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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레위기

레위기 20장 7-8절 여호와 카데쉬(하나님의 이름) - 이동원 목사

by 재영구리 2023.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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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레 20장 7-8절,  롬 6장 13절
설교제목 : 여호와 카데쉬(하나님의 이름)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청교도 시대가 남긴 에피소드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의 시대에는 한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면 대부분의 지역 교회에서 그를 그 교회 회원으로 받아 드리기 위하여 교회 위원회와 입교 문답을 하는 관례가 있었다고 합니다. 한 자매가 교회의 나이 든 장로님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자매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자신이 죄인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물론 이 자매는 “예”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장로님은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지금 예수를 믿은 후에는 자신을 어떻게 느끼십니까?” 자매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전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장로님은 다시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 믿기 전과 예수 믿은 후에 달라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 다음에 자매가 했던 대답이 아주 유명한 말이 되었다고 합니다. “전에는 제가 ‘죄를 향해 달려가는 죄인’이었지만(a sinner running after sin), 지금은 ‘죄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죄인’(a sinner running from sin)입니다.” 묻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아직도 죄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죄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중이십니까? 그리스도인라고 죄 문제와의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참으로 누구인지를 깨닫고 예수를 믿고 그를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한다면 죄사함 받고 구원받은 것은 확실한 성경적 사실입니다. 이것을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성경은 성도들에게 죄와의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아니 오히려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을 넘어뜨리고자 더욱 집요하게 공격하고 유혹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전쟁인 것입니다. 이 전쟁에서의 승리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죄로부터 도망치는 것을 배우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좀더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거룩해지는 일’입니다. 신학자들은 예로부터 이 과정을 가르쳐 ‘성화(sanctification)의 단계’라고 불렀습니다. 신학자 헨리 할러먼(Henry Holloman)교수는 성화를 가르쳐 오늘날 ‘잊혀진 축복’(The forgotten blessing)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모두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거룩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많은 것 같지 않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레위기서 입니다. 레위기는 구약에서 창세기, 출애굽기 다음에 나옵니다. 창세기는 시작의 책이고 특별히 인류에게 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출애굽기는 노예의 땅인 이집트에서 어떻게 떠나는 가를 보여주는 구원의 책입니다. 다음 책인 레위기는 죄로부터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깨꿋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니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또 하나의 이름을 만납니다. 그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 곧 ‘여호와 카데쉬’(케데쉼)라는 것입니다. ‘카데쉬’라는 말은 본래 히브리어 단어 ‘카도쉬’(kadosh)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영어의 ‘holy'에 해당되는 ’거룩하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는 무엇보다 그의 백성들이 거룩하기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오늘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소원인 거룩함을 실제로 이루어 드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롬6:13에서 그 실제적인 처방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1.자신을 죄에게 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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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6:13에서 열쇠 단어는 ‘드리라’는 것입니다. 거룩의 열쇠는 우리가 스스로를 어떻게 드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드린다’는 말의 원어는 ‘paristano'라는 단어인데 영어로는 ’present'(갖다 바친다) 혹은 ‘yield'(항복한다)의 뜻으로 번역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신을 죄에게 갖다 바친다든지 죄에게 항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개역 개정판에서는 ’내주지 말라‘로 번역했습니다. 표준 새 번역은 ’내 맡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과 된 후의 죄에 대한 본질적인 차이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어서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구원받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면 우리는 죄를 안 지을 수 있는데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죄에서 승리하는 거룩한 삶을 열망하신다면 무엇보다 죄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죄에 내어주는 어리석은 자포자기의 굴종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 가지 도움이 될 수 있는 처방은 우리가 죄 지을 유혹을 느낄 때마다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롬6;11에서 바울이 가르친 바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 지어다” 사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내 죄를 대신하시고 죽으신 것이 사실이라면 그가 죽으실 때 죄짓는 나도 거기서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자는 더 이상 죄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시체가 미워하는 것, 화내는 것, 시기하는 것, 질투하는 것을 보신일이 있으십니까? 그래서 죄 지을 일 생기면 나는 죽었는데--하고 죽은 나를 그려 보십시오. 그렇게 ‘여기라’는 말은 일종의 mental exercise를 강조하신 것입니다. 어느 주일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천국 가나요? 아이들은 일제히 “아뇨”하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교회 열심히 다니면 천국에 가나요? 아이들은 다시 일제히 “아뇨”하고 대답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럼 어떻게 해야 천국에 가나요?”물었더니 아이들의 대답이 무엇인지 아세요? “죽어야 천국가요”했답니다. 정답이지요. 그러나 죽음은 천국 가는 길일뿐 아니라, 거룩의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죽어야 새 사람이 삽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어야 의에 대하여 삽니다. 나의 자아가 죽어야 내 안에 거룩한 예수님이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죄를 이기는 처방입니다. 우리 안에 거룩을 이루어가는 가장 중요한 첫째 처방입니다. 

 

2.자신을 다시 산자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거룩은 무엇을 안 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제 무엇인가를 하셔야 합니다. 거룩의 첫 처방은 죄를 향해 끊임없이 NO하는 것을 배우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둘째 처방은 하나님을 향하여는 끊임없이 YES하는 것을 배우셔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말하면 십자가에서 죄에 관한 한 죽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십자가에서 다시 사심은 우리로 다시 산자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새 인생을 살게 하고자 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롬6:13에서 바울은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라”고 한 것입니다. 롬6:11의 표현을 빌리면 죄 지을 일에 대해서는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지만 하나님 기뻐하실 일에 대해서는 생생하게 산자답게 열렬하게 반응하시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피할려고 만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자신을 드리셔야 합니다. 사실, 레위기에서 ‘거룩하다’는 단어를 원어에 가깝도록 다른 단어로 대치한다면 가장 원 의미에 가까운 단어는 ‘구별한다'(separate, set apart)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되는 ’구별‘이나 ’분리‘라는 단어는 이중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속되고 더러운 것에서의 분리의 의미도 있지만, 이제 그 분리한 것(구별해 놓은 것)을 하나님의 목적에 사용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거룩하다는 말이 아주 광범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성전, 성소라는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단순히 그 장소에서는 죄가 범해지지 않고 분위기가 엄숙하고 깨끗해서 성소인가요? 더 중요한 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일에 그 장소가 쓰임을 받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일(안식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시간이 다른 시간과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죄를 안 짓는 날 이이어야 하기 때문입니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일을 더욱 전념하는 날이기 때문 아닙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된 우리들 스스로를 성도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왜 성도입니까? 단순히 죄를 짓지 말고 살아야 하기 때문인가요? 더 중요한 이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이유는 하나님의 거룩한 일,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에 쓰임을 받기 위해서 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섬김은 성도에게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입니다. 지난주 저는 예배의 중요성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축도와 함께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참된 영적 예배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일주일에 한 시간 드리는 예배로만 거룩을 이룰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십시오. 봉사하십시오. 목자로 섬겨 보십시오. 전도하는 일에, 선교하는 일에, 가르치는 일에 몸으로 봉사하는 일(주차장 봉사, 엘리베이터 봉사, 안내 봉사, 예배 봉사, 찬양봉사, 다양한 팀 사역 봉사)에 자신을 드려 보십시오. 쓰임 받는 기쁨을 회복하십시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여호와 카데쉬이신 하나님을 온 몸으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3.자신의 모든 지체를 거룩한 도구로 드려야 합니다. 

 

거룩을 이루는 첫째 처방은 죄에 대하여 NO를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처방은 하나님을 향하여 YES하시는 것입니다. 그 방법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헌신이 진지한 헌신이 되려면 구체적인 드림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헌신을 가르칠때마다 마음으로 헌신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몸으로 봉사하라고,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롬6:13에서는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드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mele(melos)라는 원어는 신체의 구체적인 부분들을 나타내는 단어(지체)입니다. 여러분의 머리가 하나님의 의로운 일, 그리고 이웃을 세우는 일에 쓰여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웃을 해롭게 하는 일에 여러분의 좋은 머리가 사용되고 있는지요? 여러분의 입술과 혀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 이웃을 세우는 일에 쓰여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웃을 낙심시키고 중상하고 시기하는 일에 쓰여 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손과 발이 이웃을 섬기고 복음을 전하는 일로 쓰여 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죄짓고 방황하고 인생을 헛되이 낭비하는 일에 쓰여 지고 있습니까? 그러면 이제 여러분의 머리와 생각, 입술과 혀, 손과 발 그 모든 지체를 하나님께 드리시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지체가 단순히 쓰임 받는 그 자체뿐 아니라 의의 도구(병기,무기)로 쓰임 받아야 함을 강조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 말은 우리가 섬기는 일이 의로운 일이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섬김의 태도와 동기 또한 의로운 것이어야 한다는 것도 잊지 마십시오. 

 

일찍이 리쳐드 포스터는 그의 명저 “Celebration of Discipline"(영적 훈련과 성장)에서 자기 의에 근거한 섬김과 진정한 의의 섬김을 이렇게 구별하고 있습니다. [자기 의의 섬김은 인간적 노력에만 근거하지만 진정한 섬김은 내안에 계셔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다./자기 의의 섬김은 소위 큰 일로 자기를 과시하려고 하지만, 진정한 섬김은 큰일과 작은 일을 구별하지 않는다./자기 의의 섬김은 외적 보상을 기대하지만, 진정한 섬김은 내면의 숨겨진 만족으로 충분히 기뻐할 줄 안다./자기 의의 섬김은 결과에만 집중하지만, 진정한 섬김은 그런 계산에서 자유롭다./자기 의의 섬김은 늘 편의에 따라 선택적이지만, 진정한 섬김은 사역을 차별하지 않는다./자기 의의 섬김은 기분에 따라 움직이지만, 진정한 섬김은 필요에 신실하게 응답할 따름이다./자기 의의 섬김은 한시적이지만, 진정한 섬김은 라이프 스타일이다./자기 의의 섬김은 무례하지만, 진정한 섬김은 언제나 상대를 배려한다./자기 의의 섬김은 공동체를 흔들지만, 진정한 섬김은 공동체를 세운다.] 이런 진정한 섬김으로 얻는 마지막 상급이 거룩의 열매이며 이 거룩의 완성은 우리 인생의 구주요 주님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닮아감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자리가 주어지든 자리가 주어지지 않든 상관없이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과 이웃에게 내어줄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구세군의 창설자인 윌리암 부스(William Booth)가 말년에 안질로 고통하다가 진단을 받은 후 의사는 부스의 아들에게 부스가 시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아들은 오래 주저하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습니다. “아버님 눈의 상태가 좋지 않으시데요.” “그럼 내가 시력을 잃게 된다는 말이지” “죄송해요. 그런 것 같아요” 한참을 침묵하던 부스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이런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그럼 지금까지 두 눈을 가지고 하나님과 이웃을 섬겨왔는데, 이젠 두 눈 없이 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길 방안을 찾아야 하겠구나” 이런 삶이야 말로 거룩한 인생의 표본이 아니겠습니까? 누가 그에게 이런 인생을 선물했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이름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여호와 카데쉬이십니다. 그와 함께 밝아온 새해, 진정한 섬김의 길, 거룩의 길을 걸어가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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