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마26장 17~20, 26~29
설교제목 :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9) 가정 모임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1852년 4월 아프리카 튀니지에서 영사로 봉사하던 한 미국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로부터 31년의 세월이 흘러간 1883년 미국 정부는 군함을 보내어 그의 유해를 미국으로 데려오도록 했습니다. 그의 유해가 미국 뉴욕항에 도착하던 날 뉴욕사상 최대 인파가 몰려들어 그의 귀국을 개선장군 맞이하듯 환영했습니다. 군악대의 밴드가 조가를 연주했고 길에는 조기가 나부겼습니다. 그의 유해는 다시 특별열차 편으로 미국 수도인 워싱톤으로 옮겨졌고 위싱톤 중심가 펜실바니아 가를 퍼레이드한 후 미국 대통령 체스터 아더(Chester A. Arthur)와 국무위원의 정중한 영접을 받은 후 오크 힐 묘지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흥미있는 일은 그가 이런 유례없는 환영을 받은 유일한 이유가 그가 작사한 단 한편의 노래 때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노래가 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가정의 가치를 인류에게 일깨웠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의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 꽃 피고 새 우는 내 집 뿐이리” 존하워드 페인(John Howard Payne)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역설적인 사실은 그는 어린 시절 뉴욕의 고향을 떠난 후 한번도 자기 집을 가져보지 못하고 온 세상을 떠돌아다닌 방랑자였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이 유명한 노래를 작사한 곳도 유럽의 어두운 거리를 배회할 때였습니다. 아마 그래서 그에게 홈은 눈물겨운 그의 영혼의 갈망이었는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에서 또한 그의 3년간의 공생애 기간 동안 자기 집을 가져보지 못하고 집을 그리워한 분의 이야기를 읽게 됩니다. 그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신 분이십니다. 물론 그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집이 없으셨던 그분은 그분의 사역의 센터를 제자들의 집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는 기회가 허락되는 대로 제자들의 집을 방문하는 것을 습관으로 삼으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의 지상 생애 최후의 순간을 앞두고 다시 한 무명의 제자의 집(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이곳이 마가 요한의 집이라고 생각-후일 이 집이 예루살렘 교회의 요람이 된 곳)다락방을 찾으시고 거기서 열두 제자와 함께 마지막 유월절을 보내고 계심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사역에서 제자들과의 가정 모임을 중시하신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1. 가정은 삶의 안식처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을 뜻하는 히브리어에 ‘샤바트’라는 말 외에 메누하(Menuha)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메누하라는 말은 가정을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가정을 ‘안식할 곳’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남편을 잃어버린 외로운 여인 룻의 시모 나오미는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해야겠다”(릇3:1)고 말하고 있습니다. 안식은 단순히 활동을 정지한 상태가 아니라, 고요와 평화, 건강과 충만을 뜻하는 매우 적극적인 단어입니다. 유대인 신학자 아브라함 헤셀은 하나님께서 제7일에 메누하를 창조하셨고 그 후에 비로소 그분의 아름다운 창조, 행복한 창조가 완성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후대에 와서 이 메누하라는 단어는 영생과 동의어로 쓰여지게 됩니다. 메누하는 영원한 안식의 나라를 의미하게 됩니다. 행복한 가정은 천국의 그림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가정 모임은 어떤 의미에서 천국 모임의 그림자인 것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모임의 장소로 가정을 선택한 것은 매우 의미있는 선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행복한 가정의 이미지가 바로 천국의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거대한 교회 빌딩을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를 위시한 그의 제자들이 오순도순 집에서 모여 형성하는 행복한 공동체를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교회란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단 한번도 건물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었고 언제나 부름받은 제자들의 공동체를 뜻하는 단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과 함께 제자들의 집에서 모임을 갖기 시작하셨을 때 이미 교회는 탄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순절 이후 제자들은 집에서 모이던 모임을 교회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신약에서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혹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라”는 말이 얼마나 자주 나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 교회가 소위 교회당에서 모이는 대그룹 주일 모임만 의지하지 않고 집에서 모이는 목장 교회 모임을 중시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거기서 우리는 진정한 공동체를 경험하고 교회의 교회된 참의미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분의 마지막 순간이 가까웠을 때 그분은 그분의 생애 마지막 시간을 어디서 누구와 보내고 싶어 하셨는지 아십니까? 본문이 그 대답을 들려주고 있지 않습니까? 본문 17~18절에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이미 그분이 생각해 두셨던 한 집(마가 요한의 집)을 지정하시며 “내 제자들과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그분의 마지막 시간을 한 조용한 집에서 그분의 제자들과 보내고 싶어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제자들의 공동체에서 그는 진정한 쉼, 천국의 안식을 나누고 싶어하신 것입니다. 저는 다가오는 종려 주일 우리 모든 지구촌 식구들이 성도들의 집에서의 모임을 통해 바로 그런 천국의 안식을 경험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2. 가정은 삶의 치유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만일 가정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인생 여행은 얼마나 더 고단하고 얼마나 더 힘든 여정이었을까요? 우리가 여행길에서 병들면 우리는 얼마나 더 집을 그리워하게 되는지요. 존 하워드 페인이 작사한 이 홈 스위트 홈의 본래 2절 가사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집을 떠나온 뒤 헛된 영화를 쫓았지만/오 나의 소박한 초가집 오두막이 그립구나/새들이 노래하며 나를 부르던 그 곳/참 마음의 평화가 있는 그 곳이 다른 무엇보다 그리운 것을--(3절)그대여 나 이제 돌아가리다/모든 괴로운 무거운 염려의 짐 벗고/마음의 유일한 위로로 나를 미소로 반기는 그 곳/내 오두막집 보금자리를 다시는 떠나지 않으리/비록 초라하지만 내 집 같은 곳은 진정 없기에/” 그래서 가정은 인생의 가장 효율적인 치유의 마당입니다. 아마도 이 노래의 작사자는 먼 타향에서 고향 집을 생각만 하는 것으로도 위로와 안식을 얻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죽어가는 사람이 최후로 찾는 곳도 가정이 아닙니까?
물론 가정의 상황에 따라서 왜곡된 관계로 인하여 치유가 아닌 중병을 얻고 있는 분들도 없지 않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건강한 가정의 필요성은 더 중요한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3년 공생에 기간동안 가장 중요한 일이 집에 들어 가셔서 사람들의 약함과 죽음을 치유하신 일입니다. 그가 들어가는 집마다 치유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가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심으로 그의 장모의 열병이 떠나가고 치유를 얻었습니다. 예수께서 계시던 집에 중풍병자가 친구들에 의해 들어오자마자 그는 침상을 들고 일어나 하나님을 찬양하며 걸어 나갔습니다. 예수께서 삭개오의 집에 들어오시자 남의 것을 빼앗는 일생을 살던 그가 빼앗았던 모든 것을 다시 그분 앞에 내려놓고 새 인생을 살겠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 들어가시자 그의 죽은 딸이 일어납니다. 그가 마르다 마리아의 집에 들어가시자 죽은 오빠 나사로가 다시 살고 온 동네가 그 앞에 나와 그를 믿었습니다. 오늘 우리 가정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모든 노력을 다 해보셨다구요? 그러면 이제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 예수님을 여러분의 가정에 주인으로 초청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3. 가정은 삶의 가장 소중한 헌신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의 가장으로서 지니는 가장 위대한 도덕적 가치는 희생을 배우는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는 희생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이기심을 뛰어넘는 헌신의 의미를 배우게 됩니다. 이 세상 무엇이 어머니의 희생보다 아버지의 사랑보다 더 우리를 감동시키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희생 이런 사랑을 보고 자라면서 우리도 마침내 다음 세대를 위해서 그리고 이제는 우리 가정의 영역을 넘어서서 이웃들을 위한 헌신의 참된 가치를 배우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가정은 인생의 첫 번째 학교이며 마지막 학교인 것입니다. 한동안 베스트셀러로 팔린 책 중에 “내가 배워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실 우리가 배워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 들어가기 전 이미 우리 집에서 다 배운 것들이 아니겠습니까? 아니 아직 우리가 배우지 못한 교훈들이 있다면 그것을 우리는 우리의 집이라는 학교에서 아직도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은 가장 위대한 처음 학교이고 마지막 학교이며 예수님도 가장 중요한 마지막 교훈을 집의 상황에서 그가 자식처럼 사랑했던 제자들에게 나누고 싶어하셨다고 믿습니다.
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신 레슨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레슨이었던 것입니다. 십자가 없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이 땅에서의 마지막 밤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며 그가 왜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서 그 몸이 찢겨져야 하고 왜 그가 피를 흘리셔야 했는가를 나누신 것입니다. 26절입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28절에서 그는 보다 분명하게 그의 죽으심의 이유를 밝히십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하심이셨던 것입니다.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하신 말씀대로 그는 다르게 죄 사함의 길이 없었던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의 제물로 드리시고 보배로운 피를 흘리사 우리의 용서와 구원의 기초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이 가장 중요한 그분의 희생과 헌신의 이유를 제자들만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해하실 것을 기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이 진리를 제자들에게 남기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목장 모임, 가정 모임을 통해 나누어야 할 가장 중요한 궁극적인 진리도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실패 우리의 좌절을 나누시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분의 희생의 의미, 그 헌신의 의미가 나누어지지 않는다면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의 나눔은 우리의 한풀이나 넋두리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사랑과 승리가 나누어지는 순간 바로 그 순간이 우리의 실패와 좌절을 디디고 우리가 다시 일어서는 순간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을 좇아 우리도 그분의 제자들의 가정 모임 목장 교회로 가시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집의 굳게 닫힌 문도 여시지 않겠습니까? 그분이 들어오셔서 빛을 주시도록, 우리 집을 청소하시고 치유하시도록 말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모두 윌리암 홀맨 헌트(William Holman Hunt)가 그린 유명한 성화 ‘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그림의 오리지널은 지금도 옥스퍼드 대학 케블 칼리지 채플 정문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 되신 예수님은 등불을 들고 이 집의 문을 인내성 있게 두드리고 계십니다. 자세히 보면 이 문에는 문고리가 없습니다. 이 문은 안에서만 열 수가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 집의 문을 열어야 한다는 것을 작가는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지 않습니까?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이제 우리들 개개인의 마음 문을 여십시오. 가정의 문도 여십시오. 그리고 부활과 영광의 주님을 초청하십시오. 헌트의 그림을 잘 보면 문을 두드리는 예수님은 가시관만 쓰신 것이 아니라 그가 승리와 영광의 주님이신 것을 상징하기 위해 그의 머리 주변에 빛나는 원형의 광선이 에워싸고 계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 영광의 주, 생명의 주님을 우리의 가정에 모셔 들이십시다. 그 순간 우리의 가정에 영광의 천국이 임할 것입니다. 안식의 천국이 임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부흥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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