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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요한복음

요한복음 9장 1-41절 믿음과 경배 - 옥한흠 목사

by 재영구리 2023.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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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믿음과 경배      
설교본문 : 요한복음 9:1-41 
설교자 : 옥한흠 목사님

1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2제자 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 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 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 오니이까 3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 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4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 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 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 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 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8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 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 던 자가 아니냐 9혹은 그 사람이 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 다 하거늘 제 말은 내가 그로라 하 니 10저희가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11대답하되 예수 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12저희가 가로되 그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13저희가 전에 소경되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 더라 14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 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15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 어떻게 보게 된 것을 물으니 가로되 그 사 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16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 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 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 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 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 17이에 소경되었던 자에 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 니이다 한대 18유대인들이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 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19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20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21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 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22그 부모가 이 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 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 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23이 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저가 장성하였으니 저에게 물어 보시오 하였더라 24이에 저희가 소경되었 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 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25대 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 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 이다 26저희가 가로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27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 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28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29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 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 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30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31하나님이 죄인을 듣 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 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 리가 아나이다 32창세 이후로 소 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33이 사람 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 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34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 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 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 니라 35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 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37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 하는 자가 그이니라 38가로되 주 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39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 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 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바 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 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 도 소경인가 41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 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우리가 요한복음을 1장부터 계 속 읽어보면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 기사들 가운데 특별히 일곱 개만 선택해서 자상하게 기록해 놓은 것 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 님이 세상에 계실 때 이적 기사를 오죽 많이 행하셨습니까? 다른 복 음서를 보면 이적 기사들이 꽤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한 은 왜 하필 일곱 가지만을 선택해 서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그가 이야기하는 일곱 가지 이적 기사들은 하나같이 예수 그리스도 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냄으로써 우리로 그를 믿게 하려는 그 런 목적을 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9장에는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이 예수님 의 손에 의해 고침을 받아 눈을 뜨고 보게 되는 놀라운 이적 기사가 나옵니다. 다른 여섯 개의 이적 기사와 마찬가지로 이 이적 기사 역 시 한 가지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요 우리를 어두움에서 건져내어 영원 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는 유일 한 구원자 되심을 온 천하에 선포하기 위해 행하신 이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9장 전 체를 통해 소경 되었던 자가 눈을 뜨자마자 여러 사람들에게 예수님 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는 먼저 관심을 가지고 자기 주변에 몰려든 무리들에 게 예수님이 자기 눈을 뜨게 해주었다고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바리 새인들에게 불려갔을 때도 두 번이 나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눈을 뜨게 해 주었다고 증거했고, 자기 부 모에게도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세상적인 예수관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소경 되었던 그 사람이 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할 때 그가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이 조금 씩 바뀌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 은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이르게 되었는지 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됩니 다. 오늘 우리가 먼저 이 사실을 놓고 우리 자신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서 은혜 받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11절을 봅시다. 사람들 사이에 원래 소경이었던 사람이 밝히 보는 것을 보고 적지 않은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가 전에 구걸하던 걸인이 분명하다고 하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들은 전 혀 딴 사람이라고 우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실을 확인하고자 그 를 찾아와서 여러 가지 질문을 던 졌습니다. 그는 그들의 질문에 대 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 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 게 되었노라."

그는 자기 눈을 뜨 게 해주신 분을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이 호칭은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놓고 흔히 불렀던 이름으로, 소위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을 말합니다. 그 역시 소문으로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을 들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이름으로 예수님을 부를 때는 존경의 의미도 다소 담겨 있었지만 나사렛 촌구석에서 나온 무식한 놈이라고 하는 멸시하고 조 롱하는 의미가 더 많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라는 호칭은 이와 같은 대 중적이고 세상적인 예수관을 나타 내는 말입니다.

오늘날에도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은 이런 식입니 다. 그들은 예수를 기독교의 창시 자 내지는 석가모니나 공자와 같은 현인들 중의 하나로, 성자 중의 하 나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런 식으로 부르는 자들에 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진정한 믿음이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구원도 없습니 다. 소경 되었던 사람도 처음에는 이 정도 수준에서만 예수님을 알았 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라는 그 사람"이라 부를 그 때는 구원도 없었던 것입니다.

종교적인 예수관

이제 17절로 넘어가 봅시다. 17 절을 보면 소경 되었던 사람이 바리새인들에게 호출을 당하여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눈을 뜨게 되었으며, 그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지 에 대해 집중적으로 질문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선지자니이다

"(17절). 33절로 넘어가 보면 그가 예수님을 가리켜 '선지자'라고 말한 이유가 나옵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 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지자가 아니고는 자기 눈을 뜨게 하는 기적을 행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유대 나라에서 하나님이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자 친히 세우 신 영적 지도자에 대해 흔히 사용 되던 호칭입니다. 소경 되었던 사람은 이제 예수님을 그런 선지자들 중의 하나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았다는 점에서 '나사렛 예수'라는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보다 그의 믿음 이 진일보한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선지자로 보는 믿음으로는 절대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니고데모를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을 찾아 왔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지위가 높았고 신분이 특별했던 사람으로 예수님을 선지자로 보았던 전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 2절에 보면 그는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이렇게 인사했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라 는 말은 한 마디로 '선지자'라는 말 입니다. 예수님을 선지자로 고백하 는 것입니다. 좀 더 진일보한 종교 적인 관점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을 선지자로 보는 사람 역시 진정한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구원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 을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들려 주신 말씀에서 분명히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 라."

무슨 말입니까?

"나를 하늘로 부터 온 선지자 정도로 보는 네 눈 이 바뀌지 않으면 너는 절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도 이처럼 종교적인 관점을 가지고 신앙생활 을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습니다. 저는 어떤 형제가 자기 의 답답한 심정을 이렇게 토로한 것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이제 하나님이 누구 이신 지는 조금 알겠는데, 예수님 이 왜 필요한지, 예수님과 하나님 은 또 어떻게 다른지는 아직 잘 모 르겠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가 하도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니까 예수님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말하기도 하고, 찬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상 내면에는 예수님에 대 한 믿음이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 해서 더 깊이 모르니까 믿음이 안 생기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관점을 가지고 예수님을 보는 것이 대단한 수준인 것 같아도 그것 가지고는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정도의 자세를 가지고 는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는 참 믿음

그 다음으로 35절로 넘어가 봅시다. 소경 되었던 사람이 처음으로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를 보시고 대 뜸 이런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네 가 인자를 믿느냐?"

'인자'란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이 질문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느냐'는 말입니다. 이것은 그가 생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는 그 사람'이나 '선지자' 정 도로 알고 있었는데 이제 전혀 들 어본 적이 없는 '인자' 곧 '하나님 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듣게 된 것 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대답 합니다.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 까? 내가 믿고자하나이다"(36절). 누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가르쳐 주 면 그를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예수님은 '내가...'라고 하지 않고 '너하고 지 금 말하고 있는 자가 바로 그,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너무 감동을 한 나머지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하며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드디어 그의 믿음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자리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비록 하루 동안의 짧은 시간을 통해 있었던 과정이지만 '나사렛 예수'에서 '선지자'로,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 의 아들'로 그의 믿음이 발전한 것 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하고 바라보는 이 믿음이야 말로 성경이 이야기하는 참 믿음이요, 우리에게 구원을 줄 수 있는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가진 자만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소경 되었던 사람은 예수님 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이 믿음을 갖게 되자 완전히 딴 사람 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는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과 구별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부모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 모 든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 그 이상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의 사회 분위기도 누구든지 예수님 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기만 하면 사회로부터 완전히 도태시켜 버리는 공포 분위기였습니다(22절). 그런 살벌한 분위기에서도 소경 되었던 이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 을 알게 되었고, 알자마자

"내가 믿나이다."

라고 고백하는 놀라운 변화를 맛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 믿음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와 같은 참 믿음에 발을 들여놓기 위해서는 비슷한 과정을 거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예수로부터 시작해서 교회가 흔히 말하는 예수로 발전하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아들로 서의 예수를 우리 자신이 직접 발견하고 고백하게 되는 이런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를 한번 돌이켜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전도를 받고 믿게 된 그날 하루에 이 모든 과정을 다 거치고 참 믿음에 이르기도 합니다. 참 복 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 나 불행하게도 어떤 사람은 1년 이 상이 걸리기도 합니다. 심한 경우 2-30년이 걸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일학교에서 배워 막연히 믿게 된 예수에서 부모들이 자꾸 믿으라고 하니까 믿는 예수로, 그러다 수십 년이 지난 뒤에야 자기 입술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게 되 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 장 불행한 사람은 죽는 순간까지도 해결하지 못하고 가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세상이 이야기하는 예수나 믿음 좋은 부모들이 이야기하던 예수 이상은 모릅니다. 그래서 결 국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못하고 눈을 감는 것입니다. 우 리 중에는 이런 불행한 사람이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왕 믿으려면 구원받는 믿음을 가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구원받는 믿음이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부터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만이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과연 어느 과정에 있습니까? 아직도 사람들이 말하는 예수에 머물러 있나요? 아니면 교회가 말하는 예수인가요?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구원받는 참 믿음에 이르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이 시간 말씀 을 듣는 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되심 을 분명히 알고 고백하는 아름다운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과 경배는 하나다

우리는 9장에서 또 하나의 은혜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38절을 봅시다. 짧지만 저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을 뿐 아니라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구절입니다.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 하는지라."

소경 되었던 사람은 믿음을 고백하는 동시에 예수님께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경배를 했다 는 말입니다. 믿음과 경배는 결코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습니까? 예배합니다. 믿음과 예배 는 하나입니다. 내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 입니다. 내가 경배하고 예배한다는 것은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짧은 본문 안에 감추어 진 하나님의 놀라운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 느냐? 엎드려 절하라. 진짜 믿으면 너는 절하게 될 것이다. 네가 눈을 열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느냐? 보았다면 반드시 너는 엎드려 경배 할 것이다."하는 음성을 듣는 것입 니다.

혹자는 소경 되었던 사람이 엎 드려 절했다는 사실을 대수롭지 않 게 여길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기적적으로 눈을 뜨고 보게 된 것이 너무 감사해서 절을 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그저 그런 촌놈으로 보고 있는데도 오직 그만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고백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 요가 있습니다. 이 고백과 함께 했던 절은 여느 때의 절과는 다른 것 입니다. 절하는 것 그 자체가 특별 한 신앙고백이며, 그 속에 예배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적으로 보아도 소위 절을 한다는 것은 처한 형편이나 나라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다를 수 있습니다. 저는 이번에 일본 컨벤션에 참석하기 위해 며칠 동안 일본 에 가 있었습니다. 여섯 번째로 참 석하는 일본 컨벤션인데 580명의 일본 목회자들과 일본 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컨벤션에서 만난 어떤 선교 사님으로부터 굉장히 부담스러운 이야기를 하나 들었습니다. 제가 4 년 전에 그 집회에 참석을 했을 때 일본에서 저명한 지도자급에 있는 목사님 한 분이 저를 특별히 방문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 일어서서 그분을 맞이했습니다. 그는 일본 교회의 아주 중요한 지도자 중의 한 명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다 다미에 그냥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저에게 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저는 다급하게 엎드려 함께 맞절을 했습니다. 그때 저는 '아, 다다미방이니 까 인사를 하려면 이렇게 하는 것 인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던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4년 전의 이야기니까 그 일을 다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일본 컨벤션에 아주 유능한 선교사 한 분이 참석을 했습니다. 일본에서 목회와 선교를 위해 10년 이상 사역을 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이번 컨벤션에 참석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제 측근에 있는 어떤 사람으로부터 4 년 전의 그 일에 대해 들었나봅니다. 그런데 이 양반이 그 말을 듣고 굉장한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는 저에게 찾아와서 이런 말씀을 하세요.

"목사님,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예? 무슨 의미요?"

"무릎을 꿇고 절한다는 것 말입니다."

"아, 다다미방이니까 그랬겠죠."

그랬더니 그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일본 문화를 조금 이해를 하면, 그분이 엎드려 절한 것이 보통 큰 의미가 담겨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본에서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히고 바닥에 절을 하는 것은 신하가 왕에게 하는 경우가 아니면 자기가 특별히 존경하는 스승이나 정말로 자기가 평생 섬기고 싶은 어떤 사람이 있을 때 정말 깊이 생각한 다음에 하는 일이지 예사로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 그 럼 그 절이 다른 의미가 있다는 이 야기요?"

"그렇다니까요."



그 말을 듣고 제가 얼마나 부담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지난해 그분이 한국에 방문했을 때 저에게

"목사님, 저는 목사님을 위해서 아침마다 기도합니다."라고 했던 말도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선교사님은 저에게 이 런 말까지 했습니다.

"일본 사람은 한번 무릎 꿇고 절하면 절대 배신하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스트레 스 주는 말입니까? 저는

"존경합니다"라는 말을 듣는 게 제일 겁납니다.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우리가 정을 주고받는 말이니까 부담이 없는데, 편지로든 말로든 존경한다고 하면 보통 부담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말은 제일 싫어하는 말 중의 하나입니다. 사람이 조금 자유스러워야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나라나 문화에 따라서 엎드려 절한다는 것의 의미가 그만큼 다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소경 되었던 사람이 예수님 앞 에 엎드려 절하는 것 역시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초라한 옷을 입은 나사렛 청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말씀을 듣고 다시 보니 자기 앞에 계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십시오. 창세기로 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한 사람 치고 뻣뻣하게 서 있었던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그 영광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창조자 되신 하나님, 온 우주의 주가 되신 하나님,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임재 해 계시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 모두가 무릎을 꿇고 엎드렸습니다. 나중에 어떤 사람은 아예 혼백이 떠난 자처럼 그 영광에 압도되었던 것을 성경을 통해서 보지 않습니까?

믿음이 무엇입니까?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하고 고백하는 것이요, 동시에

"믿음의 눈으로 당신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봅니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믿음의 고백이 있는 순 간은 무릎을 끓고 엎드려 절하는 경배와 예배가 따라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이라 는 것은 예배요, 예배라는 것은 믿음입니다. 보는 것은 경배하는 것이요, 경배하는 것은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음의 눈으로 봅니까? 그러면 날마다 그 영광의 빛이 우리에게 비칩니다. 운전을 하고 가다가도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까? 그 고백이 우리 마음속에 우러날 때 자기도 모르게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고자 하는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이름을 존귀하게 하고 싶은 충동이 이는 것입니다.

"믿습니다."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경배가 안됩니까?

"믿습니다."

하면서도 그 이 름을 높이고 싶은 충동을 못 받습 니까?

"믿습니다."

하면서도 마음 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황홀 과 감격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그 믿음은 병이 들었든지 아니면 엉터리입니다.

"내가 믿나이다."

하는 믿음은 반드시 경배를 수반해야 하 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믿는 것과 예배하는 것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형식으로 따지자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로 말하면 믿는 것이 곧 예배하는 것 입니다. 우리는 믿음이라는 것을 무슨 시간이나 형식의 제한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왔으니까

"믿는다."고 말하고, 회사에 갔으니까

"믿는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나 회사에서나 가정에서나 길에서나 앉았을 때나 심지어 자다가 눈을 떠도

"주여,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언제 어느 곳에 있든지 믿음의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신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습니다."하고 고백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얼굴에 환하게 비치는 것입니다. 그 렇기 때문에 믿음은 길에서도 가능 하고, 가정에서도 가능하고, 차를 몰고 가면서도 가능하고, 어디에서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에게 예 배하고 영광을 돌리고 싶어 하는 마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일날 예배당에 왔으니까 예배드립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예배는 언제, 어 디서나 가능합니다. 믿음과 경배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즐겨 부르는 복음 송 중 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주 예수 이름 내가 생각할 때 내 마음에 기쁨 넘치네."

그렇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 마음에 기쁨이 넘칩니다.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예배하고 싶은 충동이 불같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 리의 믿음이 예배로 이어지고 있습 니까? 여러분은 그 영광의 빛 앞에 서 너무 감격스러워서 언제든지 예수의 이름을 찬양하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그 이름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예배자의 심정 이 있습니까? 입으로는 "예수. 예 수." "믿습니다."

하는데 마음은 온 통 다른 것에 빼앗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병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자의 심정이 있어야 요즈음 예배를 갱신하자는 말을 많이 합니다. 갱신하자고 하는 것 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어딘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병 이 들었든지 아니면 오염이 되거나 세속화되었든지, 뭔가 잘못됐으니 까 예배를 갱신해서 새롭게 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많은 사람 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 역시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예배가 병들어서 그런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미국 어느 신학교에서 어떤 교수가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학생들을 불러서 과제를 하나씩 맡겼습니다. 어떤 도시에 가서 그 동안 교회를 몇 번 다니다가 또 는 몇 년 다니다가 포기하고 나오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서 교회를 나오지 않는 이유를 조사해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약 300여명의 대상자를 찾아다니면서 조사를 했는데 그 가운데 90 퍼센트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대답한 내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배가 지루해서 못 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들이 출석했던 교회에 나와서 "믿습니다." 하고 고백했던 사람들의 예배가 어딘가 문제가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임재해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구원자십니다. 어린양이십니다. 삼 일만에 죄와 사 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는 유일한 구원자요, 나의 하나님이요, 영광의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여 서 예배하는 자리라면 그곳에는 놀라운 감동이 있어야 되고 찬송의 열기가 있어야 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우리의 가슴에 있는 모든 병들이 물러가야 되고 하 나님의 영광의 빛 앞에 우리의 염려와 불안이 전부 다 흩어지는 기적을 맛보는 생명의 역사가 있어야 됩니다. 그러나 입으로는 "주여, 믿 습니다."

하고 고백하는데 경배하는 마음이 따라가지 못하니까 예배의 모양은 있지만 그 속에 생명이나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들어왔다가는 모두 싫증 을 내고 돌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도 억지로 나와 계신 분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 런 분들은 둘 중 하나입니다. 사랑의 교회 예배가 문제가 있든지 아니 면 여러분 자신이 영적으로 문제가 있든지 그 둘 중 하나입니다. 후자 가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사랑의 교회의 예배가 잘못되었다고 생각 하지 않습니다. 정말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어느 예수 믿는 가정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교회를 다니기는 합니다만 교회 가는 것이 별로 재미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토요일 날만 되면 괜히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부인이 자꾸 가자고 하니 안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안 간다고 버티자니 싸움이 일어나니 고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주일 아침이 되면 가끔 하는 말이 있습니다.

"여보, 오늘은 우리 둘 중에 당신이 우리 집안의 대표로 예배에 참석하고 와요."

그리고는 자리에서 안 일어나니까 부인이 말 그대로 대표로 예배에 참석하고 가는 일이 왕왕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남편이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부인하고 같이 죽어 천국 문 앞에까지 갔습니다. 문지기가 그들을 알아보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당신들은 부부지요?"

"예, 부부입니다."

그랬더니 문지기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잘 됐네요. 당신들 두 사람 중에 대표로 부인만 이리로 들어오십시오."

어떻게 보면 우스개 이야기 같지만 예배가 살아있으면

"대표로 갔다 오시오."라는 말이 어떻게 나 올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예배를 사모할 것이고 주일을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예배 가 어딘가 모르게 병이 들어있기 때문에 갓 예수 믿고 들어오는 사람에게 예배가 매력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라고 해서 꼭 주일날 함께 모여 드리는 이런 예배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삶 전부가 하나님께 드리는 신령한 예배입니다. 믿음의 고백이 언제 어디서나 가능한 것처럼 우리의 심 령 역시 언제 어디서나 예배자의 심정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믿음을 고백하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습니까? 우리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차서 주의 이름을 높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심지어 병상에 있을 때라도, 고 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가지고라  "예수님, 믿습니다. 예수님은 나 의 하나님이십니다."

라고 고백할 때는 가슴속에 그 하나님 때문에 감격이 일어야 하고, 찬송하고 싶은 열정이 불타 올라야 합니다. 사 업에 실패한 순간에라도, 불안과 근심이 마음을 짓누르는 캄캄한 밤 이라고 할지라도, "예수여, 나의 하 나님이십니다. 주여,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하고 고백할 때 자기도 모르게 모든 불안과 고통에 서 벌떡 일어나서 하나님 되신 그 분을 찬양하며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는 예배자의 심정이 되어야 합 니다. 이럴 때 우리의 삶 전부를 통해서 믿음과 예배가 일치되는 것 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자들이 될 때 주일날 교회에 모여 드리는 이 예배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 예배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것 입니다.

토저(A.W.Tozer)라고 하는 유명한 목회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 다.

"하나님을 최고로 알지 아니하는 한 아무도 그를 경배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최고로 알고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자라야 예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예배가 없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제대로 믿지 않고 계신 것입니다. 입으로는 "주 여, 주여"

하지만 실상은 그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외의 다른 엉뚱한 것들에 마음을 빼앗겨서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차갑게 식어져 있는 것입니다. 만 약 우리 가운데 이와 같은 모순이 있다면 우리 모두가 회개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집에 앉았을 때든지, 차를 타고 가든지, 일을 할 때든지, 아무도 없는 자리든지, 많은 사람이 있는 자리든지, 내가 마 음으로 "주여, 내가 믿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할 때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높이고. 경배하고, 내 사랑을 드리고자 하 는 예배자의 마음이 항상 뜨겁게 타올라야 합니다. 그 믿음이 진짜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 늘 이 시간 이 말씀을 듣고 가서 "믿습니다."하고 고백할 때 찬양이 따라오는 삶을 연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마음으로 믿게 되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주여, 주의 이름 높이기를 원합니다."하는 찬양의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을 시험하던 마귀가 혼 줄이 나서 도망갈 것입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하고 말하기만 하면 마귀가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 는 우리가 성경을 보는 시간에도 떠나지 않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빨리빨리 넘어가."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도 우리 귀에다 끊임없이 이렇게 속삭입니다.

"대충하고 빨리 마쳐."

그리고는 이제 자기 맘대로 주무르는 것입니다. 그 이유 가 무엇입니까?

"믿습니다."하는 고백에 예배가 안 따라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가슴에 찬양을 담고 다니십시오. 가슴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감격을 담고 다니십시오. 가슴에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자는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하면서 다니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마음에 어디 감히 마귀가 와서 엿볼 수 있습니까, 우 리 마음에 하나님의 아들이 계신데 어찌 감히 마귀가 들어와서 찝쩍거립니까? 우리 올 한 해 동안 승리합시다, 할렐루야!

"내가 믿나이다 하 고 절하는지라."하는 이 말씀이 바 로 나의 말씀이 되기를 진심으로 주님 앞에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저하고 찬양 좀 해볼까요? 이 자리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 리스도가 계십니다. 우리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그의 영광을 봅니다. 그 영광의 빛 앞에 우리는 있습니 다. 신을 벗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 음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그가 하나님이심을 높이고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번 해볼까요? '찬양하라 내영혼 아' 자, 같이 한번 불러 봅니다.

" 찬양하라 내영혼아/ 찬양하라 내영 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 양하라/ 경배하라 내영혼아/ 경배 하라 내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 아 다 경배하라"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여러분 찬송 아시죠? 우 리 비디오로 예배 드리는 여러분들 도 가사를 보시면서 아주 기쁘게 하나님 되신 예수님을 높이는 찬양 을 우리의 가슴에 담아 그에게 드 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힘 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 랑합니다/ 주는 나의 반석이시며 나의 노래 되시며/ 주는 나를 건지 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나의 피 할 바위시며 나의 방패시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는 나의 여 호와 나의 구세주"

"나의 생명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 주는 나의 사랑이시며 나의 구주 이시라/ 주는 나를 이끄시어 주의 길 인도하시며/ 나의 생의 목자 되 시니 내가 따름이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는 나의 여호와 나 의 구세주"

할렐루야! 다같이 기도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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