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눅9장13-17,고전14장39-40
설교제목 :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18)-질서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여러 해전 제가 미국에서 돌아 와 지구촌 교회를 개척할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전철을 탔다가 매우 충격적인 일을 경험했습니다. 지금은 비숫한 상황을 너무 자주 겪어서 인지 저도 느낌이 많이 둔 해졌습니다만, 당시에는 외국 생활에서 돌아 온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제가 겪은 일이 적지 않게 충격으로 다가 왔습니다. 지금 까지 제가 그 일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으로 미루어서도 충격적으로 느낀 것이 분명했던 것 같습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제가 전철에서 앉을 자리를 찾다가 빈자리 두 자리가 보여 다가가 앉으려고 하는데 한 아줌마가 재빠르게 저를 밀치고 제 앞에 앉더니 “오 주여”하고 옆 빈자리에는 자기 핸드백을 던지면서 그 다음에 소리치는 말이 “권사님, 빨리 와 여기 앉아”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제 속에서 나온 말도 “오 주여” 이었습니다.단순한 에피소드일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이 상황이 한국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질서 의식의 수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아주 보편적 사건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인 고린도 전서 14장 40절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 충고합니다. 이 본문의 상황은 예배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어떤 사람들이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큰 소리로 예언하고 또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큰 소리로 함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예배 집중을 방해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의도는 결코 예언이나 방언을 금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전14:39을 읽어 보십시오.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문제의 핵심은 무질서와 무례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질서를 지켜 산다는 것이 왜 중요할 까요? *우리가 질서를 지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1.주님의 존재의 양식을 모방하는 것입니다.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의 예배 상황의 무질서를 지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신 그 분의 중요한 존재 양식을 선언하십니다. 고전14:33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예배의 질서 의식을 강조하면서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냐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게도 분명하게 나타나는 특성이었습니다. 오늘의 또 다른 본문은 소위 5병2어의 기적의 현장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날 이 기적의 현장에는 눅9:14에 의하면 남자만 오 천명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자와 아이들을 합하면 약 2만 여명은 되지 않았겠습니까? 자, 이 배고픈 이만여명의 군중들에게 음식이 주어질 경우 대 혼란이 일어날 것을 아시고 그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눅9:14을 다시 읽겠습니다. “이는 남자가 한 오천명 됨이러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하시니” 다시 말하면 50여명을 한 단위로 질서 정연하게 이 군중을 배열하신 것입니다. 그 후에 그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리고 17절에 보면 남은 것들은 열두 바구니에 거두시게 하셨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질서를 따라 행동하도록 지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는 과연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그러므로 우리가 질서를 존중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방하고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귀란 말은 희랍어로 diabolos라고 하는데 dia(사이에) bolos(던진다)는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사이에 끼어 들어가 깽판을 친다는 뜻입니다. 마귀의 이미지가 뭐냐면 줄 서있는데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끼어 들어가 질서를 무너뜨리는 자라는 말입니다. 우리말에서는 ‘참소자’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만 본래가 ‘질서의 파괴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질서를 깨트릴 때 우리는 마귀를 따르는 마귀 짓을 하는 것입니다. 줄서지 않고 끼어 들 때, 주차하지 말아야 할 곳에 주차할 때, 남의 부부사이에 들어가 부부관계를 파괴할 때(그 남자의 여자 화영이 처럼 말입니다.) 다 마귀 짓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질서를 따를 때 우리는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을 닮고 있는 것입니다. 묻습니다. 당신은 마귀의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사람이십니까?
2.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입니다.우리가 질서를 지키는 인생을 살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예배의 질서를 지키라고 가르치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이 예배를 아름답게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5병2어의 기적의 현장에서도 떡과 생선을 먹기 위해 무리들이 서로 서로 달려들어 무질서한 참사가 일어났다면 예수님의 기적이 아름다운 기적으로 기억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50명씩 배열된 군중들이 ‘앉아서’(14절-앉히라/15절-다 앉힌 후) 기다리며 감사의 기도를 한 후 나누어 받으며 그들은 이 아름다운 기적의 현장에서 아름다운 주님을 만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아름다운 습관의 주인이신 주님의 제자라면 질서를 추구하고 질서를 존중하는 아름다운 습관의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우주를 영어로 코스모스(cosmos)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코스모스라는 단어는 우주라는 단어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질서나 조화를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화장을 영어로는 cosmetics라고 합니다. 역시 cosmos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까 본래 화장이란 하나님이 지어 주신 질서를 따라 얼굴을 잘 정리해 주는 작업이었습니다. 얼굴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make-up은 화장이 아니라 변장입니다. 우주 만물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질서 있게 창조되고 질서 있게 운행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주는 공포의 우주가 될 뿐입니다. 창세기 1장을 잘 읽어 보면 창조주 하나님이 얼마나 질서를 배려하며 우주를 창조하셨는가를 알수 있습니다. 엿새 동안 그는 우주를 창조하시며 첫날에 빛을 둘째 날에 하늘과 바다를 셋째 날에 땅을 넷째 날에 해와 달과 별을 다섯째 날에 새와 물고기를 여섯째 날에 짐승과 사람을 만드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첫째 날과 넷째 날/둘째 날과 다섯 째 날/셋째 날과 여섯째 날 이렇게 짝을 만들어 놓고 생각해 보면 창조주의 아름다운 의도가 드러나지 않습니까? 그는 먼저 빛을 만드신 후 빛을 사용할 주인공인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신 것이며, 그는 하늘과 바다를 먼저 만드신 다음 하늘을 나를 새와 바다를 헤엄할 물고기를 만드셨고, 땅을 먼저 만드신 다음 땅의 주인공이 될 짐승들과 사람을 마지막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는 깊이 생각하시고 질서 있고 조화롭게 코스모스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하루 창조의 과정이 끝나실 때마다 ‘보시기에 아름답다’고 선언하신 아름다움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름답게 사시기를 원하십니까? 질서를 존중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질서를 파괴하는 사람을 보면 어떻게 느끼십니까? 추하게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가는 사는 이 시대를 포스트모던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 시대의 특성은 파괴와 해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무질서와 반항에는 사단의 간교한 충동이 있음을 있지 말아야 합니다. 권위주의는 잘 못된 것이지만 권위는 존중되어야 합니다. 권위를 조롱하고 저항하는 것을 라이프스타일이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요즈음 인터넷 문화가 확산되면서 악플-리플 문화(댓글, 답글)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권위에 도전하고 이웃을 조롱하는 것을 즐겨서는 안 됩니다. 글을 쓸 때에도 품위와 아름다움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옛날 어른들은 예수님을 몰랐어도 글을 쓸 때는 의관을 정제하고 마음을 다스린 다음 글을 썼다고 합니다. 말과 글에서 그리스도인의 향기가 있어야 합니다. 다시 바울의 충고를 들어 보십시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3.이웃을 배려하는 사랑의 나눔인 것입니다.왜 질서를 지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까? 그것이 이웃 사랑의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말은 이웃의 유익을 구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왜 질서를 깨트리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지만 결국 무질서의 밑바닥에는 우리의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유명한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유익만을 위해서 남의 유익을 해치는 것-그것이 또한 무례함의 본질이 아닙니까? 그래서 바울은 또한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뜻밖에 무례한 그리스도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Fuller 신학교의 총장이신 리챠드 마우 박사는 매우 중요한 책 한권을 쓰셨는데 책의 제목이 ‘무례한 기독교’입니다. 진지하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에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사실상 무례는 무질서입니다. 희랍어로 ‘무례’(고전13:5)가 ‘아스케모네오’인데 ‘아’(없음)와 ‘스케마’(틀, 모양)의 합성어로 모양이 없는 매력이 없는 삶의 모습을 뜻하는 말입니다. 제발 그런 인생을 살지 마십시오. 그 반대가 잘 모양이 갖춰진 삶(유+스케마)곧 고전14:40의 품위 있는 삶인 것입니다. 가장 작은 일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발해 보십시오. 예배 자리에서도 남을 배려해서 가운데 자리부터 앉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꼭 끝자리에 앉아 남들보고 자기를 넘어 가라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배가 시작된 후에야 예배에 습관적으로 오고 예배가 끝나기 전에 상습적으로 나가서 남들의 시선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장애인석에 주차 금지 구역에, 통로에 주차하여 눈을 찌푸리게 하는 사람들-다 매력 없는 사람들입니다.
본래 예절이 바른 국가의 전통을 말할 때 대영제국을 손 꼽아왔습니다. 그런데 대영제국의 예절은 궁중 예절이 원천이고 그 궁중 예절의 원천은 하나님 나라 궁중의 아들답고 딸다운 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영어로 ‘예의 있다’는 말을 ‘Courteous’라고 합니다. ‘Court'라는 말은 궁중(하늘의 궁중)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래서 ‘예절을 지키십시오’라는 말은 본래 “하나님의 아들답고 딸답게 사십시오”라는 말입니다. 이런 대영제국의 예절 정신을 나타내는 일화를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1852년 2월 26일 아프리카 남단을 지나가던 영국 군함 한 척이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영국 군인과 그 가족들을 싣고 영국으로 돌아가던 배였습니다. 그런데 이 선박이 암초에 걸려 파선하게 되었습니다. 구명보트가 충분하지 않아 인원의 절반 밖에 타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우왕좌왕하는 이들에게 함장이 명령을 내렸습니다. “군인 여러분, 우리들의 가족들은 지금까지 우리를 위해 희생하여 왔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들을 섬길 때입니다. 그들을 먼저 태우도록 도우십시오. 노인들 어린이 여성들 장애인들을 먼저 태우도록 하십시오. 대영제국의 아들답게 행동하십시다.” 이래서 가족들을 먼저 구명보트에 태운 다음 그들은 멀어져 가는 배를 바라보고 파선해 가는 배위에서 질서 정연하게 기립하여 영국 국가를 부르면서 배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거수경례를 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숙연하고 아름다운 광경입니까? 이것이 바로 질서 의식이요 이웃 사랑이요 십자군인의 기상이요 하늘의 왕자답고 딸다운 삶의 모습이 아닙니까? “모든 일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십시오."죄가 무엇입니까? 죄의 본질은 한마디로 창조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깨트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오셨습니까?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법의 질서를 지키며 사는 것을 보고자 함이십니다. 그동안 우리가 생각 없이 무질서한 삶을 살았다면 혹시 구원받지 못한 때문은 아닙니까? 그러면 먼저 내 무질서한 삶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십시오. 그리고 이제부터 부활하신 주님의 도우심 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질서를 회복하는 삶에 참여 하십시오. 그리고 우리로 인해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조화로워지는 일에 앞장서십시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인생을 사는 모습입니다.
'신약 > 누가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복음 23장 39-43절 예수님의 VIP(6) 한 행악자 - 이동원 목사 (0) | 2023.03.23 |
---|---|
누가복음 24장 13-17절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11) 함께 하심 - 이동원 목사 (1) | 2023.03.21 |
누가복음 10장 1-6절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단기 선교 - 이동원 목사 (0) | 2023.03.21 |
누가복음 2장 25-35절 시므온의 찬송과 기도 - 하용조 목사 설교 (0) | 2023.03.19 |
누가복음 2장 1-7절 구유에 오신 예수님 - 하용조 목사 설교 (1) | 2023.03.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