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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누가복음

누가복음 24장 27-35절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길

by 재영구리 2023.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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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길
설교본문 : 눅 24:27-35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외래어이면서도 우리말처럼 자주 쓰여지는 단어가운데 매너리즘(mannerism)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사전적으로 "일정한 기법이나 형식이 습관적으로 되풀이되어 독창성과 신선한 맛을 잃어버린 상태"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타성'과 거의 같은 말(뜻)이라고도 할수 있을 것입니다.

본래 이 단어는 예술세계에서 사용되던 말로서 "독창성을 잃어버리고 평범한 경향으로 고정되어 감동을 상실함으로 사실상 퇴보해 가는 전통주의"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단어는 우리의 삶 전반에 걸쳐 매우 보편적으로 사용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의 삶의 마당에서 신선한 감각을 상실하고 경직된 상태에서 반복되는 몸짓에 익숙해져서 의미를 상실한 모든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컨대 오늘날 직장생활의 최대의 적은 매너리즘이라고 지적되고 있습니다.매너리즘에 빠지면 직장생활의 활력을 상실합니다.

의욕도 독창성도 상실한 채 월급만 받기 위해서만 존재하게 됩니다.

그런데 저는 매너리즘가운데 가장 무서운 것이 신앙생활의 매너리즘이 아닌가 싶습니다.

교회에 주일마다 빠짐없이 참여하고 예배에도 익숙하게 적응하지만 일종의 습관에 불과합니다.

부활절이 오면 또 하나의 기독교 명절이 왔구나 생각하고 부활절 행사에 참여합니다.

죽은자의 부활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우리의 존재를 뒤흔들어 깨울 엄청난 사건이 아닐수 없습니다.
나가는 구나"이런 식으로 맞이합니다.

매너리즘에 빠진 것입니다. 29세의 나이로 요절한 "푸른 꽃"의 시인 낭만주의 천재 작가 노발리스(Novalis)는 "우리 모두는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

철학한다는 것은 타성에서 깨어나 생과 접촉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저는 그의 말을 빌려 "신앙한다는 것은 일상의 타성에서 깨어나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는 것이다"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문제는 살아계신 주님을 어떻게 살아있는 감동으로 만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속에 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예수님의 제자들 주변에서 얼쩡거리며 갈릴리로 예루살렘으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예수를 좇아다니던 두 사람(한 사람의 이름은 글로바-18절/요한19:25에 십자가 곁에 있었던 사람가운데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가 언급)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제자의 기대를 배신하고 예수는 비극적인 십자가 처형을 당하고 무덤으로 들어가고 만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모든 희망을 접고 고향 엠마오 길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이제부터 다시 그렇고 그런 지루한 반복의 일상 곧 매너리즘의 삶으로 돌아가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길에서 갑자기 그들의 일상을 깨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변합니다.

여러분, 부럽지 않습니까? 그렇게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그러면 오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길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본문은 적어도 세 가지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세가지의 길은 때로 한 순간에 동시에 경험될수도 있고 별도로 따로 따로 경험될수도 있습니다.

1.말씀 연구의 길입니다. 슬픔과 절망속에 엠마오 길을 걷던 두 제자에게 다가오신 주님이 첫째로 하신 일은 성경 말씀을 풀어 주시는 일이었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여기 모세와 선지자의 글 하면 사실상 구약 성경 전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 성경 말씀으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제자들에게 계시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경의 핵심은 실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참으로 다양한 여러 가지 정보를 전달하지만 결국 그 유일한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요한5:39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말씀 연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저는 만일 어떤 사람이 성경을 연구하고도 주님을 만날 수 없었다면 성경을 잘못 연구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을 열고 진지하고 치열하게 성경을 공부해 보십시오.

예수를 만나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저는 본래 20대 초까지만 해도 기독교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늘 기독교는 불교보다 너무 차원이 낮은 진리를 가르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들에게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 기독교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영어 교과서가 영어 성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영어를 공부하다가 저는 영어가 아닌 성경에 빠져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년만에 갈라디아서를 통해 종교와 복음, 도덕과 복음의 차이를 깨닫게 되었고 나의 어떤 최선도 나를 구원할수 없었기에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내게 새 생명을 주시고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달라졌습니다.

두 해 전 세상을 떠나가신 한국 경영학계의 존경받는 스승이요 한국 교회의 존경받는 평신도 지도자이셨던 김인수 장로님의 간증을 읽다가 그분이 예수님을 만나신 것도 말씀 연구를 통해서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김 인수 장로님은 본래 치밀하신 성격이어서 그냥 맹목적으로 예수를 믿을 수는 없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연구하기로 하셨습니다.

성경에 일일히 밑줄을 그어가며 모르는 것은 물음표를 해놓고 답을 얻으면 다시 지우고 이런 식으로 거의 완벽한 성경 사전어가며 연구하셨다고 합니다.

그가 이런 과정을 통해서 느낀 것은 교회가 피상적으로 가르친 기독교와 성경의 기독교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마침내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만나게 되셨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아직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셨습니까?

그러면 성경을 열어 보십시오.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모임에 참여해 보십시오.

머지않아 당신도 엠마오 길에 찾아오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시게 될 것입니다.

2.성도 교제의 길입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또 하나의 길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 교제하는 마당에 참여하여 말씀을 나누고 식사를 나누고 하다가 거기에 함께 하시는 주님을 경험하는 케이스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엠마오 길의 두 제자가 그런 경험을 하지 않습니까? 30-31절입니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수 있었을까요?

저는 이것이 주님의 약속의 실현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 마태복음18:20의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여기서 "그들 중에"라는 말은 "그들 가운데"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목적으로 모인 성도의 교제가운데 주께서 당신의 임재로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공동체의 성격으로 존재하여 왔습니다.

인간은 공동체를 통해서만 의미있는 존재의 경험을 나누도록 지음받은 피조물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닮은 존재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태초부터 성부와 성자, 성령 삼위일체로 존재하여 오셨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것을 "하나님의 사회성"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인 것은 사회적인 하나님을 닮은 까닭입니다. 그래서 건강한 교제의 마당이 없는 사람들은 불건강한 교제권을 형성해서라도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제가 분당 교회 카페에 들렸다가 아주 재미있는 유머를 들었습니다.

우리 교회 자매님 한분이 "조폭과 아줌마의 공통점을 아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모른다고 했더니 4가지 공통점이 있답니다.

 1)서로를 형님으로 부른다

2)떼를 지어 몰려다닌다

3)몸에 무엇인가를 그리고 다닌다(조폭은 등에, 아줌마는 얼굴에)

4)무식하게 용감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구상의 가장 건강한 교제 마당이 성도들의 소그룹 공동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는 성전 모임만 의존하지 않고 집에서 모임을 가진 것입니다.

거기서 함께 교제하고 함께 먹다가 우리는 한순간 엠마오 길의 두 제자들 처럼 소위 '눈이 열리는 경험'(eye-opening experience)을 하게 됩니다.

거기서 우리는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지난 주일 우리들의 목장 교회 모임에서 바로 그런 경험을 할 수가 있었다고 간증을 하셨습니다.

저는 지난 주일 단 한번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런 목장 모임에 지속적으로 참여하심으로 모두가 다 살아계신 주님을 계속해서 만나게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3.성령 체험의 길입니다.

앙생활을 활력있게 하는 성도들을 만나보면 무엇인가 신앙의 체험을 가지신 분들인 것을 알수 있습니다.


는 물론 우리의 모든 신앙 체험이 건강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근거한 정당한 체험의 경우, 이런 체험은 한 사람의 신앙과 삶을 결정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됩니다.

본문의 두 제자가 바로 그런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32절을 보십시오."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이것이 바로 성령 체험이 아닙니까? 요한 웨슬레가 회심을 체험하는 순간 "이상하게 내 마음은 뜨거워 졌다"고 고백한 것도 동일한 성령의 사역이었습니다. 유명한 파스칼로 하여금 팡세에서 "기쁨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 불 불 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한것도 동일한 성령의 사역이었습니다. 성경적인 모든 성령 체험은 결국 우리로 확실하게 그리스도를 깨우치고 감격적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요한복음15:26에서 언약하신 바가 아니었습니까?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그리고 이 사건 직후에 엠마오 길의 두 제자는 고향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이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는 새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33-34절을 읽어보십시오. "곧 그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이것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결과인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 사건을 가능하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 체험의 길은 얼마든지 다양할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엠마오 길의 두 제자처럼 말씀을 듣다가 성령을 체험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하다가 성령을 체험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길 가다가 성령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동일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만난 확신을 갖고 그리스도의 일에 헌신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헌신한 사람들은 모든 창조의 신비, 구속의 신비에 매 순간 순간을 감동하며 감격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매 순간 순간의 일상속에 부활하신 주님의 섭리의 손길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개혁자 말틴 루터가 "봄철이 되어 새롭게 움트는 새싹마다 피어나는 꽃잎마다 주께서는 부활의 약속을 새겨 놓으셨다"고 말한 것이 그런 의미의 증언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오늘의 설교의 서론에서 노발리스의 푸른 꽃을 언급한바가 있었습니다. 드디어 주인공이 푸른 꽃을 발견하던 순간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겉잡을수 없이 그의 마음을 앗아간 것은 우물가에 서서 반짝이는 넓은 잎사귀로 그를 툭툭 건드리고 있는 푸른 빛의 키 큰 꽃이었다. 푸른 꽃 주위에는 온갖 색깔의 꽃들이 헤아릴수 없이 많이 피어 있었다. 달콤한 향기가 주위에 진동했다. 그의 눈엔 푸른 꽃 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한참동안 이루 말할수 없이 사랑스러운 눈길로 푸른 꽃을 응시했다. 마침내 그가 그 꽃을 향해 다가가려고 하자 푸른 꽃은 갑자기 움직이더니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잎사귀들은 더욱 반짝이는 빛을 띰면서 점점 솟아오르는 줄기에 바싹 매달렸다. 푸른 꽃이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저는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바로 이런 체험이 우리의 생명이요 우리의 푸른 꽃이신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우리의 감격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푸른꽃을 찾아 나선 주인공이 푸른 꽃을 만나는 순간 이제 푸른 꽃은 주인공의 희망이요 사랑이요 구원이요 모든 것이 된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과 제가 동일한 간증을 할수 있을까요? 말씀으로 성령으로 성도의 교제가운데 내게 다가오신 살아계신 주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순간-그는 이제 나의 희망, 나의 사랑, 나의 구원 나의 모든 것이 되셨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천년전 오늘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의 희망이요 사랑이요 구원이요 모든 것이 되십니다. 할렐루야! 오늘이 바로 오늘이 그분을 만나는 날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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