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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로마서

로마서 9장 1-5절 특권보다 더 중요한 것 - 이동원 목사

by 재영구리 2023.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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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롬 9장 1-5절
설교제목 : 특권보다 더 중요한 것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지난 수년간 우리 사회에 외래어로서 우리 사회에 중요사안이 논의 될 때마다 언론에 회자된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소위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라는 말입니다. 프랑스어로서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입니다. 노불리스가 명예를 강조하는 말이라면 오블리제는 의무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명예가 있는 만큼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노블리제는 본래 귀족(nobility)을 뜻하는 말이고 오블리제는 의무(obligation)를 뜻하는 말로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귀족의 의무'(obligation of nobility)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본래 이 단어의 유래는 로마시대에 귀족들이 보여준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 수범하는 공공 정신을 높이는데서 유래한 단어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단어가 우리 사회에서 갑자기 유행한 배경에는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귀족들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가나 사업가들이 존경받을 수 없이 살아가는 모습에서 기인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의 귀족들 특히 부자들은 가질수록 평민들과 더 나누고 더 베품으로 리더십의 존경을 유지했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 사회에 고갈되어 있음이 우리의 고민이 아닙니까? 그러나 역사를 들여다보면 우리 사회에 반드시 그런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흔히 우리 역사에서 오블리스 노블리제를 실천한 사람을 이야기 할 때 자주 언급되는 분 중에 조선시대 최고의 부자라고 일컬어진 경주 만석꾼 최 부자(첨성대 주변 계림 숲 주변에 집이 있었음)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부자가 3대 못 간다는 말이 있는데 이 분의 가솔은 10대 동안 진사를 지냈고 12대 동안 만석꾼을 이어 나갔다고 합니다. 1600년대 초반부터 1900년대 초까지 무려 300년 동안을 그가 만석꾼을 유지한 비밀은 무엇이겠습니까? 최 부자 집에는 다음과 같은 6가지 가훈이 있었다고 합니다. 1)과거를 보되 진사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 것(소위 권력 다툼에 말려들어 갈 필요가 없게 됨) 2)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할 것 3)흉년기에는 땅을 늘이지 말 것(부를 부당하게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한 것) 4)과객을 후하게 대접할 것 5)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올 때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을 것 6)자기 집 사방 백리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할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그의 가솔은 존경받는 부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자랑스런 한국판 오블리스 노블리제라고 할만 합니다. 그러나 제가 이런 이야기를 서두에 소개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떤 의미에서 우리들 그리스도인들도 모두가 신앙을 갖는 순간부터 특별한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하늘 나라의 기업을 받게 되고 영생을 소유하고 우리가 기도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응답 받는 삶을 살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정녕 특권중의 특권을 부여받은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런 특권에 부응하는 의무를 다하고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소위 선민이었던 이스라엘 백성의 특권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정말 지적하고 싶어한 것이 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특권을 바르게 사용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권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기대를 져버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께서 허락하신 특권과 기대를 생각하면서 동시에 여러분과 저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특권을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본문의 4-5절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민으로 선택되는 순간 그들에게 주어진 특권들에 대하여 열거하고 있습니다. 1)양자 됨의 특권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던 그들이 이제는 민족적으로 하나님의 장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출4:22에 보면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고 하셨습니다. 신14:1에는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라고 하였습니다. 2)영광을 경험하는 특권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성막이나 성전에 들어 갈 때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이렇게 신의 영광을 바라보며 주님의 영광안에 거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지요? 3)언약들을 선물로 받은 특권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순간부터 하나님은 그들에게 언약을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언약하시고 모세와 언약하시고 다윗과 언약하십니다. 마치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괜히 자녀들과 약속을 하시고 미래를 향한 희망을 주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4)율법을 수여받은 특권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 도착했을 때 모세를 산위로 부르시고 그들의 새로운 삶의 규범이 될 거룩한 법을 주셨습니다. 이 율법은 그들의 삶의 원칙이 되고 스탠다드가 된 것입니다. 삶의 방향자체가 혼란한 세상에서 분명한 스탠다드를 갖고 살수 있다는 것이 특권이 아닌가요? 5)예배의 특권입니다. 구약에서는 피조물이요 죄인된 인생이 하나님을 대면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을 날마다 대면하고 그분을 찬양하고 경배할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거룩한 특권인지요? 6)약속들을 붙들고 사는 특권입니다. 이미 우리가 앞서서 언급한 언약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통하여 주신 그 민족의 내일과 관련된 중요한 공동체적인 사안들이었다면 여기서의 약속들은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것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약속들이 있었기에 고난의 역사의 격랑을 헤치고 날마다를 희망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메시야의 약속은 그들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희망의 약속이었습니다. 7)명예로운 조상들을 갖게 된 특권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자랑할만한 조상들이 많았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역대 노벨상 수상자가 한 300명되는 데 그중 100여명이 모두 유대인 출신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전체 수상자의 약 30%가 되는 셈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한 집안에서 군수만 나와도 자랑인데 이스라엘인들은 얼마나 자랑거리가 많은 백성들인지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아모스, 느헤미야,--그 뒤를 잇는 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 뉴튼, 색채의 마술사 샤갈, 작곡가 쇼팽, 천재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정신 분석학의 원조 프로이트, 세계 경제계의 큰 손들이요 투자가들인 그린스펀, 조지 소로스--다 유대인들입니다. 거기다가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육신적으로 말하면 예수님도 유대인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사실이 아닙니까? 본문 5절을 보십시오.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 멘" 자랑할만한 특권들이 아닌가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런 특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이 특권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2.특권보다 더 중요한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기대입니다. 하나님의 기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자녀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런 하나님의 기대를 져버린 것입니다. 그들이 누리고 있었던 외적인 특권들이 그들을 자동적으로 특권을 누릴만한 자로 만든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특권이 오히려 그들을 눈멀게 하고 오판하게 만든 것입니다. 물론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특권들은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다운 자녀가 되게 할 수 있는 조건들인 것은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조건들이 개인의 책임을 면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망각한 것입니다. 그냥 그 공동체에 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그런 사람이 된 것이라고 오판한 것입니다. 내가 선민 공동체에 속해 있기 때문에 선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선민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며 선민이 되기 위해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질문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오늘 날 모태 교인들이 종종 빠지는 신앙의 함정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아버지나 어머니가 목사이고 장로이고 권사이기 때문에 나도 자동적으로 신앙 인이 된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책임과 상관없이 자기가 믿음의 집안에 태어났기 때문에 나도 신앙 인이 된 것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찍 무디 신학교의 학장이었던 조지 스위팅(George Sweeting)이라는 분은 "하나님에게는 손자가 없다"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우리 각자의 결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부모가 신앙 인이라는 것은 축복된 특권이지만 그것이 나를 자동적으로 신앙 인이 되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모태 교인을 '못해요 교인'이라고 말하게 되었겠습니까? 비유 하나를 더 들어보자면 이런 의식 행태는 조금 이름난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이 자주 빠지는 신앙의 의식과도 유사합니다. 내가 소위 유명한 교회가 출석하기 때문에 마치 내가 유명한 신앙 인이 된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지구촌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여러분의 신앙의 수준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특권이상으로 관심을 가져야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가 본문 롬9:1-5에 이어지는 롬 9장 전체를 살펴보면 바울 사도가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 결국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육신적인 태어남이 아닌 약속의 말씀에 의지한 영적인 태어남의 중요성입니다. 롬9:7을 보십시오.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했습니다. 어떻게 이삭이 태어 날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사라의 잉태가 더 이상 불가능한 가운데에서도 마침내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은 것입니다. 9:9을 보십시오.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 말씀을 믿고 의지함으로 이삭이라는 새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적인 환경 안에 태어나거나 교회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개개인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아드리고 예수를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경험이 계십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누리는 어떤 특권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둘째는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의 중요성입니다. 롬9:31-32절을 보십시오.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했습니다. 우리의 행위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주관적인 의에 근거한 행위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무서운 교만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교만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날마다 율법을 읽고 토론했기에 이것이 그들을 의롭게 하는 것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종종 좋은 성경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내가 그런 공부를 하기에 그런 수준에 와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혹은 좋은 설교를 듣기에 내가 그런 수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잘 기억하십시다. 듣는 것이 행하는 아닙니다. 들음은 중요하지만 들음을 행함으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아니 우리가 최선을 다해 행하더라도 나의 행함은 여전히 주님 앞에서는 더러운 옷(걸레)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만 죄인 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피 흘리신 예수의 피를 믿고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구주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런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우월한 민족적, 사회적, 종교적인 특권들을 소유하고도 구원을 경험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골육 친척들을 인하여 사도 바울은 안타까워합니다. 그들을 인하여 고통스럽다고 고백합니다.(9:1-3) 내 자신이 그들을 대신하여 저주를 받고 버림을 받는 한이 있어도 제발 이런 답답한 저주의 자리에 있는 내 가족 내 이웃들이 주께 돌아오기를 소원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주변에는 이런 답답한 영혼들이 없는지요? 인생의 여러 특권을 즐기고 사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주님의 구원을 알지 못하고 저주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들에게 그들이 누리고 있는 특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알려 주시겠습니까? 출세보다 더 중요한 것-우리의 구원입니다. 성공보다 더 중요한 것-영생을 얻는 일입니다. 명예보다 더 중요한 것-하나님의 진정한 자녀가 되는 일입니다. 어떤 권세를 붙잡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영원한 소망이신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려 주시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예루살렘에서부터 이 소식을 전해 야 합니다. 이 소식을 가까운 가족이나 이웃들에게 전하시겠습니까? 아니 주님의 명령을 따라 이 중요한 구원의 소식을 땅 끝까지라도 가서 전해 주시겠습니까? 아니 아직도 이 진리를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는 최초의 복음의 수혜자였던 이스라엘인들에게도 가서 다시 전해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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