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막 15장 42-47절
설교제목 : 예수님의 VIP(완)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린 사람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진지한 신앙인의 가장 큰 고민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믿는 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소위 ‘신앙과 실천의 괴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신앙의 노력을 포기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괴리감에 대한 고민이야 말로 우리의 신앙을 실천으로 향상시키는 동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신앙생활의 전 과정을 기독교 교리에서는 ‘성화’(Sanctifcation)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런 성화의 여정을 위해서 우리는 성경 공부도 하고, 신앙 훈련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성경 공부에서 한 가지 크게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대체로 어떤 성경 공부 과정을 진지하게 참여하게 되면 그 공부의 한 과정이 끝났을 때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도달해야 할 기준이나목표를 지적으로 이해하고 알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 공부의 가장 큰 함정은 성경 공부의 한 과정을 끝마친 것으로 우리가 마치 그 과정이 지향하는 목표에 도달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 모두가 냉정하게 확인해야 할 것은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의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숙제는 우리의 앎이나 믿음을 어떻게 삶으로 나타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결단입니다.
오늘 우리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아주 중요한 결단을 통해 마침내 믿음과 앎을 실천으로 옮긴 한 사람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가 바로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아리마대는 막달라와 마찬가지로 지명입니다. 이곳은 현대의 랜티스(Rentis)라는 지역인데 본래 사무엘의 고향으로 ‘라마다임소빔’으로 불리워지기도 하는 곳으로 예루살렘에서 북방 35km에 위치한 마을 이름입니다. 오늘 본문 43절은 이 아리마대 출신의 요셉이 존경받는 공회원이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기다린다는 말은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말과 같습니다. 혹은 그가 메시아를 통해서 이루어질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는 삶의 현장을 통해 자신의 하나님 나라 신앙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어쩌면 우리처럼 신앙과 삶의 괴리를 가지고 고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 드디어 그에게도 결단의 순간이 찾아 온 것입니다. 자, 그에게서 배우는 신앙이 삶의 실천이 되기 위한 우리의 결단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1. 공개적 신앙 고백의 결단을 내리는 일입니다.
사실 복음서를 읽어 보면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 까지 전혀 그 이름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다 십자가 사건이후 바로 오늘의 본문에서 갑자기 등장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아마도 그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며 살아왔던 예수님의 비밀 제자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럴만한 근거를 우리는 요한복음 19:38에서 읽어볼 수 있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니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그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었던 일종의 007제자였음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했을까요? 성경은 그가 유대인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아니 그가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밝혔을 때 그가 받을 불이익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에게 자신의 정체를 숨길 수 없다고 판단하는 순간이 도래한 것입니다. 그는 마침내 용기를 내었습니다. 다시 본문 43절을 읽어 보십시다. “아리마대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여기 ‘당돌히’라는 표현을 주목하십시오. 본래 ‘마음을 담대하게 먹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담대하게 마음먹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공개적으로 요청함은 그가 그리스도인임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일종의 공개적 신앙 고백의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공개적인 선언의 중요성은 무엇일까요? 질문을 바꾸어 보겠습니다. 한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면 조용히 사적으로 부부가 되어 살면 그만인데 공개적인 결혼식이 왜 필요한 것일까요? 공개적인 선언이 이들의 부부됨을 당당하고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이제 그들은 숨어 다닌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선언 없이 그들은 언제라도 헤어질 준비를 하고 사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넘어선 부부 생활은 반드시 부부됨의 공개 선언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삶이 되고 실천이 되기 위해서는 신앙인이 됨의 공개적인 결단과 선언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태복음 10:32-33). 이것이 바로 공개적 신앙 고백의 결단을 필요로 하는 이유입니다. 특히 당신이 정체를 숨기고 잠행하는 007크리스천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신앙이 삶의 실천이 되기 위해 필요한 두 번째 결단은 무엇일까요?
2. 공적 영역에서 희생을 감수하는 일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의 케이스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아마도 그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했을 때 그가 가정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아마도 공회원 자격을 상실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의 공회원은 70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으로서 이 공의회는 지금의 국회 비슷한 것이었는데 사법적 결정까지 내릴 수 있었던 당시 유대 사회 최고의 대접을 받는 원로의 위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의 공개적 결단, 범죄자 예수 편에 서는 결단으로 그는 더 이상 이런 대접도 존경도 상실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결단은 희생이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어떤 이익도 기대할 수 없는 희생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살아 계셔서 기적을 행하시고 민중 사이에서 인기가 상승할 때 그가 예수 편에 서는 것은 오히려 이해할만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죽은 예수-이제 와서 아리마대 요셉이 그의 편을 드는 것으로 무슨 이익을 기대하겠습니까? 그래도 그가 이런 희생을 감수한 이유,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무엇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제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당한 도리라는 생각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마도 그렇게 하는 것이 이제라도 죽은 예수님의 명예를 회복하고 그가 가르친 복음의 영향력을 확산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를 일입니다. 실제로 그의 이런 결단이 당시에 끼친 어떤 영향이 있었을까요? 다시 요한복음 19:39을 보면 선행하는 38절에서 기자 요한은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공개적으로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한 일을 보도한 후 이 사건이 남긴 한 가지 흥미로운 영향을 39절에서 기록합니다. 읽어 보실까요?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을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니고데모도 아리마대 요셉과 마찬가지로 공회원이었고 예수의 비밀 제자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공개적 신앙 고백에 영향을 받아 마침내 니고데모‘도’(also) 공개적으로 예수의 장례식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더 이상 그는 밤의 제자가 아닌 낮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의 공적 영역에서의 신앙의 드러냄이 바로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우리 시대-바로 이런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이 필요하지 않은가요?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공적 영역에서 신앙을 드러냄이 우리의 공적 의무를 등한이 함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만일 ‘존경받는’ 공회원(43절)이 아니었다면 그의 이런 행위가 동료들에게 거룩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겠습니까? 저는 그리스도인 교사가 수업 시간을 희생하며 전도한다든지 회사원이 근무시간에 성경을 보는 행위는 정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수업시간에는 수업에 성실함으로, 근무시간에는 근무에 성실함으로 존경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학교나 회사 식당에 와서 식사를 시작하기 전 우리가 정말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식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는 우리는 남들이 기피하는 공동체의 어려운 과제를 스스로 자원하고 감사함으로 섬길 수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비록 이런 섬김의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직장의 다른 어떤 동료들에게 우리가 때로는 오해당하고 때로는 왕따를 당한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누구가가 어떤 날 우리 곁에 슬며서 다가와 우리의 섬김의 이유를 혹은 기도의 이유를 묻는다면 그때야 말로 우리가 우리의 이웃들에게 예수를 믿는 이유를 전할 기회라고 믿습니다. *신앙이 삶의 실천이 되기 위한 마지막 결단은 무엇입니까?
3. 최선의 것을 주께 드리는 일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장례식에서 주께 드린 헌신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께 무덤을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무덤은 자신이 사용하기 위해 미리 준비한 무덤이었을 것입니다. 본문 46절은 이 무덤이 바위에 판 무덤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마태는 마태복음 27:60에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라고 기록합니다. 그것은 아직 아무도 사용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었다고 말합니다. 다시 평민들은 누군가가 사용한 무덤을 다시 잘 정리해서 사용함이 보편적 관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자신이 ‘주’라고 고백한 그분에게 최고의 것을 드리고 싶어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최고의 헌신으로 그는 신약 성경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주님의 VIP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에서부터 가르쳐 온 일관성 있는 제물 드림의 정신은 언제나 첫 번째 것, 새 것 그리고 흠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한 해를 결산하며 금년 한해 우리는 정말 첫 번째 것으로 새 것으로 그리고 최선의 것으로 주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섬겨 오셨는지요? 아니었다면 다가올 한해 어떻게 주님과 하나님 나라를 섬기고자 하시는지요? 지금이 바로 내년의 헌신을 결단하실 때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을 생각하며 저는 우리 시대 가장 고귀한 헌신을 주께 드린 한 러시아 그리스도인 생각이 났습니다. 그는 보리스 콘펠드라는 이름의 유대인 출신 의사였습니다. 그는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에서 스탈린도 신이 아닌 인간이라고 말한 죄목으로 체포되어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의사로서 죄수들이 병을 핑계대지 못하고 죽도록 일하다가 죽도록 하는 일과, 그리고 난치의 환자는 목숨을 연장하지 말고 죽도록 하여 경제를 낭비하지 말라는 명을 받습니다. 그의 치료는 형식적, 기계적이 되어가며 의사로서 그는 자신의 인간성이 철저하게 파괴되고 있음을 느끼고 절망의 바닥을 헤매던 어느 날 동료 죄수에게 전도를 받고 그리스도를 영접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 수용소내의 일종의 기독교 지하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되고 자신의 구원이 바로 그들의 기도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그는 비로소 자신이 주님과 이웃에게 빚진 인생임을 알고 그때부터 최선을 다하여 환자의 치료에 임하게 됩니다.
한번은 그가 장암에 걸린 환자를 치료하게 됩니다. 수용소 병원의 규칙은 그를 살려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환자를 살리면 그는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용소 규칙을 어기고 그를 치료하여 살려냅니다. 그의 소생이 확실해지던 어느 날 치료를 받던 환자는 “왜 당신은 이렇게 위험한 시도를 하면서 나를 살리려 하느냐, 당신은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는 질문을 의사 보리스에게 던집니다. 보리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괜찮아요. 염려마세요. 이미 당신과 나를 살리고자 죽이신 분이 계시거든요.” “도대체 그가 누구냐”는 질문에 조용히 미소를 보이며 의사 보리스는 “그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그 후 의사 보리스는 이 사람을 살린 일이 알려져 공개 처형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가 처형되던 순간 보리스에게 생명을 받고 복음을 받은 그는 땅에 엎디어 흐느끼며 이런 고백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보리스, 알겠습니다. 이제는 저도 저의 최선을 바쳐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분의 이름을 전하겠습니다.” 그가 바로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 알렉산더 솔제니친입니다. 오늘 당신과 나의 결단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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