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요 4장 20-24
설교제목 :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설교자 : 김경호 목사님
어느 교회에서 큰 행사를 준비하느라 매우 분주했습니다. 목사는 중요한 회의를 하고 있었고 강단을 무대로 준비하던 집사들이 갑자기 손을 놓고 목사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급히 회의를 끝내고 올라와 보니 모두 일 손을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유를 물어보니 강단에 올라가는 것만도 황공한데 어떻게 마음대로 강대상을 치우겠는가 하는 답변이었습니다.
강단을 성역화하고 신성시하는 풍토에서 흔하게 보는 광경이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금기가 둘러싸 있고 이렇게 하면 혹시 안되는 것 아닐까를 안절부절 못하고 염려하는 분위기에서는 창의적인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예배에 있어서는 이러한 창의적인 것들이 통하지 않습니다. 장로교 헌법 책에 보면 몇가지 예배모형, 유형이 정해져 내려오고 이것이 또 예식서에 고정된 틀로 내려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왜 예배순서가 헌법책에 실려 있나하는 의문을 갖습니다. 역사적으로 언제부터 예배가 이렇게 정형화된 틀로 고정되었는가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본래 구약시대의 예배는 이렇게 고정된 틀을 가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과 만났거나 하나님의 위대한 해방사건이 일어난 현장, 즉 예를들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복을 내려주신곳에 돌베개로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거나, 다윗 때 하나님의 재앙이 멈춘곳인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예루살렘 성전이 섰습니다.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때 다윗이 벌거벗고 그 행렬의 앞에서 춤을 추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의적 예배는 해방의 사건과 관련되어있습니다.
이러한 사건이 발생한 후에 그곳은 매우 의미심장한 곳이 됩니다. 야곱은 평범한 장소에서 꿈을 꾸었으나, 깨고 나서는 그곳을 두려운 곳이며, 하나님의 집이며, 하늘의 문이라고 외쳤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모든 유명한 예배처소들은 이러한 한 사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유명한 제의적 축제들 역시 하나님의 해방사건을 기념하는 절기들입니다. 히브리들이 에집트를 탈출하는 것을 기념하는 절기는 유월절, 해방절이고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인도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 초막절, 장막절입니다. 예배에서 쓰인 것으로 보이는 시편을 보아도 엄숙한 예배의 틀 보다는 떠들썩한 제사와 피의 냄새, 온갖 악기를 동원한 노래, 심지어는 춤까지 곁들인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문화적인 도구들을 동원한 총체적 예배입니다.
신약의 예배도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사건, 그의 구원사건과 관계 맺고 있으며 그의 십자가 사건을 기념하는 예식으로 떠들썩한 성만찬이 행해졌고 그것은 전례화된 성찬이라기보다는 모두가 함께 음식을 나누는 예식이었습니다.
예배가 오늘 같이 전례화되고 움직일 수 없는 엄숙한 틀로 고정된 것은 중세 때입니다. 이 때 모든 의식은 성직자의 독점물이 되었고 이러한 전통은 서구의 식민지 확장정책을 따라 문화제국주의적의 양상을 띄게 되었습니다. 피점령국의 고유한 문화를 파괴하고 그 나라의 고유한 문화들을 저급하고 미신적이고 타도해야될 대상으로 규정하였습니다. 기독교문화는 그 민족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를 말살하는 대립적 틀을 가지고 토착문화와의 전쟁을 시도하였습니다. 각 나라의 고유한 문화들은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의 위기를 맞게 되었으며 무력시위를 배경에 두고 승리한 서구문화-그것이 표현되는 서구적 예배의 방식은 기독교인의 사고를 아주 단편적인 것으로, 자기 창의성을 버리고 남의 것, 서구적인 문화를 반복하는 앵무새 문화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예배는 무엇입니까? 예배는 하나님의 해방사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해방)사건을 극으로, 이야기로, 상징으로, 즉 그들의 문화적 도구-시, 노래, 춤, 연주, 제사를 통해 현재화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예배 참여자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느끼게되는 것입니다. 신약시대 이후 기독교의 예배는 예수그리스도의 삶과 성령강림 사건에 집약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한해동안의 절기들은 예수의 나심, 현현, 죽으심, 부활, 재림, 성령강림등의 절기를 따라 예배가 진행됩니다.
여기서 예수의 나심과 죽으심은 과거적인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고 그의 부활, 재림, 성령강림등은 미래적 사건과 연관을 가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해방사건이 일어나는 예배는 지난 이야기를 반복하는 과거적 사건에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미래의 세계를 엿보고 그 나라에 대한 희망을 가지며 동시에 그 미래적 사건을 현재화하는 축제입니다. 우리가 과거 현재 미래 이렇게 시간을 구분하지만 이것은 관념이나 개념의 세계 안에 있는 구분입니다. 사실 우리의 경험 안에는 이런 모든 것이 통합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성서의 출애굽 사건을 말하면서 동시에 우리들의 출애굽을 생각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할 때도 그것은 동시에 우리들의 십자가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나간 성서의 해방사건을 재현하면서 미래에 우리들의 해방을 꿈꾸고 동시에 우리가 해방을 지향하는 인격을 갖고 오늘 우리의 해방사건으로 연결해 나가는 위치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거의 사건을 반복하는 예배가 갖는 기능이요 그 안에 오늘과 내일이 함께 들어있는 신비입니다. 그와 동시에 과거적 사건은 오늘 그와 유사한 사건들로 재현되어야할 당위성과 필연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단지 지나간 과거의 이야기로만 되었을 때 우리는 지나간 화석을 예배하는 것이요, 기억과 관념으로만 해방을 즐기는 것입니다.
에수님께서 "이산에서도 아니고 저산에서도 아니고....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다.... 하나님은 영이시다.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 4,21-24)고 하셨는데 여기서 진실로 드리는 예배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진실로 드리는 예배는 우리들의 사건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그것이 이시대의 영이고 영으로 드리는 예배이기도 한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은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몸을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들의 이야기로 예배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들의 해방이야기, 그것이 개인적이던 집단적이던, 우리의 몸으로 살아가는 이야기,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사건, 해방사건의 이야기를 말합니다.
우리교회가 창립된지 6년이 지났는데 그 중에 여러분의 기억이 남는 가장 예배다운 예배가 어떤 예배였다고 생각하십니까? 목사의 설교가 쏙쏙 들어온 예배입니까? 우리 개신교 예배는 설교의 비중이 높습니다만 한 사람의 모노드라마와 다수의 관객으로 이루어지는 예배는 참된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One Man Show가 아닙니다. 이것은 구성적으로 실패한 예배입니다. 그러면 어떤 예배들이 기억나십니까? 몇 차례 진행되었던 장로 권사 임직예배 이것은 매우 중요한 예배입니다. 한 개인이 평생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 예배이니까요. 또 부활절, 성탄절에 우리가 드린 음악예배, 연극예배 이런 것들은 우리의 이야기로 모두가 함께 힘을 합해 준비한 예배이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또 우리교회의 창립예배 그것은 아직 완료형은 아니지만 가능성을 가진 사건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매우 뜻있는 예배였습니다. 그 예배가 그리고 우리의 예배가 앞으로 완전한 예배, 완전한 해방사건이 되도록 우리가 힘을 합해 만들어 가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저는 어떤 예배보다도 지난 여름에 드린 화훼마을 입촌식에 드린 예배가 의미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한 겨울에 120여채의 비닐하우스 촌이 불에타 6개월의 투쟁을 통하여 다시 집을 복구하여 새보금자리로 입주하는 예배는 정말 감격스러운 예배 였습니다. 기독교인 마을이 아니라 완전한 예배 형태는 아니었지만 우리교회의 기독문화패 시람이 드린 비나리를 통해 우리는 오랜 세월 사람대접 받지 못한 도시빈민의 절망과 그 절망을 딛고 일어서 새마을을 건설하고 삶의 새보금자리로 입주하는 희망과 꿈, 무엇보다도 고립된 이들이 이웃을 발견한 기쁨들을 노래한 그 비나리(기도문)은 진정한 해방의 사건이 일어나는 예배였습니다. 여기 그 비나리를 소개해 봅니다.
사랑많은 하느님, 은혜로신 우리주님 화훼마을 입촌식에 하느님전 비옵나니 우리기도 들으시고 구원해방 이루소서 송파구 장지동에 화훼마을 불이나서 새벽두시 잠옷바람 알몸으로 빠져나와 그간모은 가재도구 숯더미로 변했구나 모으기는 수년인데 불타기는 순간이라 활활타는 보금자리 눈물로 지켜보며 발만동동 쳐다볼뿐 억장이 무너진다 쓰레기 매립지에 냄새나는 지하수로 빨래하고 식기닦고 급하면 마시기도 경제개발 도시개발 땅주인은 좋겠으나 오른셋값 엄두못내 이리저리 보따리라 개발된 아파트의 그림자를 따라가며 상도에서 봉천으로 서초에서 이곳으로 낮에는 철거위협 밤에는 화재위협 철거반원 망치소리 아이들의 울음소리 나뒹구는 그릇소리 깜짝놀라 깨어보니 꿈이구나 숨돌리나 식은땀은 하염없네 세금내고 군대가고 국민의무 물론이요 남들이 싫어하는 궂은일도 다하건만 땅없는게 죄이라서 사람취급 않하더냐 우리도 국민일세 우리도 사람일세 우리땅이 아니라고 주민등록 받지않아 살기는 예살아도 여기없는 유령이니 그나마의 권리혜택 그림위에 떡이로다 주택이 무허가지 인생마저 무허가냐 우리마을 둘러치는 얇은함석 가림막에 우리몰골 보지말고 속편안히 살랐더니 마음까지 막을치고 투깃군에 죄인취급 가난도 억울한데 이러지들 마시구려 육개월간 긴긴싸움 피곤키도 하였네만 우리마을 서로도와 함께하는 본보이고 내일처럼 나서주신 이웃들의 힘입어서 서로돕는 마음배워 우린다시 일어서오 사랑많은 하느님, 은혜로신 우리주님 화훼마을 입촌식에 하느님전 비옵나니 우리기도 들으시고 우리구원 이루소서 이마을을 지키시어 화마수마 막아주고 땅에서는 선한기운 사철부는 좋은바람 약한사람 강해지고 병든사람 일어나며 가난한자 부해지니 걱정근심 사라지네 화훼마을 사람보소 얼굴풍채 반듯반듯 서로돕고 위해주니 남부럴것 전혀없네 이웃사람 친척같고 우리모두 형제자매 못먹어도 배부르고 못살아도 떳떳하오 우리서로 존중하여 우리권리 찾아보세 바깥사람 이를보고 우리귀함 알리로다 서로힘을 합하여서 주민등록 쟁취하고 주거권을 실현하여 사람대접 받아보세 사랑많은 하느님, 은혜로신 우리주님 화훼마을 입촌식에 하느님전 비옵나니 우리기도 들으시고 우리구원 이루소서 다음 주일이 감사주일이라서 우리는 특별한 예배를 준비하려고 합니다. 우리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우리들의 일년동안의 감사의 이야기, 이런 것을 엮어서 가장 진실하고 신령한 예배를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앞으로도 이런 예배를 자주 드렸으면 합니다. 우리교회가 하고 있는 통일촌 어린이들의 꿈과 희망의 이야기, 우리 교우 중에 IMF 경제위기를 극복한 간증의 이야기, 우리 자신이 가사를 만들고, 곡을 쓰고, 연주하는 예배 등등 우리들의 삶의 무게가 실려있고 그 안에 꿈꾸고 고민하는 해방을 향한 긴 여정의 이야기... 이런 예배로 우리의 예배가 채워져야 할 것입니다. 일 주일에 한번 남의 이야기를 듣는 예배가 아니라 내 자신의 삶과 그 가운데 함께 하신 하나님, 그 분과 더불어 펼쳐나가는 해방의 이야기, 각각의 사건을 모아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한가지 질문으로 오늘 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어쩌면 우리들 각자의 인생은 각자 자기자신의 예배를 준비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죽은 후 장례식이든지 아니면 인생의 말년의 은퇴의 예배든, 어떤 기회에 우리들 자신의 삶을 주제로한 예배를 드릴지 모릅니다. 그것이 진정한 우리의 예배, 산제사로 드리는 예배일 것입니다. 크게보면 우리의 삶은 그 한예배를 준비해 나가고 있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은 매일매일의 삶을 통해서 어떤 예배를 준비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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