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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빌립보서

빌립보서 3장 12-16절 앞으로 함께 나아갑시다 - 이동원 목사

by 재영구리 2023.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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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빌3:12-16
설교제목 : 앞으로 함께 나아갑시다
설교자 : 이동원 목사

빌3장12-16

빌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우리도 중간에 같이 끼여서 같이 부르니까 좋은 거 같으네요.

얼마 전에 저의 둘째 아들 범이와 대화 하다가 저의 아이에게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아빠! 내가 내 친구들하고 얘기할 때 하고, 아빠하고 얘기할 때 하고 차이가 있는 거 알아?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무슨 차이가 있니? 그러니까 내가 아빠하고 얘기하게 되면 항상 자꾸 옛날 얘기, 나 어렸을 때 이야기 그런 이야기 많이 하게 되는데 나는 친구들하고 만나게 되면 앞으로 얘기 미래의 이야기를 자꾸만 하게 돼, 그래서? 그러니까, 아빠가 늙는 것 아냐? 그러더라구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사실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조금은 어떤 슬픔이 제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내가 나이가 늙어간다는 그 늙어감에 대한 어떤 슬픔이 아니라 혹시 내 생각까지 늙어가는 것은 아닐까라는 어떤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양식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로 크게 나누어 질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늘 과거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과거 지향적인 삶, 그리고 또 하나는 미래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미래지향적 삶, 이 두 가지 유형의 삶으로 나눌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나이와 별로 상관이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내가 아~ 그 젊더라도, 상당히 젊은 나이라고 할지라도 더 이상 어떤 꿈을 잃어버리고 있다면 비젼을 상실하고 있다면 이 사람의 삶은 과거 지향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러나 아직 꿈을 붙들고 있다면 비젼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리고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면 이 사람의 삶은 미래지향적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빌립보서 3장입니다. 이것은 빌립보서의 한 부분이고 이 빌립보서는 바울이 로마의 옥중에서 쓴 옥중 서신이라고 일컬어집니다.

아~바울의 전기를 연구하고있는 학자들은 바울이 일반적으로 AD 한 1년이나 2년에 태어났을 것 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 태어나고 나서 한 4~5년 지나고 나서 바울이 태어났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 되겠습니다.

바울이 죽은 해가 언제냐 하면 일반적으로 AD 68년 경이라고 일컬어집니다. 그런데 이 빌립보서라는 서신이 쓰여진 해가 AD 61년 경이에요. 그러니까 바울이 빌립보서라는 편지를 썼을 때 바울의 나이는 60세 전후였다고 생각 하면 되겠습니다.

옛날에는 수명이 짧았기 때문에 그 짤막한 수명을 살든 그 시대에 비교해서 바울이 60세가 되었다고 할 것 같으면 이것은 상당히 그 당시로서는 늙은 나이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마는 그 당시에 그랬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바울이 쓴 이 편지, 다른 편지도 마찬가지 입니다마는 특별히 빌립보서를 읽어보시면 바울의 마음속에 벅찬 비젼의 꿈이 아직도 바울을 붙들고, 따라서 바울의 발걸음은 생동하는 미래를 향해서 움직여 나가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이 빌립보서의 특별히 본문에서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메세지를 접할 때 마다 아, 하나님이 그래서 바울을 쓰셨고 이 단신의 거인 바울을 통해서 정말 그 시대의 세상을 바꾸는 놀라운 일을 하셨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이 바울의 미래 지향적인 삶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아니, 우리가 더 진지하게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면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분과 저가 정말 미래 지향적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것이 우리가 오늘 본문 앞에서 묻고 싶은 질문입니다.

그 첫째는 현재에 대한 창조적 불만을 가져야 합니다. 현재에 대한 창조적 불만을 가져야 합니다.

자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12절의 말씀을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다같이 12절 시작,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집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 저는 이 고백이 창조적 불만을 대표하는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이 말씀은 바울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말씀에 근거해서 구원을 확신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잘못 읽은 것입니다.

바울은 구원에 관한한 내가 확신한다! 그것은 분명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12절에서도 마지막 부분에 보시면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 바울은 이미 예수님께 잡혀있어요. 그의 구원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무엇이 아직도 이루어지지않았다고 말하고 있을까요?

두가지 측면에서 이런 고백을 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는 성숙의 차원에서 볼 때, 신앙 성숙의 차원에서 볼 때, 자 오늘 본문의 텍스트에 들어가기전에 10절에 보시면 바울이 이런 심경을 피력합니다. 10절에 보세요.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알려 하여, 나는 알고 싶다, 바울이 예수님 만났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죄 사함 받고 구원을 이미 받았지만 그것을 확신했지마는 바울의 마음속에 아직도 숨어있었던 깊은 열망, 나는 그리스도를 알고싶다 더 깊이 알고싶다!

신앙 성숙이 뭐에요?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과정이지요.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그리고 그 높이를, 그 넓이를, 나는 주님을 더 깊이 알아가고 싶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성숙에요. 뿐만 아니라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내가 주님의 부활의 권능 안에서 능력 안에서 행하고 또 주님의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하나님이 나에게 위임하신 그런 나의 비젼을 이루어가는 삶에 있어서 나는 아직도 멀었다! 나는 아직도 멀었다!

나는 아직도 이룬 것이 아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내가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이것이 바울이 자기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어떤 창조적 불만이였다 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창조적 불만 왜 중요합니까? 이 창조적 불만이 있을 때 새로운 발명이, 새로운 연구가, 새로운 사역이 시작 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 입니다마는 월트 디즈니의 이야기, 자기 딸이 어렸을 때 어린 딸의 손을 잡고 동네의 공원을 갔습니다. 그 동네 공원은 매우 지저분했고 깨끗하지 못했고 위험하기조차 느껴졌습니다. 이정도 밖에 공원을 만들 수 없는가? 이 창조적 불만, 어떤 과학적인 탐구도 할 수 있고 자연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공원에서 미래의 꿈을 꿀 수 있는 어린이들만의 천국을 만들 수는 없을까? 이것이 디즈니랜드가 디즈니 월드의 소위 Think park의 그 비젼이 탄생하는 순간 이였든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지금 에버랜드도 가고 그러는 거에요. 우리아이들이 다, 그날 그의 비젼 때문 이였습니다.

미국의 그 청소년 사역으로 크다란 영향을 끼쳤든 데이빗 윌크선 이라는 전도자가 있었습니다. 한국말로도 십자가와 깡패라는 그런 제목으로 그의 전기가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은 본래 필라델피아 근교 펜실바니아 주에 전원 목회를 성공적으로 하던 목사였습니다. 교회가 자라갑니다 확장됩니다. 그의 설교는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과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가 그의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있다가 텔레비전의 한 프로그램을 주목했습니다. 그것은 뉴욕의 그 도시 한 복판에 소위 Inner city에 청소년들의 모습을 보도하고 있었습니다. 마약에 빠지고 있는 청소년들, 또 폭력에 이끌려 가고있는 비참한 청소년들의 모습이 보도되던 순간 갑자기 그는 그 텔레비전을 껐습니다. 그리고 그는 텔레비전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시작합니다. 하나님 저 청소년들을 그대로 버려두어야 할까요? 제가 무엇을 하면 좋습니까? 그리고 이것은 계속적으로 그의 마음속에 기도의 부담이 되기 시작했고, 한 날 드디어 그는 중요한 결단을 내립니다. 그는 교회를 사임하고 뉴욕의 다운타운 험악한 도시 한복판으로 갑니다. 그리고 청소년 사역을 시작합니다. 이것은 미국정부와 수많은 사람들의 그 시선을 끌었고, 소위 미국의 도시 안에 청소년을 돕기위한 대대적인 프로그램이 시작되는, 청소년들의 인생을 바꾸는 위대한 혁명적 운동의 시작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의 마음속에 싹트기 시작한 그 창조적인 불만, 이대로 좋을까? 이것이 전부일까?

사랑하시는 여러분, 창조적 불만의 반대 개념이 뭘까요? 창조적 불만의 반대, 우리는 그것을 현실 안주의식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소위 Status quo mentality , 현실 안주의식 입니다. 뭐 이만하면 되었지 뭐, 그냥 여기서 만족하고 살면 되었지, 그러나 이것이 위험한 생각인 것을 아십니까? 그때부터 인생은 늙는 것입니다. 후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도 그렇고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과 저의 마음속에 이 창조적 불만을 경험하게 되시기를 기도 합니다. 나가기 위해서 그래요. 우리 인생이 더 부요해지기 위해서 그리고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찾는데 일을 위해서 우리에게는 창조적 불만이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사업의 장에서도 이런 창조적 불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직장생활에도 이 창조적 불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런 창조적 불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불만을 위한 불만,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그것은 오히려 공동체에 어두움의 영향을 끼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적 불만을 달라요. 창조적 불만은 어떤 의미에서 다를 가 있는가? 그것은 창조적 대안을 찾게 합니다. 그리고 창조적 대안을 제시하게 됩니다. 그리고 창조적 불만 속에서 나오는 창조적인 대안, 그것은 언제나 역사를 바꾸는 위대한 변혁의 힘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개인이나 공동체에 있어서 정말 미래 지향적인, 앞을 향해서 나아가는 그런 우리의 삶이 그리고 역사가 되기를 소망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현제에 대한 창조적 불만을 경험 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말 우리인생이 미래 지향적이 되기 위해서는 두번째로 우리는 미래에 대한 확고한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미래에 대한 확고한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

자 오늘 본문에 나타난 14절, 아주 유명한 구절이죠? 14절을 우리 다같이 읽겠습니다. 14절 시작,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녜, 푯대를 향하여, 골을 향하여 목표를 향해서 푯대를 향하여, 바울은 그가 예수를 만난 후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한 어떤 푯대가 목표가 설정되었든 것입니다. 그 푯대를 향해서 나는 간다!

그 푯대는 다른 말로하면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이다. 부름! 이것이 바로 소명이죠.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 소명이에요. 소명은 불러주심 입니다. 부르심, 바울은 그 소명을 보고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인생이 그 부르심 앞에 소명 앞에 순종하고 인생을 다 살고 주님 앞에 섰을 때 그가 누릴수 있는, 받을 수 있는 상급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바로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나는 그 목표를 바라보고 가고 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부르실 때, 단순히 구원을 위해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구원만을 위해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옥만 안가기 위해서 불러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 구원을 받았다는 것, 죄사함을 얻었다는 것, 그것은 놀라운 것이지만 그것은 출발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왜 구원 받았을까요?

주께서 저와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겨주시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신 것, 이제 여러분과 저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그 놀라운 부르심, 불러주신 그 일을 하도록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그 구원에 근거한 그리고 소명에 근거한 인생의 목표를 설정한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번 달에 우리교회 추천 도서로 소개했든 오스키니스의 소명이라는 책, 읽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책의 첫 페이지가 어떻게 시작됩니까?

어떤 부자사업가가 그가 부요 해 지기 위해서 사업에 성공하기 위해서 몰두했습니다 열심히 일했습니다. 상당한 돈을 벌었고 어느 정도 성공했습니다. 그가 이제 벤키시에서 만찬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을 때, 그러나 그는 매우 진지한 뼈아픈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가 열심히 일한 이유가 있습니다. 열심히 사업을 한 이유가 있습니다. 열심히 돈을 번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돈을 벌면 내가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게 될 것이고, 그러면 내가 하든 일들을 그들에게 다 위임하게 될 것이면 내 인생은 얼마나 편안한 삶, 소위 comfortable한 Living, 편안한 삶이 될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저는 이제 상당히 돈을 모을 수가 있었고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일하는 사람이 되었고 많은 일들을 그 분에게 위임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인생을 살다 보니깐요 도저히 이렇게 살아도 위임할 수 없는 것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 인생의 목표를 세우는 일, 그리고 그 목표를 실현하는 일만은 절대로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저는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소명을 성취하는 일, 그리고 그 목표를 바라보고 달려가는 일, 그것은 아무도 대신 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오스키니스는 계속해서 어떤 얘기를 합니까 그 다음 페이지에 보면은 저 유명한 도스도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얘기를 하면서 한 작중인물의 입을 빌려서 이런 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인간 존재의 비밀은 그냥 생존만 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인가 확실한 것을 위해서 사는 것, 무엇인가 분명한 것을 위해서 사는 것, 이것을 모른다면 자신이 왜 사는지 모르고 살아간다면 이런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수용하지 못할 뿐더러 종내는 그 인생을 스스로 파괴하고 말이다. 그것을 위해서 살 수 있고, 그것을 위해서 몸을 던져 죽을 수 있는 그 것, 우리는 이것을 인생의 최고순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존재의 목적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소명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 입니다. 소명은 사람마다 다른 것 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전체가 공유하는 공통의 보편적인 소명도 있어요. 예를 들어서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성취하는 것, 복음 전도를 하는 것,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것,

바울은 물론 이 소명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러나 전도를 해도 사람마다 어떻게 어디에서 하느냐 하는 소명이 또다시 달라질 수가 있어요.

예를 들어서 베드로의 경우에는 자기와 같은 동족의 유태인들에게 전도하는 것이 베드로의 소명 이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처음부터 달랐죠? 하나님이 그를 부르실 때부터 너는 이방인들을 위해서 내가 택했다 복음을 전해 듣지 못한 이방세계 불신세계, 나라마다 민족마다 부족마다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 바울은 그것이 자기의 소명인 것을 알았어요. 그것을 위해서 줄기차게 바울은 달려가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사업을 하면서 비즈니스 세계에서 복음을 저하는 사람, 어떤 사람은 교육계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공유하는 보편적 소명이 있지만 그 보편적 소명의 크다란 테두리 안에서 다시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에게 주신 나의 달란트, 그리고 나의 은사, 나의 재능, 나의 독특한 생존의 조건 삶의 조건을 통해서 나만이 추구해야 할 삶의 목표를 다시 설정해야 하는 일,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명하고도 확고한 내 인생의 목표를 설정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골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인생의 소명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왜 우리의 삶이 앞을 향해서 나아가지 못할까요? 목표가 없어서 그래요. 목표가 없어서요. 내 인생이 정말 미래 지향적인 삶이 되기를 소원하십니까? 저는 여러분이 미래에 대한 확고한 목표를 세울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확고한 목표를 세우셔야 됩니다.

우리의 삶이 정말 미래 지향적 삶이 되기 위해서는 세번째로 한걸음 더 나아가서 미래를 향한 집중적 헌신을 드려야 합니다. 미래에 향한 집중적 헌신을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인생의 목표를 정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인생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적은 사람들만이 어느 정도 목표를 실행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성공한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성취한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목표를 설정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 목표설정에 도달하지 못하고 인생을 힘없이 맥 빠지게 종결 짖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모습, 왜 그럴까요? 어디에 차이가 있습니까? 목표는 다같이 가졌어요. 목표를 설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가 어디에서 났을까요? 저는 그 차이가 간단하다고 생각해요. 그 목표에 헌신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목표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 땅에서 어떤 성취를 한 사람들, 어느 정도 성공을 한 사람들 귀한 가치를 남긴 사람들을 보세요. 집중하지 않는 사람 있어요? 그 목표 앞에 헌신하지 않고 집중하지않고 그런 성취와 성공을 거둔 사람들을 여러분은 보신 일이 있습니까?

자,오늘 본문13절에 바울 사도의 고백을 다시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자, 본문의 13절을 한번 더 같이 읽겠습니다. 다 같이 시작.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자, 바울은 목표를 설정한 다음에 이렇게 고백 합니다. 이제는 내가 오직 한 일, 여기서 오직 한 일이라는 단어를 주목해 보세요 오직 한 일, 영어성경에 보시면 One thing I do 오직 한 일, 오직 한 가지,

이제 자기의 삶이 그 목표 앞에 집중되어 있음을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표현이 아닙니까? 오직 한 일, 오직 한 일, 그 일을 위해서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바라보며 달려간다. 네, 그리고 14절에 이제는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어떻게 한다고 그랬어요? 쫓아가노라 쫓아가노라!

제가 전에 좇아가노라 그랬더니 설교 끝난 후에 어떤 분이 오더니 목사님 쫓아가노라가 아니라 쫓아가노라 입니다 그러더라구요. 설교 들으면서 이상한 생각만 하는 사람도 있어요 하하~

어쨌든 어느것이 정확한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쫓아가노라! 쫓아가노라!

이것이 아주 강력한 감성이 들어가 있는 그런 단어입니다. 영어에는 Press on ! 아주 강력하게 집중하고있는 그런 모습을 들어내어주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본래 희랍어에서 이 단어는 이럴 경우에 쓰여지는 단어라고 합니다. 굶주린 사냥개가, 오랫동안 굶주렸어요. 그러다가 먹이를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이제는 그 먹이에 자기의 그 모든 시선, 존재의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고 아마 질주할 것입니다. 자, 이 그림을 보세요 바울은 자기의 인생의 소명, 그 소명에 근거한 목표설정을 한 다음에 내가 그 목표를 향하여 뭐라구요? 쫓아가노라! 이제 그는 어떤 시련도 어떤 장애물도 뛰어넘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실현없이 어려움의 과정없이 목표에 도달을 한 인생들은 없습니다. 그 시련을 넘어설 수 있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여기 창조적인 모험심과 돌파의 용기가 이제 요청 되는 것입니다.

어떤 선생님, 한 분이 학생들에게 에~그 숙제를 내어주었다고 그래요. 학생들의 창조적 모험심을 실험하기위한 흥미로운 숙제였다고 합니다. 어린이 여러분, 여기 어떤 사람이, 소년이 호랑이에게 쫓기게 되었어요. 한참 쫓겨서 달려가다가 보니까 낭떠러지 앞에 왔습니다. 앞에는 낭떠러지 더 이상 갈 수는 없습니다. 뒤 돌아섰습니다. 자, 이 달려오는, 다가오는 호랑이 앞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할까요? 그런데 아이들이 재미나는 대답을 많이 했었대요

어떤 아이는 뭐 째려본다, 기 싸움을 한다, 호랑이를 마주보고, 또 어떤 아이는 죽는 척 한다, 또 어떤 아이는 호랑이가 덮치는 순간 살짝 피한다 그래서 낭떠러지에 떨어지게 한다.

그래서 선생님 마음에 합격한 답안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의 대답이 뭐냐 하면, 꿈을 깬다 하하~~

아무리 우리가 위기 앞에 서 있어도 생각해 보면 돌파할 수 있는 길은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더 이상 이제는 뒤로 돌아서지 않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제 앞을 향해 전진할 따름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 사도의 오늘 고백 속에서 그런 기계를 여기서 확인할 수 있지 않습니까? 마지막 절 한번 보세요 마지막 절 16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내 현재의 자리를 점검한 다음에 그 목표를 향해서 그대로 행할 것이다, 이제는 계속해서 달려갈 것이다

오스키니스의 책 소명이라는 책자 20장에 보면 거기서 오스키니스가 마젤란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세계를 처음으로 항해로 일주했든, 세계 그 항해 선박의 길을 처음으로 열었던 이 위대한 모험가 영웅 마젤란의 생애를 소개합니다.

그러나 그가 위대한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그가 얼마나 많은 시련과 난관을 돌파해야만 했었습니까? 우선, 항해지도의 잘못된 판독으로 그가 2년 동안 계획했든 항해는 3년 이상 걸리지 않았습니까? 식량이 고갈됩니다. 그들이 쓰고있든 모든 배의 장비가 마모되기 시작합니다. 파손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설상 가상으로 스페인 몇몇 사람들의 귀족들이 반란을, 선상 반란을 시도하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지 몰라요. 그러나 이 숱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이 마젤란 함장은, 선장은 한마디의 단어만을 승객들에게 그리고 모든 선객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한가지 단어를 되풀이 했다고 합니다. 계속 항해하라! 계속해서 항해하라! 계속해서 항해하라!

저는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같은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 해요.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이제 목표를 설정했다면 계속해서 그대로 행하십시요. 앞으로 나아 가십시요.

유명한 아프리카의 선교사 데이빗 리빙스톤 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가 노년에 잠시 안식년을 얻어서 영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때 누군가가 리빙스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리빙스톤 박사님 이제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이제 어디로 가시는 것입니까? 그때 그는 매우 의미심장한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곳이면 어디든 갈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것입니다. 그는 결코 뒤를 돌아다 보지 않았습니다. 그의 인생은 미래를 바라볼 수 있었고 그는 앞을 향해서 자기의 삶을 계속 던지고자 한 것입니다.

역사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또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역사는 새로운 새벽을 맞이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 주님 예수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어떤 삶의 족적의 또한 모본이 아니였는가 싶습니다.
여러분이 특별히 요한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생애를 공부해 보시면 요한복음은 그 예수님의 인생을 때, 라는 단어를 가지고 구조적으로 설명해 나가고 있습니다. 때,

요한 복음 2장을 딱 보시면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의 공생애 의 사역이 시작되지 않습니까? 그때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예수님의 어머니를 통해서 좀 어떻게 할 수가 없느냐고? 그때 예수님의 대답이 뭐에요? 나의 때가 아직 되지않았습니다. 내 때가, 그런데 그 얘기를 계속 되풀이 하셔요. 형제들이 와서 당신이 유명한 사람이라면 이제는 사람들 앞에 자신을 좀 나타내어 보라고, 내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계속 때를 말합니다. 때를 의식하면서 그는 한걸음 한걸음 앞을 향해 진행해 나갑니다.

드디어 요한복음 12장에 헬라인 이방인 몇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면회신청을 내었을 때 예수님이 갑자기 그 단어를 바꾸십니다. 이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아들이 영광을 얻을 때가왔습니다. 그때가 어떤 때에요? 십자가의 때,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드림으로서 인류에 대한 구속의 제물이 되므로 온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는 것, 그것이 그 분의 소명이 아니였습니까? 그 분의 목표가 아니였습니까? 그 소명, 그 목표를 바라보면서 뚜벅뚜벅 십자가를 향해서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신 생애, 어떤 시련이 있어도 어떤 장애물이 있어도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생애를 드려 생명을 드려 사람들을 구원하는 그 놀라운 인생, 아버지께서 그를 이 땅에 보내신 그 뜻을 그 소명을 이루는 생애를 위하여 한걸음 한걸음 한걸음 십자가를 향해서 걸어 가셨든 생애, 그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생애가 아니였습니까?

그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여러분이 구원 받으신 것을 믿습니까? 그가 부활하심으로 살아계신 주님이 되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생애를 인도하고 있다고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그분을 쫓아가기를 원하시는 여러분, 이제도 우리 주안에서 주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보여주시는 그 목표 우리의 소명에 근거한 그 목표를 설정하셨다면 이제 그 목표를 향해서 뒤를 돌아다 보지 아니하는 내 생애를 던지는 집중을 통해서 헌신을 통해서 그 소명을 향해서 걸어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난 주 우리교회 제직 회의에서는 학교법인 설립추진을 승인했습니다. 우리가 현재 우리교회 모든 자산을 학교법인에 수령하는 일을 의결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시작입니다. 앞으로 많은 우리가 넘어가야 할 장애 요인들이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놀라운 일의, 저는 시작이 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제 마음속에 설레이는 흥분이 또한 여러분의 흥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지나간 7년 동안 정말 놀라운 성장을 거듭해 왔습니다. 그것은 교회사회에 기적이라 할만한 성장이였다 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마음 속에 동시에 이 성장의 축복을 감수하면서도 우리 마음에 진지한 또 하나의 의문이 아마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 됩니다. 사람만 많이 모이는 교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정말 우리는 이 모아진 우리들의 힘과 우리의 에너지와 우리의 Resource와 우리의 자원과 그리고 우리의 가능성과 우리의 비젼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에 기여할 수가 있을 것인지, 이것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었든 어떤 진지한 의문, 창조적인 불만일 수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기도했습니다. 주 인도하심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주께서 보여주신 학교법인, 새로운 고등학교를 세워 거기서 이 땅의 청소년들의 미래를 열어주고 하나님 나라의 비젼을 준비하는 일, 이것이 하나님이 인도하신 새로운 비젼인 것을 우리는 함께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요즘 메스컴을 통해서 텔레비젼을 통해서 뉴스를 통해서 신문지상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우리 사회의 문제 제1호가 뭡니까? 그것은 교육의 총체적 위기가 아닙니까? 교육의 총체적 위기, 어떤 분은 신문의 기사를 쓰면서 이 땅의 교육은 절망이라는 단어까지 썼습니다. 절망! 절망,

과거에 우리는 군부 독재시절에 암울한 시대를 견디면서 자유를 찾아 많은 사람들이 정치이민을 떠났습니다. 그 이후에 우리는 달라를 위해서 경제이민을 떠나가서 전 세계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교육이민을 시작했습니다. 교육이민, 자식들 때문에 이 땅을 떠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미래가 없는 일, 비젼이 없는 일, 우리 한국의 이 교육현실 앞에 우리의 내 자식들의 미래와 운명을 맡길 수 없다는 판단 때문에 자식들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더러는 아버지만 남고 어머니와 자식들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혹은 아이들만, 초등학교 시절부터 보내는 부모들도 적지않습니다. 중,고등 학교, 거기 가서 그들이 무엇을 경험할지 아무것도 모르는 체 막연한 기대 하나만으로 우리는 자식들을 떠나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어제 신문에 보니까 어떤 분이 글을 쓰면서 오늘 이 땅에는 그래서 펭귄 아빠들이 늘어가고있다 펭귄 아빠, 이게 무슨 얘긴가? 좀 읽어보았어요. 남극의 펭귄 어미는 알을 낳은 다음에는 먹이를 구하기 위해서 먼 여행을 떠나간다고 합니다. 그 동안에 아빠가 알을 지켜야 돼요 아빠가, 어디 가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지킵니다. 때로는 아빠가 먹지도 못하고 그 알을 지킵니다. 엄마 펭귄이 돌아올 때 까지 아빠 펭귄이 생존할 수도 있지만 돌아온 어미는 자식만 챙길 뿐 아빠를 챙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빠들은 죽어갑니다.

우리교회도 이런 펭귄 아빠가 적지 않는 것 같아요. 녜, 엄마하고 자식들 다 외국에 딸려 보내놓고 밥한 끼 얻어먹지 못하고 빌빌대는 아빠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녜, 이게 펭귄 아빠들의 이 땅의 가슴 아픈 모습들인 것을 압니다.

더러는 대안 학교가 설립되어서 조금씩 우리가 어떤 빛을, 희망을 기대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적은 소수에게 돌아가는 혜택일 따름입니다. 이 땅에 자라나고 있는 수많은 청소년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희망을 제시할 수 있을까요?

우리 개화기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러나 우리 가슴을 뜨겁게 하는 학교가 있었어요.

오산학교라는 학교를 나이 많으신 분들은 아마 다 기억할 것입니다. 남강 이승운 선생에 의해서 시작된 학교입니다. 그리고 고당 조만식 선생님이 교장을 했고 유명한 사상가 유형모 선생이 교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거기서 배출된 학생, 씨알 함석헌 선생, 그리고 한경직 목사님, 이런 분들이 다 오산학교 출신들입니다. 그들은 개화기의 이땅에 역사를 만드는 일에 결정적 기여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오산학교가 비젼을 잃어버리기 시작했을 때 또다시 평범한 학교로, 학교가 지금 있기는 있지만 옛날의 그 비젼을 떠나가 있는 모습들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새로운 학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기독교적 가치관, 성경적 그 비젼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학교가 있다면 아마도 저 거창에 있는 거창 고등학교 일찌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어떤 분들은 시골까지 자기 아이들을 유학 보내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한 학교가 이 땅에 어떻게 청소년 교육에 희망과 비젼을 던질 수가 있겠습니까? 만일 진정한 성경적 가치관으로 무장된, 기독교적 가치관과 희망으로 무장된 젊은이들을 우리가 양육할 수 있다면 그들의 가슴 속에 펄펄 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민족에 대한 애정과 하나님 나라의 희망을 가진 젊은이들을 이땅에서 우리가 길러낼 수 있다면 그들을 외국에 맡길 수는 없잖아요?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우리민족 역사를 위해서 얼마나 좋은 기여가 될 수가 있을까 이것이야말로 우리교회가 21세기 비젼으로 선택한 민족을 치유하고 그리고 세상을 변화 시키는 교회의 비젼을 이룰수 있는 하나님의 인도임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이 새로운 비젼, 이 비젼을 향해서 저는 감히 제가 마젤란이 아니지만, 마젤란 함장 같은 격려를 저와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어요.

여러분, 우리 앞에 어떤 시련과 어려움과 장애물이 있어도 항해를 계속합시다! 항해를 계속하십시다.

푯대를 향하여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급을 위해서 앞을 향해서 나가는 저와 여러분 우리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공동체의 비젼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있어서 여러분의 비젼도, 우리 개인의 비젼도 함께 이루어지는 그 감격 속에 살아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우리 다 일어나서 함께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 함께 기도할 때 이 시간에 한번 이 땅에 청소년들을 위해서 오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물질은 옛날보다 훨씬 더 풍요해 졌지만 옛날보다 훨씬 더 방황하고있는 이 땅의 청소년들, 목표를 알지 못하고 어렸을 때부터 심각한 어둠 속에 삶의 목표를 빼앗긴 채, 방황하고 자라나고있는 이땅의 청소년들 우리의 자식들 내 이웃의 자식들 하나님 그들을 붙들어주시고 그들에게 비젼을 보여주시고 꿈을 주시고 그 꿈을 향해서 함께 우리가 나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이땅이 새로워지도록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 수 있도록 오 하나님 성령으로 역사하시고 이땅 이 역사 젊은이들의 삶 가운데 새로운 비젼을 보여주시옵소서

우리 다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하십시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에게 임하셔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의 이름을 높여 드립니다. 오, 하나님 성령으로 역사하시고 주의 권능으로 함께 하셔서 정말 우리의 인생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부르심을 따라서 우리 인생이 소명에 근거한 목표를 설정하고 목표를 향해서 함께 달려가는 생애, 이러한 성도들이 되게 하시고 이러한 우리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찬양하십시다

이 산지를, 가사를 기억하며 함께 부르십시다

주님이 주신 땅으로 한걸음씩 나아갈 때에
수많은 적들과 견고한 성이 나를 두렵게 하지만
주님을 신뢰함으로 주님을 의지하므로
주님이 주시는 담대함으로 큰소리 외치며 나아가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날에 주께서 말씀하신
이제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그 땅을 취하리라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날에 주께서 말씀하신
이제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그 땅을 취하리라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날에 주께서 말씀하신
이제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그날을 취하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취할 그 땅을 약속의 땅을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개개인이 그리고 가정이 나아가야 할 우리의 직장이 우리의 사업이 나가야 할 우리들의 약속의 땅 또 우리 공동체가 나가야 할 그 비젼의 땅 이 땅의 청소년들을 섬기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길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내는 일 주여 우리가 이 비젼의 땅을 보았사오니 이제 그 땅으로 나아가기를 소원합니다.

이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우리를 구속하시는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하심과 성령의 교통케 하심이 오늘 말씀 속에 우리인생의 비젼을 보고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를 원하는 당신의 백성들 걸음걸음 마다 그들의 삶의 장마다 축복으로 비젼으로 능력으로 함께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 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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