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엡 5: 22 - 23
설교제목 : 남편과 아내
설교자 : 조용기 목사님
5월은 가정의 달인데 5월 마지막 주간을 보내면서 저는 '남편과 아내'라는 제목으로 여러분과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생령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곧장 그 사람 아담에게는 돕는 배필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담은 돕는 배필이 없이 혼자는 능히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난 다음 그 갈비뼈 하나를 취해서 그로써 하와를 만들고 그 갈비뼈를 취한 자리는 흙으로 메꾸었습니다. 그래서 하와를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데려오니 아담이 하와를 보고 깊이 감격해서 "이는 내 살 중의 살이요 내 뼈 중의 뼈니 여자라 하리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에는 그 다음에 '남자가 그 부모를 여자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룰지라' 이렇게 말씀하시므로 인생 가운데 세운 가정은 가장 첫 제도요 하나님께서 지극히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아담은 돕는 배필 하와를 얻어 한없이 기뻤으나 또한 그 돕는 배필의 말에 너무 귀를 기울여서 금지한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그 이후로 마귀의 지배에 들어가 죄악이 저들의 생애와 가정과 자녀들에게 저주의 가시가 되어 고통과 완력과 분쟁과 슬픔과 죽음이 먹장구름처럼 덮이게 된 이유도 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 조상 아담과 하와 그 가정의 시작과 그 비극을 말씀해주는 성경 적인 내용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남편과 아내간에 좋은 관계를 정립하고 행복한 부부의 삶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가정의 원초적인 뿌리인 아담과 하와의 삶을 알아야 됩니다. 그 다음 이후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교훈을 받아서 건전하게 성장 발전해 나가야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첫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남편과 아내라는 두 인물을 만들어 주신 그 존재적인 위치를 살펴보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창조적인 순위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9절에 보면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적인 순위를 보게 되면 남자가 먼저 태어나게 되고 그리고 남자 속에서 여자가 태어났다 이렇게 말하므로 어찌할 수 없이 남자가 여자보다 앞섰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여자를 앞서서 인도해야만 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원리 속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남편과 아내의 사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또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계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영적인 신랑이시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인데 어찌할 수 없이 예수께서 모든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예수로 말미암아 교회가 태어났으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어찌할 수 없이 예수님을 따라가야만 될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인도하는 것처럼 남편도 아내보다 먼저 났으므로 남편은 아내를 인도해야될 창조적인 순위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조의 목적을 볼지라도 고린도전서 11장 9절에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가 아무리 남녀동등권이다, 우리는 다 똑같다 그렇게 말을 해도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자가 남자를 위해서 지음을 받았다 남자가 여자를 위해서 지음을 받지 않았다. 이러므로 별도리 없이 우리 인간 사회는 남자 중심의 사회요 가정에도 남자 중심의 가정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적인 목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가 먼저 지어지고 그 다음에는 여자가 뒤에 지어졌으며 남자를 위해서 여자가 지어지고 여자를 위해서 남자가 지어진 것이 아니므로 여자가 남자를 잘 보필해서 훌륭한 가정을 세워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야 될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분명히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서 지어졌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지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먼저 계시고 우리는 다음에 지어졌으며 예수님을 위해서 우리가 지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예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받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받드는 것처럼 그러므로 아내들도 범사에 남편을 섬기고 사랑하고 받들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내가 남편을 위해서 지음을 받았지 남편이 아내를 위해서 지음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마 현대 여권 운동을 하는 사람은 이 말을 들으면 저를 가만 안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든 안 하든 하나님이 창조적인 목적으로 지어 주신 것 절대로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찔레꽃이 장미꽃이 될 수 없고 장미가 찔레꽃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어 놓으신 것은 그대로 우리가 순복할 때 참 행복을 가질 수 있고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존 재적인 관계도 성경은 분명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3절에 보면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머리와 몸의 관계이므로 누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다 이런 말은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한 몸에서 머리가 없는 몸이 살아 있을 수 없고 몸이 없는 머리가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머리가 몸을 보호하고 인도하는 것처럼 몸은 머리를 받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한 가정에서 남편은 머리가 되고 아내는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몸을 보호하고 인도해야할 책임이 있고 몸은 머리를 잘 받들 듯이 아내는 남편을 잘 받들고 순복 해야 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와 똑같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영적인 신랑이 되시고 우리의 머리가 되시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를 순종하고 받들어야 될 것이요 예수님은 몸된 교회를 돌보시고 보호하시고 이끌러 주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관계를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라는 존재 적인 위치를 분명히 깨닫지 못하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의 위치를 점령하기 위해서 경쟁을 하고 투쟁을 한다면 비극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어 놓으신 절대적인 우리가 지킴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참 행복한 개인과 행복한 가정을 마련할 수 있고 남편과 아내의 위치를 분명히 앎으로 말미암아 서로 경쟁적인 위치에 있지 아니하고 협조적인 상대로서 행복한 삶을 살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남편과 아내의 심리적인 관계를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남편과 아내라는 두 인생을 지어 놓았을 때 이것이 심리적인 변화를 분명히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6절에 보면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남편과 아내의 심리적인 형성이 벌써 에덴 동산에서부터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남편은 언제나 그 마음속에 지배적인 심리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때문에 남편이 어느 곳에 가든지 여성 사회에서는 남자가 리드하려고 하고 또한 가정에 들어가서라도 남자가 아내와 자녀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려는 그런 심정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가정에도 아내가 일어나서 남편을 지배하고 자녀를 지배하고 이끌어 가면 소위 말하는 콩가루 집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집안이고 남편이 아내를 지배하고 자식들을 지배하고 잘 다스려야 되는 것입니다. 물론 지배한다고 해서 폭력을 사용하는 지배권은 악한 지배권입니다. 지배하는 심리는 하나님이 주셨는데 이것이 죄악이 들어오면 폭군화할 위험이 있습니다. 남편들이 올바른 지도자가 되지 못하고 폭군이 되어서 주먹을 가지고 완력으로 그 아내나 자녀를 지배하려고 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부패된 지배력인 것입니다. 이것은 악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상적으로 남편의 마음속에 지배적인 심리를 주었기 때문에 남편이 이 지배적인 심리를 가진 이상 아내와 자녀를 사랑으로 잘 다스려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다스려서 인도하는 것이 올바른 지배적인 심리이지 주먹을 가지고 폭력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흉악한 것이요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원리를 배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보면 아내는 남편을 사모하는 심리를 갖고 있습니다. 너는 남편을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여자들이 어찌해도 남편을 사모하지 않고 떠나고 싶은 마음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별도리 없이 그 마음은 언제나 그 남편을 사모하게 되고 남편에게 그 마음이 잡혀 있습니다. 왜 이럴까? 나는 이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해도 벗어나지를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해 놓았기 때문에 아내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남편을 사모하고 그 남편을 사모하는 묶여져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부패하면 투기화할 위험도 있는 것입니다. 많은 가정이 투기심 때문에 편안할 날이 없는 것은 사모하는 마음이 잘못하면 투기심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투기심이 들어오면 가정에 많은 상처가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남편은 아내의 도움을 받는 심리를 갖고 있고 아내는 돕는 심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편은 집에 들어오면 꼭 어린아이같이 된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남편은 어제나 아내에게 도움을 받아야 존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집에 들어오면 아내에게 도움을 받기를 원합니다. 정신적인 도움도 받고 생활의 도움도 받습니다. 그래서 가정에 들어오면 가정의 모든 일을 아내가 돌보고 꼭 어린아이 돌보듯이 남편들을 돌보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남편은 도움을 받고 싶어하는 심리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내는 언제나 돕는 심리를 갖고 있습니다. 제가 심방을 가보면 특별히 아는데요. 심방 가서 남녀 성도들이 다 모여서 그 다음 과자라도 나누면 남자들은 같이 앉아 있는데 부엌에서 부지런히 물건을 가져오고 음식을 가져오고 대접을 하는 것은 전부 여자들이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제가 마음속에 생각하기를 '이거 불공평하다. 왜냐하면 똑같이 남녀가 함께 모여 있는데 왜 서비스 할 때는 여자만 하고 있느냐?' 또한 우리가 야유회를 갈 때 보면 그 장로님이나 교역자들 함께 가면 사모님도 같이 가는데 다같이 예배드리고 그 다음 음식 만들 때는 부인들만 부지런히 일을 합니다. 음식 갖다 나르고 물 떠오고 남편 음식 먹을 때까지 서비스합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늘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거 불공평하다. 왜냐하면 똑같이 남녀가 야유회를 나왔는데 왜 여자들만 봉사하고 남자들은 앉아서 얻어먹느냐?' 그러다가 제가 성경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남자는 도움을 받는 심리가 있고 여자들은 어찌하든지 도와주는 심리가 있어서 일만 생기면 도와주어야지, 그래서 밥도 내가 해야 되고 설거지도 내가 해야 되고 빨래도 내가 해야 되고 옷도 내가 입혀야 되고 잠자리도 내가 준비해야 되고 모든 것을 도와야 된다는 그런 도움의 심리가 여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움을 받는 사람은 주로 많은 듣게 되고 도움을 베푸는 사람은 말을 많이 하게 됩니다. 이러므로 오늘날 남편의 부인의 말을 잘 듣게 되고 부인은 말이 많고 남편의 결정에 거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입니다. 제가 가만히 일을 해 보면 분명히 오늘 일을 해서 서로 대화가 되고 일이 다 결정되었는데 그 분이 집에 돌아가서 하룻밤 자고 외서는 영 다른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자들끼리 무슨 일을 하려면 집에 가서 하룻밤 자기 전에 아예 계약서를 만들어서 도장을 찍어 버려야 돼요. 집에 가서 자고만 오면 다른 소리를 하기 때문에 괴롭습니다. 그것은 남자들은 어찌할 수 없이 여자들의 돕는 말에 굉장한 영향력을 받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오늘날 여자들이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사회 전반에 앞에 나서서 인도를 하고 있지 않지만 뒤에서 거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남편은 도움을 받는 심리를 갖고 있고 아내는 돕는 심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모든 일에 여자들의 어드바이스를 받아서 남자들이 그 마음에 사물을 결정하는 일이 대단히 많기 때문인 것입니다. 마귀와 죄악은 인간 심성을 부패케 하여 남편과 아내의 심리적인 관계를 삐뚤어지게 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래서 에덴 동산에도 남편은 도움을 받기 원하고 아내는 돕는 심리가 있는 것을 알고 마귀는 하와를 먼저 잡아서 그는 부패시켜서 하나님을 반역하고 산악과를 따먹게 하고 난 다음 그 부패 심리는 남편에게 전달시켜서 남편이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을 반역하고 선악과를 따먹게 만들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것을 알고서 도움을 받는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에 중심에 서서 남편의 말을 들어야 될 것이고 아내도 남편에게 도움을 베풀 때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에 입각해서 도움을 베풀어야지 그렇지 아니하면 마귀의 올무에 빠질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셋째로, 남편과 아내의 상호 의무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창조적인 위치만 알 뿐 아니라 남편과 아내의 심리적인 관계를 우리가 분명히 알 뿐 아니라 남편과 아내의 상호 의무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무를 부과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사람이 함께 살자면 자기 권리만 주장할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무도 반드시 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는 남편에게 준 의무가 있고 아내에게 준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에게 준 가장 중대한 의무는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한 가정에서 남편은 아내를 사랑할 절대적인 의무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그 의무도 보통 의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자기 몸을 줌 같이 희생적인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할 의무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남자가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자꾸 자기 권리만 주장해서 집에서 큰 소리만 내면 이것은 하나님의 법도에 어긋난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의 의무란 무엇일까요? 사랑의 의무란 아내를 제 몸같이 사랑한다고 하니까 아내의 여러 가지 잘못과 부족한 것을 이해해야 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러분 자기 잘못을 언제나 이해를 잘 합니다. 그러나 남의 잘못은 끝까지 파헤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정에서 같이 살려면 아내는 자기 몸이니까 자기 아내의 잘못과 연약한 것을 끝까지 선하게 이해하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해해서 마음에 동정을 해야지 끝까지 잘못을 파헤치고 그것을 정죄하면 이것은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한 가정에서 남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의 의무는 아내의 연약하고 모자란 점이 있더라도 이것을 잘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 사랑이고 그리고 고뇌를 동정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여러 가지 어려운 면에서 고뇌를 하고 있을 때 그것을 깊이 동정하는 것입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한쪽 손이 아프면 여러분 다른 손이 가서 그것을 만져주고 붕대를 감아주고 동정하는 것처럼 동정하는 것 이것이 참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상처를 치료해줘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세상에 살면서 심리적인, 육체적인 상처가 없을 수 없는데 한 사람이 상처를 당하면 못 본 체 하지 말고 그곳에 가서 상처를 치료해 주고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고 용기를 주는 것 이것이 또한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란 짐을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내 짐은 내 짐이고 네 짐은 네 짐이 아닙니다. 사랑은 짐을 함께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슬픔을 함께 나누고 고통을 함께 나누고 괴로움을 함께 걸머지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사랑이지 무관심 하는 것은 절대로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그뿐 만 아니라 소원을 성취시켜 주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상대방의 간절한 마음의 소원이 있으면 그 소원이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지 않는 이상 도울 수 있는 힘을 다해서 소원을 성취해 주는 것이 또한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란 양육의 의무가 잇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것은 안정된 주거를 허락해 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여러분 남자가 해야 될 일은 아내가 마음을 놓고 자녀들을 기르고 살림을 할 수 있는 안정된 주거를 보장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안정된 주거를 보장해 주고 의식주 생활을 보장해 주어야 합니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이러한 일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남편이라면 이것은 진실한 사랑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 가지 생활 환경상의 어려움에 처해서 이러한 것을 잘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만 그러나 절대로 자기 스스로가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혹은 술을 먹고 도박을 하고 세상에 방탕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수입을 다 그곳에 다 소모해 버리고 가정을 돌보지 않는 그런 남편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이것은 절대로 남편으로써 올바른 의무를 다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활에 기쁨을 가져와야 됩니다. 조그마한 일이라도 생활에 기쁨을 가져와야 되고 슬픔을 가져오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말 한 마디, 생활 하나하나, 기쁨을 가져올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아내도 똑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요, 집에 와서 그대로 곰팡이 피고 인생을 살라는 법을 없습니다. 이러므로 성장의 뒷받침을 해 주어야 됩니다.
고린도전서 11장 7절에 보면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가정에서 아내가 진실로 자기 인생을 성장시켜 영광된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남편이 만들어 준다면 이것이 남자의 큰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자가 남자의 영광인데 여자가 꾀죄죄해지고 절망해 버리고 그만 인생의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린 이런 상황에 있으면 남자가 자기 혼자 아무리 잘 되어도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영광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이 영광을 마음속에 받아들일 때 참 행복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내가 자기의 꿈을 이루고 성장하는 것을 잘 받들어 주면 그것이 남편에게 큰 영광이 되어서 그의 삶에 굉장한 행복을 갖다 주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장의 뒷받침을 해 줄 그러한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이란 내가 말로만 가지고서 "사랑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행함이 없는 사랑은 아무런 사랑도 아닙니다. 사랑은 바로 증명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증명되지 않는 사랑은 헛된 공기를 울리는 언어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참 사랑은 이해하고 고뇌를 동정하고 상처를 치료하고 짐을 나누어지고 소원을 함께 성취시켜주며 안정된 주거를 돌보아 주고 의식주 생활을 보장하고 생활의 기쁨을 갖다 주며 성장의 뒷받침을 해 주는 이와 같은 일들이 따라야 참으로 그 남편이 아내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아내의 의무는 무엇일까요? 여러분, 아내의 의무는 존경의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또 아내에게는 "아내들이여 남편을 경외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경외하라는 것은 굉장히 존경하고 두려워하라는 말입니다. 아내들은 남편을 존경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존경이 없이는 절대로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능동적으로 사랑하지만 아내는 남편을 존경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예 아내가 남편을 발 밑의 때같이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짓밟아 버리는 그러한 가정이 많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가정은 아예 파괴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아내에게 존경을 받지 못하는 남자는 세상 어디에 나가도 아무 일도 못합니다. 인생의 자신을 다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아내에게 존경을 받는 남자는 비록 세상에서 못났다고 해도 그래도 어깨에 힘을 주고 목을 꼿꼿이 세우고 이래봬도 나는 우리 집 사람에게 존경을 받고 있다. 그런 당당한 마음이 생깁니다. 존경을 하는 아내를 가진 남편은 백만 대군을 거느린 장수와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유능하고 훌륭한 남자라도 그 아내에게 무시를 당하고 멸시를 당하고 천시를 당하면 이것은 풀이 죽어서 얻어맞아 쫓겨 나온 개같이 돌아다니면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아내는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33절에 보면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저는 젊은이들이 결혼하는 것을 보고 대단히 마음속에 의구심을 가집니다. 저래서 가정이 행복하겠는가? 왜냐하면 그들이 결혼을 하고 이제 새 살림을 시작하는데 가보면 서로 말을 놓아요. 남편도 아내에게 말을 놓을 뿐 아니라 아내도 남편보고 "준비됐어? 밥 준비 됐어. 빨리 먹어. 뭘 하는 거야?" 이것은 전부다 존경심은 하나도 없고 친구로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 서로 부부간에 결혼했으니까 친구로 사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천만에. 그것은 인간의 생각으로 좋은 것 같지만 하나님의 법칙에 어긋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칙에 어긋났는데 어떻게 행복이 다가오겠습니까? 존경이 반드시 있어야 되요. 그러므로 아내는 남편에게 말 자체조차도 존경하는 말을 써야 되고 그리고 행동도 존경하는 행동을 해야 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또한 아내는 남편에 대해서 복종할 의무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22절로 23절에 보면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복종이란 말은 순종과 다릅니다. 순종이란 말은 내가 순종하고 싶으면 순종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그러나 복종이라는 것은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따라가는 것이 복종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순종을 하길 원하면서 복종은 안 하려고 해요. 복종을 안 하면 성경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물론 복종하는 것이 죄악까지 복종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복종한다고 남편이 도적질하라면 하고 도박하라면 도박합니다. 어떤 남편은 정신 이상이 되어서 몸을 팔라고 합니다. 그러면 남편이 몸 팔라고 한다고 해서 창녀가 되어서 몸파는 것도 복종하지요. 이런 것은 아닌 것입니다. 복종이라는 것은 죄악까지 복종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죄가 아닌 이상 올바른 정상적인 삶에 있어서 남편에게 부인은 복종하도록 주님께서 명령한 것입니다. 노예 근성 같은 소리를 하지 마시오 라고 할지 모르지만 노예 근성이 아닙니다. 복종함으로 말미암아 진실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대로의 가정이 이루어지고 행복하게 되고 또 복종하는 아내는 남편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교회라 바로 그리스도의 아내인데 교회가 하나님께 복종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에게 반발하고 그리스도와 동등한 위치에 서려면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복종을 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는 말할 수 없는 사랑을 베풀어주고 교회를 이끌어 주고 인도해 주고 도와주므로 위대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아내가 남편에게 경쟁적 위치에 서지 말고 복종하며 돕는 의무가 있습니다. 그 다음 남편은 범사에 영육간에 도와주고 가정 실림을 잘 꾸려 가면 이와 같은 가정은 하나님 앞에 큰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각각 다른 개성과 교육적인 배경과 생활, 취미와 습관을 갖고 있으며 또 남성과 여성이라는 생리적 차이를 갖고 있습니다. 이처럼 다른 두 개체가 함께 조화를 갖고 행복한 삶을 갖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본적인 법칙을 반드시 받아들이고 그 위에 성장과 발전을 가져와야 되는 것입니다. 이 법칙을 무시하면 남편과 아내의 행복이란 게임은 망쳐지고 맙니다. 그러나 이 법칙을 지키면 서로서로의 생활이 단계를 따라 변화와 성장과 발전을 도모하면서 수많은 비바람과 고뇌를 통하면서도 역시 크고 작은 차이는 있으나 행복이란 열매를 맛보면서 살아갈 수 가 있는 것입니다. 울고 살아도 일생을 살고 웃으면서 살아도 일생을 삽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살면서 울고 사는 것보다는 웃고 사는 것이 좋습니다. 불행을 가지고 사는 것보다 행복을 자기고 사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이나 하나님과 경쟁해서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인간 과학이 발달되고 교육이 향상되었다고 해서 그리고 우리의 생활 위치가 달라졌다고 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거역하고 살아서 승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성 해방이 되고 여성 교육이 향상된 것 아름다운 것입니다만 그렇다고 여성이 무조건 하고 남성과 같이 되어서 똑같은 위치에서 생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대로 남편은 남편의 위치를 지키고 아내는 아내의 위치를 지키고 그리고 남편은 남편의 의무를 다하고 아내는 아내의 의무를 다할 때 비로소 우주의 조화된 인생을 살게 되고 이러한 가정과 이러한 개인은 참으로 하나님이 창조한 목적을 성취하고 있기 때문에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국적으로 우리는 다 이 세상을 떠나 천당에 가면 우리는 모두다 아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이 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영원한 저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부부간의 올바른 조화를 가진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사이에 아주 조화로운 관계를 가지고 더 깊은 관계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아무리 지혜롭고 총명해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이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목적과 그 상태로 살아가지 않고는 절대로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가정이 지표를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남편의 위치를 아내는 아내의 위치를 상실하고 말했습니다. 남편은 남편의 의무와 책임을 아내도 아내의 책임을 잃어버리고 그래서 많은 가정이 고통 속에 있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오늘 성경이 가르치는 그와 같은 남편과 아내의 위치를 우리가 분명히 알 고 의무와 책임을 알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 성경을 볼 때 우리는 참으로 좋은 신랑 예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완전한 남편이요, 우리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우리들은 이 완전한 남편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 보호를 받고 인도를 받고 살 수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행복한지 말로다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버림받고 홀로된 사람과 같아서 불쌍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셔들인 사람은 행복하게 결혼한 사람 같아서 신랑 되신 예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고 사랑과 위로를 받고 격려와 축복을 받아서 위대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러므로 우리 모두다 이 세상에 살면서 신랑 되신 예수님을 깊이 마음속에 모시고 천국의 영광을 누리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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