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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사도행전

사도행전 2장 1-4절 왜 성령의 충만함이 필요한가? - 옥한흠 목사

by 재영구리 2023.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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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사도행전 2:1-4
설교제목 : 왜 성령의 충만함이 필요한가?
설교자 : 옥한흠 목사님


행 2: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요즈음 제가 읽고 있는 책이 한 권 있습니다. 빌 게이츠라는 사람이 쓴 최신작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 다시피 그는 짧은 기간 동안에 세계 최고의 갑부가 된 사람입니다. 현대 사회를 주도하는 컴퓨터 분야에 있 어서 선두 주자로서 마이크로소프트 사를 창업하여 지금 회장으로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쓴 「생각의 속 도」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아마 여러분 중에도 읽어보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제가 이 책을 읽는 이유는 요즈 음 비즈니스 계통에서 일어나는 변 화를 모르면 세상을 이해를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컴퓨터, 인터 넷 분야와 결합된 경영 분야는 가장 최첨단의 영역입니다. 일종의 미래 학의 영역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분야의 경향에 주의 를 기울이는 것은 목회에 매우 필수 적인 일입니다. '비즈니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또 앞으로 21세기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인 가?'를 이러한 책들을 통해서 내다 보면서 목회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 도 하고 계획도 세우는 것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 정보가 곧 힘'이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어떻게 보면 진부한 이야기처 럼 들리는 이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이며, 오늘날 세계 속에 이 말이 옳다는 증거들이 얼마나 급속도로 퍼져가고 있는지를 새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고, 또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사회는 그야 말로 정보가 힘이요, 정보가 능력인 사회인 것입니다. 하지만 정보가 힘 이라고 하여 그저 잡동사니처럼 많 이 모아 놓고, 많이 아는 것이 힘이 라는 말은 아닙니다. 어떤 정보는 그 속도가 얼마냐에 따라 능력이나 힘이 될 수도 있고, 쓰레기통에 들 어가는 쓸모 없는 것이 될 수도 있 습니다. 디지털 형식을 이용하여 새 롭고 비상한 방식으로 정보를 얻고 공유하며 활용하는 정보의 속도, 이 것이 이제 현대 사회를 주도하는 힘 이요, 미래 사회를 여는 힘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세 상은 더욱 살벌한 세상이 될 것입니 다. 조금만 방심하면 한없이 뒤쳐질 것입니다. 조금만 게으름을 피워도 아주 무식한 인간이 되어 버릴 가능 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그러므로 앞 으로 세상에서 여러 가지 일들이 많 이 일어나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 장 무서운 현상은 수많은 사람들이 정신병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사실 입니다.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새 로운 지식과 정보의 변화 속도를 못 좇아가면 결국에는 정신병자가 되는 것입니다. 못 따라가니까 사회에서 낙오되고, 그 위기감과 불안감의 악 순환으로 말미암아 결국에는 자기 자신의 인격이 파괴되는 위기가 초 래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 람들이 도태되고, 얼마나 많은 사람 이 상처를 입을까?' 하는 생각을 하 면 눈앞이 캄캄해집니다. 이런 사회 조류 속에서 21세기 목회는 정말 힘 들겠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하나 님의 은혜가 아니면 도무지 세상을 살 수 없는 살벌한 세상이 바로 21 세기 사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흔히 이 시대를 가리켜 '무한경 쟁'의 시대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말이 쉽지 '무한경쟁'이 무 엇입니까? 눈에 핏발을 벌겋게 세우 고 달려들지 아니하면 살아 남기 어 려운 시대가 바로 무한 경쟁 시대입 니다. 세상에서 살아 남는 힘은 시 대에 따라 무섭게 변해가고 있습니 다. 원시 시대에는 육체적, 물리적인 힘이 '힘'이었습니다. 그러나 조금 지나서는 부동산이 힘이었고, 또 조 금 지나서는 군사력이 힘이었고, 그 다음에는 제 1차 산업에서 생산되는 생산량을 국가의 힘이었습니다. 그 러나 21세기를 눈앞에 둔 오늘날의 힘은 바로 정보입니다. 그것도 속도 가 가속도로 붙은 정보입니다. 이 정보의 힘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 고, 삼류 시민으로 밖에 살 수 없는 시대가 바로 21세기인 것입니다.

교회의 힘

그러면 교회의 힘은 무엇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의 힘은 무엇입니까? 정보입니까? 아니면 성경의 정보량 입니까? 그 어느 것도 아닙니다. 교 회의 힘은 바로 '성령'입니다. 우리 는 이 세상의 힘을 다른 어떤 사람 처럼, 미국처럼 다 가질 수는 없지 만 이 세상이 가질 수 없는 단 한 가지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을 능히 다스릴 수 있고,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많은 인생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의 힘, 성령 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 다. 하나님이 교회와 믿는 자들에게 주신 이 성령은 시대를 초월하여 변 함이 없습니다. 세상의 힘은 시대마 다 끊임없이 바뀌며 변화하지만 성 령은 하나님이 주신 유일한 불멸의 힘입니다.

스가랴 4장 6절을 보십시오.

"이 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그렇습니다. 몇 천년 전 에 있었던 스가랴 시대의 문제도 성 령으로 해결 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21세기에 우리가 당면할 모든 문제 도 성령으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변함이 없고, 하늘로부터 오는 유일 한 힘을 우리 모두가 덧입으면 21세 기가 아무리 무한 경쟁 시대라 할지 라도 우리는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연약한 사람들을 붙들어 일으켜 세 울 수 있을 줄 믿습니다. 그만큼 성 령의 능력은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오늘 성령강림주일을 맞아서 우리가 다시 한번 성령의 능력과 성령의 힘 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내 힘으로 하는 것 아닙니다. 물론 이 세상도 내 힘으로 사는 것 아닙니 다. 내 힘으로 사는 것 같아도 사실 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힘으 로 사는 것입니다.

릭 워렌 목사님이 좋은 예화를 들려주었습니다. 한 때 세계를 주름 잡았던 권투 왕이었던 무하마드 알 리라는 사람을 잘 알 것입니다. 그 는 현재 파킨스씨 병에 걸려 투병 중입니다. 이 병 때문에 그는 지난 번 애틀란타 올림픽 때 성화를 점화 하러 나와서는 제대로 점화를 못 할 정도로 덜덜 떨었다고 합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왕년에 전성기 때

"내 가 최고로 힘이 세다. 세상에서 제 일 강한 자다."하고 큰소리치던 사 람이 아닙니까? 그런 사람이 덜덜 떨면서 성화도 겨우 점화할 만큼 약 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기자 회 견을 하면서 이런 의미 있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사람보다도 하나님 이 더 강하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 해 제가 이 병에 들었습니다."

백 번이고 옳은 말입니다. 인간 의 힘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사 람이 만든 힘은 다 유한적인 힘입니 다. 정보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세월이 흐르면 그것도 바뀔 것 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통해서 우리 에게 주신 하나님의 능력은 변함이 없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오고 가도, 아무리 세상이 급변해 가도 하나님 이 주시는 성령의 힘은 변하지 않습 니다. 이 성령의 힘은 힘 중의 힘이 요, 유일한 힘입니다. 이 힘은 급변 하는 세상을 이깁니다. 이리저리 엉 켜 있는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합니 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꺾이지 않 고, 거꾸러지지 않도록 우리를 굳게 붙들어 줍니다. 이 성령의 힘을 우 리가 소유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아직도 예수 님이 누구신지 잘 모르시는 분이 계 십니까? 아니면 세상을 살다가 이런 저런 상처를 입고 마음이 무거워서 '교회나 가보자!'하고 찾아 나와서 이 자리에 앉아 계시지는 않습니까? 그래도 가정에서는 큰 소리쳤었는데 이제는 가정에서조차 식구들 앞에서 조차 힘을 쓸 수 없고 어깨가 축 처 진 위축된 마음을 가지고 이 자리에 나오신 형제들은 안 계십니까? 그러 나 소망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하 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의 힘을 주시 면 우리는 일어납니다. 우리는 웃으 면서 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두 려워하지 않고 살아 갈 수 있습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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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성령 강림

성령의 능력을 우리가 바로 알기 위해서는 원본을 찾아보아야 합니 다. 사진으로 말하면 원판과 비교하 는 것입니다. 그 원본이 무엇이냐 하면 사도행전2장입니다. 성령 강림 과 함께 탄생한 예루살렘 교회가 우 리의 원판입니다. 흔히 이 교회를 가리켜 이상적인 교회, 가장 건강한 교회라고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사 랑의교회가 과연 성령의 능력으로 서 있는 교회인지를 알려면 이 원판 을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비춰보면 됩니다. 우리 각자가 진정으로 성령 충만한 가운데, 성령이 주시는 능력 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를 점검해 보 려면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과 비 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것입니 다. 성령이 임하시자마자 그 사람들 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성령의 충만 함을 받자 그들이 얼마나 강하고 놀 라운 사람으로 변화되었는지, 그런 그들을 통해서 세상에 어떤 일이 일 어났는지를 비교해 보면 내가 성령 충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가 좀더 주님 앞에 기도해야 되겠 다.'라거나 '좀더 능력을 얻어야 되 겠다.'라는 결심도 하게 되는 것입 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날 십자가에서 세상 죄를 지고 돌아가셨습니다. 그 리고 사흘 뒤인 첫 열매를 드리는 초실절 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 습니다. 그후 50일이 지난 오순절 날에 그는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보 내 주셨습니다. 사실 '오순절'(五旬 節)이라는 말은 '50일 째 되는 날' 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이 오신 그 날은 오늘로 말하면 주일입니다. 유 대의 요일로 치면 안식일 다음 날이 됩니다. 성령이 임하신 날이기 때문 에 우리 모두가 이렇게 주일날 나와 서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 앞에 경배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일 날 예배에 참석하시는 모든 사람들은 항상 성령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열려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날도 120여 명의 제자들이 승 천하신 예수님을 전송하고 나서 다 락방에 모여 약 10일 동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 성전 어느 한 편에 있는 장소에 있었는지 아니면 예루살렘 성전과 가까운 어 떤 다락방에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이 모였던 아 침 9시경은 아마도 매일 기도하고, 찬송하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 던 시간이 아닌가 합니다. 그 날도 전 날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기도하 고 있었는데, 갑자기 큰 소리가 들 렸습니다. 엄청난 바람 소리 같았습 니다. 사실 우리 한국에서는 바람 소리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잘 경험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토네이도 의 재앙을 가끔 당하는 미국 중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바람 소리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 지축을 흔들며 돌진 하는 토네이도의 소리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전율을 느끼게 하 는 무섭고 강력한 소리라고 합니다. 바로 그와 같은 바람 소리가 났던 것 같습니다. 우리 성경에 보면 '강 하고 급한 바람 소리'라고 했지만 이 '강하고 급하다'는 것이 어느 정 도였는지는 설명이 없으니까 잘 모 르겠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 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 터진 줄 알고 몰려들 정 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그 소리가 얼 마나 강하였는지를 추측해 볼 수 있 습니다.

학자들은 당시 예루살렘의 상주 인구를 2만 5천 내지 3만 정도로 계 산합니다. 더욱이 그 날은 오순절 날입니다. 오순절 경에는 중동 지역 의 기후가 아주 좋은 때라고 합니 다. 그렇기 때문에 지중해 연안이라 든지, 그 당시에 세계 각지로 흩어 졌던 교포 유대인들이 이 오순절 절 기를 지키기 위해서 사방에서 모여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무렵에는 예루살렘 인구가 10만 내지 30만 정 도 되었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 다. 10만에서 30만 정도 되는 사람 들이 바람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 하고 소리 나는 쪽으로 달려 왔으 니, 그 소리가 얼마나 대단했겠습니 까?

그 바람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120여 명의 사람들 각 자의 머리 위에 마치 혀와 같이 날 름거리는 불꽃이 전부 머물러 있었 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성령 이 예외 없이 임하신 것입니다. 이 와 같이 성령은 믿는 자에게 예외 없이 충만히 임재하십니다. 이 사실 을 믿습니까? 어떤 사람은 성령의 불꽃이 없고, 어떤 사람은 성령의 불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120여 명의 남녀 노소 각 사람 머리 위에 성령의 불꽃이 머물러 있었던 것입 니다.

이 불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 하는 징표입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 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실 때 불꽃 가 운데서 나타나셨고 엘리야에게 응답 하실 때도 불로 응답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오순절 날 제 자들에게 내려졌던 이 불의 임재는 곧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우며 황홀한 사건입니까? 그뿐 만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입을 열게 하시니까 모든 사람이 방언으로 하 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 임재에 대한 잘못된 태도

우리가 이런 장면을 보면서 주의 할 것이 있습니다. 잘못된 환상을 가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도 이런 현상이 좀 일 어났으면 좋겠다. 바람 소리가 확 나면서 불꽃이 그냥 앉아 있는 우리 모든 사람들 머리 위에 임하면 얼마 나 좋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황홀할까?'하고 기대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 령 강림과 같은 사건은 반복되지 않 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이 반복되지 아니하는 것처럼 성령이 지상 교회에 임하시는 그 첫 번째 드라마 같은 사건은 절대 반복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환상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그 때로부터 성령은 이미 교회에 임하여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 므로 더 이상 그런 일이 반복되어야 할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성령이 이미 교회와 우리 각자에게 임하셨 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순절에 대한 잘못된 환상을 가지면 안 됩니 다. 기록을 보면 그런 환상이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고 열심히 기도하던 사람들 중에 이상하게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안 주는 것을 억지로 달라고 아우성 치면서 자꾸 이상한 공상을 하니까 잘못되는 겁 니다. 마귀가 틈을 타서 시험에 빠 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에 성령이 임하시는 사건을 보면서 이상한 병 적인 열등감을 가져서도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자기를 자책합니다. '아, 처음에 성령 받은 사람은 입이 열려 방언을 말하고, 성령이 불 같이 임해서 머리가 뜨겁 고, 가슴이 후끈후끈 달아오르는 체 험을 했다는데, 왜 나는 그런 게 없 을까? 아무래도 나에게는 성령이 계 시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성령을 아 직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해.' 어떤 교회에서는 아예 이런 식으로 가르 칩니다. 어떤 식으로든 가슴이 한 번 후끈해져야 성령 받은 사람이라 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와 같은 소 리를 들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그 런 병적인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 습니다.

제가 그것을 '병적인 열등감'이 라고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 를 믿으면 이미 우리 안에 성령께서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우 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결코 우리 를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할렐루야!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고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라 시인하게 하신 성령님은 들락날락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 령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늘도 나 를 떠받치고 계십니다.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것도 성령께서 나를 떠받 치고 나에게 힘을 주시니까 존재하 는 것이지, 내 힘으로 존재하는 것 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열등감이나 잘못된 환상을 가지고 성령을 잘못 오해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선물을 구하라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을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선물을 기대하는 것 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달라고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은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하여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소유한 우리가 해야 하는 것 은 성령이 주시는 선물을 기다리며 구하는 것뿐입니다. 성령의 선물이 무엇입니까? 능력이요, 힘입니다. 성 령의 선물이 무엇입니까? 은사입니 다. 성령의 선물이 무엇입니까? 치 유하심입니다. 성령의 선물이 무엇 입니까? 우리를 높이 들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시는 역사입니 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38절을 보십시오. 베드로의 전도를 받아서 한꺼번에 남자들만 3 천 여 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놀라 운 대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대단한 일입니까? 여기에 앉 아 있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예수를 믿고 돌아온 것입 니다. 그것도 여자하고 아이들은 모 두 제외하고 순전히 성인 남자만 3 천여 명입니다. 이렇게 놀라운 대부 흥이 일어났을 때 베드로는 그들에 게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 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 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 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 리니."

이것은 마치 성령을 받고 또 받고 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 같습니 다. 그러나 이 용어를 다르게 번역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선물을 받 으리니'라고 번역 할 수 있습니다. '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와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는 의미상 대단히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즈음 미 국의 유명한 권위 있는 성경은 이것 을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 미 교회에 임하신 성령께서 우리에 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우리가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의 선 물이 우리 가운데 임하실 때 우리에 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알기 위하여 우리는 성령의 역사가 처음 으로 시작된 초대 예루살렘 교회를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성령 받은 증거들

부부가 결혼하고 나서 파도가 거 센 험한 세상을 5년, 10년을 지내다 보면, 둘 중에 하나가 은근히 '왜 우리는 신혼 때와 같이 그렇게 달콤 한 결혼생활을 못 할까? 왜 우리는 황홀하지 못할까? 그 때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행복에 겨워 노래가 나 왔는데, 왜 지금은 이렇게 침체되어 있을까? 아마 결혼 생활이 잘못되어 가나 보다. 부부 관계에 뭔가 이상 이 생겼나 보다.'라는 생각을 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지 금은 황홀하지도 않고 가슴도 두근 거리지 않으니 우리는 서로 사랑하 지 않나 보다.' 라고 생각하는 여자 나 남자가 있다면 그를 정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 다. 그는 비정상입니다.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이 왜 비 정상입니까? 결혼 생활을 하면서 가 끔 신혼 때 찍었던 사진을 보기도 하고, 그 때 찍은 비디오 테이프를 틀어 놓고 손을 잡고 같이 보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한 번씩 사 진을 꺼내 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혼 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황 홀하고 꿈을 꾸는 것과 같은 생활로 돌아가기 위해서입니까? 그렇지 않 습니다. 그 때의 모습을 보며, 회상 하면서 '그 때의 처음 사랑이 아직 도 우리에게 건재한가? 그 때 서로 서약한 것을 우리는 성실하게 지키 고 있는가? 그 때에 비해서 우리는 얼마나 성숙한 부부가 되어가고 있 는가? 그 때의 풋풋한 사랑이 이제 는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었는가?' 하는 이런 점들을 점검하기 위해서 결혼 초의 사진도 보고, 비디오 테 이프도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루살렘 교회에 임한 성 령의 원본을 보는 이유도 이와 같습 니다. 원본을 보는 이유는 그 때 일어났던 그 현상이 나에게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서가 아닙니다. '예루 살렘 성도들이 성령 받고 얼마나 달 라졌나? 그들을 통해 어떤 일이 일 어나고 있었나? 그들이 갖고 있었던 성령의 특별한 능력과 역사는 어떤 것이었나?'하는 이런 점들을 살펴보 면서 나에게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평가하려는 것입니다. 그러한 비교 를 통해 기도 제목도 생기고, 성령 에 대해서 좀더 많은 이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예루살렘 교회와 우리 자신을 비교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성령 받은 예루살렘 성도들 은 어떤 특징이 있었습니까?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가 한 마음 한 입이 되어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4절을 보 십시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 을 받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 라."

성령이 오셔서 먼저 그들의 입 을 여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입에 서 찬양이 막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 니다. 그것이 찬양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11절 끝에 보면 그들 이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고 있었 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 말하다'라는 말은 '찬양하다'라는 뜻입니다. '전도했다'는 말과는 뉘앙 스가 다른 것입니다.

사람들이 몰려와서 보니 그들은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고 있었습니 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 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유대인의 언어로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15 개의 각각 다른 지방 방언으로 하나 님의 큰 일을 찬양하고 있었던 것입 니다. 그들이 말하는 방언은 요즈음 말하는 이상한 방언이 아니었습니 다. 15개의 각기 다른 지방의 언어 였습니다. 그래서 15개 지역에서 온 사람들은 전부 자기 지방의 말로 그 들이 찬양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습 니다. 15개 이상의 부족이나 나라의 언어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제자들을 그들이 본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무엇을 찬양했을 까요? 그들은 십자가에서 죽음을 이 기고 승리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찬 양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했습니 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살아 계시고, 만유의 주가 되심을 찬양했 습니다. 성령이 임하자마자 그들은 예수님을 생각하면 가만히 앉아 있 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가슴이 뜨거워 견딜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감동이 해일 처럼 막 밀려오는데 입을 다물고 있 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범람하는 강물에 제방들이 터지듯이 주님을 찬양하는 함성이 터졌습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에 가면 찬양이 살아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성도는 슬플 때나 기쁠 때나 항상 그 입에 서 찬양이 떠나지 않습니다. 가슴에 서 성령의 샘물이 터져 나와 입으로 막아둘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해일을 막지 못하듯 사랑의 감동의 해일을 막아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혼자 흥얼거리기도 하고, 함께 부르 기도 합니다. 찬양이 그 사람의 가 슴에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마 치 용암이 산을 뚫고 분출하듯이 찬 양이 활화산처럼 흘러 넘치는 것입 니다.

만일 찬송을 부르는데 도무지 따 라갈 힘도 없고, 부르는 찬송도 두 세 번 반복하면 짜증이 나서 입을 다무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까요?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그 사 람이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단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자 라면 분명히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 람입니다. 그 사람이 지금 비록 찬 양을 따라 하지도 못하고 입을 다물 고 있어도 성령을 소유한 자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찬양하는 은혜가 메말라 있다면, 그 렇기 때문에 찬양하는 것이 지겹고 곤혹스럽다면, 여러분은 성령 충만 하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해야 하는 문제입니 다. 내 영혼이 성령의 깊은 감동과 사랑의 격정으로 다시 달구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의 사랑에 황 홀한 감격이 솟구쳐 오르도록 성령 의 충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미지근하거나 냉랭한 가슴은 결코 성령의 마음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 분, 세상 살기가 얼마나 고달픕니 까? 그러나 성령 받은 우리는 고달 픈 세상에서도 노래하며 살 수 있습 니다. 찬양으로 세상을 헤쳐 나갑시 다. 세상 사람들을 보십시오. 스트레 스가 쌓이면 그것을 어떻게 풉니까? 노래방에 가지 않습니까? 여러분들 도 그런 데 가서 마이크 잡고 엉덩 이를 흔들고, 탬버린을 흔들면서 30 분이고 1시간이고 목이 터져라 노래 를 부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앞에 찬양하라고 하면 입이 안 떨어 져서 '또 부른다. 아이고 지겨워 죽 겠네.'하고 앉아 있다면 성령 충만 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래 가지고 어떻게 우리가 세상을 이기겠습니 까? 성령의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십 시오. 성령의 충만을 달라고 기도하 십시오. 무엇보다도 찬양하는 은혜 를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온 가정에 근심 걱정이 짙게 깔 려 있으면 자녀들도 벌써 그것을 느 낍니다. 부모가 이야기를 안 해도 ' 굉장히 어려운 염려를 안고 엄마 아 빠가 마음에 고민하고 계시는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집을 감싸고 흐르 는 분위기는 감출 수 없는 것입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부엌에서 설거지하는 어머니 입에서 찬양이 흘러나옵니다. 엄마 가 자기도 모르게 찬양을 하는 것입 니다. 아이가 밖을 지나가다가 엄마 가 찬양하는 소리를 들을 때 그 찬 양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아십니 까? 그 어머니의 찬양이 어린 자녀 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상상 하실 수 있습니까? 그 어머니의 찬 양 한 소절이 아이의 마음에 있던 무거운 먹구름을 걷히게 합니다. 그 찬양이 아이의 마음에 믿음을 뿌리 박히게 합니다. 어머니의 작은 찬양 소리가 집안에 생기를 흐르게 합니 다. 막혔던 사랑과 평안의 강물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찬양이 마귀를 쫓습니다. 찬양이 근심을 쫓습니다. 찬양은 주저앉아 있는 사람을 일으 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하면 누 구든지 찬양의 충만함을 받습니다. 막 춤을 추기도 하고 어떤 때는 울 면서 찬양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남가주 사랑의교회 에 갔었는데 그 교회 찬양이 참으로 은혜롭고 대단했습니다. 장로들이 찬양을 하다가 두 손을 높이 번쩍 들기도 하고, 서서 찬양하기도 하였 습니다. 그 찬양하는 모습을 보고서 저는 교회가 성령 충만한 교회인 줄 알 수 있었습니다.

"구원하심이 보 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 께 있도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 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 / 은혜 주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 은혜 주 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

이 찬송을 부르 면서 우는 사람도 있고, 손을 들고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모르는 사람도 있고, 모습은 달라도 모두가 천국으 로 둥실둥실 떠 올라가는 것은 충만 함이 넘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교 회의 그러한 생동감을 보면 성령 충 만한 교회임을 금방 알게 됩니다.

오늘 2부 예배 때 릭 워렌 목사 님과 그 일행 9명이 같이 앉아 예배 를 드렸는데, 그분이 제게 이런 말 을 해주었습니다.

"목사님, 이 교회 찬양이 정말 대단하네요. 너무 좋아 요. 주기도문송 부르는 것부터 시작 해서 너무나 감동적이었어요."

아마 그들의 가슴에 우리들이 드린 찬양 이 너무나 강한 감동으로 다가왔었 나 봅니다. 그래서 제가 속으로 감 사를 드렸습니다. '아! 역시 우리 교 회에도 성령이 살아 계신다. 충만히 임재해 계신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여러분, 개인적으로도 찬양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성령 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주여, 내 입 을 벌려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옵 소서."라고 부르짖으십시오. 성령이 쏟아 내게 하는 그 찬양은 우리가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 수 있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마귀를 이길 힘이 찬양을 통해 흘러나옵니다. 아무리 큰 고통 가운데서 씨름하다가도 나 도 모르게 찬양이 나오면 금방 마귀 는

"날 살려라!"

하면서 줄행랑 놓 습니다. 루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찬양이란 무엇인가? 마귀를 쫓는 가장 최고의 수단이다."

만일 성령 충만해야 될 가정에 마귀가 자리를 펴고 앉아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 까? 여러분의 입에서 찬양의 향기가 언제나 퍼지게 하십시오. 그러면 마 귀는 여러분 가정에서 결코 그 추악 한 악취를 피울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예배 때 너무나 영감 넘치 는 아름다운 찬양을 했습니다. 저는 이 찬송이 너무 좋아서 요즈음 거의 매일 부릅니다.

"나 주님만을 섬기 리/ 헛된 마음 버리고/ 성령이여 내 영혼/ 충만하게 하소서/ 주님 앞에 내 생명 드리리다."

무릎 꿇고 기도 하다가 이 찬송을 불러 보십시오. 천사가 내려 와서 여러분의 손을 꽉 잡아 줄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을 안고 직장에 갈 때나 핸들을 잡고 있을 때 이 찬송 불러 보십시오. 주 님께서 여러분의 어깨를 포근히 안 아 줄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찬양 충만에 다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여러분은 입을 다물고 계십니까? 어떤 때는 성령께 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찬양해. 찬 양해."하고 감동을 주시는 데도 여 러분은 왜 입을 꽉 다물고 있습니 까? 왜 여러분의 마음더러

"찬양하 라."고 명령하지 않습니까? 찬양에 는 나이가 없습니다. 저도 이제 60 살이 넘어갑니다. 그런데도 즐겨 찬 양하지 않습니까?

"나이 들어서 점 잖지 못하게 뭘 그렇게 찬양하고 그 래."하면서 괜히 고상한 척 하지 마 십시오. 노래방에 가서는 남에게 질 새라 고함치면서, 왜 하나님 앞에서 찬양할 때는 입을 꼭 다물고 있습니 까? 그것은 결코 바른 태도가 아닙 니다. 하나님 앞에서 전심으로 찬양 하십시오. 어린아이처럼 찬양하도록 성령 충만하게 해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증거하는 교회

성령 받은 예루살렘 교회의 두 번째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한 번 증거하니까 3천명이 회개하고 돌아 왔습니다. 사도행전을 계속 읽어보 면 그 다음에는 5천 명이 예수 믿고 돌아왔습니다. 또 5장 14절에 보면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 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라고 기록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회개하고 돌아왔음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 었습니까? 그것은 성령 충만한 베드 로를 위시하여 온 예루살렘 교회 성 도들 120명과 3천 명과 5천 명이 다 성령 충만하여 나가서 예수를 계속 전한 결과였습니다. 성령 충만한 교 회가 계속적으로 전하는 복음을 듣 고 하나님 앞에 손들고 찾아오는 사 람들이 부지기수로 많아진 것입니 다. 이처럼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복음을 전합니다. 나의 구원자가 되 시고, 내 인생의 유일한 소망이 되 신 예수 그리스도를 남에게 말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와 같이 증거하는 삶이 바로 성령 충만함의 표징인 것입니다.

엊저녁에 릭 워렌 목사님과 저녁 식사를 하고 돌아오는데 강남 역 쯤 오니까 부처님 오신 날이라고 큰 행 사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연꽃 같은 것을 들고 행진 하고 있었습니다. 한참 차가 막혀서 거기서 기다려야 했는데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너무나 안타까워 가슴이 마구 저미어 왔습니다. '불 쌍한 사람들, 신도 아니고 아무 것 도 아닌 우상을 저렇게 어깨에 매고 거기에 무슨 구원이나 복이 있는 것 처럼 믿고 있는 가련한 사람들, 우 리 교회가 좀더 능력이 있다면 저 사람들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있을 까? 한국 교회가 좀더 성령 충만하 다면 어떻게 불교 믿는 사람들이 아 직도 저렇게 많을까?' 제 가슴에 탄 식이 절로 나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한 사람은 복 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전하면 놀라 운 열매가 있습니다. 안 믿을 것 같 은 사람이 예수 믿고 돌아오는 역사 가 일어납니다. 이 모든 것이 성령 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당신에게 복 음 전하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 습니까? 그러면 당신은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전도에 별 관심 이 없습니까? 예수를 모른 체 미련 한 것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이웃 을 봐도

"예수 믿으세요."라는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부끄럽게 생각됩니 까? 이 시간 땅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보좌를 향 해 성령의 선물을 구하십시오.

"주 여! 나에게 성령의 충만을 주옵소 서. 성령의 능력과 담대함을 주옵소 서. 지금 나의 이 상태는 정상이 아 닙니다. 저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옵 소서."

말씀에 헌신함

세 번째로 나타난 성령 받은 예 루살렘 교회의 특징은 말씀 배우기 를 힘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말 씀 배우기를 힘썼습니다. 42절을 보 면 예수를 믿고 돌아온 삼천 명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 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 니라."

그들이 가장 먼저 힘쓴 것이 무엇입니까?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 말씀을 배우기를 원했습니다. 여기서 '전혀 힘쓰니라'는 헬라어 원어로 '프로스 카르테룬테스'(proskarterountes)라 고 하는 아주 긴 단어인데, '끈기 있게 계속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 다. 예수 믿고 돌아와 성령 충만함 을 받은 예루살렘 교인들은 끈기 있 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를 원했 습니다. 만사를 제쳐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을 먹고, 그 말씀을 통해서 점점 더 자신들의 믿 음이 자라기를 원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는 사람들은 하 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있습 니다. 말씀을 배우고 또 배우기를 원합니다. 그렇다고 무슨 말씀 중독 증에 걸린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을 능사로 알 거나 성경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배우고 깨달은 말씀에 자 신을 온전히 순종하며 사는 것을 기 쁨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 람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사람인 것입 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성령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 씀에 귀를 기울이도록 만듭니다. 그 리고 들을 때 깨닫게 만듭니다. 깨 달을 때 그 영혼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변화가 일어날 뿐 아니 라 그 말씀대로 사는 능력을 얻습니 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때 그들의 삶에 하나님의 놀라운 위 력이 따라가는 것을 체험합니다. 이 것이 성령 충만이요, 성령 충만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신앙 생활은 말 씀에 그 기초를 두어야 합니다. 예 루살렘 교회의 성령의 역사가 그렇 게 강하고 대단했지만 거기에 무슨 성령 집회가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 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려고 노력했습니다. 말씀의 기초가 바로 되어야 교회가 건강하고, 개인의 신 앙이 바로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를 보면 성 령은 많이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말 씀은 등한히 하는 교회가 참 많습니 다. 결국에는 그로 인해 교회가 심 각한 어려움에 빠지는 것을 저는 많 이 보았습니다. 이상하게 성령에 대 해 많이 강조하는 교회일수록 그 끝 이 좋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끝 이 좋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데 등한히 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떤 교회도 성 령 집회를 참 많이 했습니다. 그래 서 교회 안에 은사 받은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것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목사 사모가 은사를 받았는 데, 예언하는 은사를 받았습니다. 예 언하는 은사를 받았으면 예언을 똑 바로 했어야 하는데 무슨 예언을 했 는지 아십니까? 그 교회에 다니는 모 회사 사장을 보고 이런 예언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당신은 사장 직을 그만두고 교회에 와서 사찰을 하라고 하셨다."

하나 님이 하라고 하셨다는 데 겁먹은 사 람이 어떻게 거부합니까? 그래서 그 사람은 정말 사장 직을 그만두고 교 회에 와서 사찰 일을 했습니다. 이 것이 무슨 꼴입니까? 그게 무슨 예 언입니까? 여러분, 이런 식으로 되 면 교회가 굉장히 어려워집니다. 그 교회가 지금 얼마나 말로 다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모릅니 다.

요즈음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모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문제 의 그 목사가 설교 시간에 무엇이라 고 말했습니까?

"목사가 라스베가스 빠찡코에 들어가서 땡겼다 놨다 땡 겼다 놨다 해서 돈을 벌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했느냐? 그것은 교회 가 너무 재정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보태기 위해서 내가 땡 기고 했다."

그러자 거기 앉아 있던 사람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아 멘! 아멘!"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기가 막힌 일들이 벌어지게 되었습니까? 도대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습니 까? 병 고친다고 소문 난 교회, 하 나님의 능력이 역사한다고 소문난 교회가 왜 그렇게 잘못된 교회가 되 어 버렸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기 초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성령 충만하기 를 원합니까? 성령 충만하기를 원하 면 하나님 말씀 앞으로 돌아오십시 오. 그렇다고 배우는 것만을 능사로 아는 문제아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 니다. 배우는 것만 능사로 아는 사 람만큼 무서운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지 말고, 지킬 때까 지 배우는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 의 말씀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그 말 씀을 순종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 할 때까지 배우십시오. 바로 그렇게 말 씀을 사모하는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 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령 받은 교회와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찬양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둘째는, 복음 전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말씀 배우기를 힘쓰는 사람입니다. 이 시 간에 미처 다루지 못했지만 나머지 특징들도 간단해 요약해 드립니다. 넷째는, 성도끼리 교제하는 일을 힘 쓰는 사람입니다. 다섯째는, 떡을 떼 는 일에 힘쓰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성 만찬을 항상 마음에 담고 주님의 십 자가를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입니 다. 그것이 떡을 떼는 사람의 의미 입니다. 여섯째는, 기도하기를 힘쓰 는 사람입니다. 일곱째는, 표적과 기 사가 일어나는 역사가 있는 사람입 니다. 여덟째는, 헌금에 인색하지 아 니한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 들은 땅을 팔아서 교회와 하나님 나 라를 위해 아낌없이 내놓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아홉째는, 세상 사람들 에게 좋은 이미지를 주는 사람들입 니다. 마지막으로, 삶 자체가 활짝 열린 전도의 문이 되는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저 사람 때 문에 나는 교회 안 나간다."라는 말 을 듣지 않습니다. 도리어 '저 사 람을 보니까 나도 교회에 나가고 싶 다.'하는 소원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렇게 삶으로 덕을 끼치는 교회의 모 습이 가져온 결과가 무엇이었습니 까? 2장 47절은 예루살렘 교회 성도 들이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자 그 영향력으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날마다 교회로 밀려 왔다고 증 거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본문에서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10가지 특징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가 이런 특징을 소유한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만일 저와 여러 분이 성령 충만하여 이와 같은 특징 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산다면 우리는 이 세상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습 니다. 아무리 정보의 속도가 놀랍도 록 사람들을 위압하고, 위축되게 하 며, 어떤 면에서는 우리를 낙심케 한다 해도 성령이 주시는 능력을 입 기만 하면 우리는 이 세상을 이깁니 다. 성령이 주시는 능력을 입으면 우리는 날마다 감사와 찬송이 넘치 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아무도 우 리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어떤 원 수가 우리 성문을 에워싼다 해도 우 리는 평안한 잠을 잘 수 있으며, 승 리를 선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승리와 능력을 우리 것으로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 의 능력의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우 리가 이 성령의 능력을 가지고 이 세상을 승리하며 살 수 있기를 간절 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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