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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요한복음

요한복음 13장 4-10절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3) 섬김 - 이동원 목사

by 재영구리 2023.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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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요13장4-10, 14-15
설교제목 :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3) - 섬김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저는 지난 한 주간 동안 대만 제2의 도시인 카오슝(高雄)에 위치한 성광 신학교가 주최한 대만 교회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한 중보기도 컨퍼런스에 저를 포함하여 우리 교회 41명의 교우들과 함께 다녀왔습니다. 20여개 교단 90개 교회에서 대만 교회 사상 유례 없는 1,000명에 가까운 약 900명 이상의 지도자들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룬 대만 교회 사상 최대의 기도 성회였습니다. 대회 첫 시간부터 마지막 시간까지 등록자 대부분이 한 시간도 빠짐없이 참여하며 부흥을 사모하는 열심은 한국 교회에서도 보기 어려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를 감동시킨 것은 그 신학교의 총장인 진 길송(다니엘 첸)목사의 진지한 태도였습니다. 그는 세미나 처음부터 끝까지 맨 앞자리에 앉아 경청하는 모범을 보여 주었을 뿐 아니라, ‘여리고 작전’을 할 때도 참여자들과 함께 땅 밟기를 하며 자신의 봉사하는 도시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했고, 병자들을 위해 기도하던 밤도 밤늦게 마지막까지 교회에 남아 아픈 분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세미나가 다 끝난 마지막 날 저녁에 우리 한국에서 온 일행이 저녁 식사를 하며 야시장에 나가던 밤에도 밤늦게 까지 함께 동행 하며 우리를 섬겨 주었습니다.본래 진 총장은 신학을 하기 전에 대만에서 핵무기를 만들던 명망 있는 과학자였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국제 사회의 개입으로 핵무기 계획이 무효화되는 계기로 자신의 남은 인생을 고민하고 기도하던 때 하나님의 인도로 신학을 하고 신학교수가 된 후에 그의 경건한 인격과 모범적인 리더십을 인정받아 신학교 총장이 되어 대만 최고의 신학교로 성장시키고 계신 분입니다. 제가 그 신학교에서 선교학과를 담당하며 섬기시는 한국인 선교사인 김 기문 선교사님에게 이런 신학교 총장이 단 한분이라도 한국에 계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자 김 선교사님은 진 총장에 대한 다른 에피소드를 들려 주셨습니다. 김 선교사님이 진 총장과 함께 여행을 하며 호텔에 투숙을 하면 그는 이른 새벽에 먼저 일어나 아침 식사를 만들어 놓고 조용히 자기가 잠깨어 일어나기를 기도하며 기다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학교 총장이 학교 교수를 위해 아침 식사를 만들어 놓고 기다리는 모습을! 그런데 그분은 신학생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그런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섬긴다는 것입니다. 제가 진 총장에게 어떻게 그렇게 까지 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수줍어하며 자기는 그냥 당연히 할일을 하고 있는 것이고, 자기가 소원하는 것이 있다면 예수님 흉내를 조금 내보는 것이라고 하면서 아기처럼 웃고 있었습니다.그렇습니다. 진 총장이 사모한 예수님의 리더십의 본질이 바로 섬김의 리더십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자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마음을 지배하던 유일한 관심은 자신의 죽음이나 고통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섬김이었습니다. 섬김은 그의 거룩한 습관이셨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잘 알려진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계신 장면입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이것이 과연 일회성의 이벤트인지 아니면 정말 그분의 라이프스타일이었는지 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문을 포함하고 있는 요한복음 13장 1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예, ‘끝까지’입니다. 바로 그 ‘끝까지 사랑하심’이 자연스럽게 섬김의 실천으로 나타난 것뿐입니다. 그러면 과연 예수님 자신은 섬김에 대한 어떤 관점을 가지고 사셨을까요?

 

1.예수님의 오심은 섬김이 목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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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 막10:45을 읽어 보겠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 이니라” 저는 이미 지난 설교에서 ‘인자가 온 것은’이란 표현은 예수님의 사명을 나타내는 대목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 땅에 오신 주님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구원하는 일인 것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막10:45에 의하면 예수님의 또 하나의 사명이 바로 섬김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과 섬김이 과연 별개의 것일까요? 막10:45은 구원과 섬김이 결국 하나임을 말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섬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섬김은 결국 섬김의 대상에 대한 최선의 유익을 구함이 아니겠습니까? 주께서는 인류에 대한 최선의 유익은 우리의 구원임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는 우리를 섬겨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자신의 목숨을 속죄의 제물로 드리기로 결단하신 것입니다. 다시 막10:45을 묵상해 보십시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 이니라”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의 목적이 바로 섬김이었습니다. 섬김의 절정의 표현이 바로 자신의 목숨의 드림이었고 그 결과가 또한 인류의 구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섬김은 목숨을 드리는 거창한 일 뿐 아니라 가장 작은 일로도 가능한 것을 주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본문이 보여주는 것처럼 수건과 대야를 들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친히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가장 작은 일도 목숨을 드리는 일 못지않게 소중함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자동차 주차할 때 이렇게 주차하면 이웃들이 불편하지 않을까 배려하여 주차하고, 주차금지라고 쓰여 있으면 주차 안하는 일, 엘리베이터 타실 때 몸이 불편한 이웃들이나 노약자들을 먼저 배려하는 일, 엘리베이터 안에 있던 분들이 먼저 다 밖으로 나오기까지 기다려 타는 일, 다른 분들이 엘리베이터 타도록 양보하고 자신은 에스컬레이터 이용하고 또는 층계를 이용하여 걷는 일, 나 하나라도 대중교통 이용하면 그 만큼 주차난 해소에 도움되리라고 생각하여 주일만이라도 대중교통 이용하는 일, 짐을 들고 있는 분들에게 문을 열어주는 일, 교회 봉사에도 남이 가장 꺼려하는 일들을 자원하는 일, 복도에 주보나 쓰레기가 떨어져 있으면 줍는 일, 화장실에서 화장지 두장 쓸 수 있는 것을 한 장만 쓰는 일-이런 사소한 섬김에서 섬김의 정신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2.예수님은 섬김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사실 본문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예수님은 누군가 자신의 제자 중에 발을 씻기는 섬김을 실천하는 모습을 기다리고 계신 것으로 보여 집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의 관습에 의하면 발 씻음은 샌들을 신고 다니던 시절 더위가 심한 사막지대에서는 손님들에 대한 예절이어서 집 문 곁에 물동이와 대야를 준비했다가 귀한 손님이 도착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의 섬김의 실천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제자도 이런 섬김에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요한복음13:3은 “저녁 먹는 중에”라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사실 발 씻음은 저녁 전에 있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그때까지 제자들의 액숀을 기다리고 계셨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제자들 편에서 아무런 행동의 징후가 없자 본문이 시작되는 4절에 보면 그분은 마침내 저녁 드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십니다. 아마 저녁 식사는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먼저 서둘러 자신의 식사를 끝내시고 이 소중한 기회를 섬김을 가르치는 기회로 사용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실천 후에 주님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시지 않으셨습니까? 15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그렇습니다. 그분의 실천은 '본'(example)이었습니다. ‘본’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누군가가 따라 오게 하려는 것 아닙니까? 누군가가 누구입니까? 그의 제자들, 예수의 제자들이 아닙니까? 제자의 의미가 바로 “따라가는 자들”(followers)이란 뜻이 아닙니까? 우리가 자신들을 예수의 제자로 자처한다면 예수의 본을 따르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그렇게 못할까요? 자신의 이기심 때문입니다. 내 한 몸 조금 편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작은 고난들을 견디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벧전2:21의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대만 성광 신학교 진 총장의 고백처럼 그분의 흉내를 조금이라도 내어야 옳지 않겠습니까? 섬김은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이셨습니다.

 

3.예수님은 섬김의 행함을 명령하셨습니다.무슨 말입니까? 섬김은 옵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섬김은 명령입니다.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일이 아니라, 하지 않으면 안 될 주인 되신 분의 명령이란 말입니다. 요한13:13-14의 말씀을 읽어 보십시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주라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섬김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분들을 향한 주인 되신 그 분의 명령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선택은 하나입니다. 주인 되신 그분에게 어떻게 순종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 뿐입니다. 저는 지난 새해 첫 주일 이제부터 우리 교회가 이제부터 기존 타 교인 전입을 억제하고 전도하는 교회가 될 것을 선언했습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교회 모두에게 진지하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면 섬김을 고민해 주십사는 것입니다. 섬김은 보다 더 가진 자가 덜 가진 이들을, 보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보다 편리하게 사는 자가 덜 편리하게 사는 이들을 섬기는 것이 성경적 원칙입니다.저는 이 원칙이 우리 교회의 섬김에도 적용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우리 교회는 빠른 시일에 여러 가지 면에서 축복을 누리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우리가 자랑이 아닌 책임으로 받아 드려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즉 우리 보다 더 연약하고 힘들어하는 많은 교회들을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동안 우리 교회가 그런 노력을 안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고 느낍니다. 저는 그냥 연약한 교회들에게 선교 비를 얼마 지원하는 차원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 주변에 약하고 어려운 교회들을 돕기 위해 우리 교인들이 흩어지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물론 저는 한 성도가 한 교회에서 평생을 섬기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 모두는 한 날 모두 흩어져 개인적으로 죽음의 다리를 각자가 건너 천국에서 만나야 하고, 그 천국에서는 우리 모두 특정한 교회 소속도 교파 소속도 없이 존재해야 한다면 지금부터 그런 천국의 교제를 실천함이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교회는 영구 제직들이 은퇴 연령인 70세가 되기 전 은퇴하실 수 있는 제도를 두고 있습니다. 저는 특별히 이런 분들이 아직도 건강 하실 때 우리 교회에서 배운 여러 훈련의 유익함을 활용하셔서 어려운 개척 교회들을 섬기실수가 있다면 얼마나 이 땅의 개척 교회들이 큰 힘을 얻을 수가 있겠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 교회 시니어 부원들 중에는 이미 우리 교회에서 이른 아침 예배를 드리고 천안의 개척 교회에 가셔서 온 종일 섬기고 돌아오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사실 개척 교회에는 한 두 사람도 귀하지 않습니까? 거기서 안내하고 봉사하고 교사도 하고 필요한 일로 섬기시고--이 얼마나 보람 있는 섬김이 되겠습니까? 우리 교회를 떠나지 않으시고 그렇게 하실 수도 있으십니다. 아니면 1-2년 섬기시고 돌아 오실수도 있으십니다. 아니 거기서 여러분을 필요로 한다면 거기서 나머지 평생을 섬기실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서 영구 제직이 된 분들은 우리 교회의 명예 영구 제직으로 계속 남으시게 될 것이고, 우리는 여러분을 우리가 파송한 국내 선교사로 기억하고 기도해 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곁에 있는 또 다른 중형, 대형교회로 옮겨 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물론 작은 교회에서 섬기시다 보면 어려운 일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래도 말없이 섬겨 주시고 “지구촌 교회에서는 이렇게 한다”는 등의 소리는 하지 마셔야 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작은 교회를 더 힘들게 하시는 일이 될 것입니다. 섬기다가 정 힘이 들면 다시 돌아오셔서 우리 교회에서 충전하고 또 가십시오. 저는 우리 교회가 그렇게 해도 무리가 없는 그런 분위기가 만들어 지기를 기도합니다. 이렇게 해서 돌아오시는 분들을 여러 교회 왔다 갔다 하는 분으로 취급하시면 안 됩니다. 고향에 돌아온 선교사로 맞아 주시면 됩니다. 그러므로 떠나실 때 그런 의향을 밝혀주고 떠나십시오.이미 은퇴하신 분들에게도 이런 도전을 하고 싶습니다. 은퇴란 말은 본래 영어로 ‘retirement’라는 뜻입니다. “타이어를 다시 갈아 끼우고 달린다”는 뜻입니다. 아직도 건강하시다면 그 건강과 지혜로 여러분을 필요로 하는 곳에 가서 한번 섬겨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텐트 메이커로 해외 선교지에도 도전해 보십시오. 그 일에 지나치게 느껴지시면 국내 멀지 않은 곳, 우리가 조금만 도우면 금방 일어설 수 있는 자신의 집에서 가까운 개척 교회에 가서 섬겨 보십시오. 나는 수지와 분당의 여러 개척 교회들에도 우리 교우들이 좀 흩어져 섬기시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이 번에 안 용호 목사님이 2월부터 개척하시는 신갈 지구촌 교회에도 많이 가서 섬겨 주십시오. 성도 여러분, 언제까지 우리는 소위 편리한 시설, 명성 있는 교회, 좋은 설교, 짜임새 있는 교육 훈련 프로그램을 즐기기만 하시겠습니까? 우리 주님이 하늘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섬기시고자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시고 이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동일한 삶을 명하고 계시다면 이제 우리도 겉옷을 벗고 수건을 들고 섬김을 결단할 시간이 되지 않으셨는지요? 언제 섬김 받는 자가 아닌 섬기는 자로서의 보람과 기쁨을 누려보시겠습니까? 아씨시의 성자 프랜시스의 라베르나 산에서의 기도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주님, 저에게는 주님처럼 섬기다가 고난받아본 일이 없습니다. 제 몸에는 못 자국이 없습니다. 저에게도 주님의 고난을 알게 해 주십시오.” 그의 기도의 응답으로 그의 손과 발에 생긴 거룩한 5개의 못 자국을 우리는 거룩한 ‘상흔-스티그마타(stigmata)’라고 부릅니다. 이제 우리에게도 우리의 일생을 부끄럼 없이 마감하도록 거룩한 섬김의 상흔을 만들기 위한 기도와 결단이 필요한 때가 되지 않으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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