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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요한복음

요한복음 1장 1-18절 독생자의 영광을 보라(1) - 옥한흠 목사

by 재영구리 2023.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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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요한복음 1:1-18
설교제목 : 독생자의 영광을 보라(1)
설교자 : 옥한흠 목사님

주의 영광을 보여주소서

얼마 전부터 제 마음속에는 한 가 지 간절한 소망이 싹트고 있습니다.

"주님, 내 눈을 열어 주의 영광을 보게 해 주시옵소서."

하는 소망입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제게는 굉장히 진지한 기도요, 소망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이와 비슷한 기도를 한 분이 있습니다. 모세입니다.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위대한 지도자 모세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주여,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18절) 하며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숭배에 빠져서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리자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노를 발하시며 다시는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지 않겠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와중에서 지도자 모세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해서 하나님 앞에 울며 매달리는 참 어려 운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그는 "주 여, 주의 영광을 보여 주옵소서."

하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저는 출애굽기를 읽을 때마다 모세가 왜 갑자기 주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영광을 보여 달라는 기도가 저의 소원이 되고 나니까 모세가 왜 이런 이상한 요구를 했는지 약간 감을 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의 기도를 들으시고 제 마음속에 이런 대답을 주셨습니다.

"너, 나의 영광을 보기를 원하냐? 요한복음을 읽어라."

그래서 제가 속으로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주님, 요한복음은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록하지 않았습니까? 20장 31절에서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잖아요? 영광을 보여 달라고 하는 나에게 왜 안 믿는 사람을 위해서 기록된 이 책을 읽으라 십니까? 저는 이미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까? 저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 가 아닙니까?"

그러자 주님은 다시금 이런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너, 아직도 요한복음 1장 14절을 잘 모르는가 보구나. 그러니까 그런 소리하고 앉았지."

그래서 저는 요한복음 1장 14절을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의 '우리'입니다. 그때 제가 깨달았습니다. '아, 그렇구나. 요한복음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성도들과 그들이 받는 은혜가 기록되어 있는데 내가 이제까지 요한복음을 잘못 이해했구나.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원하면 요한복음을 보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구나.'

사실 성경을 너무 많이 아는 것도 탈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무식해도 탈이지만 너무 똑똑해도 탈입니다. 목사가 요한복음을 오죽이 잘 압니까? 그럼에도 등잔 밑이 어두운 것처럼 진짜 중요한 것은 제가 놓치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한복음을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읽으면서 보니까 주님의 영광을 보고 환희에 차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성도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광을 보는 자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마련해주신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진리가 자유케 하는 은혜를 맛보고 있었습니다. 또 예수 안에서 풍성한 과실을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은혜도 맛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기도하는 자가 누리는 축복의 풍성함을 맛보았습니다. 내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이 내 안에 거하는 신비스러운 차원을 체험 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살펴보면서 저는 주님의 영광을 보기 원하면 요한복음을 읽어야 한다는 말씀이 사실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 정도 말씀드리면 여러분 은 왜 제가 요한복음을 들고 오늘 이 자리에 섰는지 이해하실 것입니다. 앞으로 주일마다 이 요한복음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향해서 달려가야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기만 하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주님으로부터 임하는 놀라운 축복들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교회는 다니지만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분이 계십니까? 주님의 영광을 보십시오. 그 영광을 보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영적으로 병을 앓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마음이 몹시 지쳐있는 분이 계십니까? 주님의 영광을 보십시오. 그 영광을 보면 여러분의 모든 영적 인 병이 치유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새 힘을 얻습니다. 세상을 이기지 못해서 진흙 탕 속에서 계속 씨름하는 분이 계십니까? 죄를 거역하지 못해서 마음이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분이 계십니까? 주님의 영광을 보십시오. 그 영광을 보기만 하면 죄를 능히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독생자의 영광

이제 우리가 본문 내용을 하나씩 차근차근 정리해 나갑시다. 성경을 손에 들고, 제가 지적하는 본문을 찾아 함께 읽고 묵상하면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합시다. 성령께서 우리 눈을 밝히 열어 주사 주님의 영광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본문 14절은 주님의 영광을 특별히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영광'하면, 뭐라고 설명은 못해도 대충 어떤 것을 말하는지는 우리가 대충 감을 잡지 않습니까? 대통령의 영광을 보기를 원합니까? 청와대로 가야 합니다. 한 세기에 한 사람이 날까 말까 한 천재적인 음악가의 영광을 보기를 원합니까? 정명훈 씨라든지 장영주 양이 누리는 영광을 보기를 원합니까? 광복 50주년 음악제가 열렸던 잠실 체육관으로 가 보시면 그 영광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위대한 학자의 영광을 보기를 원합니까? 대학의 강의실에 가서 그 학자의 이론이나 여러 가지 자료들을 인용하면서 가르치고 배우는 그 분위기를 보십시오. 그러면 탁월한 학자의 영광이 어떤 것인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독생자의 영광'이란 무엇입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본문 14절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말씀은 1절부터 그 다음에 이어지는 본문을 해석하는 열쇠가 될 뿐 아니라 요한복음 전체를 꿰뚫는 하나의 맥이 됩니다. 그러므로 14절은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기에 보면 독생자의 영광을 보는 사람들의 간증이 나옵니다. 먼저

"말씀이 육신이 되어"

라는 말씀부터 살펴봅시다. 교회를 한 이삼 년 다니고, 신약을 한두 번 이상 읽으신 분이라면 '말씀'이 누구를 말하는지를 금방 압니다.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성경이 예수님을 이와 같이 '말씀 ', 곧 '로고스'(logos)라고 표현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구약 시대에는 많은 선지자들이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다 그림자와 같은 것이요, 하나의 예표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말도 권위가 있었지만 계시의 완성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말세가 되자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말씀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자는 누구든지 최후의 복음이자 완성된 메시지를 듣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보탤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는 완전무결한 하나님의 진리를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듣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말씀', 곧 '로고스'라고 해도 전혀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할 당시 '로고스'라는 말에 단순히 말씀이라는 의미만 있었던 것 은 아닙니다. 주전 6세기부터 1세기 헬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사상을 지배하던 철학이 있었습니다. '로고스'는 바로 그 철학의 골자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신이 '로고스'고, '로고스'가 신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의미를 알든 모르든 간에 '로고스' 하면 ' 아, 신을 이야기하는 구나.'하고 생각할 정도로 그 개념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심지어 플라톤 같은 위대한 철학자는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어느 날 신으로부터 로고스가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그들은 로고스를 온 우주를 통제하는 하나의 능력이자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는 하나의 초월적인 존재로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신이라고 믿고 있는 그 로고스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전도할 때 '알지 못 하는 신'이라고 하는 팻말이 붙은 신상을 보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그 신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섬겼던 것입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로고스'라고 말하는 데는 다분이 이런 의도가 숨어 있었습니다.

"너희들이 날마다 '로고스', '로고스' 하는데 그 '로고스'가 누군가를 내 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주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너희들이 말하는 로고스니라."

그 당시 사람들은 요한의 말을 듣고 '아, 그렇구나. 나사렛 예수가 바로 그 로고스시구나.' 하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또 한편으로 이런 의도도 있었다고 봅니다. 우리가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진리를 전할 때 사람들에게 익숙한 개념을 사용하지 않으면 의사 전달에 대단히 어려움을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요한이 '예수'라는 직접적인 표현 대신 '로고스'라는 단어를 쓴 것은 이러한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고스' 라는 용어는 매우 지혜로운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저는 비교적 일본에 자주 가는 편입니다. 일본 목사님들의 설교나 기도를 듣다 보면 참 귀에 거슬리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가미사마'(神) 라는 말입니다. 저에게는 굉장히 인상이 안 좋은 말입니다.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있을 때 그들은 천황을 '가미사마'라고 불렀습니다. '일본의 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섬기는 수백만의 잡신들도 ' 가미사마'라고 부릅니다. 우리 믿음 의 선조들이 그 가미사마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가미사마'라는 말만 들으면 진절머리가 쳐 집니다. 그런데 일본 목사님들은 만나면 연신 가미사마 어쩌고저쩌고 한다는 말입니다.

저는 다른 말은 못 알아들어도 ' 가미사마'라는 말만 나오면 귀가 번 쩍 뜨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그 말을 안 쓸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굉장히 듣기 싫은 말이지만 그들은 하나님 을 '가미사마'라고 말해야 서로 그 개념을 이해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듣기 싫어도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가미사마' 라는 말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로고스'로 표현한 것 도 이와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말씀은 어떤 분입니까? 1 절을 보십시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성경에서 '태초'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첫째로는,

"태초 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1:1)라는 말씀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태초는 시간의 시작을 말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는 시간의 시작이 아니라 영원한 과거를 의미합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한 과거, 이것이 바로 요한이 말하는 '태초'라는 말입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부터 계신 분이십니다. 영원히 자존하시는 분입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태초에 계신 말씀이 십니다.

그러나 나사렛 목수의 모습을 가지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영원부터 자존하신 분으로 믿기란 결코 쉬 운 일이 아닙니다. 나사렛이라는 시골에 쳐 박혀서 날마다 목수 일만 하시던 예수님은 그 권세 있는 가르침과 여러 가지 이적 기사로 인해 하루 아침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입에 올리는 유명 인사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고향 사람들도 예수님을 새로운 눈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가운데 그들이 말꼬리를 물고  늘어질 소지가 다분한 말씀을 한 마디 하셨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 쉽게 말해 아브라함이 자기를 보려고 무척 애쓰고 사모하다가 드디어 자기를 보고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참 이해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보다도 2,600여년 전 에 세상을 살다가 간사람 아닙니까? 그런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유대인들로서는 도무지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물고 늘어졌습니다.

"네가 아직 오십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네가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느냐?"(요8:57) 그러자 예수님은 기가 막힌 대답을 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8:58) 그러자 유대 인들은 격분을 해서 돌을 들고 치려고 달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나와 있는 대로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십니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계셨던 분이십니다. 또 본문 1, 2절에 나와 있는 대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십니다. 여기서 '함께'라는 단어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 함께'라는 말은 '끼리끼리'라는 말입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공부 잘하는 아이들끼리 끼리끼리가 되기 쉽고, 요란하게 화장하는 여학생들은 요란하게 화장하는 아이들끼리 끼리끼리가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됨됨이를 알려면 그의 친구를 보라는 말이 나왔는지도 모릅니다. 함께 있는 자가 누구냐가 바로 그의 정체성이나 신분이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6장에 보면 재미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제 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입장이 된 예수님께서 자기 고향으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어릴 때부터 같이 살면서 자라는 것을 지켜 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야, 대단하구나. 언제 저렇게 됐지?' 하고 감탄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얕잡아 보는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그들은 본심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아니, 저 사람은 우리 고향에서 자라고 살지 않았느냐?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그 동생들이 지금 우리와 함께 있지 않느냐?"하면서 예수를 배척한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을 자기들이 알고 있는 그 형제들 이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자기들이 익히 알고 있는 그 가정의 형제들과 똑같이 본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의 신분을 아는 데는 '함께 '라는 단어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1, 2절은 예수님이 '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결국 예수님이 누구시라는 말입니까?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1절 후반부에서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하고 덧붙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계신 분이신 동시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 곧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본문 3절에서 요한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 이 없느니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신 동시에 모든 존재를 존재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원천이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생명 때문에 오늘 이 지구에 있는 모든 만물이 소생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신이 생명을 지탱하는 것도, 우리 영혼이 영원토록 살 수 있게 된 것도 생명의 원천이신 예수님을 통해 흘러나오는 그 생명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원천이 아니시라면, 또는 그분이 생명을 거두신다면 이 세상은 죽음이 지배하는 어두운 세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생명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4절 후반부에서는 이 생명을 우리가 볼 수 있는 말로 바꾸어 설명해 줍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생명은 눈에 안 보이지만 빛은 눈에 보입니다. 그리고 이 빛은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큰 빌딩에 가려져 곰팡이가 피어 있던 음지도 햇살이 비쳐 들기만 하면 한 1, 2년 내로 잡초들이 우거지고 야생화가 울긋불긋 피어나는 곳으로 바뀝니다. 벌 나비가 쉴 새 없이 날아드는, 생명이 환희가 넘치는 그런 동산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햇살이 비쳐드는 곳에는 이와 같은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 눈에 보이도록 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가시는 곳에는 생명이 일어납니다. 그분이 가시는 곳에는 어두움이 물러갑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곳에는 거짓이 거짓으로 드러나고, 참된 것이 참된 것으로 드러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빛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육신이 되신 하나님

그런데 14절에서 우리는 또 한 가 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요, 창조자요, 생명이요, 빛이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육신이 되어' 하는 말은 어떤 면에서 '사람이 되어' 하는 말 보다 더 강한 표현입니다. 육신은 천하디 천한 흙으로 빚어진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범죄케 하여 온 인류를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버림받게 만들어버린 뱀에 대해 하나님께서 이런 저주를 내리셨지 않습니까?

"내가 흙을 너의 식물로 주노라. 너는 종신토록 흙을 먹을 지니라"(창3:14). 흙은 저주받은 뱀에게 식물로 줄 정도로 천한 것입니다. 욥도 자식이 하루아침에 다 없어지고, 재산이 날라 가고, 아내가 도망가고, 몸도 병이 들어 만신창이 인생이 되어 버렸을 때 자기의 비참함을 이야기하면서 스무 번 이상이 나 자신을 흙에다 비유했습니다. 흙은 그만큼 천한 것입니다.

그런데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흙으로 빚어진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분은 위대하고 깨끗한 사람들만 사는 그런 동네에 계셨 던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육신을 입고 바로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여기서 '거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스케노오'(skenoo)인데, '장막을 친다', '텐트를 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죄인들이 살고 있는 곳에 함께 텐트를 치고 사셨다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창녀와 같은 자들의 틈바구니에 오셔서 그곳에 천막을 치고 함께 유숙하셨다는 말입니다. 태초부터 계신 만유의 주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입니까?

비록 육신의 몸을 가지고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 틈에 사시는 분이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태초부터 계시면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온 우주의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입니다. 이 세상을 비추는 빛이십니다. 그는 분명 하나님이십니다. 18절은 이 사실을 좀 더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 타내셨느니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을 나타내 보여주신 분이 계십니다.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 하신 하나님, 곧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비록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셨지만 그 분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 당시에도 그랬지만 오늘날에도 예수님에게서 이 영광을 보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영광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계십니까? 여러분 중에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분이 계시다면 이 시간 예수님에게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눈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그 영광을 보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습니다. 할렐루야. 교회를 꽤 오래 다닌 분들 가운데도 아직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저는 여러분에게 분명하게 도전합니다.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못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자기모순에 빠져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위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종교인이나 성자도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관계없는 세상 사람들이나 하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을 펴서 한 절 한 절 조용히 읽어 내려가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은 내 아버지다."

라는 것을 얼마나 강조하여 말씀하고 계신지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통 인간과 같은 선에 놓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 당시 상황에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로 주장하는 것은 사형 감이었습니다. 유대 나라에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거나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르는 행위는 신성모독죄로 간주되었습니다. 자기를 하나님과 똑같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로 말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마다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돌로 쳐 죽이려고 달려든 이유 역시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많이 보게 되겠지 만 요한복음에 '죽인다'는 말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주님은 끝까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주장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 말을 조금이라도 양보했더라면 주님은 십자가에 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그것을 고집하셨기 때문에 결국 십자가 죽음을 맞게 되셨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진짜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과대망상증에 걸린 정신병자나 사기꾼으로 취급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그 중간은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은 위인이나 성자가 아닙니다. 그런 시시한 말은 예수님과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 가운데 아직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믿지 못해 그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한 분이나, 교회를 다니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영광 앞에 압도되는 은혜를 받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양자택일하시기 바랍니다. 이 문제에 관한한 중간지대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양자택일을 돕기 위해 캠브리지 대학교의 교수였던 C. S. 루이스의 말을 여러분에게 인용해 드립니다.

"이제 당신 스스로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과거와 현재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든지, 아니면 미친 사람이나 그보다 더 상태가 나쁜 어떤 존재로 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여러분은 그를 바보라고 몰아칠 수도 있습니다. 귀신들렸다고 하면서 그에게 침을 뱉을 수도 있고 돌을 던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못하겠다면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주님이야말로 나의 하나님입니다.' 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위대한 스승이니, 성자니 하는 허튼 생각에 빠져서 그분에게 어 울리지도 않는 말을 붙여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셔서 죄인들 가운데 거하셨지만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분의 영광을 보기를 원한다면 그분이 하나님 인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중간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야

그렇다면 누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까? 14절 은 '우리'가 보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일차적으로는 사도 요한을 비롯하여 예수님을 목격하고 직접 예 수님과 동행했던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제자들만 '우리' 속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12, 13절을 보십시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누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까? 누가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라야 합니다. 자식은 부모를 압니다. 왜냐하면 그 부모가 낳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많은 군중 속에서도 자기 아버지가 어디 있는 지 금방 알아 맞춥니다. 본능적으로 아버지를 아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로 하나님께로서 난자, 곧 중생 받은 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신 것을 금방 압니다.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그렇지 않고는 아무도 그를 볼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을 읽어 보면 사람들이 두 부류로 나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장 조금만 넘어가도 벌 써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누어집니 다. 한 부류는 3년을 따라다니며 보았음에도 예수님을 초라한 목수 이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얼마 동안은 예수님이 이적기사를 행하니까 흥분해 가지고 따라다니기도 하고, 관심도 가졌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들의 가슴에 못처럼 박히기 시작하자 그들은 그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는 드디어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미움이 점점 도를 더해 가면서 예수님을 더욱 배척했고, 결국에는

"저 놈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소리치는 무서운 사단의 무리들로 바뀌었습니다. 끝까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그에게서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그분을 보자마자 그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앞에 엎드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하고 고백하는 거룩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들이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로서 난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과 통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다'는 말에 대해서는 제가 다음 시간에 충 분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 영광에 압도될 수밖에 없습니다.

영국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보면 유니우스라고 하는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백과사전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또 그를 설명하기 위해 상당한 분량을 할애한 것을 보면 대단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17세기에 살던 사람으로, 목사이자 탁월한 고전학자로 옥스포드 대학의 교수를 지냈던 분입니다.

그는 목사 집안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그의 아버지 역시 목사였는데,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는 그 이름이 보이지 않지만 기독교 백과사전에 그 이름이 실릴 정도로 탁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부자간에 아주 훌륭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훌륭한 목사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자녀라면 어려서부터 그 믿음이 탁월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유니우스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는 어릴 때는 아버지 밑에서 신앙생활을 하긴 했지만 머리가 커지고 학교에 가서 고등학문을 배우면서 점점 믿음에서 떠났습니다. 결국 나중에는 신앙생활마저 포기해 버리는 지경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놓고 늘 마음속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나 절대 강압적으로 신앙생활 잘하라고 말한 일이 없다고 합니다. 목사 집에서는 그런 사례가 많습니다. 목사 집안에서 예수 잘 믿으라고 너무 윽박지르면 자녀들이 오히려 빗나갈 확률이 참 높습니다. 장로 집안도 비슷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상당히 총명한 사람이었던 같습니다. 속이 답답하지만 인내하면서 강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꾸준히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던 중에 그 아버지가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냈습니다. 아들이 가끔 자기 서재에 들릴 때면 늘 찾아가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에다 신약성경을 가져다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는 갖다 놓았다는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내 아들의 눈을 열어 주시면 이 아들이 성경책을 보게 되는 날이 있을 것이 다.'하는 믿음을 가지고 꾸준히 기 다렸던 것입니다.

어느 날 유니우스가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서재에 들어왔습니다. 어떤 생각에 골몰하면서 늘상 하는 대로 자기가 잘 가는 그 자리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책이 한 권 놓여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심코 그 책을 펴 보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요한복음 1장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니라."

이 구절을 슬쩍 보는데 뭔가 가슴을 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대학에서 철학과 논리학을 배웠기 때문에 논증의 구조를 잘 보는 예리한 눈이 있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요한복음 1장 1절의 논증 구조가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야, 이거 대단한 논증인데. 간결하면서도 힘이 있고, 군더더기도 없이 핵심을 치면서 3단계로 뛰는 논증이 다 있네.' 하고 그 논증 방법에 감탄을 한 것입니다.

내친김에 그는 요한복음 1장을 내리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읽어갈수록 자기 마음이 자꾸 이상해지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뭐, 태초에 말씀이 계셨는데, 이 말 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이 말씀이 하나님이라고?' 마음이 자꾸 이상해지니까 이내 성경을 닫아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황급히 서재를 나왔는데, 이상하게 그 마음이 진정되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흥분했다고 할까요? 충격을 받았다고 할까요? 아니면 불안했다고 할까요? 무엇인가에 쫓긴다고 할까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감정에 붙들려서 헤어나지를 못했습니다.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도, 심지어 밤을 새도 마음이 진정 되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너무 견딜 수 없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릎을 꿇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예수님,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제가 이제 믿겠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 을 제가 이제 고백합니다"

하고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순간에 형용할 수 없는 평안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불안하고 초조하던 마음이 바다와 같이 잔잔해진 것입니다. 이 일을 계기로 유니우스는 신학 공부를 시작해서 목사가 되었고, 옥스포드 대학에서 가르치며, 성경의 사본을 연구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하는 학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은 예수님의 초라한 모습에서도 하나님을 봅니다. 할렐루야! 나사렛 예수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것을 봅니다. 예수를 오래 믿으신 분들에게 다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은 진정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계십니까? 그 영광의 찬란함 앞에 무릎을 꿇고 감격합니까? 그 영광 앞에 압도되어 하나님을 찬송하지 아니하고는 견딜 수 없는 흥분과 뜨거움을 느낍니까? 돈과 쾌락의 영광에 마음을 온통 빼앗겨서 예수님의 영광에는 털끝만치도 관심이 없는 것 은 아닙니까?

만일 그런 분이 계시다면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 여, 주님의 영광을 보여 주옵소서. 내 눈을 열어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보여 주옵소서."

그 영광을 보기만 하면 우리 영혼의 질병은 모두 사라 질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 영광을 볼 때마다 세상의 헛된 영광에 취해 있던 우리 마음이 하늘의 영광의 빛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신 것을 보는 영광의 눈만 열리면 우리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모든 근심과 걱정이 다 사라집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왜 세상 사람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그런 표정과 말씨, 행동, 생활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합니까? 말만 번지르 하게 잘하지, 주님의 영광은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주의 영광을 보는 사람은 달라집니다. 주의 영광을 보는 사람은 그분 앞에 무릎 꿇고 생을 주님 앞에 기쁨으로 드리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보는 사람은 자신의 직업이나 가정도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보는 사람은 세상의 어떤 기쁨이나 행복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영광 앞에 이 세상 의 것은 다 헛된 것이요. 태양 앞의 촛불처럼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공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돈이나 명예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사람들의 존경이 얼마나 오래 갈 것 같습니까? 건강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건강이 여러분의 생명을 지탱 해줍니까? 천만에요. 흙으로 빚어진 인생의 모든 것은 그 영광이 아무리 화려해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만 하면 세상의 모든 영광이 안개가 흩어지듯이 흩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 다닌다고 하면서 아직도 예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의 영광에 매달려 미혹을 당합니다. 비참한 자리에까지 떨어집니다.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님 앞에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여, 주의 영광을 보게 하옵소서. 내 눈을 열어 주의 영광 보게 하옵소서."

앞으로 요한복음을 계속 읽어 가는 동안 우리 모두가 이 영광을 보는 황홀감을 맛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영광을 보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은혜에 취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의 뜻을 아름답게 이루어 드리는 멋진 생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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