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마태복음 1장 18-25절
설교제목 : 성령잉태와 동정녀 탄생
설교자 : 윤석준 목사
서 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우리 주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과학적인 모든 이해를 뛰어넘어 처녀에게서 예수님께서 나셨다고 고백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런 고백은 수많은 현대주의자들에게 반대를 받아왔습니다. 지금도 자유주의 신학을 신봉하는 이들이 결정적으로 거부하는 것들 중에 하나가 주님께서 동정녀로 탄생하셨다는 교리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께서 동정녀에게서 나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믿는 것은 그것이 단지 ‘신기한 일인데도 믿는다’ 정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믿음이란 동정녀 탄생 교리가 무너지게 될 때 우리 구원의 핵심이 파괴당한다...는 차원에서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구원의 핵심을 파악못하고 그저 과학적 시각으로 이를 바라보려 합니다.
우리가 동정녀 탄생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만’ 왔다는 것을 믿는 것이고, 마리아를 통해서 나신 분은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의 구원은 무너질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고 고백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입니다. 동정녀 탄생과 성령으로부터의 잉태가 거부된다면 우리의 구원은 없습니다.
우리 신앙고백의 핵심 중 하나인 동정녀 탄생에 관하여 오늘 말씀을 듣겠습니다. 주께서 말씀에 귀 기울이는 성도들에게 은혜 주시기를 원합니다.
본문의 정황
먼저 본문의 정황을 간단히 살피고 들어감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본문 정황이 향하고 있는 방향이 우리 설교의 주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정황을 잘 파악하는 것이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읽을 때 정황에 있어서 중요하게 파악해야 하는 점은 “요셉이 과연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했고, 어떤 행동을 하려고 했는가”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잘 알게 되면 오늘 말씀의 중요한 주제인 “성령으로부터의 잉태”라는 점이 조금 더 잘 이해되게 됩니다.
먼저 요셉이 마리아가 부정을 저질렀다고 생각하고 그저 이혼하려고 생각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과거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본문 이해가 얄팍해지고 현대인들의 정서에 맞추어 말씀을 보려하는 풍조에서 더 강조되는 것 같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아니! 내가 마리아랑 결혼하려고 했는데 임신을 했네? 어떤 놈이랑 놀아난 거야?”.... 이렇게 요즘 TV드라마에 나오는 식으로 요셉이 이해를 했다고 보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오늘 말씀을 보는데에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상 말씀을 주의 깊게 읽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1) 먼저 요셉과 마리아의 신앙 상태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리아의 노래에서 살폈듯이 마리아는 경건한 여인이었습니다. 요셉 역시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이 점은 뒤에서 살핌). 그러면 요셉이 자기와 정혼한 여인인 마리아가 잉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과연 단순하게 이 여자가 부정을 저질렀다고 생각했을까요? 여기에 무언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요? 물론 경건한 사람도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가 경건한 여인임을 잘 알았던 요셉이 마리아를 쉽게 부정을 저지른 여인으로 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성령으로 잉태했다.....라고 까지는 생각할 수 없었다 하더라도, 요셉과 마리아의 신앙을 우선 생각해 두자....는 것은 너무 쉽게 요셉이 그렇게 얄팍하게 대응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미리 배경으로 두자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정혼한 여자가 정식 결혼 이전에 임신을 했을 때 율법이 무어라 규정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당시 율법이 정확하게 지켜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결혼하기 전 여자가 임신을 했다면 사람들에게 큰 비난을 받거나 심하게는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사안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19절 말씀에 의하면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여기서 ‘의롭다’는 단어를 원 성경의 의미와 반대로 이해합니다. 원래 성경에서 의롭다는 것은 우리가 흔히 ‘사랑의 하나님’과 약간 반대되는 뜻으로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할 때....즉 율법이 그대로 지켜지고 하나님께서 정의로운 판단과 형벌을 주실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라는 말은 ‘불법을 그냥 넘기시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 본문에서 사람들은 요셉이 ‘의롭다’는 구절을 읽으면서 이런 통상의 이해와는 정반대로! ‘요셉이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정도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실 ‘의롭다’는 말은 정반대의 뜻입니다. 요셉이 만약 정말 ‘공의로운’ 사람, ‘정의로운’ 사람이었다면, 그가 마리아가 부정을 저질렀다고 생각했다면 어떻게 행동했겠습니까? 그것을 그냥 슬며시 덮어두었을까요? 그랬다면 그는 ‘정이 많은’ 사람일지는 몰라도, ‘의로운’ 사람은 아닙니다. 요셉이 진짜 ‘의로운 사람’이라면 오히려 그녀를 데리고 법정에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이 훼손당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녀가 결혼 전에 부정을 저질렀다고 율법 앞에 고소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서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구절을 읽을 때 ‘사람이 좋아서’, ‘따뜻한 사람이어서’....이런 식으로 읽습니다. 그래서 그가 마리아의 부정을 알고도 덮어두려 했다는 식으로 얼렁뚱땅 읽고 넘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방금 살핀대로 ‘의롭다’라는 본 의미를 생각할 때 이런 방식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19절 말씀은 요셉이 ‘의로왔다’고 쓰고 나서.....그래서 고소하러 간 것이 아니라....이 사실을 덮어두려고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사실은 요셉이 지금 마리아가 부정을 저질렀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3) 오히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조용히 끊는 것’이었습니다.
조용히 끊는 것은 두 가지 방향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예를 들어 김홍전 박사님 같은 이는 이를 “결혼하여 살면서 아내로 생각지 않고 메시야의 어머니로 생각하며 봉사하려 했다”고 이해합니다. 이렇게 볼 때는 뒤에 25절에 나오는 말씀이 잘 이해됩니다.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실제로 요셉은 마리아를 데러오라는 천사의 명을 듣고서도 이후에 마리아와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김홍전 박사님 생각처럼 요셉이 그 마음에 마리아와 함께 살아도 그녀를 더 이상 자신과 성적 연합을 통해 아내로 삼으려는 마음을 포기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방법으로는 ‘사적으로’ 이혼을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유대 풍습에 따르면 파혼을 법정에서 공식적으로 할 수 도 있었지만, 두 명의 증인 앞에서 사사로이 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요셉은 아예 (김홍전 박사님 의견과 조금 다르게) 결혼 자체를 하지 아니하고 마리아와의 관계를 청산하려 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앞서 말씀드린...마리아가 부정을 저질러서....와는 다른 것입니다. 불법이 있어서 이혼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사적으로’, ‘사사로이’ 이혼하려 했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 한글 본문에는 번역의 문제로 오해하기 쉽게 되어 있는데, 19절의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에서 ‘저’를 보통 요셉으로 잘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끊으려 했다고 말이죠. 하지만 여기 ‘저’는 3인칭 여성, 즉 ‘그녀’입니다. 그러니까 19절 말씀의 뜻은 마리아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어 재판하지 않고 사적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가만히 끊는다’ 할 때 ‘가만히’도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비밀리에’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 두 번째 이해가 다 가능합니다. 결혼관계를 유지하면서 부부 내적으로만 부부관계를 포기하는 것도 이 표현상 가능하고, 아예 사적인 절차를 통해서 부부관계를 청산하는 일도 이 표현상 가능합니다.
하지만 첫 번째이든 두 번째이든 분명한 것은 요셉이 ‘마리아의 부정을 의심해서’ 그렇게 하려 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결혼관계를 유지하든, 사적으로 청산하든....요셉이 그렇게 하려고 했던 동기는 마리아가 부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요셉 자신이 ‘메시야의 어머니가 될 마리아를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리아에 대한 의심’ 때문이 아니라 ‘메시야에 대한 경외감’ 때문에 취한 행동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이 잘 조화됩니다.
3) 그래서 같은 맥락 안에서 20절 말씀도 보시면, 이 내용이 더욱 잘 이해됩니다. 천사가 요셉에게 현몽했을 때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요셉이 마리아의 부정을 알게 된 것이라면 마리아 데려오기를 왜 ‘무서워’ 할까요? 요셉이 마리아가 부정을 저질렀다고 생각했다면 배신감을 느끼고 분개해야 정상입니다. 그래도 사랑했던 여인인데 자기를 배신한 것에 분노해야 합니다. 하지만 요셉은 마리아를 데려오는 것을 ‘불쾌해’ 했던 것이 아니라 ‘무서워’ 했습니다.
이 사실은 요셉이 이미 그녀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마리아에게 들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집에서 돌아온 후에 요셉과 만났을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안 나오기 때문에 추측이지만, 이 본문의 정황상 그랬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아마 요셉은 마리아에게 잉태된 것이 사람의 씨로 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들었을 것입니다. 요셉에게 천사가 현몽했을 때 요셉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하고 있었다는 점은 요셉이 이 사실에 대해 전혀 정보가 없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요셉은 아마 자신이 메시야의 육신적 아버지가 될 수 있을지 몹시 고민했을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의 육신적 어머니 마리아와 똑같은 방식으로 예수님의 육신적 아버지 요셉에게도 ‘인증’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천사의 인증’이죠.....마리아에게도 천사가 메시지를 전달하고 천사가 묻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네게 성령으로 잉태가 일어날 것이다”....마리아는 ‘아멘’으로 이 일을 받았습니다. 요셉에게도...비록 꿈으로서이긴 했지만, 똑같은 과정이 주어집니다. “마리아에게 태어날 아기는 성령으로 된 것인데....데려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즉, 요셉은 마리아에게 사실을 들은 뒤, 자신이 메시야의 아버지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고, 그 고민의 종지부를 찍는 입장에서 천사가 현몽하여 ‘무서워하지 말고 데려오라’고 답을 준 것입니다. 이렇듯, 20절의 ‘무서워 말라’를 잘 보면 요셉은 마리아를 부정하다고 여겨서 이혼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성령의 잉태
따라서 이 사실들을 종합 정리해 보면, 요셉의 고민은 “내 여자가 왜 부정을 저질렀을까?”가 아니라, “자신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는 ‘그 메시야’가 태어나는 것에 대해 내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였다는 점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점으로부터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게 되었을 때 궁극적으로 처하게 된 고민이 무엇인지에 분명하게 접근하게 됩니다. 그들의 고민은 단순하게 “아직 결혼도 안했는데 임신을 해서, 사람들이 이걸 알면 어떡하나”와 같은.....그런 저급한 고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고민은 오히려 “사람인 우리들에게 메시야가 잉태된다고 하니....이런 전무후무한 일을 겪어야 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며, 또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와 같은...경건한 자들의 고민이었습니다.
이 점에서....우리는 이 마리아와 요셉과 함께 이 중대한 주제, 즉 “하나님께서 성령잉태와 동정녀 탄생을 통해 메시야를 주신다”라고 하는 이 중대한 주제를 깊이 숙고해 볼 수 있게 됩니다. 성령잉태와 동정녀로부터의 탄생이라는 중대한 교리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중요한 사실은 무엇입니까?
성령 잉태의 의미
우리는 동정녀 탄생 이야기를 접하게 될 때 그 포커스를 무엇보다 ‘성령으로 잉태되심’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평범한 ‘인간의 아기’가 아니라 ‘성령의 아들’이십니다. 이 점에서 우리가 이 ‘성령 잉태’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일반적 이해
1) 먼저 많은 사람들이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는 점을 이해할 때 단지 ‘신비한 탄생’에만 포커스를 맞추는 경향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주로 성경지식이 많지 않은 현대인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주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예수님은 처녀에게서 태어났지?”라고 물으면,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아무래도 좀 특이한 방식으로 태어나야 하지 않겠나?”라고 대답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처녀에게서 났다는 것은 단지 ‘기이한 방식으로’ 태어나셔야만 한다는 뜻입니까? 그렇다면 박혁거세가 알에서 났다고 말하는 것과 어디에서 다른지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처녀에게서 태어나셨다는 것은 그저....‘기이한 방식으로서의 탄생’ 정도의 의미만 가지는 것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굳이 처녀탄생이 아니어도, 알에서 나셔도 되었고, 땅의 여신에게서 풀처럼 나셔도 괜찮았습니까? 바다가 갈라져서 태어나거나, 연꽃에서 태어나셔도 괜찮습니까? 이런 전설들과 ‘동정녀 탄생’이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2) 이것보다는 좀 더 나은 것으로, 성경지식이 조금 있거나 신자로서 생활을 좀 오래하신 분들의 경우에 ‘동정녀 탄생’을 “인간의 죄의 혈통에서 나지 않았다”는 점에 강조를 두어 생각합니다. 즉 정상적인 남자와 여자간의 관계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면 그분도 우리처럼 죄인이셨을텐데 여자에게서만 태어나셨으니까, 그분은 ‘죄가 없으시다’는 것이죠.
맞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오랫동안 받아들여 온 성경적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동정녀 탄생을 하신 중요한 이유가 ‘죄의 유전’으로부터 벗어나 계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동정녀 탄생이라는 사실에서 이 사실, 곧 ‘예수님의 무죄하심’도 봅니다. 이것은 맞는 말이고 매우 중요한 교리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더 적극적 이해 : 성경주해에 의한
하나님께서 성령잉태와 동정녀 탄생을 선택하셨을 때, 그것은 (맞기는 하지만) 단순하게 ‘무죄 탄생’이라는 목적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것을 ‘소극적’ 의미라고 한다면 여기에는 더 ‘적극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 적극적인 의미로서의 성령잉태가.....마태복음 문맥에서 말씀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겠다는 천사의 현몽(20절) 직후에 성경은 예수님의 이름을 계시합니다. 많은 분들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점이 이 마태복음 자체 내에서 어디에 강조점이 두어졌는지 보지 않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잘 보시면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말씀하시는 20절 말씀은 이어지는 예수님의 이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예수님의 성령잉태와 동정녀 탄생의 의미는 다양한 각도에서 이해될 수 있지만, 제일 먼저 이 본문 안에서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예수님의 이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의도라는 측면을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성령잉태/동정녀 탄생과 죄사함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21절)는 말씀은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20절)는 말씀과 함께 요셉에게 설명된 말입니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아라. 저는 성령에게서 잉태된 자이다. 그러니 너는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어라......이것은 전체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요셉에게 설득력있게 알려주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은 다름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잉태와 ‘죄사함’이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이 점은 교리문답에 아주 정확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교리문답 35문과 36문, 그리고 17문을 함께 결합하여 읽으면, 성령잉태가 어떻게 ‘죄사함’과 관련되어 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35문은 직접적으로 “성령으로 잉태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묻고 있는 문항입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께서 여전히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령의 사역을 통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인성을 취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교리문답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에게서 나셨다는 구절에서 강조하고 있는 바는 ‘하나님의 신성’입니다. 일반 사람으로 태어나시지 않고 성령잉태와 동정녀 탄생을 통해 태어나셨다고 성경이 말씀할 때는 다른 점들 보다 “그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라는 점이 강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6문을 보면 “그리스도의 거룩한 잉태와 탄생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가”를 질문하고 대답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보자시므로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가려준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으로서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의 주된 역할은 ‘죄사함’입니다.
즉 35문과 36문을 종합하여 말하자면, 성령 잉태와 동정녀 탄생이 가진 강력한 의미는 다른 데 보다도 태어나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점, 그리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점은 ‘죄를 사하시는 분’이라는 점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17문에 보면 이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문 : 중보자는 왜 동시에 참 하나님이셔야 합니까?
답 : 그의 신성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짐을 그의 인성에 짊어지시며, 또한 의와 생명을 획득하여 우리에게 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우리가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동정녀에게서 나신 것을 생각할 때 1)그저 기이한 탄생이라고만 생각하거나, 2)조금 더 나아가도 예수님의 ‘무죄 탄생’이라는 점...즉 그분이 죄가 없으시다...라는 점 정도에만 강조가 두어져 있지만, 마태복음에서 적극적으로 강조되어 있는 ‘성령잉태’와 ‘동정녀 탄생’의 의미는, 오시는 그분께서 ‘평범한 사람’이셔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실 수 없으시므로, 반드시! 모든 죄를 속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셔야 한다”는 점입니다.
2) 죄사함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
이 사실, 즉 “죄사함은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으시다”라는 사실은...성경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교리가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우리는 마태복음 9장에서 중풍병자를 상에 달아 내렸을 때 주님께서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고, 그에 대해 사람들이 반응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외에는 죄를 사할 수 있는 존재가 절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예수님의 말씀에 놀랐고,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주님께서 이들에게 알려주신 중요한 사실은 “자신이 하나님이시다”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말씀에서 ‘성령잉태’와 ‘동정녀 탄생’의 당위성이 어디에서 오는가고 묻는다면, “죄사함은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시므로 성경은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오시는 그분께서 반드시 ‘사람의 아들’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여자에게서 났다”는 것(여자의 후손)이 창세기 문맥에서 무슨 뜻인가?
그리고 끝으로 그분께서 ‘여자에게서 났다’는 것의 의미를 창세기 문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께서 ‘동정녀에게서 났다’는 것은 ‘여자의 후손’이라는 뜻입니다. 아담 이래 모든 인류는 ‘남자의 후손’입니다. 단 한 사람도 ‘남자의 후손’이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 족보가 “누가 누구를 낳았고”라고 할 때 주체는 언제나 아버지이지 어머니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전무후무하게 ‘여자에게서’ 난 단 한사람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의 후손’이신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3장 15절과 관련하여 알려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과연! 여자의 후손만이 사탄의 머리를 깨고, 죄를 해결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모든 면에서 서로 조화롭게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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