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눅2장46-49, 마18장19-20
설교제목 :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4) 예배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요즈음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유머 가운데 ‘웨이터의 만행’이라는 제목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죄수가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너무 심심해서 감방에 돌아다니는 개미를 잡아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것은 개미에게 ‘차려 동작’을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드디어 3년 만에 개미는 이 사람이 ‘차려’ 하면 아주 멋진 폼으로 ‘차려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감옥에서 출옥하면서 그는 이 훈련된 개미를 가지고 출소했다고 합니다. 자기 애인을 만나자 마자 그는 그가 감옥에서 훈련시킨 개미의 묘기를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개미의 ‘차려 동작’이었습니다. 애인은 너무 재미있어 하며 그가 정말 수고했다고 축하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 애인의 격려에 고무된 그는 애인과 함께 어느 식당에 들어가자마자 다시 자기의 묘기를 식당 웨이터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개미를 식탁위에 올려놓고 “어이 웨이터, 이 개미 좀 봐!” 하자마자, 웨이터는 “손님 죄송합니다.”하더니 잽싸게 엄지 손 가락으로 이 개미를 눌러 죽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웨이터의 만행의 전모입니다.그런데 여러분, 오늘의 교회 안에도 이런 웨이터의 만행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무슨 말입니까? 생각하고 대답해 보십시오. 성도 여러분은 성도의 신앙생활의 기본 동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군인들의 제식훈련에서 차려 자세는 모든 동작의 기본동작, 기본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기본 동작인 차려 자세가 흔들리면 다른 모든 자세가 흔들리게 됩니다. 성도의 기본 동작은 예배에서 시작됩니다. 예배 자세가 흔들리고 예배에서 은혜를 받지 못하면 우리네 신앙생활 전반의 자세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의 편의 주의적 발상, 자기중심적 사고는 오늘 예배의 기본 동작을 아예 취하지도 못하도록 만드는 예배의 영성을 죽이는 만행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주일 성수의 전통은 이미 흔들려 버린 지 오래 되었고, 그나마 주일에 한번 드리는 공 예배조차 제대도 시간을 지키지 않고 5-10분 늦게 예배의 자리에 나아와 적당히 한 40-50분을 때우다가 축도 전에 교회당을 빠져나가면서 그래도 예배는 드렸다고 자위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아졌습니까? 이것이 예배를 죽이는 오늘의 성도의 만행이라면 너무 지나친 표현일까요?그러면 우리가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수님은 예배를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그분의 모본, 그분의 교훈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가 배워야 할 예배의 레슨은 무엇일까요?
1.예배의 습관은 우리의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누가 복음에 보면 소년 예수님이 유월절이라는 이스라엘 최대의 명절을 맞이하여 그 부모인 요셉 마리아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을 때의 에피소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주간의 명절을 잘 마치고 다시 고향 나사렛으로 떠날 무렵 사건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행방이 모연해진 것입니다. 처음에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그 친척들과 함께 있으려니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없었습니다. 아직도 예수님은 12살의 소년이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어떻게 부모된 입장에서 근심이 안 되었겠습니까? 요셉과 마리아는 예루살렘 교외 시골 마을의 거리마다 골짝마다 뒤졌지만 그분은 보이지 않습니다. 마침내 요셉과 마리아는 예루살렘 시내로 돌아가기로 작정합니다. 이번에는 시내의 골목 골목을 뒤지며 12살 소년이 있음직한 곳을 뒤집니다. 오락실, 게임방, PC방, 볼링장을 다 뒤졌지만 여전히 그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찾고 또 찾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았습니다. 어디에서 찾았습니까? 예, 맞습니다. 성전에서 찾아낸 것입니다.그리고 이제 어머니 마리아가 묻습니다. 본문 48절입니다.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며 찾았노라”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잊지 마십시오. 이때 예수님은 불과 12살의 소년이었습니다. 4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성경학자들은 이 대목에서 두 가지의 놀라움을 지적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이고, 또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르신 것 입니다. 이것은 그 때까지 유대 문화에서 결코 익숙하지 못한 표현이었습니다. 구약 39권 가운데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기한 것은 불과 14회 정도이고 이것도 문서상의 표기일 뿐 언어로 하나님을 부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불과 12살난 소년이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예배하는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신약학자인 데럴 보크(Darrell Bock)는 여기 이 대목 이 구절에서 사용된 희랍어 단어‘dei’(it is necessary)를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이 단어의 뉘앙스를 살려서 이 구절을 다시 번역하면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것은 내 인생의 가장 필요한 우선순위임을 모르셨습니까?”라는 의미라고 그는 지적합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그것이 큰 성전이든 아니면 작은 회당이든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집은 모두 그분의 아버지의 집이었고, 그 아버지의 집에 그가 삶의 중심을 두는 것은 당연하게 그분의 우선순위적 습관이요 실천이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성전의 빌딩이 특별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 아니라, 거기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던 까닭입니다. 하나님은 물론 어디에나 게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신학적으로 무소부재하시다 혹은 편재하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은 또한 특별하게 어떤 장소를 구별하시어 그곳에 자신의 거룩한 영광을 집중적으로 계시하고자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에서 성전이 갖는 의미의 중요성이고 신악에서 예배가 중요한 이유인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예배의 장에서 구약에서처럼 아버지의 특별한 임재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장 17절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성전을 정결하게 하시는 일을 보며 예수님에게서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을 보았다고 증거 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예수님의 제자들인 여러분과 저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과연 주의 전을 사모하는 예배의 열심이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과연 아버지의 집에 대한 거룩한 갈망을 안고 매 주일 예배의 장으로 나아오는 거룩한 습관이 있습니까? 혹시 이 습관을 다른 어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빈번하게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일은 없으십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집을 찾아 그를 예배하는 일- 이 일이 우리의 평생에 양보할 수 없는 우선 순위의 습관이 되게 하십시오. 예배는 성도의 기본 동작입니다. 이 기본자세가 흔들리면 우리의 인생 전체가 흔들린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2.예배의 목적은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도대체 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것입니까? 예배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오늘의 또 하나의 본문인 마태18:20은 두 세사람 성도의 모인 곳에 주께서 그들 중에 계실 것을 약속합니다. 주경학자 프레데릭 브룬너(Frederick Dale Bruner)는 여기서 두 세 사람은 신약 교회의 성도의 공 예배가 성립하는 최소단위라고 지적합니다. 유대인들의 경우에는 공 예배의 최소 단위를 장년 남자 10명이라고 전통적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 세 사람의 거듭난 성도만 있어도 예배는 성립할 수 있다고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진정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할 목적으로 모인다면 주께서 그들 가운데 당신이 임재 할 것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부르너 교수는 이 본문을 좀 더 주의해서 들여다보면 예수님은 당신이 거기에 임재할 것을 미래형으로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현재형이라고 지적합니다. 영어로 표현해 보면 “I will be in their midst” 가 아니라 “I am in their midst"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몇 사람이 모였던 진지한 예배가 진행되는 곳에 예수님은 이미 " I am"으로 임재하십니다. 그것은 얼마나 고귀한 특권입니까? 우리가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우리를 자기 목숨까지 드려 사랑하신 주님을 예배하는 순간 이미 여기에 와 계신 그분을 실제로 만나는 것입니다.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예배는 그분과의 만남에 초점이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를,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 속에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찬양의 가사의 주제이신 주님을 찬양하며 만나야 합니다.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헌금을 드리며 우리의 헌물을 받으시는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말씀의 유일한 초점이신 예수님을 말씀의 선포를 통해서 만나야 합니다. 그럼으로 그분의 임재가 느껴지도록 전심으로 찬양하십시오. 그분의 임재가 느껴지도록 집중해서 기도하십시오. 그분의 임재가 느껴지도록 그분에게 당신의 사랑을 드리십시오. 그분의 임재가 느껴지도록 말씀속에 그분의 음성을 기울여 들으십시오. 예배의 성공의 열쇠는 ‘집중’입니다. ‘집중’은 영어로 ‘concentration’이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con과 center라는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함께’ ‘중심으로’ 나아간다는 말입니다. 함께 우리의 예배 그 한복판에 영으로 임재하시는 그분 앞으로 나아가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그것이 바로 예배의 본질이요 예배의 목적인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예배의 목적은 주님의 임재를 경험함이며 그런 예배의 성공은 집중입니다. 집중하여 말씀을 듣고 집중하여 찬양하고 집중하여 기도하고 계십니까?
3.예배의 축복은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배의 가장 큰 축복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배의 장에서 하나님을 만나면서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바로 설수 없는 거룩하지 못한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것이 이사야의 체험이 아닙니까? 선지자 이사야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 성전에 들어가 엎드려 하나님을 예배하던 순간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천사들의 찬양소리를 듣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순간 바로 그 순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스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 순간 그의 고백이 무엇이었습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으로 왕이신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그는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룩한 하나님의 도구로 새롭게 보내심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령한 예배의 축복입니다. 주님도 산상수훈에서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습니까?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태5:23-24)고. 본문 마태 18장의 교훈도 같은 맥락에서 주어진 말씀입니다. 두 세 사람의 예배와 기도의 교훈은 사실상 마태18:15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15절 이하는 죄를 범한 형제를 교회 안에서 다루는 문제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풀리면 하늘에서 풀리고 이런 것들이 해결 안되면(매인바 되면)우리의 기도도 예배도 응답이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예배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교정하는 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배할 때마다 변화되고 예배할 때마다 성숙하고 예배할 때마다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축복입니다.가장 단순한 예배의 정의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을 닮게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바라보는 대상을 본능적으로 닮도록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청교도 작가인 나타나엘 호손의 명저 ‘큰 바위 얼굴’이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어느 평화로운 시골 마을 산마루에 보기만 해도 준엄하고 자애로운 큰 바위 얼굴이 있었는데 이 마을에는 이 얼굴을 닮은 주인공이 그 마을에서 나오리라는 오래된 전설같은 예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의 출현을 기다립니다. 처음에 게더 골드(황금을 모으는 자)라는 상인 부자가 등장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환호했지만 그는 불쌍한 이들에게 동전 몇푼을 던져줄 뿐이고 끝내는 재산을 탕진합니다. 그 후에 피와 천둥의 노인이란 별명의 장군이 등장합니다. 그는 용기있는 사람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이 기다려온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 후에 올드스토니 피츠라는 정치인이 등장합니다. 그는 언변에 능했지만 역시 마을이 기다려온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시를 쓰는 시인이 등장합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매혹을 느꼈지만 그는 스스로 자기가 그 바위 얼굴을 닮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전설의 주인공은 등장하지 않는다고 실망한 마을 사람들에게 연설하는 그 마을 출신의 어니스트를 향해 시인이 소리칩니다. “어니스트다! 어니스트야. 보라 그가 닮았다”고--그렇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기다려온 사람은 그들 중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아침에도 저녁에도 늘 그 바위를 보고 살았습니다. 그는 젊어서도 늙어서도 그 바위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살았습니다. 그 바위가 그의 안식이었고 위로였고 희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바위를 닮아갔던 것입니다.만일 예배가 우리의 거룩한 습관이 된다면 인생의 아침에도 그를 바라보고 인생의 황혼에도 그를 바라보고, 성공할 때도 그를 바라보고 실패할 때도 그를 바라보고 산다면 무슨 일어날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를 바라보며 그를 닮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특권이요 축복입니다. 예배를 거룩한 습관으로 삼는 일생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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