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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느헤미야

느헤미야 3장 1-3절 함게 하는 사역의 원리 - 이동원 목사

by 재영구리 2023.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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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느3장1-3, 20-23
설교제목 : 함께 하는 사역의 원리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망해가던 미국 자동차 회사 크라이슬러를 재건하여 경영의 귀재로 일컬어지던 리 아이아코카(Lee Iacocca)에게 어느 신문기자가 경영의 비밀을 물었을때 그는 유명한 3-P로 대답했습니다. 1)principle(원리 혹은 원칙) 2)practice(실천) 3)persistence(일관성 혹은 집중). 원칙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되 일관성있게 집중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나라의 국가 경영에도 자주 인용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제일 어려운 것이 무엇인가를 물었을때 리 아이아코카는 처음 원칙을 세우는 것이라고 하면서 리더의 가장 중요한 책임이 바로 원리 원칙을 세우는 일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건강한 리더십의 이상으로 '원리 중심의 리더십'(Principle-centered Leadership)이란 말도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래전 느헤미야라는 지도자는 이미 예루살렘성을 재건하면서 바로 이런 원리 중심의 리더십을 잘 발휘하여 위대한 프로젝트를 완성할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가 중시한 리더십의 원리들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그 대답을 느헤미야 3장에서 찾아 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목장에서나 직장 혹은 어떤 사역의 현장에서도 주의 일을 하고자 할 때 반드시 중시해야 할 원리들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것은 특히 금년 여름 단기선교로 선교지에 나아가 사역하게 될 모든 지도자들이 기억해야 할 사역의 원리들이기도 합니다. 자, 그러면 느헤미야에게서 배우는 함께 하는 사역의 원리들은 무엇입니까?

 

1.협동의 원리입니다.

 

느헤미야는 자기 홀로 이 사역을 실현할수 있다고 생각치 않은 것입니다. 그는 문자 그대로 함께 하는 협동의 사역으로 이 프로젝트를 실현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는 협동의 원리를 중시한 리더였습니다. 우리가 느헤미야 3장을 읽어보면 무려 75명이상의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왜 느헤미야는 이런 여러 사람들의 이름을 여기서 열거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느헤미야 혼자 이 사역을 감당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함께 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본문 1절을 읽어보십시오. 느헤미야가 어떤 단어를 강조하고 있는지요? "때에 대 제사장 엘리아삽이 그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여기서 강조된 말은 '함께'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어떤 단어가 두드러지게 느헤미야의 리더십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되고 있습니까? 이 느헤미야 3장에 제일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가 무엇인지요? 네, 맞습니다. "그 다음은--"이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그 다음'이라는 표현은 이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 자리를 지키며 동시에 나란히 서서 협동하여 이 성의 재건을 이루어 낼수 있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협동의 원리인 것입니다.우리 한국인들의 리더십에서 결격사항 제 1호가 바로 이런 협동의 정신이라고 지적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은 다를까요? 성경은 교회의 본질을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가르칩니다. 몸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여러 지체들이 연결되어 협동하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요즈음 말로하면 인간의 몸이야말로 가장 탁월하게 네트워킹된 공동체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왜 주님은 교회를 몸이 되게 하셨을까요? 주의 일이야말로 혼자 할수 없는, 해서도 안될 팀-스피리트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주님의 사역이 진전되지 못하는 현장을 보면 우리들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고 비 협동적입니다. 세상의 영향을 극복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쓴 이규태씨는 특히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이 협동하지 못하는 원인을 산업화의 과정에서 과잉된 경쟁구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변질된 오늘의 한국인들을 '독속의 게'에 비유합니다. 독속의 게 하나 하나는 모두 독밖으로 기어 나올 충분한 역량이 있는데 기어 나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게 하나가 기어 나오려하면 다른 게가 뒷다리를 물고 늘어집니다. 게들의 생존방식은 한마디로 "너 죽고 나 죽자"인 것입니다. 저는 오늘의 한국인들이 또 한번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우리가 자주 말하는 상생의 철학을 익혀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목장 공동체에서부터 배워야 합니다. 바울사도는 신앙생활의 원리를 "서로 서로"의 원리로 소개하지 않습니까? 교회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 서로 서로를 지원할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이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순종하고 실현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2.은사의 원리입니다.

 

본문 느헤미야 3장에는 적어도 15가지 이상의 다양한 직종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이 모두 성의 재건사역에 동참한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모두 자기들이 일하게 될 사역의 자리를 책임지고 건축에 헌신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1절을 보시면 제사장들은 양문 건축을 담당합니다. 양문(sheep gate)은 제사장들이 제물인 양들을 가지고 출입하는 문이었던 것입니다. 그 문의 용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제사장들이 그 부분을 책임지고 있었던 것입니다.3절에는 어문(fish gate)이 나옵니다. 이 어문은 아마도 지금의 예루살렘 성의 북으로 향한 다메섹 문 근처였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두로쪽에서 오는 생선들이 이 문을 통과하여 시장에 가서 팔렸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하스나아의 자손들은 아마도 이 문을 가장 자주 사용하는 사람들이거나 어업에 종사했던 사람들로 판단됩니다. 그들이 이 문의 건축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전문성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 집부분의 건축을 감당하게 하였습니다. 이곳은 23절에서도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내가 사용할 부분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기에 내가 책임지는 형식으로 공사가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 교회에서 자주 말하는 은사배치의 원리라고 할수 있지 않습니까?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4:10에서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섬김의 가장 중요한 원리중의 하나가 은사를 따라 섬기는 것입니다. 은사에 적합한 일을 어떻게 알수 있습니까? 한마디로 내가 좋아하고 잘 할수 있는 일이 내 은사에 맞는 사역인 것입니다. 두가지가 다 충족되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 우리가 어떤 일을 좋아하지만 잘할 수 없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은사에 맞는 일이 아닙니다. 예컨대 저는 음악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제가 잘 할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늘이 알고 세상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그런 제가 솔로이스트를 시켜 달라고 하든가 지휘를 하겠다고 나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을 오늘의 사회에서는 전문성이라고 말합니다. 한 공동체가 잘 돌아가려면 전문성이 존중되고 잘 할수 있는 사람들을 발굴하여 적합한 사람들에게 적합한 일이 맡겨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좀더 자원하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나라면 나에게 적합한 일을 스스로 찾아 나서야 합니다. 그리고 객관적 평가를 받아 사역의 장에 서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사역은 소위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는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목장교회에서부터 이것을 실행하여 보십시오. 심리학자인 아브라함 마슬로우(Abraham Maslow)는 인간안에 존재하는 가장 고도의 욕구를 자아실현의 욕구로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은사에 맞는 봉사를 발견한다면 인생의 살맛을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희랍어로 은사를 나타내는 말인 카리스마는 본래 카라라는 말 즉 기쁨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은사에 맞는 일을 하면 너무 기쁘고 좋은 것입니다.느헤미야는 이런 은사의 원리를 잘 사용하여 적재 적소에서 지도자들이 일하게 함으로 단시일에 예루살렘 성의 중건이라는 대업을 실현하게 된 것입니다.

 

3.격려의 원리입니다.

 

자, 본문인 느헤미야 3장에서 느헤미야가 이렇게 세심하도록 여러 지도자들의 이름과 사역의 내용을 상술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격려하기 위해서이지요. 인간은 누구나 격려받지 못한다면 어떤 일에 지속적으로 헌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격려의 반대는 낙심입니다. 영어로는 격려를 'encouragement'(in+courage)라고 합니다. 격려받으면 용기가 생깁니다. 낙심은 영어로 'discouragement'라고 합니다. 낙심하면 용기를 잃어버립니다. 의욕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히10:24)고 말합니다. 한국인들의 의식속에는 유교문화의 전통이 생각보다 뿌리가 깊습니다. 그런데 유교문화는 성경적으로 율법주의적 경향을 갖습니다. 따라서 책망과 정죄에는 빠르지만 격려의 전통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좀더 서로를 격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크리스챤 유머리스트인 마크 퉤인은 "칭찬보다 공동체를 건강하고 견고하게 세워갈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칭찬을 모르는 가정을 들여다 보십시오. 감옥이 아닙니까? 칭찬을 모르는 부부관계를 보십시오. 원앙(원한과 앙심으로 맺어진 부부)의 부부가 아닙니까? 칭찬을 모르는 목장이나 교회를 들여다보십시오. 찬바람이 불고 있지 않습니까?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20절의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여기서 느헤미야는 바룩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사용하지 않은 특별한 수식어를 써서 그를 격려하고 있음을 보십시오. "그 다음은 사배의 아들 바룩이 한 부분을 힘써 중수하였고--"라고 말하면서 그의 특별한 '힘써서' 노력한 헌신을 격려하고 있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격려가 사역의 효율성을 증대시킬수 있었던 것은 그의 격려가 분위기 띄우기 용도의 감상적이 아닌 진지한 격려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격려가 사실에 입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일시적 효과밖에는 가져오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리가 격려한다는 것이 결코 평가를 간과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실 느헤미야 3장에는 사역을 소홀히 한 사람에 대한 냉정하고도 객관적인 평가도 동시에 존재합니다. 예컨대 5절을 보면 드고아의 귀족들에 대하여는 "--그 귀족들은 주의 역사에 담부치 아니하였으며"라고 기록합니다. (프랭크 틸라파 목사라는 분은 어떤 사역의 현장에도 한두 마리의 미꾸라지가 존재한다는 교훈을 위해 이들이 기록되었다고 말합니다.)아마도 이들은 지나친 자신들의 신분을 의식한 나머지 주의 일에 팔을 걷어 부치고 헌신하는 용기를 발휘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제발 이런 귀족들이 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런 사람들에 대한 필요이상의 비판을 조심하고 있는것도 유의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런 예외적인 사람들의 비협조에도 불구하고 3장 전체의 톤은 지극히 긍정적입니다. 느헤미야는 유명 무명의 모든 공동체원들의 헌신으로 이 위대한 역사가 가능할수 있었다는 것을 담담하게 기술하며 일일히 그들을 격려하고자 한 것입니다.제임스 보이스 목사님은 느헤미야 3장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느헤미야가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지 않는 부분이라고 지적합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느헤미야가 남들을 격려하기 위해 너무 바쁜 나머지 자신을 격려하는 것을 잊었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런 태도야 말로 진정한 격려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초대교회에 이런 격려자가 또 한 사람 있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이 사람은 이름 조차도 '격려자'였습니다. 바나바이지요. 그는 본래 안디옥 교회의 목사였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자기의 능력의 한계를 느끼자 사울이라는 방금 회심한 청년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를 격려하여 그를 지도자의 반열에 세웁니다. 그리고 세계선교 여정에 나서며 그를 동반합니다. 처음에 이 두사람의 관계를 기술하며 사도행전은 "바나바와 사울이--"하다가 나중에는 "사울과 바나바가--"로 바뀝니다. 리더십의 주도권이 이양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이 된 사울이 세상을 바꾸는 놀라운 지도자가 되어가는 것을 보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사역의 무대 저편으로 조용히 퇴장한 지도자 그가 바로 바나바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바나바가 이런 느헤미야가 우리 시대에 우리 사회에 우리교회에 필요하지 않습니까? 당신이 그런 격려자가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1849년에 미국 뉴 잉글랜드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세관 감정관으로 일하던 한 남자가 너무 고지식하다는 이유로 해고되어 실직을 당했습니다. 그때 아내는 뜻밖에 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여보 잘된일 아니에요. 이제야 말로 당신이 하고 싶었던 꿈을 이루실때가 되신 것 같으네요. 글을 쓰고 싶어 하셨잖아요. 소원대로 글을 쓰시지요.”그리고 아내의 부탁으로 교회친구 몇 사람이 그날 밤 그를 찾아와 그에게 창작활동을 할 것을 격려합니다. 그리고 불과 반년이 못되어 소설 하나가 세상에 태어납니다. 이 소설이 유명한 “주홍 글씨”였던 것입니다. 이 남자는 청교도 문학사에 불멸의 발자취를 남기게 된 나타니엘 호돈(Nathaniel Hawthorne)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실직하던 밤부터 꾸준히 그를 찾은 친구가운데 한 사람은 유명한 시인 롱펠로우였습니다. 그에게 만일 아내의 격려가 없었다면 친구들의 격려가 없었다면 그리고 그에게 만일 자기의 은사를 발휘하여 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인류는 위대한 정신사의 유산을 잃을뻔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진실로 저와 여러분이 협동의 원리, 은사의 원리 그리고 격려의 원리를 다시 배워 주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존귀하게 쓰임 받으시는 주의 종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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