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막 16장 1-8절
설교제목 : 빈 무덤이 말한다(부활절)
설교자 : 이종철 목사님
마가복음 16장 1-8절
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찌기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4 눈을 들어 본즉 돌이 벌써 굴려졌으니 그 돌이 심히 크더라 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8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부활의 증거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느냐? 그냥 꾸며낸 이야기 아니냐 하고 의심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빈 무덤이 증거입니까? 여인들이 안식 후 첫날 예수님이 묻히셨던 무덤을 방문했습니다. 여인들이기 때문에 무덤을 가로막고 있는 큰 돌을 굴릴 수도 없는데 돌이 굴려져 있었습니다. 다른 성경에서는 파수꾼들이 그 무덤 앞을 지키고 있었다고 합니다. 외부의 흔적이 없는데 돌은 굴려져 있고 무덤 안에는 시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과학적 근거입니까? 그러면 이렇게 반론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치고 나서 부활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것은 마태복음에서 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파수꾼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마8:11-13)
사도 바울의 증언처럼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다”(고전15:5-6)며 목격자들의 수를 들어가며 논증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다 짜고 그렇게 하거나 헛것을 본 것이라’고 하면 더 이상 논리적으로 대응할 수 없게 됩니다. 회교권에서는 예수님 대신 다른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하며, 어떤 자유주의자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시 기절했던 것뿐이라고 합니다. 믿는 우리들에게는 예수님의 부활이 너무나 확실한데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빌리 그래함이 말하듯 “예수께서 죽음에서 사셨다는 증거가, 황제 시저가 있었다는 증거나 알렉산더가 30세에 죽었다는 증거보다 더 많다.”고 우리는 말하지만 세상은 못 믿겠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인류 역사상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성서에 기록된 부활의 증거를 들며 세상을 설득하려는 시도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고 있는 오늘 말씀의 초점도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논증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단지 “그가 살아나셨다”며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할 뿐입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는 근거가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하신 결과 드러난 한 현상일 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부활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어떻게 부활을 믿게 할 수 있습니까?
가장 강력한 근거는 ‘기독교의 출현’ 자체입니다. 기독교의 기원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입니다. 부활절 이전에는 기독교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신 때나, 공생애를 시작하신 때가 기독교의 기원이 아닙니다. 부활 이전까지 예수님은 단지 특별한 한 인간이거나 세상에 출범했던 여러 메시야들 중 하나였을 뿐이었습니다. 부활절 이전의 제자들 또한 오합지졸이었습니다. 예수 운동은 무슨 거대한 운동도 아니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제자들은 다 도망갔고, 유다라는 한 제자는 자기 스승을 돈에 팔았고, 그들 중 수석이라는 베드로는 그 스승을 저주하고 부인했습니다. 단지 교주인 예수님만 돌아가신 아주 실패한 운동이었습니다. 그것도 가장 비참하며 당시 저주의 나무라고 생각했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삼일 만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모든 것이 완전히 바뀌어버렸습니다. 두려워 달아났던 예수의 제자들은 사람들 앞에 담대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야임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난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그 열두 제자는 하나같이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그들은 원수를 사랑하며 자기 재산과 권리들을 아낌없이 포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이 혐오하며 피하길 원하는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며, 십자가를 하나님의 사랑의 징표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 운동은 염병처럼 급속도로 퍼져나갔고, 결국 로마를 정복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부활절 이후에 일어났던 놀라운 변화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제자들을 변화시켰습니다. 부활한 예수를 만나고 나서야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의로운 죽음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십자가가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복음서는 거꾸로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빛에서 다시 읽고 기록한 것이 바로 복음서입니다. 예수 부활의 강력한 근거는 제자들의 변화이고 기독교의 출현 그 자체입니다. 부활이 없으며 기독교도 없습니다. 기독교는 죽음을 부정하는 부활의 신앙으로부터 태동되었습니다. 제자들 또한 죽음의 권세를 극복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넘어 이제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부활에 대한 여러 논쟁들이 있고 이를 변증하는 책들과 설교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세상을 설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설득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있습니다. 바로 신앙인들의 변화된 삶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평안하고 찬양을 합니다. 자기 가진 것을 빼앗겨도 감사합니다. 세상의 것에 연연해하지 않고 자유합니다. 오히려 하늘의 상급과 영원한 것을 기뻐합니다. 원수에 대해서 보복으로 갚지 않고 용서하고 사랑합니다. 이기적이지 않고 세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합니다. 이런 신앙인들의 모습은 본다면 세상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부활은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당신을 변화시킨 무언가가 있는 것은 확실하군요.”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나뭇잎이 흔들릴 때 우리는 바람이 불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변화된 사람들 그들이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부활에 대한 논증보다 중요한 것은 부활신앙을 가진 자의 삶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부활에 대해 설득할 것이 아니라 부활의 삶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빈 무덤
무엇보다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서 그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앞에 죽음의 권세는 힘을 잃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처럼 우리가 부활할 것을 믿으며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고 외치고 있습니다. 죽음을 숙명으로 안고 살아가는 인간의 입에서 어떻게 이런 담대한 고백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인간들은 무덤 앞에서 절망합니다. 그 안에는 사랑하는 이의 뼈와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은 비었습니다. 빈 무덤입니다. 그 안에는 시신이 없습니다. 이는 단순히 예수님의 무덤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의 무덤도 그렇습니다. 신앙인들에게는 무덤은 절망이 아닙니다. 그 무덤은 빈 무덤입니다. 아니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때가 되면 하늘에서 나팔이 울릴 것이요, 삽시간에 우리 몸은 변화되어 새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헤어졌던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신앙인의 무덤에는 이런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눅24:5)는 누가의 증언이 맞습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자에게는 무덤에 있는 자는 죽은 자가 아니라 이미 산 자입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그들의 창시자의 무덤을 성지화하고 자랑합니다. 가장 거대한 묘는 아마 이슬람교의 마호멧 사원일 것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메디나에 가면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멧의 묘가 있습니다. 이 묘는 금격자로 되어 있으며 그 사원은 1백만 명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합니다. 그렇지만 그 안에 있는 것은 인간의 시체일 뿐입니다. 거대한 피라미드도 결국 무덤에 불과합니다. 그 안에는 바로의 미이라가 감추어 있습니다. 죽음을 찬양하고 기념하고 있을 뿐입니다. 반면에 예루살렘 성지에 가면 예수님이 묻혔던 성묘교회가 있습니다. 이곳은 십자가에 달리셨던 주님의 시신이 잠깐 머물렀던 곳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이제 아무것도 있지 않습니다. 성지순례를 가서 보면 빈 대리석 자리만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관이 없습니다. 모형관조차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빈 무덤을 자랑합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다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며 우리 또한 부활할 것을 믿고 있습니까? 우리 찬송가들을 보십시오. 부활과 영생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장례식에서도 곡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쁨의 찬송을 부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로 이어지며 또한 장차 다시 부활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맞서 정면으로 도전하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입니다. 17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성공회 사제였던 존 던은 그의 시 “죽음이여, 뽐내지 말라”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죽음이여, 뽐내지 말라, 어떤 사람들 그대를
강하고 무섭다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아.
그대가 쓰러뜨렸다고 생각하는 그들 죽은 것 아니라네.
가련한 죽음이여, 그대는 나도 역시 죽일 수 없어.
단지 그대의 그림자일 뿐인 안식과 잠에서
많은 기쁨이 흘러나온다면,
그대에게선 더 많은 쾌락이 흘러나오리라.
가장 선한 자 가장 먼저 그대를 따라가지만,
그것은 육체의 안식이요 영혼의 구원.
그대는 운명과 사고와 폭군과 절망자들의 노예,
독약과 전쟁 그리고 질병과 함께 사네.
아편이나 마술로도 우리를 잠들게 할 수 있으니,
그대의 칼보다 낫지, 그러니 뽐낼 것이 무엇이랴?
짧은 한잠 지나 우리 영원히 깨면
이젠 죽음은 없네, 죽음 그대가 죽으리!
시인은 ‘죽음 그대가 죽으리’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죽음 앞에 절망하지 않는 자의 담대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소망과 담대함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산다면 세상은 부활을 믿지 않을지라도 부활 신앙의 위대함 앞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여인들의 헌신
예수님 부활의 첫 목격자들은 여인들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입니다. 이 세 사람은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여인들입니다(막15:40). 제자들은 예수님을 팔고 부인하고 다 달아나버렸지만 예수님의 마지막을 지켰던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묻히시는 무덤도 지켜보았습니다(막15:47).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이어지는 안식일이 지나자 그들은 향품을 사두었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급박하게 돌아가시는 바람에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입니다. 몸에 향품을 발라 썩는 냄새를 막고 예수님의 장례를 정중하게 치르려 하였던 것 같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고 싶지만 안식일이 끝나며 어두워졌기에 그럴 수 없었습니다. 안식일 다음날, 일요일 새벽에 그들은 부지런히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이 때도 제자들은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부활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예언(막8:31)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인들 또한 그 말씀에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무덤을 찾았을 뿐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무덤을 찾으면서 그 앞을 막고 있는 그 육중한 바위를 어떻게 치울 것인가 걱정하는 데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습니다. 무덤 안으로 들어갔을 때 거기서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을 보게 됩니다. 아마 천사였을 것입니다. 그 천사가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6)는 놀라운 선언을 듣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아니 부활의 소식을 처음으로 들은 자들은 바로 이 세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녔던 제자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반면에 예수님 공생애 기간 중에는 존재감마저 희미했던 여인들은 어떻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었습니까? 그들의 믿음이 제자들보다 뛰어나서였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이념이나 믿음보다 더 강한 것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가진 무엇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예수님 그 분 자체를 온전히 사랑했습니다. 믿음은 그 사람이 가진 좋은 어떤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 사람이 가진 단점까지 포함하여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나 이념은 단점이 보였을 때 쉽게 포기하고 맙니다. 그러나 사랑은 단점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데서 더 나아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믿음의 관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랑할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교회도 믿음만을 가진 사람들보다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를 지키고 끝까지 함께 합니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오늘 말씀의 메시지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좀 더 어려운 부분을 통과해야 합니다. 마가복음은 오늘 읽은 16장 8절로 끝납니다. 아니 20절까지 있잖아요? 하고 반문하실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자세히 보십시오. 9절부터 20절까지는 괄호가 쳐져 있고 어떤 사본에는 없음이라는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원래 처음 성경이 기록될 때는 장 절 표시가 없었습니다. 소문자가 없고 대문자로만 기록되었고, 단어와 단어 사이의 구분도 없었습니다. 16세기에 이르러서야 스테파누스라는 사람에 의해서 장과 절이 구분된 성경이 처음으로 출판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그 이후 성경사본에 관한 과학적 연구가 계속되었습니다. 성경사본 연구가 중요한 것은 지금은 인쇄술이 발달되어 있지만 옛날에는 손으로 일일이 베껴서 보관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오류도 있고, 덧붙여지기도 했습니다. 과학적 기법에 의해서 성경은 이제 거의 원본에 가깝게 복원이 되었습니다. 이런 성경 사본학 방법론은 매우 엄격해서 일반 세상 학문에서 고문서를 고증할 때도 사용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스테파누스가 장절을 붙였던 성경들이 현대의 검증 결과 실제 원본과는 다르다는 평가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 성경을 읽다가보면 몇 장 몇 절 (없음)이란 표시가 생긴 것입니다. 마가복음 16장 9절에서 20절까지는 유력한 사본에는 없습니다. 원래 마가복음에는 없었다는 것이 학자들이 내린 대체적인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8절로 끝나면 성경메시지의 결론이 이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예수님이 부활하신 모습도 묘사되지 않고, 여자들은 마치 믿음이 없는 사람마냥 아무 말도 못하고 심히 놀라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후에 사본을 기록했던 사람들이 불완전해 보이는 것을 보충하기 위해 부활과 관련된 다른 성경의 증언들을 덧붙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약 마가복음이 8절로 끝나고 있다면 성경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먼저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기 위해서 쓴 책이 아닙니다. 이미 마가 공동체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천사가 전한 메시지입니다. 7절입니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이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부활의 예수님입니까 아니면 다른 예수님입니까? 만약 8절로 마무리된다면 이 말씀은 주님을 뵙기 전의 상태라 할 것입니다. 지금 마가공동체는 곧 주님을 뵙게 되는 긴장감 속에 있습니다. 8절의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는 말씀은 단지 여자들의 두려움만이 아니라 모든 교회 공동체의 두려움입니다.
그렇다면 이 주님은 부활의 주님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이미 부활의 주님을 만났고 그 증언을 들었던 공동체입니다. 초대교회는 이제 부활의 주님을 넘어 재림의 주님을 소망하던 공동체였습니다. 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주님은 바로 재림의 주님이 아니었을까요? 마가복음연구의 주요한 학자중 하나인 빌리 막센과 많은 학자들이 이런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갈릴리는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며 가르침을 행하던 현장이며, 또한 기적과 능력을 베풀던 곳입니다. 바로 교회가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곳이 갈릴리입니다. 제자공동체는 선교의 복판에서 자신들의 일을 감당하며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마가복음은 아주 정교하게 우리로 하여금 부활의 주님을 넘어서 재림의 주님에게 시선을 맞추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갈릴리에서 부활하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초대교회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기도 합니다. 우리 또한 여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이 놀람과 두려움을 간직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놀람과 두려움은 불신앙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시내 산에서 주님의 두려운 강림을 이스라엘이 대했듯이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긴장감과 두려움입니다. 오히려 신앙적인 두려움이라 할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자기 인생을 갑작스럽게 급습하는 초월적인 것에 전혀 무방비상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심판 대 앞에 서야 하는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두려움과 놀람이 없기에 악을 저지르는 데 담대합니다. 세상에 매여 삽니다. 주님은 여러 번에 걸쳐 깨어있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때가 언제일지 모른다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한다(막13:3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빨리 악에서 떠나야 합니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다면 빨리 가서 화해하고 와야 합니다. 재판을 하고 소송을 할 틈이 없습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부활의 신앙을 산다는 것은 주님 오실 날을 기다리며 깨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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