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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마태복음

마태복음 11장 28-30절 주님이 주시는 쉼 - 옥한흠 목사

by 재영구리 2023.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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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주님이 주시는 쉼
설교본문 : 마태복음 11:28-30
설교자 : 옥한흠 목사님

얼마 전 신문에 보도된 내용입니다. 외국계 모은행 명동지점장을 지내던 안 모씨가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로 자살을 했습니다. 왜 자살을 했는지 알아보았더니 그 직장 업무가 주는 스트레스를 도무지 감당하지를 못해서 버티다, 버티다 결국은 생명을 끊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 모 일간지가 현재 우리나라에서 직장 생활하는 샐러리맨들이 얼마나 정신적으로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조사한 내용을 제가 보았습니다. '이미 한계를 넘는 심리적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표현들을 썼습니다. 살벌한 경쟁을 부추기는 업무 환경인지라 누구 하나 그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하루하루를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참 어려운 여건에 그들이 놓 여 있는 것을 쉽게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러다 보니까 조직 안에서는 인간관계가 점점 메말라 가고, 너를 죽여야 내가 산다는 무서운 잠재의식을 가지고 뛰는 그런 환경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한 마디로 살맛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도 안정된 직업이자 선망의 대상이라고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의사들까지도 의과대학에서는 교수끼리 진료라든지 수입실적 같은 것을 공개하면서 경쟁을 해야 되는 이런 풍토 속에 그들이 빠져 있는 것을 봅니다.

미국에서 최근 몇 년 동안에 제일 많이 사용되는 용어 중에 하나가 릴 렉스(relax)라고 하는 말입니다. '릴렉스'라면 우리가 잘 알다시피 긴장이 라든지 스트레스를 벗어나는 무엇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하면 좀 '릴렉스' 하면서 직장 생활도 하고 가정생활도 할 수 있을까? 여기에 관심이 많다 보니까 가정마다 그 분야에 관한 전문 서적 한두 권은 꽂아 놓지 않는 집이 없다고 할 정도입니다. 현대인이 얼마나 정신적으로, 심적으로 벼 랑으로 몰리고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이런 상황을 통해서 쉽게 알 수 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 라는 자꾸만 술을 마시는 사람이 늘 어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아무리 마셔도 스트레스가 풀리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어느 경찰서장의 말처럼 '스트레스를 풀 방법이 없다는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스트레스가 된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현실을 잘 표현한 말 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에 쉴만한 공간이 점점 좁아지는 것입니다. 하루가 멀다고 많은 것이 바뀌는 이 현실 속에서, 점점 부익부 빈익빈의 현 실이 눈앞에 두드러지고, 능력 있는 자는 앞서 달려가고 적응하지 못하는 자들은 쳐져야 되는, 이런 살벌한 분위기로 인해 우리 모두는 마음의 쉼 을 빼앗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생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 이것이 인생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 문에서 주님이 그렇게 인생을 정의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수고한다, 짐을 진다, 멍에를 멘다.'는 표현을 주님이 사용하신 것 을 보면 마치 인생을 무거운 짐을 실은 마차를 끌고 가는 소나 당나귀로 보신 것 같아요.

어릴 때 저는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마차에 무거운 짐을 싣고 소가 끌고 가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마차를 끌고 가면 저는 항상 따라다니기를 잘 했고, 그래서 어떤 때는 소가 힘들게 일을 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비탈진 길을, 마차를 끌고 올라갈 때 소는 침을 질질 흘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눈에서 눈물을 펑펑 쏟기도 합니다. 그래도 잘못 올라가면 아버지가 소의 엉덩이를 회초리로 때립니 다. 한 번은 올라가다 올라가다 힘이 없으니까 소가 털썩 그 자리에 주저 앉아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런 모습을 주님께서 인생을 생각하면서 마음에 그리고 계시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팔자 좋게 살다 간 인물로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솔로몬 같은 사람도 인생을 정의할 때,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전도서2장 22 절, 23절입니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아무 소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일평생에 근심 하며 수고했는데 슬픔밖에 남는 것이 없다.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것이 다 헛되고 헛되구나.'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가 쉼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정신적인 쉼도 필요 하고, 육신의 쉼도 필요하고, 다 필요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마음의 쉼입니다. 마음이 편치 못하면 아무리 정신이 쉬고 싶어도 쉬지 못합니다. 육신이 아무리 편하게 살아도 그 사람은 쉬는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29절에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쉼을 줄 텐데, 그 쉼을 얻으면 너희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마음의 쉼이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 이 쉼이 필요합니다.

현대인은 환경오염을 피할 수 없듯이 정신 오염이라고 할 수 있는 스트레스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언제 어디를 가나 우리는 이제 이 스트레스가 점점 가중되는 하루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지식은 자꾸 발전합니다. 그것을 따라가기에 우리의 능력은 너무나 제한되어 있습니다. 사회는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요구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요구에 응할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스트레스는 자꾸 쌓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에 쉼을 얻는 비결을 갖고 이 현실을 대처하지 못하면 비탈을 올라가던 소가 주저앉아 버리듯이 언제 우리도 모두 주저앉아 버릴지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 이 쉼을 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러분 가운데 피곤을 느끼는 분 있습니까? 스트레스를 받는 분 있습니까?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계속 이 본문을 외우면서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 말씀이 바로 예수님 자신의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들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 사랑하지요? 너무 많이 애송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나 여러분이나 한번 솔직하게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과연 예수님이 주시는 쉼을 알 고 있습니까? 아니, 이 쉼을 마음에 담고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각자에 게 물어 보십시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한 열흘 전부터 이런 질문을 자주 제 가까운 사람들에게 했습니다. 아내한테도 질문을 해 봤습니다. 저와 함께 동역하는 부교 역자 몇 사람에게도 똑 같은 질문을 해 봤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나는 이 쉼을 알고 있는가? 나는 이 쉼을 가지고 마음에 안식을 하고 있는 사람인가?' 대부분이 예수님이 주시는 쉼을 그들이 마음 속에 갖고 있다고 긍정을 했습니다. 저도 그것을 긍정합니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그 사람의 표정은 쉬는 사람처럼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것인가 봅니다. 어떤 교역자는 말을 합니다. '머리가 복 잡해요. 어떤 때는 너무 피곤하구요.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쉼이 내 마음에 있기 때문에 이런 모든 고통을, 또 스트레스를 견디는 것 아니겠어 요?' 옳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좀 더 예수님이 주신 이 쉼, 이 마음의 쉼을 즐길 수 있는, 실감나는 신앙생활이 필요합니다. 말로는 쉰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쉬지 못하는 모순을 당연한 것처럼 우리가 받아들이면서 신앙생활을 하면 그것이 나중에 우리의 영적인 성장을 방해하는 일이 될 수가 있습니다. 실제 로 우리는 주 안에서 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스트레스가 짓누르고 업무가 쌓이고 불안한 일들이 가로막고 있어도 마음의 평안을 유지 할 수 있는 쉼이 필요합니다. 이 쉼을 우리가 찾아야 됩니다. 이 쉼을 우리는 갖고 살아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가 쓰러지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주저앉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계속 앞을 향해서 전진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쉼을 여러분이 다 주님 의 손에서 다시 한 번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쉼은 한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주시는 쉼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 로 오라.' 주님은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게로 오라'는 예수님 을 믿으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이 이 쉼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믿어야 됩니다. '주는 그리스 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 니다.' 이것을 믿어야 됩니다. 우리는 먼저 예수님이 그리스도 되심을 믿어야 됩니다. '그리스도'는 구원자라고 하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만약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항상 무언가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어떤 선행을 우리 스스로 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누구나 다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족할 만한 선을 우리가 행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런 선을 전혀 행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는 선은 따로 있는데, 나는 그것을 행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사실이 우리 마음 속에 얼마나 무거운 짐이 되겠습니까? 영적으로 캄캄해서 구원이고 뭐고 그런 것은 생각도 안하고, 재미만을 좇아 날마다 그저 하루살이처럼 인생을 사는 사람에게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정말 인생은 70 년 한 생이 끝나면 다인가? 그 다음에 또 하나의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 는데.'라고 고민하는 사람에게는 이것은 진지한 문제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만 하나님의 눈에 들 수 있을까?' 이런 것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픕니다. 쉬지 못합니다. 아무도 행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 우리를 보고 예수님을 믿는 자 들에게 주님이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하라. 하지 말라고 하는 율법은 내가 책임지겠다. 그 대신 너희는 나를 믿으라. 나만 믿으면 영생을 선물로 주겠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기막힌 은혜입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우리의 영혼이 자연적으로 쉬게 됩니다. 우리 마음에 있던 짐이 달아납니다. '예수 믿기만 하면 되는구나. 뭘 하느냐, 하지 않느냐 그것은 구원과 관계가 없는 것이구나. 야, 예수 믿기만 하면 되는구나.'라고 할 때 우리 마음에 있는 짐이 내려지는 것이고, 우리가 그 압박감에서 해방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아직도 이 사실에 대해서 확신을 못 가지는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예수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다고 하는 확신을 못 가지면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루 빨리 그 짐을 주님 앞에서 벗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어떤 분으로 믿습니까? 우리는 그 분이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우리를 한없이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아 들을 우리는 믿습니다. 예수님은 풍랑을 만나 밤새도록 고생하는 제자들을 찾아 오셔서 '내니 두려워 말라.' 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자상하십니까?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인생 풍랑에 시달리는 우리 하나 하나를 보시고 '내가 옆에 있다. 두려워 말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 주님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 주님을 믿을 때 우리 마음에 쉼이 찾아옵니다.

또 우리는 우리를 이 세상에 혼자 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습니다. 우리는 혼자 걸어가지 않습니다. 주님이 약속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말은 '세상 끝날 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걸어가겠다.' 는 이야기입니다. 주님과 우리가 같이 걸어갈 때 주님이 우리 보다 얼마나 강하십니까? 얼마나 전능하십니까?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의 짐을 대 신 져 주십니다.

초등학교 시절에 저는 가난한 집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자주 많은 일을 했습니다. 어린 철부지이지만 아버지와 함께 지게에 짐을 지고 4, 5km나 되는 높은 산을 넘어서 짐을 옮기는 일도 가끔 했습니다. 그럴 때 보면 아버지가 저에게 딱 맞게 짐을 몇 개 지게에다 얹어 주십니다. 그리고 무거운 짐은 자기가 지십니다. 그리고 둘이서 같이 갑니다. 저도 처음에는 펄펄 날듯이 갑니다. 그러나 산길을 1km, 2km 정도 걸어 가다보면 산세 가 점점 험해지고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굉장히 힘이 듭니다.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지금 생각해도 '중노동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구나' 라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씩씩거리면서 올라오지 못하고 땀을 뻘뻘 흘리는 것을 보시면 아버지께서 자기 지게를 내려놓고 저에게 옵니다. 와서 저를 세우고는 제 지게에 얹혀 있는 짐 하나를 집어서 자기 지게에다 옮겨 놓습니다. 그러면 나는 그만큼 가벼워집니다. 그래서 조금 가벼운 기분으로 아버지를 또 따라 갑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4km쯤 가면 전신에 힘이 싹 빠집니다. 그럴 때쯤 되면 아버지가 또 하나를 들어다가 자기 지게에다가 얹고 나를 가볍게 해 줍니다. 아마 아버지는 할 수만 있었다면 저까지도 자기 지게 위에 얹어서 지고 가셨을 것입니다. 그게 아버지의 심정 아니겠습니까? 제가 그런 일 들을 가만히 회상하면서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겠다고 하는 주님이 바로 이런 분이시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가 짐을 지고 가다가 힘들어 할 때 그것을 함께 져 주시는 주님, 이 분이 동행하시는 주님입니다. 이 주님을 믿으면 우리 마 음에 쉼이 옵니다. 평안이 옵니다. 이 주님이 오늘 여러분을 만나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주님이 주시는 쉼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이 주시는 쉼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그의 멍에를 메는 데서 얻는 쉼입니다. 오늘 말씀에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그러므로 주님이 지워 주시는 멍에를 메는 데서 얻는 것이 예수님이 주시는 쉼 입니다. 예수님은 멍에를 벗겨 주신 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다른 멍에로 바꾸어 주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는 동안에 우리는 멍에를 아예 벗어버리고 살 수는 없습니다. 인생의 수고와 슬픔을 우리는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지워주신 짐입니다. 이마에 땀이 흘러야 입에 먹을 것을 넣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운명을 정해 주셨습니다. 우리 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짐을 완전히 벗어놓고 살 수는 없습니다. 짐을 져야 됩니다. 짐을 지기 위해서는 멍에가 필요합니 다. 주님은 멍에를 다른 것으로 갈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어떤 멍에로 바꾸어 주신다고 합니까? 더 쉬운 멍에로 갈아주신다고 합니다. 멍에가 쉬우면 똑같은 짐이라도 끌고 가기가 훨씬 편하다고 합니다. 멍에가 목에 안 맞으면 작은 짐이라도 보통 힘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소가 마차를 끌기 위해서는 목에다가 멍에를 멥니다. 그런데 그 멍에가 소의 목에 잘 맞으면 웬만한 짐도 끌 고 갑니다. 그러나 그 멍에가 어딘가 잘못 만들어져 목에 안 맞으면 소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모릅니다. 조금만 끌고 가다 보면 목이 붓습니다. 나중에는 살갗이 벗겨지고 피가 날 때도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아주 쉽게 멜 수 있도록 멍에를 갈아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이 멍에를 우리가 메면 쉼을 얻을 수 있다 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 만드시는 멍에이기 때문에 그 멍에는 참으로 메기가 쉬울 수밖에 없습니다. 고약한 주인은 소 생각을 안 합니다. 당나귀 생각을 안 해요. 제 기분대로 만들어서 무조건 목에다 얹어놓고 짐을 실어서 끌고 가게 만듭니다. 고약한 주인입니다. 짐승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짐승이 여간 힘 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짐승을 생각하는 자상하고 인정 많은 주인은 그런 식으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 아버지를 봐도 얼마나 소를 사랑하는지요. 아버지는 소 멍에를 한번 씌어 보셨다가 벗긴 다음에 소의 목을 잘 조사해 봅니다. 목에 출혈이 있다든지 부어 있다든지 하면 그 멍에를 다시 사포로 갈기도 하고 끌로 다시 잘 다듬기도 해서 고친 후에 또 얹어 봅니다. 그래도 안 되면 나중에는 거기에다 부드러운 천으로 감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용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소가 불편하지 않도록 가볍고 쉬 운 멍에를 얹어 주려고 주인은 애를 씁니다. 왜 그렇습니까? 소를 사랑하는 주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소에 대해서 자상한 마음과 소를 위해 주려고 하는 마음가짐을 아버지가 갖고 계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자기를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소개한 이유가 바로 이것 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왜 우리를 불쌍히 여깁니까? 자기가 다 당해 봤으니까 그런 것입니다. 히브리서4장 15 절에,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분'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가 지고 있는 모든 짐을 다 져 보신 분이 누 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자기가 당해 보지 않고는 남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무슨 고통이든지 자기가 당해 보지 아니하면 남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남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만큼 사람은 잔인해집니다. 말 한마디를 해도 툭툭 던집니다.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이런 말들 듣습니다.

"당신이 안 당해봐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당신이 안 당해 봤으니까 그렇게 말을 쉽게 하지. 진짜 당해 봤으면 그런 말 할 수가 없지."

옳은 말입니다. 당 해 본 사람은 말을 쉽게 안 합니다. 그러나 안 당해 본 사람은 모르기 때 문에 다른 사람 사정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나오는 대로 말해 버립니다. 얼마나 사나운 사람입니까? 만약에 우리 예수님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짊어지고 고통하는 이 짐을 져 보시지 않은 분이었다면 아마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 아닐 지도 모릅니다. 우 리의 목에 좀 더 쉬운 멍에를 메어 주려는 생각을 안 하실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은 오셨습니다. 다 당해 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떻게 하면 우리를 좀 위해 줄지를 생각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식구가 많은 집에 가난이 주는 고통 이 얼마나 대단한지 우리는 잘 압니다. 나사렛이라고 하는 조그만한 마을에 보잘 것 없는 목공소 하나를 경영하면서 열 명이 넘는 식구를 부양해야 되는 예수님의 형편을 한번 여러분 마음속에 상상해 보세요. 어릴 때든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가난을 몸소 체험하시는 분들은 식구 하나 더 있고 없고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체험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 손바닥만한 동네에서 목공소 를 경영하셨는데 무슨 수입이 그리 대단했겠습니까? 그것을 가지고 식구를 먹여 살려야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가난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에 지금 생계가 막막해서 아무리 아끼고 아껴도 내일 모레 어떻게 살아야 될 지 걱정이 앞서는 그런 형편에 계신 분들 있습니까? 먼저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이 먼저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러분이 멜 수 있는 멍에를 메어주시지, 여러분이 감당할 수 없는 멍에는 절대 메어주시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식민지에서 살면서 착취자들 밑에서 평민이 겪는 아픔과 한이 무엇인지 몸소 체험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가족을 일찍 빼앗아 가는 난폭한 죽음의 슬픔도 몸소 체험하신 분입니다. 아버지 요셉이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랑하는 식구를 그와 같이 일찍 빼앗기고 젊어서부터 과부가 된 자기 어머니 마리아를 옆에 모시면서 그 어머니가 겪는 고독을 친히 다 옆에서 보아 왔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인생을 사셨습니다. 우리 가운데서도 죽음이 사랑하는 자를 앗아가고 고독과 씨름 하면서 한 생을 슬픔과 눈물로 지세 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당하신 슬픔입니다. 주님을 찾으십시오. 주님 앞에 나가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멍에를 가볍게 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기를 누리기도 했지만 조롱과 비판을 받을 때도 많았습니다. 형제들과도 마음을 합하지 못해 배척을 당하는 아픔도 그는 경험했습니다. 억울한 재판을 받으셨고, 억울한 죽음을 당하시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짊어지고 있는 모든 짐을 스스로 짊어지고 체험하셨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우리를 대하 실 때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사정을 아시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메기 쉬운 멍에를 메어주려고 주님은 마음을 쓰십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 라.' 우리가 메기 쉬운 멍에를 만들어 주시려 하고, 우리가 끌고 가기 쉬운 짐을 우리에게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 멍에를 쉽게 만들어 주십니까? 어떻게 우리 짐을 가볍게 해 주십니까? 이것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여러 가지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만 제가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문제를 보는 우리의 시각을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현실을 해석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가짐을 바꾸어 주시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 입니다. 요사이 현대 용어로 쓴다면 우리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주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아무리 잘 믿는다고 해도 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해서 가난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성경을 열심히 보면서 '주여, 주여' 해도 우리 집 안에 있는 자녀의 문제가 하루아침에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바뀌지 않는 현실을 목전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날마다 일어나면 그 문제가 여전히 우리를 괴롭힐 수 있습니다. 날마다 눈을 뜨면 지겹게 반복되는 일을 계속해야 됩니다. 직장에 가면 상황이 하나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주여, 주여'하고 의지하는 데도 진급에서는 누락이 됩니다. 우리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러면 이럴 경우에 우 리는 죽지 못해 인생을 산다는 생각 을 가끔 하게 됩니다. '처자를 거느리고 있으니 어찌 할 수 없지 않은가? 가는 데까지 가봐야지.' 이런 식의 일종의 체념적인 생각을 가지고 우리가 인생을 삽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너 죽고 나 죽자 하는 식으로 인생을 한번 살아 봐야지.'라며 악한 마음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면 문제를 보는 우리의 눈이 달라집니다.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인생임을 그는 새롭게 발견합니다. 예수님이 눈을 뜨게 해주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10장 31절에 중요한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날마다 아침에 똑같은 부엌에 들어가서 똑같은 음식을 만들어 오면서 지겹게 하루에 3 번씩 먹어야 되는 것, 주부들에게는 보통 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 아이고, 내가 이 짐을 어떻게 벗을까?'하는 생각도 자주 했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손에서 내가 다듬어 지고 보니 이렇게 먹고 마시는 것 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구나.' 아무리 내 생활이 평범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기뻐하는 산 제사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로마서12장1 절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거지 나사로와 같이 실패자의 인생을 살아도 그 실패자의 인생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하나님 앞에 산 제사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현실, 나의 문제, 내가 안고 있고, 내가 지고 있는 짐을 보는 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해석 하는 생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보기 시작하면 모든 것 이 달라집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에도 이런 생각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이 잘해 해결해 주실거야. 우리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게 해주신다고 약속했으니 잘해 주실거야.'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견디기 어려운 시련을 만나도 '하나님께서 이것이 나에게 유익하니까 허락하셨구나.' 이렇게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또 어쩌다가 일이 잘 풀리고 돈이 굴러 들어오면 웬만한 사람 같으면 목에 힘을 주고 우쭐거리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뜻 을 갖고 계시나 보다. 그러니까 이런 축복을 해주시지. 내가 이런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는데.'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 범사에 감사할 거리가 눈에 들어옵니다. 옛날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도 그 일속에서 기뻐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보는 시각이 달라진 것입니다. 똑 같은 문제를 놓고도 감사할 거리가 눈에 뜨이고 기뻐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되면, 자연히 내 멍에는 쉽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여러분?

데살로니가전서5장 16절, 18절에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말장난이 아닙니다. 교인들에게는 그게 가능합니다. 똑같은 문제를 놓고도 전에는 무지무지하게 무거운 짐으로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렇게 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께 드리는 제사가 되고 감사할 거리가 되고 기뻐할 거리가 된다고 생각 하니까 그게 하루아침에 갑자기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쯤이야 얼마든 지 끌고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시각을 바꾸어 주십니다.

며칠 전에 믿음이 참 좋은 어떤 자 매님하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분이 25년 전에 겪었던 한 사건을 놓고 회상하면서 간증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수만 마리나 되는 닭을 사육하는 양계장을 경영하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저녁 화재가 났습니다. 몽땅 다 타버렸습니다. 너무너무 기가 막혀서 '하나님 왜 이러세요. 왜 이러세요.' 라고 탄식을 하고 절망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던 중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오늘밤 만약 남편이 서울에 가지 않고 남아 있었다면 그 사람 기질로 봐서는 닭 몇 마리라도 건지려고 불 속에 뛰어 들어갔을 것이고, 그랬다면 남편이 어떤 일을 당했을지 모르지 않았겠나? 그런데 마침 남편이 없을 때 이런 일이 생겼으니 닭은 없어졌지만 내 남 편은 아무 일 없이 무사할 수 있었지.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감사한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정말 감사해요. 재산은 다 날라 갔지만 남편 이 건재하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이렇게 기도하다가 문득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내가 입으로만 감사해서는 안 되지. 하나님 앞에 감사하다면 진짜 감사한 표시를 내야지.' 그래서 헌금이라도 해야 되겠는데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 말 그대로 표현하자면 빗자루를 가지고 싹싹 쓸듯이 집안에 있는 것을 다 쓸어 담아서 하나님 앞에 갖다 드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알아서 하세요. 나에게는 아무 것도 없어요.' 25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 후로 하나님께서 그 가정 식구들이 다 인정할 만큼 그 가정에 절대 실망시키지 않는 은혜를 주셨어요. 그래서 지금 감사하고 간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전 재산이 한 순간에 잿더미가 되어버린 마당에 감사할 조건을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것이 어디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입니까? 주님이 그렇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문제를 주님이 그렇게 보게 하신 것입니다. 똑같은 문제지만 그렇게 바꾸어 놓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멍에를 가볍게 하신 주님의 방법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최선을 다했는데 진급에서 누락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잘해 주실 거야. 우리 주님은 항상 선하시니까.' 여러분 중에 퇴출을 당했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다 알고 계셔.' 생각지도 않던 일들이 잘 풀렸습니까? '이것도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나 보다.' 이렇게 감사할 것을 찾고 '주님이 주신 은혜로 나는 얼마든지 견딜 수 있어.'라는 생각을 하면 멍에가 가벼워집니다. 이것이 주님이 메어주시는 멍에입니다. 아멘! 사람이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는 것입니다. 짐이 무겁기도 하고 가볍기도 한 것입니다.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한 것입니다.

세 번째로 주님이 주시는 쉼은 무엇 입니까? 그를 배우는 데서 얻는 것입니다. 29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배우라는 것은 순종하라는 의미입니다.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3장15절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 을 보였노라.' 주님에게 가서 배우면 순종하게 됩니다.

우리가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순종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와서 예배 중에 말씀을 듣는 이유가 무엇 입니까? 이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입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하신 분들에게 도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생각을 바꾸어 주신 것을 믿습니다.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주님이 주시는 시각으로 문제를 보는 눈이 여러분에게는 다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감사하려고도 하고, 어떤 때는 기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시는 분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아직도 주님이 주시는 마음의 쉼을 누리지 못하고 허둥대고 있는 것을 자주 봅니다. 조금만 상황이 어려워지면 마음의 쉼이 몽땅 다 날아가고 안 믿는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는 반응을 보이는 성도들이 있는 것을 압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행복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 아버지 이야기를 자주 해서 죄송합니다. 소의 목에 멍에를 메고 그 뒤에 쟁기를 달고 논을 갑니다. 저도 논을 많이 갈아 봤기 때문에 이것이 얼마나 힘든지 압니다. 물이 가득하게 차있는 논에 들어가서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베테랑이니까 잘 하십니다. 저는 옆에서 따라 다니기도 하고 배우기도 했는데, 어떤 때는 이 소가 말을 안 듣습니다. 아버지가 지시하는 대로 가면 일도 빨리 끝나고 소도 수월할 텐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가다가 옆으로 가 버리기도 하 고 저 쪽으로 가 버리기도 하면서 자꾸 말썽을 피우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화가 납니다. '이 자식이 왜 이래. 이 놈아.' 그런데 또 한참 가다가 그만 옆으로 새는 것입니다. '이 자식 봐라.' 하면서 아버지는 고삐를 잡아 당깁니다. 그래도 말 안 들으면 뒤에 서 막 때립니다. 그러면 소는 소대로 화가 납니다. 제가 잘못해서 그런 줄 은 모르고, 화가 나서 눈을 왕방울처럼 크게 뜨고 씩씩거립니다. 옆에서 가만히 쳐다보면 소가 참 멍청이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순종만 하면 매도 안 맞고 자기도 마음이 편하게 일을 잘 할 수 있을 텐데, 순종을 안 하기 때문에 매도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도 힘들고 아버지도 힘들고, 일은 일대 로 안 되게 합니다. 참 멍청이입니다.

오늘 우리가 잘못하면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데 우리는 사랑하지 않고 자꾸 옆으로 빠집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어떤 때는 우리를 때리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갈등을 주십니다. 용서하라는 데 왜 용서 안 합니까?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만 사랑하라고 하는데 왜 자꾸 세상에 눈을 돌립니까? 왜 마음의 탐욕은 그대로 고치지 않고 살려고 합니까? 왜 거짓말을 함부로 합니까? 주님의 명령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내 마음을 지킬 수가 있는데 자꾸 나는 옆길로 새는 소처럼 가끔 순종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있는 쉼이 다 흐트러져 버리는 것입니다. 마음에 평안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주님 이 주시는 마음의 평안을 자꾸 잃어버리는 이유는 진리를 몰라서가 아닙니다. 순종 안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를 잘 기억하십시오. 먼저 주님은 우리에게 쉼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구원자로 믿을 때 이 쉼은 우리의 것 이 됩니다. 두 번째로 주님이 메어주 시는 멍에를 멜 때에 우리는 이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멍에를 더 쉬운 것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문제를 보는 눈을 바꾸어 주십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주님께 순종할 때 주시는 쉼입니다.

현대의학에서 분명히 밝혀진 사실이 있습니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병이 온다. 모든 병의 원인은 스트레스가 누적될 때 생긴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없애기 위해서 별의별 짓 을 다합니다. 그러나 스트레스를 푸는 가장 확실한 비결은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의 평안을 가지고 스트레스를 다룰 수 있어야 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안을 소유하는 사람만큼 건강하고 여유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사람만큼 강한 사람이 없습니다.

저는 어떤 그림 하나를 참 좋아합니다. 그 그림 속에는 물보라를 일으키며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면서 절벽 아래로 쏟아지는 폭포가 있습니다. 그 폭포 옆에는 자작나무 숲이 있습니다. 그 자작나무 숲에는 로빈새 한 마리가 둥우리를 짓고 앉아있습니다. 물보라를 흠뻑 뒤집어 쓴 채 앉아 있습니다. 천둥소리를 내는 폭포소리에도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습니다. 물을 흠뻑 뒤집어쓰는데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너무나 평화스럽게 눈을 지그시 감고 앉아 있는 로빈새 한 마리, 이것이 주님이 주시는 쉼을 소유 한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마음의 쉼을 가지고 이 세상을 이기는 주의 자녀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쉼을 우리 모두 소유하고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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