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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3장 1-3절 웰빙교회 레슨(2) 고린도 교회 - 이동원

by 재영구리 2023.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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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고전3장1-3, 12장26-31
설교제목 : 고린도 교회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정반합(正反合)이란 말이 있습니다. 본래 이 단어는 철학 용어로서 사전적인 정의에 의하면 하나의 주장(정, 테제)과 그 반대되는 주장(반, 안티테제)과의 갈등을 통해 새로운 합이 창출된다는 것입니다. 본래 철학자 헤겔의 변증법을 도식화한 것으로 헤겔 본인에 의해서는 사용된 적이 없지만 헤겔 이후 그의 논리학을 해설하는 과정에서 붙여진 용어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사회 발전을 해석하는 매우 보편적인 패러다임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저는 오늘의 한국 사회의 갈등도 이런 틀로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한동안 우익 이데올로기 일변도였던 우리 사회가 최근에는 때 늦게 제기된 좌익 이데올로기로 갈등하면서 이제 새로운 합일을 찾기 위한 교차로에 서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같은 패러다임을 우리의 신앙 발전 과정에도 적용해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지나치게 이성적으로 발전하면 우리의 감성의 영역이 빈곤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반작용으로 우리는 매우 극단적인 신비 신앙에 몰두하게 됩니다. 반대로 우리의 신앙이 지나치게 감정적으로만 발전하면 이성적인 판단이 결여되어 매우 비이성적인 신앙의 모습으로 기울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두가지 대립적인 신앙의 형성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이성과 감성을 통합하는 보다 인격적인 신앙의 합일을 이루어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됩니다. 초대 교회중 이런 두가지 극단의 신앙의 성향으로 갈등하고 있었던 교회가 고린도 교회이었습니다. 세속주의가 고린도 도시의 삶의 스타일이었다면 이 도시에서 기독교 신앙을 수용한 고린도 교회의 신앙 스타일은 신비주의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따라서 고린도 교회의 신앙인들은 누구나 세속주의와 신비주의라는 두개의 극단적 삶의 스타일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 당시 “고린도인처럼 산다”는 말은 도덕적인 기준을 포기한채로 매우 세속적인 죄에 몰두하는 삶을 산다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무역항을 끼고 발전하던 상업도시로서와 로마의 검투 경기를 수용한 스포츠 오락도시의 영향으로 고린도 시민들은 황금과 오락에 빠져 죄의 안락한 심연으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바울사도는 주후 50년경 그의 제2차 전도여행중 이 도시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합니다. 유대인 회당과 유스도라는 사람의 집을 중심으로 전도하던 그의 선교의 결실로 드디어 고린도 교회가 탄생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다음 선교지 에베소로 떠난 후 고린도 도시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인 교인들 가운데 더러는 교회 안에 들어왔지만 여전히 세속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부도덕에 빠져 들게 되었고, 더러는 죄에 빠지는 대신 신앙의 황홀한 감정에 몰두하는 신비적인 신앙을 형성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신앙의 극단을 벗어나 건강한 신앙을 형성하도록 권면할 필요를 느껴 붓을 듭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서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고린도 교회에서 배워야 할 건강한 교회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1.성령의 역동이 있는 교회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은사를 사모했습니다. 그것은 잘한 일이고 당연히 그래야만 했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역사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성령의 깊은 은혜속으로 나아가고 싶은 영적 욕구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거듭난 성도들의 지극히 자연스런 욕구라고 믿습니다. 바울사도는 이런 욕구를 가지고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고 있던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고린도 전서12장에서 14장까지 무려 3장에 걸쳐 성령의 은사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의 바울의 권면은 대체로 한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영적인 일에 대하여 무지한 성도가 되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는 신령한 은사들을 사모하라는 것이고, 셋째는 그러나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는 사람들일수록 교회안에서 덕과 질서를 세우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 권면은 신령한 일에 대하여 무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전12:1의 말씀이 어떻게 시작되고 있습니까?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라고 말합니다. 3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예수를 주로 믿고 고백하게 된 것 자체가 성령의 역사이었다고 말합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예수를 만난 우리가 성령에 관심을 갖고 성령의 은사를 알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바울은 그래서 둘째 권면으로 그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가르칩니다. 바울 사도는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을 열거한 다음 본문 고전12:31에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가르칩니다. 고전14:1에서도 “사랑을 추구하되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고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이어서 셋째 권면으로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는 사람일수록 교회의 덕과 질서를 세워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저는 지난 13년이상의 우리 교회 사역에서 우리의 신앙의 기초인 말씀사역을 충분히 다져 왔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조심스럽게 성령사역에 대하여도 사역의 지평선을 넓혀갈 필요를 느끼고 있습니다. 몇주 전에 있었던 특별 심야 기도회도 그런 의도를 가지고 기획된 집회이었습니다. 나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성령에 대하여 목마르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나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우리 교회 안에서도 성령의 생수를 깊이 마시고 춤추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가지 중요한 우리 공동체의 윤리적 약속이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은사추구는 철저하게 교회의 덕과 질서를 위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시대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성령 사역을 오픈하다 보면 교회내에서 영적 지도를 받으며 건강하게 은사를 추구하기보다 교인들을 데리고 무분별하게 여기 저기 은사집회를 돌아다니며 가정을 등한히 하고 자기가 속한 교회를 세우지 못하는 철없는 성도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에게 고전14장 전체를 통하여 두가지 단어를 반복합니다. 덕을 세우라고 질서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령운동이 비윤리적 운동으로 오해받지 않고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건강운동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꿈꾸는 교회-그것은 성령의 역동이 있는 교회입니다.

 

2.성숙을 필요로 하는 교회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배우는 건강 교회의 두 번째 레슨은 무엇보다 우리 교회가 성숙한 교회가 되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은사들을 추구하는 남다른 열정을 가진 교회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가 영적으로 미성숙한 교회, 따라서 더 자라가야 할 교회라고 진단합니다. 우리의 영적 성숙의 가장 현저한 표지는 남을 배려하고 공동체를 세울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는 이런 것들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조금 은사를 경험하고 받았다고 해서 안하무인처럼 행동하는 성도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특별히 방언의 은사를 체험한 성도들에게서 그런 모습들이 보인 것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고전14:19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말은 결코 방언을 무시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도는 고전14:39에서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언은 은사중의 하나일 뿐이고 방언을 하는 것이 결코 영적 우월감의 표지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전12:30에서 사도는 어떻게 말합니까? “다 병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우리는 서로의 은사의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서로를 정중하게 배려하고 사역할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 성숙인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성령을 사모하고 은사를 사모하는 교회이면서도 영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상당한 혼란을 겪고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인이 진정한 의미에서 영적으로 자라나지 못한 성도들이 많은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고전3장에서 육신에 속한 자들이요 영적 어린 아이들이라고 말합니다. 영적 아이들의 가장 현저한 삶의 특성이 무엇입니까? 아이들이 모여서 서로 어울릴 때 제일 많이 하는 일이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서로 싸우는 일입니다. 바울사도는 영적 성숙이 지체된 성도들의 모임에서 제일 두드러지게 관찰되는 현상이 바로 시기와 질투라고 지적합니다. 그것은 누구를 지도자로 따를 것인가? 혹은 누구의 은사가 더 우월한가? 따위의 이슈들이었습니다. 자, 고전 3:1을 보실까요?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자 곧 그리스도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3절에서는 이런 아이됨 혹은 육신성의 특성을 어떻게 지적합니까?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그래서 우리는 자라가야 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자라갈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하는 것이 자라가는 것입니까?

 

3.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입니다.

 

고린도 전서 12장을 가리켜 우리는 흔히 은사장이라고 부릅니다. 이 은사장이 어떤 교훈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까? 31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전12-14장에 이르는 영적 은사의 교훈에서 바울 사도가 가장 여러 구절을 통해 다룬 은사는 방언의 은사였습니다. 아마도 고린도 교회내에서 고린도 성도들이 가장 귀하게 여겼던 은사가 방언의 은사였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또한 그 만큼 방언의 은사를 둘러싸고 성도들 사이에 논난이 일어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제 바울은 방언에만 관심을 고착시키지 말고 더욱 큰 은사들을 사모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은사문제에 있어서 무엇보다 관심을 가지고 추구해야 할 가장 좋은 길을 추구하라고 촉구합니다. 이 제일 좋은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12장 다음이 어디로 연결되는 가를 주목하시면 됩니다. 13장-사랑 장이지요. 그렇습니다. 사랑은 가장 좋은 길, 가장 귀한 은사요 우리 모두가 그 무엇보다 먼저 추구할 것입니다. 고전 13장에 이어 연결되는 14장 1절이 무슨 말씀이었습니까? “사랑을 추구하며--”입니다. 아마도 고린도 교회는 디도 유스도라는 사람의 집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행전18:7-8을 보십시오.“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침례)를 받더라”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하여 유대인 회당을 찾아 복음을 전했을때 복음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생겨나자 회당 바로 옆에 있던 디도 유스도의 집에 초청하여 거기서 회당장과 여러 사람들이 마침내 예수를 믿고 고린도 교회는 태어난 것입니다. 유스도에 집에 모여 서로 몸을 부딪치며 복음을 이야기하고 함께 찬양하던 바로 그곳이 고린도 교회 탄생의 요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기독교 공동체가 그런 것처럼 회심자의 숫자가 많아지고 집에서 모이던 교회의 분위기를 상실하면서 고린도 교회는 급속히 사랑을 잃고 논쟁하는 교회로 분위기가 변질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그 사랑의 요람으로 돌아가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교회가 주일 모임뿐 아니라 목장 교회를 강조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닙니다. 사랑은 동사입니다. 사랑은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의 장을 가질때 비로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12명 미만의 사람이 작은 교회로 모여 서로를 돌보고 그리고 구체적인 선교와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우리의 이웃들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일-사랑을 실천하는 일-그것은 방언보다 더 귀하고, 예언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사랑을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신 주님은 이 사랑을 나눔을 위하여 우리로 공동체로 살라고 우리를 한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지체의 삶의 모습이 무엇입니까? 다시 본문 12:26을 보십시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교회이고 이렇게 사는 것이 성도의 삶의 본질인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의 말은 얼마나 진리입니까? “본질적인 것에 일치를, 비 본질적인 것에는 관용을, 그리고 모든 것에 사랑을!” 바울 사도의 고린도 교회에 대한 결론적 교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고전16:14입니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입니다. 선교사 데이비드 리빙스톤의 전기 작가가 아프리카를 여행하며 그가 사역했던 곳들과 사람들을 만나 그가 거기서 무슨 설교를 했는지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를 묻습니다. 그런데 이 작가가 가장 많이 들어야 했던 대답은 하나였습니다. “우리는 그가 무슨 설교를 했는지,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 잘 기억 못하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는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그렇게 우리를 사랑했습니다.”이것이 우리의 모습, 우리 교회의 모습이 될 수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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