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롬 10장 1-4절
설교제목 : 열심보다 더 중요한 것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열심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지난(2005) 6월 미국 LA타임스지에 한국 출신 야구 선수 최 희섭 선수의 스토리가 스포츠지면 톱 뉴스로 소개되면서 “최 희섭-무엇에든 열심인 선수”라는 타이틀을 걸었다고 합니다. 특히 이 기사는 최 희섭이 영어를 배우는 일에도 열심인 것을 늘 통역을 대동했던 일본 출신 노모 히데오와 비교하며 그가 활동하고 있는 한 팀 다저스 멤버들과 우정을 쌓고 교류하기 위해 그는 영어를 열심히 학습하고 있다고 전합니다. 그는 또한 바쁜 야구 일정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출석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믿음과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일에도 열심을 다하고 있다고 전했다고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도 열심이 있으신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37:32에 보면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루시는 일에 대하여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고 말합니다. 바울사도도 롬12:11에서는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맹목적인 열심은 인류의 역사속에서 적지 않은 역기능적인 결과를 초래한 사실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히틀러가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증명하고자 유대 민족 말살 정책을 광신적으로 열심히 추진한 일과 소련과 중국의 초기 공산주의자들(특히 홍위병들을 동원한 문화 대 혁명사건)이 마르크스 혁명 이데올로기의 환상에 빠져 열심을 가지고 수많은 무고한 인명을 희생하고 국가 전체를 공포 사회로 만들어 간 사례는 대표적인 열심의 피해라고 할만 합니다. 그래서 오늘 바울 사도는 우리의 믿음의 추구에 있어서도 열심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먼저 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을 생각하기에 앞서 이스라엘 민족이 가진 열심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열심의 정체성 이스라엘 민족의 열심의 정체성은 두 가지로 나누어 관찰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종교적 열심이었고, 또 하나는 민족적인 열심이었습니다. 1)종교적 열심-바리새 주의 바리새 파는 본래 주전 160년대 이스라엘이 시리아에게 정복당하여 모든 것을 상실해 갈 무렵 유다 마카비 형제가 애국운동을 벌려 나라를 구출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그룹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엇보다 하시딤(경건)의 전통을 계승하여 정결을 중시했고 모든 가증하고 더러운 것에서의 구별, 분리를 추구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구별의 방편으로 율법과 계명을 철저하게 열심히 지키고자 했습니다. 희랍어 파리사이오스(parisaios)는 본래 아람어 '페라스'(peras)에서 유래한 말로 '분리된다는 뜻입니다. 바울사도는 본래 바리새파의 큰 스승이었던 가말리엘에게 율법을 배웠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바리새파의 전통을 따라 종교적인 열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갈1:13-14을 보십시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그는 우선 여기서 그가 그리스도인이기 이전에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었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한 것도 그의 종교적인 열심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빌3:5-6의 고백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이런 바울의 고백을 확인하게 됩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바울은 오히려 열심이 오히려 역기능적으로 작용했던 과거를 고백한 것입니다. 열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2)민족적 열심-열심 당원들 열심당은 본래는 정치적 행동을 위해 바리새 파에서 나온 이들이 만든 유대의 애국 정당의 일종으로 그리스어로는 셀롯(Zealots) 당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들은 애국의 충정으로 조국 이스라엘을 로마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출발했지만 그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벨릭스가 유대 총독으로 재위할 때는 ‘시카리’(소위 단검의 사람들, sicarii)라고도 불리워 친 로마적인 유대인들에게 갑자기 나타나 단검으로 찌르고 살해하는 일들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요즈음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의식구조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의 폭력적인 단체였다고 볼수 있습니다. 갈릴리 사람 유다라는 사람을 두목으로 서기 6년 경에 창설되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이들의 활동은 서기 70년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소위 맛사다 최후의 항전 때까지 그 활동이 지속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중 가나안인 시몬도 바로 열심 당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교훈은 이런 이들의 철학과 상반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태26:52)고 가르치셨습니다. 기독교 윤리는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는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정당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도 정당한 수단을 사용해서 그 목적을 실현하지 않는다면 그 목적의 실현 그 자체도 하나님이 기뻐할 수 없다는 것이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가르침은 적을 살해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가능하다는 이슬람의 가르침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교훈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때 애국의 이름으로 이런 비 성경적인 애국적인 광신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열심만으로 인생을 살수 없는 것입니다. 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2.열심보다 더 중요한 것 한마디로 하면 그것은 진리의 지식 혹은 바른 지식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필요했던 이 지식은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은 특별히 롬10 장을 통해 두 가지 지식을 강조합니다. 이 두 가지 지식은 지금도 변함없이 소위 열심히 인생을 사는 종교인들에게 여전히 중요하고도 필요한 지식인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지식-무엇일까요?
1)구원의 바른 지식입니다.
바울 사도가 오늘의 본문에서 특히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10:1-2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라” 바울은 그들의 동족 이스라엘의 열심을 지적하면서 그러나 불행한 사실은 그들이 구원의 바른 지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3-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행위로 율법을 지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었다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필요도 십자가에 가실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했기에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죄 값을 치르심으로 그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의에 이르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예수는 율법의 완성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최종적인 목표는 의인데 예수를 믿는 것이 그 의를 가져다주었다면 예수님이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 예수는 도덕의 완성이요 윤리의 완성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교회 생활을 하면서도 바울 시대의 이스라엘처럼 예수를 떠난 도덕과 윤리만을 아직도 의존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이 교회에 나오면서도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갖고 인생을 살지 못하는 이유일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분들에게 들려 드릴 복음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가 바로 희망이십니다. 예수가 구원이십니다. 예수가 의이십니다. 당신의 의가 아닌 예수를 붙드십시오. 그때 당신에게 진정한 구원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2)전도의 바른 지식입니다.
유대교인들은 전도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유대교 신앙 곧 여호와 신앙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극단적인 칼빈주의자들이 전도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칼빈주의를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 자신도 칼빈주의적 신앙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경계하는 것은 극단적 칼빈주의일 따름입니다.)선택할 백성들이 다 결정되어 있는데 전도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온건한 칼빈주의자들은 선택을 소명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한 것은 나만 선택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선택받은 나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을 알리고자 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 누군가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선택의 계획 속에는 심지어 나를 통해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까지도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진리, 이 전도의 바른 지식을 롬10장의 후반부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10:12을 보십시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유대인만의 주가 아닌)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 하시도다.”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믿으리요” 그런 배경에서 우리가 잘 아는 롬10:17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래서 복음의 참된 지식을 전하기 위해서 복음을 들려주는 노력은 귀한 것입니다. 아니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나아가는 발걸음보다 더 아름다운 발걸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15절에서 바울 사도는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며 구원받은 모든 이들에게 이제 순종의 행동을 촉구합니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이 여름, 이 아름다운 발걸음이 되어 구원의 바른 지식을 갖고 전도(선교)의 명령에 순종하는 여러분과 저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가질수 있는 열심가운데 가장 존귀하고 가치있는 열심은 영혼을 구원하는 열심일 것입니다. 우리의 열심을 다른 일에 낭비하지 마십시오. 전도하는 일, 선교하는 일에 드려 보십시오. 그러면 이 여름이 너무나 소중한 여름이 될 것입니다.
조지 포먼(George Foreman)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무하마드 알리, 조 프레이저와 함께 70년대 권투계를 3분했던 세계 헤비급 권투 챔피언이었습니다. 흑인 슬럼가에서 태어난 조지 포먼은 어려서 학교 가기를 싫어했고 자라나며 휴스턴 뒷 골목의 불량 청소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먹의 가공할 파괴력을 발견한 한 권투 코치에 의해 그는 권투선수가 되어 1973년 당대의 무적 조 프레이저를 꺽고 헤비급 세계 챔피언이 됩니다. 하지만 그는 1974년 그의 나이 28세가 되던 해 무하마드 알리에게 충격적으로 패배한 후 깊은 좌절에 빠져 권투계를 떠납니다. 그러나 바로 이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예수안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한 후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됩니다. 그는 자기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고 마약과 범죄로 방황하는 흑인 청소년들에게 전도하기 위해 교회를 개척하고 체육을 가르치고 제자 훈련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청소년들에게 좀더 체계적인 믿음과 삶의 교육과 훈련을 위해 그는 청소년 회관을 건축하다가 재정난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는 권투선수로는 회갑의 나이로 불리우는 38세에 회관 건립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다시 사각의 링에 서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나이 45세라는 나이로 WBA와 IBF 통합 챔피언이 되는 신화적인 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그를 잘 아는 스포츠 기자는 그의 나이 45세가 되던 해 그의 챔피언전에 나선 그를 가르쳐 아마 복싱사상 돈을 위해서도 아니고 명예를 위해서도 아닌 다른 동기로 게임에 임한 유일한 케이스일 것이라고 보도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는 이 마지막 챔피언 전을 치르면서 그의 마음속에 복음으로 그가 양육하는 수많은 청소년 제자들의 얼굴들을 떠올리면서 주님께 기도하며 경기를 진행했다고 간증합니다. 그의 딸 나탈리는 그의 아버지의 생애를 증언하며 그녀의 아버지가 예수님 을 만난 후 가장 중요한 일은 오직 한 가지 뿐이었다고 증언합니다.--"그날이후 내 아버지에게는 권투도 돈도 명예도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내 아버지의 열정은 오직 한 일-예수님을 증거하고 그분을 찬양하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지요? 여러분의 열정은, 열심은 어디에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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