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마태복음 1장 18-25절
설교제목 : 요셉의 성탄절
설교자 : 최동규 목사님
일반적으로 족보는 아버지가 아들을 낳은 것으로 기술합니다. 그러나 16절을 보면, 예수님의 출생을 언급하면서 “그녀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출생되었다”(헬라어 성경)는 전혀 판이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낳는’ 주체인 아버지가 생략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그저 들러리에 불과했을까요?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해서 요셉의 역할이 무엇이었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18절을 보면, 마리아와 요셉은 정혼한 사이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정혼제도는 우리의 약혼과는 좀 다릅니다. 정혼을 하면 법적으로 부부가 됩니다. 19절을 보면, 요셉은 마리아의 남편이라 기술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혼 후에 헤어지는 것은 파혼이 아니라 이혼으로 간주되었고, 정혼 기간 중에 남편이 죽으면 과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부부이지만 정혼 후에도 1년 정도는 동거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신부의 순결성을 판별하기 위한 기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수태되셨습니다(18). 구약에는 정혼 기간 중에 여인의 부정함이 드러나면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습니다(신 22:23-24). 이 율법이 신약에 와서까지 그대로 지켜지지는 않았습니다만, 이혼을 해야 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의롭다’는 말은 ‘율법 앞에 바로 선 사람’ 혹은 ‘자비로운’이라는 뜻입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율법을 따라 이혼해야 했습니다. 이혼 방법으로는 공개적인 방법과 은밀한 방법이 있었는데 요셉은 은밀한 방법을 선택하려 했습니다.
마리아가 잉태사실을 요셉에게 알렸는지, 요셉이 먼저 눈치 챈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마리아가 그 중요한 사실을 요셉에게 말하지 않았을 리가 없으며, 요셉은 마리아의 순결함을 믿었다고 봅니다. 다만 요셉은 이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에 관여하는 것이 ‘무서워’서 가만히 끊고자 했다고 합니다. 이 주장을 따르면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사실을 알릴 필요가 없었다는 난점이 있습니다. 반면 어떤 학자들은 요셉이 잉태된 것을 먼저 눈치 채고 마리아의 순결을 의심했다고 봅니다. 이 주장을 따르려면 요셉이 이혼을 숙고했던 이유가 ‘무서워’서였다는 것을 설명하지 못하는 난점을 해결해야 합니다. 요셉이 마리아를 부정하다고 의심했다면-그런 마리아를 데려오는 일이 적어도 무서운 일은 아니기 때문에- 주의 사자는 ‘분노하지 말라’거나 ‘불결하게 여기지 말라’고 말했어야 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마리아가 먼저 말했든지 요셉이 먼저 눈치를 채었든지, 결국은 요셉이 그 되어진 일에 대한 자초지정을 마리아에게서 들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전혀 듣지 않고 일방적인 자기 추측을 근거로 이혼한다는 것은 명분이 없고, 의로운 행동도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요셉은 성령으로 잉태된 사실을 듣고 반신반의하는 상태가 되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마리아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느끼고 성령으로 잉태된 사실을 믿었기에 두려웠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존재나 그 분의 능력을 인식하는 순간에는 강한 두려움을 느낍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되어진 일이 역사상으로 전무후무한 일이었기 때문에 선뜻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머리는 받아들였는데 마음으로는 완전히 소화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요셉은 이 일을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알쏭달쏭한 이 일을 해결하고 마리아를 배려하는 점에서 최선책이었습니다.
우리도 때때로 믿으면서도 동시에 믿어지지 않는 묘한 상태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라는 간구는 그 자체로는 상당히 모순된 말이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종종 경험하는 일입니다.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도 머리로는 믿고, 심정적으로도 믿고 싶은데 마음 깊이 믿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고심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우리 주변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고심하고 있을 때에 주의 사자가 꿈에 나타났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20-23) 주의 사자는 그 되어진 일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확정해주었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이 일이 갑자기 되어진 일이 아니라 주께서 선지자로 예언하신 말씀이 성취된 것임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선택의 문제를 놓고 갈등하는 사람에게 언제나 최종적인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는 것은 언제나 최종적인 판단의 근거를 말씀에 둔다는 뜻입니다. 소위 ‘영몽’을 꾸고 그것을 바탕으로 어떤 중대한 문제들을 결정하려고 하는 것은 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정말 그 꿈이 하나님이 꾸게 하신 꿈인지, 자신의 생각의 반영인지 무엇으로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인 것 같다는 자기 느낌이나, 좀 더 영몽을 잘 꾼다는 선배들의 그럴듯한 설명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말씀에 비추어서 해석하지 않으면 바른 판단을 할 수 없고 신앙이 미신적으로 변해갈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최종적 판단은 언제나 성경에 근거에 두어야 합니다.
요셉도 꿈 자체를 믿은 것이 아닙니다. 꿈을 통해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했고, 그 말씀에 비추어 되어진 일을 판단했습니다. 비록 꿈이 계기가 되기는 했지만 요셉도 기록된 성경 말씀을 최종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일이 이미 예언되어졌던 일에 대한 성취임을 깨닫자 곧바로 이혼하려던 자신의 계획을 취소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릅니다. 24-25절을 보면, 요셉은 잠에서 깨어나자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옵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않다가 낳은 후에 그 이름을 예수라 했습니다.
여기서 요셉의 역할이 드러납니다. 주의 사자는 아내를 데려오라고만 했지 동침치 말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요셉 스스로의 결단으로 예수님이 탄생하기까지는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부부가 동침치 않은 것을 더 경건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혹시라도 예수님을 칠삭둥이 허니문 베이비로 오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한 상태였기 때문에 법적으로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었고 다윗의 후손으로 부르심 받기에 정당했습니다. 동시에 아직 동침하기 전에 잉태하고, 출생하기까지 요셉은 동침치 않았으므로 요셉의 혈육에 의해 탄생하신 것이 아님이 드러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적 상황이나 개인적인 상황을 섭리하셔서 절묘한 타이밍에 자신의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마리아와 요셉 부부가 마음에 들어서 그들을 사용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언의 성취를 위해 오래전부터 마리아와 요셉의 신앙을 준비해오셨습니다. 마리아는 처녀로서 잉태하면 돌에 맞아죽을 수 있음을 알고도 순종했고, 요셉도 그 일을 폭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말씀이 주어질 때 아내를 영접했다. 목숨이 달린 일에, 또 결혼생활 전체가 달린 일에 그들이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은 확고부동한 하나님의 뜻이다’는 것을 확신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천사를 보고 꿈을 꾸는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해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분별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또한 하나님의 뜻을 알면 즉각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사람으로 준비시켜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관점에서는 ‘하나님께서 준비된 자를 쓰신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은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는 자를 기분 내키는 대로 쓰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택하여 쓰시는 사람은 반드시 준비 과정이 있습니다. 갈등과 고민과 방황의 시간을 거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고 순종할 수 있게끔 만들어 놓으십니다. 그렇게 준비시키신 후에 말씀에 올바르게 분별하며 순종하는 그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오늘날 시대에는 신비적인 현상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비주의자들도 확신을 가지고 가르치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을 듣다보면 무엇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 오히려 혼동하기 쉽습니다. 기록된 성경 말씀에 철저하게 익숙하지 않으면 분별하기가 몹시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성취를 위한 맥락에서만 주어집니다. 따라서 구속역사가 완성된 지금은 기록된 성경 외에는 더 이상의 계시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준비가 없으면 지금도 계시가 계속 될 수 있다고 오해하게 되고, 개인의 유익을 위해 신령한 사람들로부터 계시를 받으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또 그렇게 해서 들은 말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잘못 확신하기 쉽습니다. 성경에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지 않은 잘못된 신앙으로 자라게 된다는 것입니다. 꿈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게 하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지만, 꿈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는 아닙니다. 요즘 통용하는 ‘방언 통역’이나 소위 ‘예언’도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라는 최종 판단은 성경 말씀에 비추어서 영접해야만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진정으로 하나님에 의해 준비되어진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인과 약자에게 관심이 많았던 누가복음은 마리아를 중심으로 예수님의 출생을 기술했습니다. 반면 마태복음은 요셉의 역할을 비중 있게 다룹니다. 예수님이 동정녀를 통해 탄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요셉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법적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었으며, 신학적으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불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출생과 관련해서 마리아의 태가 사용되었다면, 그 후 모든 것은 요셉이 감당해 주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마리아보다도 더 많은 부분에 있어서 요셉이 사용되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의 적극적인 순종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강력한 증거를 뒷받침해주기도 했습니다.
요셉이 맞이한 성탄절은 참 특별하였을 것 같습니다. 하마터면 그는 마리아와 이혼함으로써 예수님의 탄생과는 무관한 사람이 될 뻔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분별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 어떤 아버지도 누리지 못한 아주 특별한 은혜를 누렸습니다.
2004년 성탄절에 우리에게도 요셉과 같은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영적으로 혼탁한 이 시대에 그 분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며, 그 분의 뜻에 적극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잘 준비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임마누엘 예수님의 이름과 그 분의 중심사역에 대해서는 매우 중요한데 다음 시간에 집중적으로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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