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갈1장6-8, 6장7-10
설교제목 : 갈라디아 교회
설교자 :이동원 목사님
한 잡지에서 건설회사 CEO에 대한 글을 인상 깊게 읽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CEO들이 골프를 건강의 방편이나 비즈니스 교제의 장으로 활용하는 시대에 이 기사의 주인공은 골프대신 매일 아침 산행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산행을 선택한 이유가 흥미로웠습니다. 그것은 그가 경영인으로서 초심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는 산이야 말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고백합니다. 산행의 기본은 자기가 출발했던 자리를 확인하는 것이며 그 곳이 그가 돌아와야 할 자리임을 잊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산행의 귀로에서 그는 늘 자신이 출발했던 자리에서 어떻게 얼마나 길을 벗어나 살아왔는가를 자성한다고 합니다. 불가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처음으로 귀의한 사람을 초발심자(初發心者)라고 부르고 이런 분들이 처음 읽도록 하는 일종의 불교 공부 입문서를 가르쳐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이라 일컫습니다. “초심자들이 자신을 일깨우기 위해 경계하는 글”이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초심자를 위한 글이면서도 심지어 오래 동안 수행을 해온 승려들에게도 늘 다시 읽혀져야 할 책으로 추천된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초심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바울사도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갈라디아서라는 서신을 쓴 이유도 바로 갈라디아 성도들로 하여금 초심을 잃지 않고 살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의 첫 번째 전도여행(주후45년경)에서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지역등을 방문하는데 이 지역들을 통칭하여 갈라디아 주(남부 갈라디아)라고 부릅니다. 아마도 이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첫 번째 전도여행 직후에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주후 49년경이었을 것입니다. 갈1:2에 보면 이 갈라디아서는 한 교회가 아닌 남부 갈라디아 지방에 위치한 여려 개척교회들을 대상으로 기록한 편지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2절)라고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회들을 개척하고 이 지역을 떠난지 3-4년이 지난 시점에서 처음 복음을 받아드렸던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들과 성도들이 초심을 잃고 갈등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편지를 쓰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갈라디아서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갈라디아서를 통해 우리가 배우는 건강교회의 교훈을 살피고자 합니다. 갈라디아서가 교훈하는 건강교회-어떤 교회일까요?
1.은혜의 복음을 지키는 교회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편지의 서론인 본문에서 갈라디아 교회의 어떤 성도들이 은혜의 복음을 지키지 못하고 떠나고 있음을 개탄하고 있습니다. 6절을 읽어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학자들은 바울이 갈라디아를 떠난 후 유대인들 가운데 소위 율법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와 갈라디아를 갈라지게 하고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성도들의 삶의 표준으로 지켜져야 할 것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는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서신이 기록되던 당시의 예수믿는 것외에도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참 백성이 되고자 한다면 할례와 같은 의식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런 우리의 의식 지킴이나 어떤 특별한 종교적 행위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사도는 그것은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죽으심을 헛되이 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갈2:21의 사도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구원의 조건으로 예수를 믿는 믿음외에 무엇인가를 더해서 강조하든가 가르친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다른 복음이라고 경고합니다. 1:7-8을 다시 보십시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받은 복음이 은혜의 복음이라고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이들에게 베풀어지는 조건없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은 종교적 의식과 인간적 행위를 담보로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조건부 사랑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의 친구가 당신을 구하기 위해 조건없이 죽었는데 누군가가 찾아와서 “그럴 리가 없어. 그가 당신에게 받아낼 것이 있어서 죽은 거야”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친구의 순수한 사랑에 대한 모독이 아니겠습니까? 율법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회안에서 가르친 것들이 그런 가르침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단호하게 그것은 다른 복음이며 이런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는 순수한 복음을 가르치고 선포하는 교회입니까? 문제는 이런 오리지널 은혜의 복음이 변질되지 않고 10년후에도 20년후에도 변함없이 선포되고 가르쳐지는 일입니다. 나는 우리 교회가 역사가 흘러도 세월이 흘러도 이 은혜의 복음이 변질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선포되고 가르쳐지기를 기대합니다. 아니 우리들의 작은 교회 목장교회 내에서도 이 순전한 은혜의 복음이 변함없이 우리를 붙드는 교회가 되기만을 기대합니다.
2.성령의 열매를 구하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행위(비록 그것이 종교적 행위라 할지라도)와 상관없이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선포할 때 제일 염려가 되는 것은 그러면 이제 우리의 행위는 아무래도 좋은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아니 더 큰 은혜를 느끼기 위해서 죄를 좀 더 지어도 좋지 않은가라는 질문조차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사실 훗날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게 됩니다. 롬6:1-2이 바로 그 해답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만으로 우리의 새로운 삶이 가능할까요?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성령이라고 가르칩니다.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받는 순간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시작하십니다. 이제부터의 승리로운 인생-그것은 우리가 우리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구원받은 성도안에 아직도 존재하는 타락한 성품인 육체의 소욕을 따를 것인가가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갈5:16을 읽어보십시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5:19-21에서 사도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산 육체의 열매들을 열거합니다.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주술, 원수 맺기, 분쟁, 시기, 분 냄, 당 짓는 것, 분열과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의 삶이 바로 그런 열매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어 갈5:22에서 그는 성령의 열매들을 열거하지 않습니까?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그리고 절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옛날 청교도들은 이런 이야기로 이 대목의 진리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우리 안에는 옛 아담과 새 아담 둘이 살고 있는데 죄가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릴 때 옛 아담(옛 성품, 육신에 속한)아 나아가 반응하면 우리는 죄를 짓고, 새 아담(새 성품, 성령에 속한)이 나아가 반응하면 우리는 죄를 이기고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육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옛 아담을 살찌우는 것이고 성령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 새 아담을 살찌우고 그래서 우리는 변화된 삶을 살게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것이 바로 갈6:8의 본문의 말씀입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여러분과 저는 어떻습니까? 육체를 위해 심고 계신가요? 아니면 성령을 위하여 심고 계신가요? 육체의 열매를 사모하십니까? 성령의 열매를 사모하십니까? 갈라디아 교회에서 배우는 건강 교회의 레슨은 무엇입니까? 성령의 열매를 구하는 성도와 교회가 되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3.사랑으로 서로를 돌보는 교회입니다. 바울사도는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우리 안에 거하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우리가 선을 행할 첫째 대상은 무엇보다 믿음의 공동체에 속한 가족들이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거룩하신 성령은 구원받은 성도들안에서 하나님의 선을 행하도록 자극하고 동기를 부여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구원받은 성도들은 자연스럽게 선행에 대한 욕구를 갖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실 것은 그때 우리의 선행을 질투하는 마귀의 역사가 반드시 함께 한다는 사실입니다. ‘호사다마’라고 하지요. 좋은 일에 마귀가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한 일을 하다가 반드시 좌절을 경험합니다. 그때 영적으로 미성숙한 사람들이 흔히 보이는 반응은 이제부터 선한 일을 하지 말자입니다. 그렇게 되면 누가 제일 좋아할까요? 마귀만 좋아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하다가, 구제하다가, 선교하다가 봉사하다가 어려운 일 생겼다고 포기하면 안 됩니다. 마귀가 좋아하지 않을 방법으로 어떻게 더 잘 이 선한 일을 이루어 가야 할 것을 고민하셔야 합니다. 낙심은 예외 없이 마귀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그때 기억하실 말씀이 있습니다. 갈6:9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무엇보다 선한 일 하다가 성도들 사이에 관계의 상처를 입지 않도록 유의하셔야 합니다. 본래 마귀의 전문 사역이 이간시키고 참소하는 일입니다. 마귀를 희랍어로 ‘디아볼로스’라고 합니다. ‘디아’(dia)는 ‘사이에’라는 뜻이고, 볼로스(발로우)는 ‘갈라놓는다’(던진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인간관계의 상처를 사전에 조심해야 하지만 상처를 입었다고 해서 마귀가 좋아 할 반응을 보여서는 안됩니다. 고슴도치의 성숙은 그들이 등에 가진 그 많은 바늘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작은 상처들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껴안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건강한 부부는 상처없는 부부가 아니라 상처를 사랑으로 극복하는 것을 배운 부부들입니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해도 이제는 상처가 되지 않을 자리에 섰을 때 우리는 이제 이웃들을 돕고 세상을 변화시킬 준비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드는 공동체가 참으로 사랑과 돌봄의 공동체가 될 때 우리는 세상을 치유하고 변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갈6:10의 말씀이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사도는 이미 갈5:13에서는 “사랑으로 서로에게 종노릇하라”고 가르친바가 있었습니다. 6:2에서는 “서로의 짐을 지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다시 여기에서 우리 교회가 셀 공동체로 존재하는 이유를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다 사랑할 수는 없겠지만 만일 12명 미만의 이웃들이 우리에게 사랑할 가족으로 주어졌다면 그것은 가능한 사랑의 마당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물론 목장교회를 문제가 없는 만병통치의 공동체로 묘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때때로 우리가 사랑하고자 선한 의도로 다가 섰던 사람들에게 반대로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선함을 악함으로 곡해하고 오히려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 이웃들을 향하여 변함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시 다가설 준비만 되어 있다면 세상은 우리를 통해 ‘사랑으로 베푸는 선의 의미’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마침내 변화될 것입니다.
1956년 청년 선교사 짐 엘리엇(Jim Eliott)이 중남미 에콰도르 아우카 인디언 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접촉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그와 그의 다섯 친구들이 인디언들의 창에 찔려 죽임을 당했을 때 20대의 다섯 명의 순교자들의 미망인들과 먼저 회심한 인디언들이 모여 기도회를 열었을 때 누군가가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오, 하나님, 그들이 하나님을 몰라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들은 이렇게 사람을 죽이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모르오니 그들을 용서하소서. 그러나 우리로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들에게 사랑의 메신저들을 보내게 하소서. 아우카 족들에게 사나운 마음대신에 유순한 마음을 주소서. 오, 주님, 그들은 우리의 친구들을 창으로 찔렀나이다. 그러나 주여, 주는 이제 그들의 마음을 당신의 사랑의 창으로 찔러 주소서. 당신의 말씀으로 찔러 주소서. 그리하여 그들이 믿고 우리의 형제들이 되게 하소서”(영광의 문,325p) 그리고 이 기도를 드린지 꼭 3년이 지난 후 짐 엘리엇의 부인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자신의 남편을 죽인 일곱 남자 중 두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그들과 함께 앉아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었고, 아우카 족의 마을은 복음의 능력 앞에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바로 이런 복음의 능력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 교회에게도 진실로 필요한 것-더 넓은 주차장도 아니고, 더 넓은 공간도 아니고, 새 예배당도 아닙니다. 바로 이런 복음의 능력으로 무장된 사랑의 공동체의 회복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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