 바보라고 그랬다 하지 않습니까?
백 년에 한 명 나는 성자 같은 장기려 박사를 꿈꾸기는 어렵지만,
여러분, 그런 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나도 그렇게 예수님 닮은 사람,
나도 그렇게 정말 예수님 닮은 사람,
정말 선한 사람 그런 사람이 될 소원을 가질 수 있지 않습니까?

강림절 넷째 주일을 우리는 보내고 있습니다.
이 주일을 보내는 마지막 결심은 그런 것이 되면 좋겠습니다.
정말 선한 사람이 되어야지,
다른 사람이 듣고 숨이 막힐 만큼 선한 그런 사람이 어쩌면 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우리 가운데 살아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치 하에서 올곧게 자신의 삶을 살다가 간 본회퍼는 그래서
죄를 지었다면 정말 내 손을 잘라버릴 수 있는 그런 순수함으로 살라고 조언했습니다.
판넨베르그라는 사람은 기독교 윤리의 기초라는 책에서
현대는 이제 하나님도 윤리도 사람들의 생활을 규정하는 원리가 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의 원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 선하게 살고 정말 하나님을 따라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숨이 막힐 정도의 놀라움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기독교에 새로운 숨통을 틔어 줄 것입니다.

이번 주에는 성탄절도 맞는데,
성탄을 맞으면서 그런 결심하나 견고히 하시기 바랍니다.
우선은 세상을 사는 것이니까 윤리적이 되시기 바랍니다.
윤리란 원래 좋은 습관을 말하는 것인데,
그런 윤리적 습관을 넘어서,
그리스도 예수가 숨막힐 정도로 여러분 안에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아멘)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