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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누가복음

누가복음 17장 11-19절 예수님의 VIP(18) 감사를 잊지 않은 사람 - 이동원 목사

by 재영구리 2023.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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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눅17장 11-19절
설교제목 : 예수님의 VIP(18) 감사를 잊지 않은 사람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의 하나가 ‘기억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어떤 것은 결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컨대 시편 103:2에 보면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또 어떤 것은 기억하지 말고 잊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예컨대 이사야 43:18에 보면 우리가 새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인생의 혼란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리고 사는가 하면 반대로 잊어야 할 것은 잊지 못하고 기억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제가 워싱톤에서 목회할 때 크리스마스가 가까운 어느 날 전화 한통을 받았습니다. 한 자매가 병원에서 출산을 하다가 큰 쇼크를 받았는데 심방을 와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서 보았더니 생명은 건졌는데 기억을 상실한 것입니다. 아무 것도 기억을 못해요. 자기가 엄마라는 것도 지금 출산하기 위해 병원에 온 것도 남편도 기억을 못해요. 밥을 어떻게 짓는지, 커피를 어떻게 타는지도 잊었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영적인 것과 관련된 것은 다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평소에 암송하던 성경 구절들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고 찬송가 가사들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담임목사인 저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남편도 잊었는데 목사인 저는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그런데 이 분은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서 점차로 기억력을 회복하게 되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그 남편이 주께 헌신하여 신학공부를 하고 지금 이 자매님은 목회자의 아내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많은 것을 잊었지만 잊지 말 것을 붙들고 산 것이 새 인생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을 만나 치유를 경험했던 열 명의 나병 환자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열 명이 함께 예수님께 치유를 호소했고 나란히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치유 받은 열 명중 오직 한 사람만이 주께 돌아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한 사람만이 감사를 잊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사람이 감사를 잊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는 이 사람을 통하여 감사를 잊지 말고 살아야 할 이유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감사를 잊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1. 과거의 모습을 잊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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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우리가 감사를 망각하는 것은 과거를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치유를 경험한 사람들이 정말 자기가 나병 환자로서 겪어야 했었던 수모와 불행한 과거를 기억한다면 어찌 감사를 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중 한 사람만이 유독 감사를 망각하지 않을 수 있었던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18절의 예수님의 말씀을 주목해 보십시오. “이 이방인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여기서 예수님은 돌아온 그가 이방인이었다는 것을 주목하신 것입니다. 저는 그의 이방인 됨-그것은 그의 핸디캡이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가 치유를 경험했을 때 더 큰 감사와 감동을 느낀 이유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 나 같은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셨구나!” 이것이 바로 그가 주께 돌아와 주 앞에 엎드려 감사하게 한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평생을 감사함으로 살아간 좋은 샘플 인생이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기의 과거의 모습을 잊지 않은 까닭이었습니다. 사무엘하 7:18을 읽어보십시오.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그렇습니다. 그는 왕위에 앉아서도 가난한 목동으로 고생하던 그 과거를 잊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과거의 모습을 조용히 떠올려 본다면 또한 감사의 조건들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보다 근본적이고 영적인 과거를 잊지 말고 생각하라고 권면합니다. 에베소서 2:11-12입니다. “(11)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도 육체로부터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은 자들이라 (12)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것이 바로 우리의 과거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의 소망을 갖고 여기서 살고 있다는 것--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이 감사를 잊지 말아야 할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이유인 것입니다. 우리의 과거 말고 또 다른 감사의 이유가 있을까요?

2. 현재의 감동을 붙들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감사의 영성으로 한 평생을 살고자 한다면 우리의 과거를 기억하는 것 못지않게 현재의 감동을 붙잡고 살 줄 알아야 합니다. 사실 행복감이라는 것은 순간순간의 감동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만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들은 믿음과 순종의 도상에서 치유를 경험한 것으로 보여 집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여기서 ‘가다가’라는 말은 원문에 ‘현재 부정사(huipagein)’로서 영어로 번역하면 ‘going’입니다. 제사장을 만나러 길을 가는 도상에 길을 가면서 깨끗함을 경험한 것입니다. 저는 틀림없이 나머지 아홉 명에게도 감사의 마음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인가 그분을 뵈러 가야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한 사람은 그것이 내일까지 아니 언젠가의 미래로 미루어 둘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곧장 예수님께 달려온 것입니다. 그는 현재의 감동을 현재의 감사로 드리고 싶어 한 것입니다. 저는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전서 5:19에서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권면한 의미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고 믿습니다. 성령의 감동이 임하면 그 즉시 행하는 것이 바로 현재의 행복을 누리는 길입니다. 오래 전부터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이런 경험을 가르쳐 “성령에 ‘민감해야 한다’(sensitive)”는 표현과 함께 사용해 왔습니다. 저도 얼마 안 되는 믿음의 여정이지만 기도하다가 문득 누군가가 생각이 날 때 연락을 해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대로 했을 때 그것은 언제나 기쁨이었습니다. 언제나 행복이었습니다. 언제나 경이로움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미루어 두는 것은 언제나 후회였고 언제나 아픔이었습니다. 감사의 영성으로 한 평생을 살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현재의 감동에 민감하십시오. 지금 성령이 감화하고 감동하는 대로 하십시오. 성령을 소멸치 마십시오. 지금 찬양하십시오. 지금 고백하십시오. 지금 도우십시오. 지금 감사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은 언제나 감동일 것입니다. 오늘도 감동이고 내일도 감동일 것입니다. 그것을 가르쳐 옛날 수도사들은 ‘현존의 행복’(Happiness of Present Moment)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이 사막에서도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이 현존의 행복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성령께 순종하는 행복이었고 지금 성령께 순종하는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감사를 잊지 말고 살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3. 미래의 여정을 기대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가야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누가 이 남은 길을 행복하게 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말할 것도 없이 감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오늘을 인해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감사할 내일이 준비되는 것입니다. 현재를 인해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감사할 미래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펄전 목사님은 “촛불을 인하여 감사하는 자에게는 달빛이 주어지고 달빛을 인해 감사하는 자에게는 햇빛이 주어지고 햇빛을 인해 감사하는 자에게는 햇빛도 필요없는 천국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본문의 주인공이 경험한 행복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자, 그가 치유 받고 돌아와 주 앞에 엎디어 사례하자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19절입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그가 육체의 치유를 인하여 감사했더니 그의 영혼의 구원을 보장하신 것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이 말씀이 단순히 그가 믿음으로 육체의 치유를 받은 것을 확인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른 9명은 믿음으로 제사장에게로 가는 그 길을 가지 않았던 말입니까? 여기서의 주께 나아와 엎드림은 명백하게 이제 그가 남은 인생길을 그가 예수를 의지하고 갈 준비가 되어 있음을 고백한 것이고 그가 이 믿음으로 영혼의 구원을 입고 예수의 참 제자가 된 것을 뜻하는 선언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축복의 미래를 여는 열쇠입니다. 오늘의 답답한 현실을 극복하고 새 미래를 열고자 하십니까? 그러면 멋진 감사의 제단을 쌓으십시오. 여러분, 존 데이비슨 록펠러(John Davision Rockefeller)를 아십니까? 그는 세계적인 부자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빛과 그림자를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한때 대중들에게 ‘더러운 자본가’라는 평을 듣기도 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그는 ‘악의 화신’이란 악명도 얻게 됩니다. 그로 말미암아 ‘반 독점법’이 만들어 지기도 했습니다(한때 미국 부의 98%를 독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43세에 미국에서 가장 큰 회사를 소유하게 되었고 53세에 억만장자가 되어 세계 최대의 부호가 됩니다(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그의 재산은 빌 게이츠의 세 배를 소유한 것으로 평가). 그러나 그는 결코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나이 55세에 그에게 일생일대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기관지, 탈모증, 신경병, 위궤양, 탈진 등으로 그는 쓰러집니다. 정말 종합진단결과 그는 이런 몸과 마음의 상태로 일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결정적인 경고를 받습니다. 그는 하루 100만불을 벌었지만 그 모든 돈이 이제는 무의미하게 느껴졌고 그는 자지도 먹지도 못한 채 몇 날을 보내다가 한 밤중 침대 옆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는 본래 부모의 영향으로 침례교회에서 자라난 믿음의 사람이었고 어려서부터 십일조를 드리는 성실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돈을 많이 벌자 사실상 십일조도 어려워졌고 그의 믿음 생활은 형식화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하나님 앞에 엎디어 어려서의 하나님과의 약속을 기억하고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회개의 기도를 드리다가 갑자기 “하나님은 내 모든 것이 되신다”고 소리치며 일어납니다. 이 일 직후 그가 영적 지도자로 신뢰했던 프레드릭 게이츠(Frederik T. Gates) 목사와 의논하고 자신의 십일조로 록펠러 재단을 만들어 본격적인 자선 사업과 선교 사업을 시작합니다. 그는 머지않아 이 재단에 수입의 절반 이상을 드리게 됩니다. 그는 어려서 십일조를 의무로 드렸지만 이제는 십일조를 감사로 드린다고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때부터 유명한 시카고 대학을 위시한 12개의 종합대학, 12개의 단과대학과 뉴욕의 리버사이드 교회를 위시한 4,928개의 교회당을 지어 헌납하게 됩니다. 55세를 넘기기 어렵다고 했던 그는 98세까지 살며 ‘더러운 자본가’대신 ‘위대한 자선가’의 간증을 남기게 됩니다.

그의 나이 98세,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느끼는 순간 그가 55세 때 침대 곁에 무릎꿇던 모습으로 엎드려 이렇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 나의 하나님, 제 인생의 전반기 55년은 쫓기며 불행하게 살았지만 지난 43년은 정말 행복했습니다. --그동안 저를 지켜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그만 주님과 제 마음에 간직한 제 사랑 제 아내를 만나고 싶습니다. --이제는 여한이 없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밤이 지난 새벽 그는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는 어떤 감사를 드리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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