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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전서 1장 4-10절 데살로니가 교회 - 이동원 목사

by 재영구리 2023.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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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살전 1장 4-10절

설교제목 : 데살로니가 교회
설교자 : 이동원 목사

 다음 주일은 목장교회 종려주일입니다. 우리 교회 청장년 목장 1,500목장과 할 수 있으면 700여개에 달하는 교육 목장(어린이 청소년)까지도 함께 목장교회 주일에 동참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물론 평상시 주간이나 주말 모임시간과 다르게 주일에 모이기 때문에 특별한 시간을 정하고 경우에 따라 연합으로 모이는 일도 있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도 목장 교회 종려주일에 평상시 주일에 모이는 교회당이 아닌 성도들의 집에서 모이는 실험을 하는 데는 몇 가지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의 본질이 건물이 아니라는 성경적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만일 교회의 본질이 교회당이라면 교회는 건물이 없어지는 날 함께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교회는 건물을 의존하지 않아도 존속할 수 있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가 시작되고 나서 처음 300년간 교회는 이 땅에서 그렇게 존재하여 왔습니다. 중국 문화혁명당시 교회당이 폐쇄되었지만 중국 교회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들은 지하교회 혹은 가정교회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존재하며 예배와 선교의 사명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는, 우리 교회 모든 평신도가 평신도 목사의 사명을 감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중요한 발견은 소위 만인 제사장 직이었습니다. 만인 제사장이란 소위 전문 적인 신학훈련을 받은 성직자들만이 예수님을 만난 모든 평신도들도 직접적으로 주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누구나 소명 받아 사역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것은 구호에 그치는 경우가 많고 한국 교회는 특히 목회자 의존도가 높은 교회로 존재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만일 중국 교회가 목회자만을 의존하는 교회였다면 중국 교회는 문화혁명 당시 존재할 수 없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중국 정부는 모든 선교사들을 추방했고 모든 성직자들의 기능을 중지시켰습니다. 그러나 지하로 들어가 작은 가정 교회로 존재하기 시작한 중국 교회들에서 모든 성숙한 평신도 지도자들이 목사가 되어 예배를 인도하고 가르치고 전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이 오히려 중국교회의 더욱 폭발적인 성장을 초래한 것입니다. 우리가 목장교회 종려주일을 갖는 셋째 목적은 그동안 소그룹 공동체인 작은 교회 목장 교회에 참여하지 못했던 분들에게 참여의 기회를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목장교회를 선언하고 주일 예배이상으로 이 작은 공동체 모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교회로 전환한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포기할 수 없는 건강한 교회의 비전 때문이었습니다. 건강하지 못한 교회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구경꾼이 다수로 이루어진 삶의 나눔이 없는 교회입니다. 잠실야구장을 가득 채운 구경꾼들은 흥행이 지속되는 몇 시간동안 흥분과 함성을 터트리지만 그것으로 인생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게임이 끝난 즉시 그들은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흩어져 갑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그렇게 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12명 이내의 소그룹으로 공동체를 이루기 시작하면 절대로 옆에 있는 이웃들에게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내 이웃들의 고민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그들의 신앙 성숙에 진지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삶의 나눔으로 치유와 변화 그리고 성숙이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지난 5년간 확인해 오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지구촌 교회 성도라면 우리가 목장교회에 반드시 소속하여 삶을 나누며 살아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신약 성경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건강한 교회-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교회는 바울 사도가 그의 제2차 전도여행중 유럽의 속한 마케도냐 빌립보에 와서 전도한후 그 다음 선교지로 찾아온 도시가 바로 데살로니가(지금도 그리스에 속한 대도시)였습니다.(행전17장) 바울은 이 도시에 에베소나 고린도처럼 오래 머문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학자들은 짧게 잡으면 3주(아마도 회당에서 가르친 기간), 길게 잡아 7-8개월 이내를 머물렀지만 그러나 선교 효과는 대단했고 이 도시에 아주 건강하고도 영향력 있는 교회가 태어났다고 보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도시에서 바울의 전도에 저항했던 유대인들의 박해를 피하여 고린도로 떠난후 다시 얼마 전에 태어났던 이 데살로니가 교회가 건강한 교회로 성장해 가도록 주후 52년경 고린도에서 쓴 편지가 바로 데살로니가서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배우는 건강한 교회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1.기쁨으로 말씀을 받는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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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5절에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분명한 복음이 성령의 능력으로 전파되었고, 6절에 의하면 데살로니가 인들은 성령의 기쁨으로 이 말씀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교회라는 공동체가 다른 모든 세속적 공동체와 구별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관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 말씀으로 거듭나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말씀에 의해 영적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말씀이 영적인 젖(우유)이고 단단한 고기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향해 선포하는 것도 바로 이 말씀인 것입니다. 주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 바로 이 말씀인 것입니다. 요한17:8에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로 가시기 직전에 이렇게 기도 중에 말씀하십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이것이 우리가 모일 때마다 우리들의 이야기도 나누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이유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이 선포되고 나누어 질 때 우리가 어떻게 이 말씀을 받느냐는 것입니다. 똑 같은 말씀을 받는데 어떤 사람의 인생은 변하고 어떤 사람의 인생은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말씀이 능력이 없어서 일까요? 문제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가 문제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씨 뿌리는 비유’에서 네 가지 마음 밭을 이야기하신 이유입니다. 씨는 같아요. 그런데 밭이 달라요. 길가도 있고, 돌짝밭도 있고, 가시밭도 있고 그리고 좋은 땅이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인들의 마음 밭이 좋은 땅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짧은 시일에 좋은 결실을 거두게 한 것입니다. 살전2:13을 보십시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무엇을 감사해 하고 있습니까?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 하느니라” 바로 이것이 비밀입니다. 나는 우리 교회와 우리들의 목장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2.믿는 자의 본이 되는 교회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 우리 사회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역할 모범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받을 만한 지도자를 상실한 사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이런 유머가 유행할까요? 어떤 선생님이 학교에서 우리 사회는 더 이상 정치가나 사업가중에서는 투명한 지도자를 찾을 수 없다고 하자 어떤 학생이 손을 들어 “선생님, 가장 투명한 사람들은 연예인들뿐 입니다.”하더랍니다. 왜 그러냐고 하자, “선생님, 연예인들은 잘 벗지 않습니까?”했다고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행복은 그들이 본받을 대상이 있었고 그들을 잘 본받아 마침내 그들도 본 받을 교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6절 하반부와 7절을 보십시오.“--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이 교회 내에서는 성숙한 성도들이 때로는 아버지처럼 훈계하고 때로는 어머니처럼 사랑하며 때로는 형님 누님 언니 오빠처럼 서로를 세우고 서로에게 본이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살전2:7에서는“--유순한자가 되어 우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같이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살전2:11에서는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교제가 가능했던 것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집에서 모임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바울 사도가 처음 데살로니가 교회에 도착하여 회당을 중심으로 한 3주간 전도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어떤 유대인들이 시기하고 반발하자 행전 17:5-7에 보면 사도는 모임 장소를 야손이라는 사람의 집으로 옮긴 것으로 보입니다. 행전17:7을 보십시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야손의 집에서 모여 서로를 사랑하고 권면한 모임 이것이 바로 데살로니가를 변화시킨 모체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동일한 역사가 우리들의 목장교회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3.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배우는 또 하나의 모습은 이 교회가 주의 오심을 특별한 열정으로 기다리는 교회이었다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종말론적인 교회였습니다. 오늘 날 성도들은 종말론의 이해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두 가지 극단적인 입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하나는, 여러해 전 2,000년에 진입하기 전 이 땅에 일부 종말론적 교회(다미 교회, 다베라 선교회등)가 보여준 행태처럼 현실을 도피하고 가정과 사회를 버리고 밤 12시에 모여 기도하며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있는가 하면, 또 하나는 이런 병리적 신앙에 놀라서 아예 예수님의 재림 그 자체를 부인하거나 무시하는 성도들도 적지 않게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내에도 그런 두 가지 경향의 성도들이 다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구실로 자기의 일상적인 일을 등한히 하는 자들에게 바울은 살후3:10에서 “누구든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규모없이 무질서하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다운 삶이 아니며 이런 삶을 사는 자들에게서 떠나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전히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는 것은 우리의 중요한 신앙고백인 것을 분명하게 전달합니다. 이미 본문 10절에서 데살로니가 인들이 받은 신앙의 중요한 고백의 일부가 재림신앙인 것을 확인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 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종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오늘 세상을 떠나 주님 앞에 서도 부끄럼이 없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의 결론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살전5:23입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존되기를 원하노라” 그래서 언제라도 내 인생이 끝날 수 있다는 것을 준비하고 사는 것-이것이 종말 신앙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것이 주께서 재림을 가르치시면서도 그 날을 비밀에 부치신 이유인 것입니다. 그분이 오늘 오실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제가 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여류 문학가 권사님이 계십니다. 이 분이 건강이 안 좋게 느껴져 병원에 갔다가 암 진단을 받습니다. 처음엔 가족들이 알리지 않고 숨겼는데 우연히 병실 밖에서 가족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자기가 암에 걸린 것을 아셨습니다. 이 분이 믿음이 좋은 분이셔서 그 날부터 죽음 준비를 하십니다. 만날 사람 다 만나고 용서할 사람 용서하고 용서 받을 분에게 용서 받고 편지 쓸 사람 편지를 하셨답니다. 갚을 돈이 없나 갚고, 지키지 못한 약속이 없나 살펴 다 정리합니다. 유산도 정리하고, 평소에 부담이 있었던 선교사님들에게 선교헌금도 보내고, 유언서도 작성했습니다. 그런데 별로 더 병세가 나빠지는 증상이 없어요. 누군가가 다른 병원도 가보라고 해서 가 보았더니 오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 지난 후 저도 그 분을 뵈웠을 때 “권사님, 지금까지 인생 정리하시느라 돈도 많이 쓰시고 했는데 후회 안 되시나요?” 물었더니 대답이 뭔지 아세요? “아네요. 목사님, 제가 지난 몇 달처럼 인생을 진지하게 산적이 없었습니다. 앞으로 남은 인생도 그렇게 살고 싶어요” 이것이 바로 종말 신앙이요 재림 신앙인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바로 이 신앙으로 세상을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믿고 살며 전도하던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데살로니가 시민들이 붙여준 별명을 아시나요? 행전17:6입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에도 이르렀도다” 그런데 이 대목을 영어 KJV는 어떻게 번역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These that have turned the world upside down" 세상을 뒤집어 놓은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할일입니다.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가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 우리의 이웃들을 품고 나아갈 때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다음 주일-우리들의 집, 혹 마을에서 모이는 모임에서 이런 간증이 나올 것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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