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예수님의 눈물
설교본문 : 히 5: 7
설교자 : 조용기 목사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의 눈물"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사람은 대단히 슬플 때 웁니다.
그리고 대단히 기쁠 때도 눈물을 흘립니다. 거짓된 눈물도 있지만 그러나 대개의 경우 눈물은 우리의 마음속 진실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짧은 공생애를 생각해 볼 때 예수님께서 웃으셨다는 말은 한곳에서도 나오질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셨다는 기록은 세 번이나 나타나고 있습니다.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버림받고 절망 가운데 허덕이는 인류를 주님께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서 사역하시면서 남모르게 수없이 주님은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신 장면을 다시 한번 살펴봄으로 우리들에 대한 예수님의 깊은 사랑과 자비를 체험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시면서 우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시면 베다니에 들렸는데 베다니에 들어올 때마다 언제나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의 집에 유하셨습니다. 저들은 조실부모하고 외롭게 삼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주님께서 그들에게 마치 부모와 같이 대해주고 형제와 같이 대해주셨습니다. 또 한번은 예수님이 저 요단강 멀리 계실 때 나사로가 병들어서 죽게 되매 마르다와 마리아가 급히 사람을 보내어서 예수님을 청했으나 예수님이 나흘만에 왔었을 때는 이미 나사로는 죽어서 무덤에 들어간지 나흘이 되었습니다.예수님께서 동구 밖에 계실 때 마르다가 뛰어나오면서
예수님의 발 앞에 그 몸을 내어던지고 슬피 울며 말하기를 "주님께서 이 자리에 계셨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며 통곡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말을 들으시고 냉담하게 대했기 때문에 놀래서 그가 예수님을 쳐다보니 예수님이 아주 슬픈 기색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장 자기 입술의 고백을 바꾸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면 들으실 줄 아나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당장 대답하셨습니다. 네 오라비가 살리라 그 말에 마르다는 도저히 감당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오라버니가 이미 죽어서 무덤에 들어간지 나흘째 되고 썩은 냄새가 나는데 어떻게 삽니까? 그래서 내 부활의 날에 우리 오라버니가 장차 살 줄 믿나이다 그렇게 미래로 미루어 보았을 때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내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못하리니 이것을 믿느냐 그러니까 마르다는 동문서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믿나이다"
여기에서 예수님과 마르다의 대답은 영원의 차원과 삼차원 세계의 대화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겠다고 하는데 마르다는 죽기 전에 왔으면 우리 오라버니를 살리겠다! 과거의 예수님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금 살리라고 하니까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미래 부활할 것을 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지금 부활이라고 주장하니까 그 다음에는 엉뚱한 대답을 했습니다. 이것이 영원과 삼차원의 대답인데 인간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손으로 만지는 체험의 세계 속에 살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분명히 분리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없고 오늘도 없고 내일도 없이 영원히 동일하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께선 나사로가 죽었던 살았던 상관할 것 없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러 오셨는데 마르다는 예수님이 과거에 와서는 살지 지금은 못산다고 말했습니다. 주님이 지금 산다고 하니까 미래에는 살아나지 지금은 못살아난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과거로 밀쳐 버리고 혹은 미래로 밀쳐 버리고 현재 우리 가운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와 계시는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발버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기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내가 항상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너희 가운데 있겠노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과거의 예수님 미래의 예수님이 현재의 예수님과 다르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죄를 용서하신 그 예수님은 지금도 죄를 용서하시고 과거의 병을 고친 그 예수님은 지금도 병을 고치시고 과거의 귀신을 쫓아낸 그 예수님은 지금도 귀신을 쫓아내시고 과거의 파도를 잠잠케 하신 예수님은 오늘날도 우리의 심령과 가정에 몰아치는 파도를 잠잠케 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이 시간에 살아서 우리 가운데 이 자리에 와 계신 것입니다. 마르다가 예수의 현재 살아계신 역사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주님께서 가서 너의 동생 마리아를 보내라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항상 예수님의 발 앞에서 말씀을 열심히 들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마리아가 울다가 일어나서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서 그는 말했습니다 주께서 이곳에 계셨다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여기에 예수님께선 아주 실망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마리아도 똑같이 과거의 예수님을 인정하지 현재의 살아서 와 계신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시체를 어디다 두었느냐? 그 무덤에 가자! 그러니까 마르다와 마리아가 앞서서 가는데 머리는 산발이 되고 옷은 다 구겨지고 나흘동안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울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림자같이 쇠약해져서 허덕허덕하면서 앞으로 걸어가는데 수많은 유대인들이 함께 따라가면서 그들은 수근수근했습니다. 장님의 눈을 뜨게 한 그가 나사로가 죽지 못하게 할 수 없었던가? 그래서 예수님이 따라가시면서 그들을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고 통분하게 여기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시고 주님은 민망하게 여기셨다는 것은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그들을 도와주려고 왔는데 예수님이 계신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예수님께 의지하지 아니하고 그들이 절망만 생각하고 울고 몸부림치고 머리도 몸도 간수하지 아니하고 처참한 몰골로 걸어가는 것을 보고 주님께서 그들의 무지를 너무나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주님은 또 통분히 여겼습니다. 같이 간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비난합니다. 장님의 눈을 뜨게 한 자가 그를 죽지 않게 못했는가? 그래서 그 말을 듣고 주님이 분하게 여기셨습니다. 통분히 여기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올바르게 예수를 믿어주지 아니함으로 안 믿는 사람들에게 비난을 당하고 조소를 당하게 됨으로 주님께서 통분히 여기시는 것입니다.이래서 주님께서 나사로의 무덤가에 오셔서 마르다를 두고 말했습니다. 무덤의 돌을 옮겨놓아라. 마르다가 말하기를 주님이여 이미 무덤에 들어간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나이다. 그때 예수께서 벼락같은 고함을 쳤습니다. 마르다야! 내가 네게 말하기를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지 않았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지만 우리가 믿지 아니하면 주님은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믿음을 통해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주님께서 말씀하는 것입니다.오늘 주님께서는 여러분과 나의 믿음을 찾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만 있으면 주님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이 똑같이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올 때 믿는 자를 보겠냐고 탄식하셨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너무나 이기주의가 되고 이지주의가 되고 과학주의가 되고 이성주의자가 되어서 주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주님께서 역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여서 믿기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을 통하여 오늘날도 우리 가운데서 그 위대한 기적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마르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그
엄한 명령에 기가 눌려서 마리아와 함께 그들은 무덤의 돌을 옮겨놓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입니다.믿음이란 행함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이란 언제나 행함으로 증명되고 행함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믿음이 있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무덤의 돌을 옮겨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도와주어서는 안됩니다. 도울 수 없습니다. 그들이 믿음이 있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행위로써 돌문을 옮겨 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몸부림치고 발버둥치면서 돌의 움직임을 따라 몸을 돌에 부딪쳤습니다. 그리고 몸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돌을 옮겨 놓았습니다. 돌문이 열리고 썩은 냄새가 확 풍길 때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의 발판에 서서 주님은 그 나사로의 무덤 입구에서 외쳤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즉시로 나사로는 수의를 동인 체 살아서 걸어나오고 만 것입니다.
이 위대한 기적을 우리가 보고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주님께서 오늘 여러분과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보고 민망히 여기시고 우리의 믿음이 없음으로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비웃는 것을 보고 통분히 여기셔서 오늘도 주님께서 우시고 계십니다.
여러분, 하늘과 땅을 지으신 예수님이 왜 우십니까? 나사로가 불쌍해서 울지 않습니다. 왜? 살아날 것을 알고 계시는데 왜 울어요. 주님이 우신 것은 오늘날 주가 살아계셔서 우리 가운데서 기사와 이적을 행하실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우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하기를 "과거의 예수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미래에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안돼요"라고 말합니다. 지금 믿지 아니하는 우리를 보고 안 믿음으로 우리가 비극적인 상황에 떨어져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낙심하는 것을 보고 주님은 민망히 여기사 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기독교인들과 교회가 믿지 아니함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을 깔보고 미신이라고 말하고 이미 지나간 시대의 종교라고 하니까 주님께서 그 말씀을 들으시고 통분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예수 믿는 교회와 성도들의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예수님을 울게 하고 있는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면서 눈물을 흘리고 계시지 않나요? 혹시 예수님은 우리 여의도순복음교회 앞에서 문을 두드리며 눈물을 흘리시고 계시지 않나요? 우리의 불신앙이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회개하고 자복하고 우리의 불신앙을 저버리고 믿음으로 일어나서 그리스도가 웃으시게 만들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번째, 예수님이 우신 것은 예루살렘성에 마지막 입성하시면서 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러서 주님이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고 그 환난을 주님께서 미리 보셨습니다.누가복음 19장 41절로 44절에 보면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서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하시니라" 그리고 주님께서 우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내게 파송된 자를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은 것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고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않았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림받았으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심이라" 그리고 주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왜 주님께서 눈물을 흘리실까요? 이스라엘 백성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 삼여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서 주님이 복음을 전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사두개인과 교법사들이 함께 힘을 합쳐서 예수님을 배반하고 말은 것입니다. 그리고 곧장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아서 이방인에게 내어주어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권고하시는 날을 거부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주님 바라보고 우셨습니다. 꼭 주님께서 그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 말씀하신 후 40년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로마에 항거하여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주후 66년 로마에 반역했는데 3년 후에 베스파시아라는 황제가 디도 대장을 파견해서 예루살렘성을 공격해서 3년만인 주후 70년 함락시키고 60만 유대 민족을 죽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던지 피가 강물같이 흘러 예루살렘의 불이 피로써 꺼졌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이 훼파되었습니다. 성전이 불타서 성전 안을 금으로 장식했는데 금이 다 녹아서 돌 사이로 흘러 들어가니 로마군인들이 금 캔다고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게 다 무너뜨리고 훼파시켰습니다. 이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시고 그는 통곡을 하고 우시는데 오늘날도 주님은 이 세상의 멸망을 보시고 보좌에서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고함과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실 때 주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아 남은 자들이 하늘로 올라가 첫 부활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자 곧장 7년 환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다니엘서 9장 27절에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 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대로 7년 환난이 다가오고 7년 환난 동안에 적그리스도가 이 땅을 종횡무진으로 처참하게 짓밟을 것을 주님은 보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북한의 김정일 때문에 자유를 잃고 굶주리며 몸부림치며 도망칠 기회만 삼고 있는 우리 북한 동포는 그때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적그리스도에게 짓밟혀서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처참한 죽임을 당합니다. 그것을 보고 주님께서는 이미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환히 아시고 보좌에서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7년 환난 후에 아마겟돈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 그 전쟁에 온 세계 군인들이 다 모여서 혈전에 혈전을 벌여서 얼마나 피가 많이 흐르던지 피가 말굴레까지 닿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비극이 오늘 미래의 세계에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루살렘성의 멸망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며 우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이 세상에 종말과 거기에 다가올 처참한 환난을 바라보고 우십니다. 주께서 내가 너를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밑에 품으려고 애를 쓴 것 같이 얼마나 땅 끝까지 전도하며 품으려고 애를 썼던고, 그러나 너희는 나를 배반하였도다 보라 이제 너희와 너희 자녀들이 처참한 고난을 당할 것이요 죽음이 온 땅을 휩쓸려고 할 때 너희들은 그 고통 속에 빠지겠구나 우리 주님께서 이 땅을 바라보고 오늘날도 눈물을 흘리며 주님께서 통곡하고 계신 것입니다.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열심히 전도하는 것은 마지막 7년 환난 동안과 그리고 마지막 지구 최후의 전쟁 때 온 세상이 당할 그 처참한 고통에 가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열심히 전도하는 것이요, 그 이후로 주를 배반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지옥에 떨어져서 세세 무궁토록 고통 당할 것을 우리가 바라보고 저들을 고난에서 건지기 위해서 열심히 전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믿지 않고 자꾸 거역하며 죽음을 자초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보좌에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예루살렘 조그마한 성의 멸망을 향해서도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께서는 세계의 멸망을 향해서 어찌 주님께서 피눈물을 흘리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에 고난 당하는 사람들, 멸망당하는 사람들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피눈물을 흘리시며 통곡하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는 큰 통곡을 하시고 우셨습니다. 주님이 이 통곡을 하고 우실 때 얼마나 간절했던지 그 피하의 모세 혈관이 터져서 땀이
핏방울이 되어서 그 몸을 적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왜?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셨습니까? 그는 모든 사람이 자기를 떠나는 큰 외로움을 바라보고 그는 우셨습니다. 사람이 다 떠나가 버리고 오직 혼자 남아서 고난을 당할 때 그 외로움 속에 사람은 울게 되는 것입니다. 외로움이란 무서운 것입니다.
성경 이사야서 53장 3절은 그렇게 말합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버림받아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는 통곡을 하고 울었습니다. 고독은 하나님 아들조차도 울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또 우신 것은 대속의 잔을 마시기가 너무 괴로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왜? 하나님이 마시라고 내놓은 잔을 보니까 창세 이후로 마지막까지 인간이 지은 모든 더러운 죄악이 다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과 나의 모든 지은 죄악을 주님께서 잔에 다 담아놓았습니다. 우리가 받을 저주를 다 담아놓고 우리의 질병을 다 담아놓고 우리의 죽음을 다 담아놓고 주님께서 예수님 보고 마셔라 네가 대신 마셔라 네가 이 잔을 마시면 세상 사람들이 이 잔을 안 마셔도 되거니와 네가 마시지 아니하면 세상 사람들이 이 잔을 마시고 다 죽는다 그 잔을 마시고 살아날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만이 그 잔을 마시고 죽었다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예수님에게 이 잔을 마시라고 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 잔을 볼 때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진똥물보다도 더러운 그 흉악하고 냄새나고 무서운 잔을 마시라고 하니까 주님께서 그 잔 앞에서 통곡을 하고 울었습니다.
여러분, 마가복음 14장 33절로 36절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 때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려 될 수 있는 대로 이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그러면서 통곡을 했었습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주가 받으신 잔이 얼마나 쓰디쓴 잔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 잔을 들고 통곡을 하고 울었다니 여러분 생각을 해 볼일인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로 6절 말씀에 "저가 찔림은 우리 허물을 인함이요 저가 상함은 우리 죄악을 인함이라 저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웨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저에게 감당시켰도다" 한 것처럼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이 대신 마셨습니다. 어느 종교 지도자가 인류를 대신해서 그들의 모든 잘못을 대신 책임지는 종교주의자가 있습니까? 이 세상에는 훌륭한 종교지도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석가모니도 훌륭한 종교적인 철학을 주었습니다. 공자도 맹자도 훌륭한 윤리와 도덕을 주었습니다. 마호메트도 훌륭한 종교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인류를 위해서 그들의 모든 반역의 죄를 대신 마시고 걸머져서 청산해 주는 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습니다. 종교나 교훈이 우리를 결코 구원하지 못합니다. 천하 인간에게 구원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만이 우리를 대신하여 몸을 찢고 피를 흘리고 우리의 모든 죄악의 잔을 다 마셔주었기 때문에 우린 그 날개 아래 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그러므로 남녀노유 빈부귀천 할 것 없이 오늘날은 누구든지 이 상처 입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셔드리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당할 것을 생각하고 두려워서 떨며 울었습니다. 창세 후로 한번도 하나님과 나뉜 적이 없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 때문에 그 잔을 마시고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습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는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하나님이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무자비하게 심판하셨습니다. 이것을 생각하고 그는 몸부림치며 울었습니다.
시편 22편 1절에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나이까" 친아들이라도 우리의 모든 죄악을 짊어지고 갈 때 주님께서는 버림을 당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처참하게 버려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있는 최고의 심판을 내린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그 고통 가운데서 몸부림치며 통곡한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님은 당신이 고난을 당하고 눈물을 흘리며 몸부림을 쳐보았기 때문에 오늘날 고난 당하는 사람의 심정을 알고 그 형편을 알고 계십니다.
히브리서 2장 17절로 18절에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주님께서 직접 시험을 당하시고 직접 고난을 당하시고 눈물을 흘리셨기 때문에 오늘날 시험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여 눈물 흘리는 자의 심정을 주님은 너무나 잘 알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눈물 흘린 자 곁에 있어서 주님은 오늘날 우리를 도와주시고 위로해주시고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이러기 때문에 이러한 구주를 우리가 가졌으니 이 어찌 감사하지 않습니까? 우리를 위해서 울어주시는 우리 구주, 눈물을 흘려주시는 우리 구주, 그 눈물 속에 나타난 그 큰 사랑과 자비를 우리는 가슴 깊이 느끼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눈물로 태어난 자녀들인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눈물을 닦아드리고 예수님의 마음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녀가 되기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다해야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깨어진 몸과 흘리신 피를 대하며 생각해 보십시다. 주님이 당신의 깨어진 몸을 우리에게 나누어주면서 받아먹어라 당신의 혈관에서 뽑은 피를 우리에게 주면서 받아 마셔라 이는 너희에게 생명을 주는 떡이요 음료라고 말할 때 얼마나 주님께서 간절한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기를 원하셨기에 당신의 살을 양식으로, 당신의 피를 음료로 주어서 멸망하는 우리를 살리려고 애를 썼겠습니까? 이 속에 주님의 눈물의 들어있습니다. 깨어진 몸 속에 주님의 눈물이 있고 흘리신 그 피의 잔에 그리스도의 애타는 눈물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깨어진 몸을 먹고 흘리신 피를 마실 때 그리스도의 통곡을 기억하고 그리스도의 눈물을 기억하고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우리의 반역적인 행동을 회개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우리 주 예수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충성하여 여생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셨고 지금도 흘리시고 계심을 감사합니다. 이 깨어진 몸은 눈물의 몸이요, 흘리신 잔은 눈물의 잔입니다. 우리 눈물 없이 주의 깨어진 몸과 흘린 잔을 어떻게 먹고 마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의 그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고 그 사랑에 감동되고 변화 받아서 참으로 예수님을 위해서 남은 여생을 사는 우리들이 될 수 있도록 보혜사 성령이 도와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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