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막 10장 46-52절
설교제목 :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완) - 경청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한 보석상이 자신의 나쁜 습관 때문에 고민이 되어 ‘고정 관념을 깨는 습관의 법칙’의 저자 브라운 랜던을 찾아 왔다고 합니다. 그는 어렸을 때 있었던 나쁜 습관을 잊고 있었는데 삼년 전부터 그 습관이 다시 나타나 고민하고 있었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 습관을 고치지 못해 절망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에게 랜던 박사는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보석상이시니까 금고에 다이아몬드가 많이 있겠지요?” “예, 많이 있습니다. 약 삼십 만개는 될 것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러면 여기 조약돌 3개가 마침 있는데 이제 눈을 감으시고 당신의 금고에 있는 다이아몬드 30만개 옆에 제가 가지고 있는 조약돌 3개를 저에게 받아 당신의 금고 옆에 놓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상상이 되십니까?” “예, 상상이 됩니다.” “그러면 혹시 이런 상상이 가능한지 계속 상상해 보십시오. 그 조약돌 3개가 자꾸 눈에 거스리기 때문에 당신은 보석상 사업이 불가능하고 인생의 보람도 의미도 누리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이 상상이 되십니까?” 그러자 그는 “상상이 안가네요. 어떻게 저 조약돌 3개 때문에 제가 가진 다이아몬드 30만개 사업을 포기하고 인생을 포기하란 말입니까?” 그러자 랜던은 그에게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당신이 하고자 하는 말이 아닙니까? 당신은 당신의 못된 2-3개의 습관 때문에 인생이 절망이라고 지금 말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까?” 얼른 대답을 찾지 못하고 주저하는 그에게 랜던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제부터 당신이 하실 일은 못된 습관 몇 개를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좋은 습관을 만드시고 그런 새로운 습관에 집중하시는 일입니다.”
금년 들어 저는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 시리즈 설교를 계속해 오면서 우리가 새롭게 만들고 집중해야 할 습관을 나누어 왔습니다. 오늘은 그 마지막 시간으로 예수님의 ‘경청의 습관’에 대하여 나누고자 합니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우리 인간이 말하는 것을 배우기까지는 2년이면 족하지만, 듣는 것을 배우기까지는 80년이 걸린다”고 했습니다. 경청의 습관은 평생의 학습을 필요로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지한 경청을 하는 순간 인생은 기적을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예수님의 경청의 기적을 보여주고 있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경청의 습관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1. 경청은 머물러 이웃에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여리고 도성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맹인 바디매오가 지나가는 예수를 향해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소리치는 장면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외침을 단순히 시끄러운 소리로만 생각했습니다. 40절에 보면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고 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는 또 한번 “나는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칩니다. 이때 49절에 보면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것이 바로 경청의 자세인 것입니다. 경청은 이웃들의 소리를 듣기 위해 머물러서는 것입니다. 경청은 귀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지한 경청은 온 몸, 온 눈, 온 마음, 내 온 존재를 동원하여 상대방에게 나 자신을 내어 주는 행위인 것입니다. 한문으로 ‘듣는다’는 말 ‘청’(聽 )자를 보면 좌측에 귀를 나타내는 ‘이’자가 있지만, 우측에는 열‘십’자와 눈‘목’자 그러니까 열 개의 ‘눈’과 그 아래 마음 ‘심’자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든 눈을 동원하여 상대방에게 주목하고 마음을 내어 주는 일이 바로 ‘듣는 일’인 것입니다.
한 심리학자는 오늘 가정문제의 대부분은 배우자들 특히 남편들이 경청만 배워도 해결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남편이 집에 와서 내가 오늘 직장에서 들었는데 여자가 남자보다 갑절이나 하루에 더 많은 말을 하고 산다(남자는 1만 5천, 여자는 약 3만 단어의 말)고 하더라고 하니까 아내가 “왜 그런지 아세요?”하고 물었답니다. “왜?”하고 남편이 묻자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남자들은 우리 아내로 하여금 똑같은 소리를 두 번씩 하게 만들잖아요?” 그러자 남편이 뭐라고 했을까요?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하더랍니다. 경청이 어려운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경청은 진지한 집중과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한다면 경청은 가능할 수가 있습니다. 해답은 결국 사랑입니다.
본문에서 왜 예수께서는 길을 가다가 머물러 서셨을까요? 그에게 호소하는 맹인에게 관심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사랑의 첫째 의무는 경청하는 것이다”(The first duty of love is to listen)는 말을 남겼습니다. 사랑은 이웃의 작은 신음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나는 이 맹인이 큰 소리가 아닌 작은 신음소리로 외쳤어도 예수님은 여전히 그의 외침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성가에서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지상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본문의 맹인처럼 지금도 여전히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기도하면 그는 우리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 경청하심을 믿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이웃의 말을 경청하고자 한다면 이웃을 바라보고 그 앞에 머물러 집중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적의 시작인 것입니다.
2. 경청은 이웃의 마음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경영 컨설턴트였던 피터 드러커는 “의사소통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말하지 않은 소리를 듣는 것이다”(The most import!ant thing in communication is to hear what isn`t being said)고 말했습니다. 일찍 심리학자들은 이런 작업을 가르쳐 “제3의 귀(The third ear)로 듣는다”고 말해왔습니다. 상대방은 표면적으로는 나를 공격하고 비난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심층적으로는 나에게 도움을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웃을 돕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웃들의 소리를 마음으로 듣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이 바로 우리의 제3의 귀인 것입니다. 상대방이 아직도 스스로의 마음을 열기를 두려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거든 상대방이 마음을 열도록 그 마음의 이야기에 공감해 보십시오. 아니면 상대의 이야기를 내가 경청하고 있다는 신호로 그의 이야기를 다른 언어로 반복해 보십시오. 심리학자들은 그것을 ‘공감적 경청’ 혹은 ‘반영적 경청’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대화하는 장면을 주목해 보십시오. 여인은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찌해서 사마리아 여자인 내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고 시비를 겁니다. “당신이 여기서 물을 준다니 당신은 내 조상 야곱보다 더 위대하냐?”고--조상 탓까지 합니다. 이때 예수님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반응은 “싫으면 관두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끈질기게 그녀의 말을 경청합니다. 그러자 마침내 이 여인은 “이런, 목마르지 않는 물을 내게 주사 다시는 여기에 물 길러 오지 않게 하소서”라고 도움을 호소하지 않습니까? 상대의 마음이 어느 정도 준비가 되어 있거든 본문의 예수님의 케이스처럼 단순히 질문해도 좋을 것입니다. 51절을 읽어 보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러자 맹인의 진심이 토로되지 않습니까?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렇습니다. 이 말 한마디 “제가 무엇을 해드리면 좋겠습니까?”--이 단순한 질문만 잘 연습해도 마음을 열 준비가 된 수 많은 상처받은 이웃들이 줄지어 우리를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경청은 이웃의 마음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3. 경청은 이웃의 믿음의 소원을 깨우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믿음의 소원을 갖고 인생을 살아갑니다. 누구나 믿고자 하는 바가 있다는 말입니다. 어둠속에 사는 이웃도 밝은 내일을 믿고자 합니다. 가난 속에 사는 이웃도 풍요한 내일의 삶을 믿고자 합니다. 실패를 거듭하는 이웃도 성공하는 내일을 믿고자 합니다. 병약한 이웃도 건강이 회복된 내일을 믿고자 합니다. 우리 중에는 그런 내일을 말하는 이웃들을 좌절시키며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런 믿음의 소원을 늘 격려하며 일깨우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치료자라고 상담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경청은 이런 믿음의 소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일깨우는 처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죽하면 우리는 돈을 주고 내 이야기를 들어 줄 전문가를 찾아가 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습니까?
본문의 주인공 맹인도 얼마나 눈을 떠 보고 싶은 믿음의 소원을 갖고 살아 왔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52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너는 어차피 볼 수 없는 운명이니까 포기하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절망의 도구가 아닌 희망의 도구이기를 원하셨습니다. 좌절의 도구가 아닌 재기의 도구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본문 52절에 보면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고 했습니다. 경청이 그를 예수의 제자가 되게 한 것입니다. 경청이 그의 눈을 연 것입니다. 경청이 그의 잠자던 믿음을 일깨워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한 것입니다. 경청이 그에게 기적의 삶을 선물한 것입니다.
최근 베스트셀러로 자리잡은 책 조진영님과 박현찬님의 책 “경청”을 읽어보셨습니까? 주인공 이토벤은 별거중인 아내와 발달장애 아들을 둔 30대 후반의 직장인입니다. 평소에 그는 ‘알았다’는 말을 달고 살았던 자기 편한대로만 모든 것을 이해하고 결정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구조조정 당하고 가까스로 자신의 마지막 꾀로 얻어낸 악기대리점 오픈 당일 그는 어지럼증으로 쓰러지니다. 그러나 그가 씨름해야 할 보다 심각한 병은 남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못하는 병이었음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이토벤은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하지만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고 결심합니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자기가 근무하던 악기제조 공장에 들어가 청력 장애인으로 멸시를 받으며 바이올린 제작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가 인생의 마지막 시간에 배운 더 소중한 레슨은 이웃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는 유언적 메시지는 “이청득심(以聽淂心) 곧 귀 기울여 들을 수 있다면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카라 로렌스(Cara Lawrence)라는 분의 말을 이 메시지의 결론으로 드리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이 준 충고를 기억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들의 말을 경청해 준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할수록 예수님의 사랑이 깊이 경험되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분은 언제나 우리에게 귀를 기울여 우리의 기도를 경청하시는 분이심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경청의 습관을 닮아 가십시오. 경청의 습관을 사모하십시오. 경청을 날마다 지속적으로 연습하십시오. 경청의 습관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경청의 기적을 경험하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지금 누군가가 당신의 아픔의 이야기를 경청해 줄 분이 필요하십니까? 본문의 앞 못보던 맹인처럼 다윗의 자손 예수를 불러 보십시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쳐 보십시오. 그분의 머물러 서심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분이 들으십니다. 그분이 희망이십니다. 그분이 구원이십니다. 그분의 이름이 구원자 예수이십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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