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누가복음 15:11-32
설교제목 :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기쁨
설교자 : 옥한흠 목사님
눅15장11-32
눅 15:11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14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을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 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이 비유는 너무나 유명한 비유입 니다. 제가 지난 21년 동안 이 강단 을 지키면서 벌써 이 본문을 가지고 3번 설교한 기억이 납니다. 오늘이 4번째입니다. 이렇게 자주 설교하였 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다시 설교 를 준비하면서 제가 느낀 것이 뭐냐 하면 '나는 이제 겨우 서론의 뚜껑 을 열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습 니다. 그만큼 이 비유는 무한한 진 리를 담고 있고 하나님의 그 광대한 사랑을 담고 있어서 그 차원을 우리 고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도 성령께서 저와 우리 모두 에게 은혜를 주시고 비록 부분적이 지만 이 말씀 속에 담겨 있는 하나 님의 진리와 은혜를 우리가 맛보며 또 함께 누리는 귀한 시간이 되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비유를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 기 위해서는 15장1절, 2절을 꼭 보 아야 합니다. 15장1절, 2절을 한번 여러분 보십시오. 모든 세리와 죄인 들이 말씀을 들으러 예수님이 계시 는 가까이 나아 왔어요. 그것을 보 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원망을 했습니다. '왜 예수라는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 가?' 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나오는 세리, 죄인, 또 흔히 여기 하나 더 끼어 넣으면 창녀가 들어가지요. 유대 나라의 사람들이 배관시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 습니다. 이 사람들은 세리요, 창녀 요, 죄인이라는 이름을 달고 다닙니 다. 사람들의 눈에 이들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존재로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 절대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 만약에 그들이 천국을 들어 간다면 그 천국은 자기들이 들어가 지 말아야 된다고 할 정도로 생각하 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 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하시자 그 은 혜로운 말씀에 끌려서 주님 주변에 몰렸어요. 그리고 말씀을 듣다가 함 께 식사도 하는 것입니다. 일반 상 식으로는 유대 나라에서는 상상을 못하는 일이 예수님 주변에 벌어지 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 인들이나 서기관들이 원망 비슷하게 예수님의 티를 물고 들었지요. 이렇 게 원망하는 그들의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유명한 이 비 유들입니다. 15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는 앵글만 바꿨지, 내용은 똑같 습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가 읽은 이 탕자의 비유만큼 유명하고 많은 사람을 감동시킨 것이 없습니다.
이 비유를 주님이 말씀하시는 이 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사람들 이 멸시하는 자들을 다르게 보신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바리새인들 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보다 훨씬 더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 이 비유를 주님이 선 택하셨어요. 하나님의 기쁨이 얼마 나 신비한지요. 24절, 32절이 두 번 이나 반복되면서 기록이 되었지 않 습니까? 24절은 하나님의 기쁨을 이 렇게 표현합니다. '이 내 아들은 죽 었다가 다시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 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 워하더라.' 그리고 32절에 가면, 아 버지가 큰아들을 보고 말합니다. '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 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 라.' 반드시 기뻐해야 된다는 것입 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정말 신비스 럽습니다. 어떻게 창녀 같은 사람을 품에 안고 그렇게 좋아할 수 있습니 까? 어떻게 세리 같은 인간답지도 못한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온다고 해서 그들을 위해 잔치하고 그들을 위해서 춤을 추며 기뻐하겠습니까? 우리는 이 하나님의 기뻐하는 심정 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있어요. 헤 아릴 수가 없어요. 오직 신비하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주님이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오늘 이 비유를 가지고 설명을 하고 계십 니다.
어떤 부자한테 두 아들이 있었다 고 합니다. 그 아들들은 이미 머리 가 다 컸어요. 결혼은 했는지 안했 는지 모르지만 아버지 눈에는 참 대 견해 보이는 성인이 되었습니다. 어 느 날 둘째 아들이 찾아와서 이상한 소리를 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실 때 저에게 주려고 유 산을 이미 마음에 작정하고 계시지 요? 저에게 줄 재산 있잖아요? 저 에게 지금 주세요. 아버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릴 거 뭐 있어요. 지금 주세요.' 하도 때를 쓰니까 마음은 불편했지만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 가 거절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 서 재산을 떼 주었어요. 아마 유대 나라 법에 의하면 장자는 3을 준다 면 차자나 그 밑의 동생은 1 정도를 준다고 합니다. 그렇게 보아도 최소 한 아버지 재산의 1/3을 떼 준거예 요. 며칠 동안 이 둘째 아들 분주하 게 들락거리더니 그 모든 재산 처분 해서 현금으로 만들어 가지고는 먼 나라로 갔습니다. 요즘 말로 말하면 이민 간 거요. 쉽게 번 돈은 쉽게 쓰기 마련입니다. 자기가 땀 흘리고 자기가 고생하면서 벌지 않았기 때 문에 그만큼 쉽게 쓰지요. 이 둘째 아들 멀리 이민 가서 큰 집 사고 분 에 넘치는 자동차 굴리고, 그리고 이 여자, 저 여자 번갈아 가면서 즐 기고 한참 신나게 살았습니다. 이 신나게 산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해 서 '허랑방탕'했다고 그러지요.
아무리 많은 돈을 쌓은 사람이라 도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쓰기 시 작하면 얼마 안 가서 바닥이 나게 돼 있습니다. 돈이 얼마 남지를 않 았어요. 거기다가 설상가상으로 기 근이 들었어요. 요즘 말로 말하면 IMF가 몰아 닥쳐서 경제 사정이 아 주 최악으로 치달았습니다. 그러니 별 도리가 있나요? 자기 호주머니 비고 경제 사정은 안 좋고 그렇게 자기 주변에서 친구처럼 따라 다니 던 사람들도 돈 떨어지니까 다 얼굴 돌리고 가 버리잖아요. 그것 몰랐지 요. 인간은 야박한 거요. 있을 때나 친구지, 없으면 다 얼굴 돌려요. 여 러분 이 가운데서 IMF 맞아 가지고 부도 나고 어려움을 당할 때 인생은 정말로 비정하다 하는 것 많이 느끼 셨을 거예요. 이 둘째 아들도 마찬 가지요. 그렇게 자기와 한 그릇에 밥을 먹을 정도로 우정을 나누던 사 람들도 다 떠나구요. 나중에는 배가 고프잖아요? 중동에는 돼지 치는 사 람이 많아요. 그래서 돼지 치는 가 장 천한 직업을 선택해서 갔습니다. 아무리 일을 해도 허기진 배를 채울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기근이 왔으 니까. 그러니 돼지가 먹는 것을 같 이 먹어도 이것은 끝이 없어요.
어느 날 밤 쏟아질 것 같은 별이 반짝이는 하늘을 쳐다보고 누워 있 을 때 문득 아버지 생각이 났어요. 아버지와 함께 지내던 행복한 시절 이 주마등처럼 눈 앞을 스쳐 지나갑 니다. 내가 왜 이런 신세가 되었을 까? 그러면서 불현듯 아버지에게 돌 아가고 싶다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 다. 날이 새자마자 그는 모든 것을 집어던지고 길을 떠났습니다. 냄새 나는 옷이요, 참 보잘 것 없는 모습 이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나를 받아 주시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기대 를 가지고 고향을 향했습니다. 길을 가면서 몇 번이고 외우고 또 외웁니 다. 아버지에게 이런 말씀을 하면 될까? 저런 말씀을 될까? 어떻게 하면 나를 받아 주실까? 그래서 생 각해 낸 말이 이것입니다. '아버지 여, 하늘을 향해서 죄를 짓고 아버 지를 향해서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는 아들이라고 하시지 말고 아버지 집에 있는 품꾼의 하나라고 생각하 시고 받아 주세요.' 아마 내가 이렇 게 하면 아버지가 들어 주실꺼다. 그래서 이 말도 더듬거리면서 하다 가 중단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 안에서 가면서 외우고 또 외우고, 외우고 또 외우면서 길을 걸어갔습 니다.
어느덧 눈에 익은 마을에 들어왔 습니다. 길을 따라 집을 향해 올라 가는데 앞에서 누군가가 오는 소리 가 들려서 고개를 들어보니 자기의 아버지가 두 팔을 벌리고 달려오는 것입니다. '얘야, 네가 맞지.' 하면서 달려오는 거요. 그러더니 아들을 덥 석 끌어안고 '너 잘 왔다. 얼마나 고생했냐.' 어찌할 줄을 모릅니다. 등어리를 두들기고 볼을 비비고. 이 때 아들이 마음 속에 외우고 외웠던 말을 합니다. '아버지, 하늘과 아버 지에게 죄를 범한 불효자입니다. 이 제 아들이라고 하지 마시고' 하는데 아버지가 입을 막았어요. '얘야, 그 런 말 안 해도 된다. 그만해. 가자. 나 고 가자.' 집에 도착하자마자 종 들 불러서 '목욕시키고 새 옷 갈아 입혀라. 신발 신겨라. 가락지 끼워 라. 그리고 송아지 잡아 오라. 그리 고 잔치하자. 이웃 사람들도 다 청 해라.' 야단 났습니다. 여러분, 고기 중에 제일 맛있는 것이 무슨 고기지 요? 많이 드셔서 아시지 않아요. 우 리 같은 처지에 송아지 고기 찾고 1 년 된 암소 고기 찾고 그럴 처지는 못됩니다만 흔히들 그렇게 이야기합 디다. 제일 맛있는 고기는 1년 이내 의 송아지 고기라고요. 그래서 아버 지는 최고의 고기를 준비하고 잔치 를 벌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너무 너무 기뻐서 '내 아들 죽은 줄 알았 더니 살았구나. 잊어버린 줄 알았더 니 이제 얻었구나. 정말 좋구나.' 하 고는 춤을 추며 기뻐합니다.
큰아들이 들에서 일하다가 돌아 옵니다. 아버지가 큰 실수했지요. 동 네 사람 청하면서 왜 큰아들한테는 연락도 안 합니까? 정신이 없었던 것이요. 너무 좋아 가지고. 예, 정신 이 없었어요. 그런데 큰아들 돌아와 가지고 보니 가관이지요. 동생이 돌 아왔다고 해서 온 집안이 춤을 추고 법석을 떠니 가관이지요. 화가 나서 안 들어갔습니다. 아버지가 그 소리 를 듣고 달려 나왔습니다. '얘야, 너 왜 안 들어 오냐? 너 동생 죽은 줄 알았더니 살아왔잖니. 이렇게 건강 한데 우리가 기뻐해야지.' 큰아들의 분은 풀리지 않았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 보면 큰아들이 분이 풀려서 집 으로 들어갔다는 말이 없어요. 아마 내 생각에는 옆집에 가서 대포잔을 하나 놓고 마시면서 씩씩하고 있었 지 않을까? 아마 그렇게 생각이 됩 니다.
참 아름다운 이야기예요. 며칠 전 집에서 아내와 더불어 이 본문을 읽 고 한번 제가 물어 봤어요. '여보, 당신 같으면 이런 아들이 돌아오면 받아 주겠소? 그리고 잔치하고 좋아 하겠소?' 예를 들어봅시다. 어느 날 저녁에 늦게 벨이 울렸는데, '누구 세요?' 하고 나갔더니 '엄마, 나예 요.' '뭐라고?' 하면서 놀래 가지고 문을 열어 보니 3년 전에 꽤 많은 돈을 뜯어 가지고 가출했던 아들이 서 있는 것입니다. 실제는 그런 아 들이 없어요. 딱 서 있는데, 노랗게 물을 들인 머리는 꽁지를 하고 있고 눈동자는 마약 기운에서 아직 덜 깨 었는지 흐릿하고 옷에는 고약한 냄 새가 나는 아들이 서 있어. 그리고 하는 말이 '엄마 미안해요.' 이렇게 한다고 합시다. '당신, 그 아들 왔다 고 부엌에 들어가서 냉장고에 있는 것 다 끌어 내가지고 음식을 만들고 좋아서 어찌할 줄 모를 만큼 할 수 있겠소?' 그랬더니 가만있어요. 있 더니 집안에 들여놓는 것은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잔치하고 좋아하고 그러지는 못할 것 같다고 대답을 했 어요. 그래서 나도 그렇다고 그랬어 요. 도대체 이해가 안되는 거요. 그 렇잖아요? 그러니 둘째 아들 돌아왔 다고 기뻐하는 아들 이해하지 못하 지요. 그러면 그 아버지가 누굽니 까? 하나님을 지금 예수님이 가리키 는 것이거든요. 하나님이 세리나 창 녀나 흔히 말하는 죄인들이 돌아왔 다고 해 가지고 하늘 천군 천사들과 함께 잔치하면서 춤을 춘다고 상상 해 보세요. 이해가 안되는 거요.
차라리 밖에서 화를 내고 집에 안 들어오고 버티고 있는 큰아들이 오히려 우리에게는 자연스러워 보입 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왜 자연스 러워 보입니까? 아무리 동생이지만 얼마나 못된 놈이요. 여러분, 아직도 눈 시퍼렇게 살아 있는 아버지 앞에 가서 유산 내놓으라고 하는 놈이 인 간이요? 저런 것도 인간이라고 낳고 미역국 먹었나 하고 생각할 정도로. 그렇잖아요? 같은 형제지만 너무 형 편 없는 짓을 하면 동생도 미운 거 요. 형제라고 다 사랑합니까? 사람 구실을 해야 서로 사랑하는 것이지.
레바논에서 사역하는 어느 선교 사가 지금도 그 시골에 들어가면 예 수님 당시와 비슷한 문화 환경을 가 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대요. 그 사 람들은 이 비유에 대해서 한번도 들 어 본 일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래서 선교사가 일부러 시험을 했어 요. 이 비유를 그들에게 설명을 하 고 나서 어떤 반응을 보이나 하고 봤더니,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이 도 무지 자기들로서는 이해가 안된다고 그러더래요. 아직도 살아 계시는 아 버지한테 유산 내놓으라는 것은
"아 버지 빨리 죽으시오."
하는 말하고 같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입장에 서는. 그리고 이와 같은 모욕적인 아들의 행동을 보고도 자기 재산을 떼 주었다는 것은 자기들로서는 상 상을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 다.
자, 그러니 형님의 입장에서 볼 때 못할 짓을 하고 나간 녀석이 아 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 아들이 돌아 왔다고 춤추는 아버지 이해하 겠어요? 그리고 동생을 보고 여러분 기분 좋게 '너 잘 왔다.' 그렇게 할 수 있겠어요? 안되는 거요. 그러니 까 우리 눈에는 형의 반응이 훨씬 더 자연스러워요. 그리고 이 동생이 나가서 제대로 잘 돼서 돌아왔다면 모르지만 형 말대로 창기들과 함께 재산 말아먹고 갈 데 올 데 없으니 까 기어 들어온 거 아니요. 어떤 사 람이 그러대요. 이 둘째 아들이 만 약에 나가서 돈이나 좀 벌고 성공을 했다면 아버지에게 돌아왔을까? 천 만에 절대 아버지에게 돌아올 애가 아니죠. 갈 데 올 데 없으니까 돌아 왔으니 그 뻔뻔스러움이 얼마나 대 단합니까? 그러니 형이 볼 때 미워 도 보통 미운 거 아닙니다. 우리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할 수 있잖아요.
게다가 더 형의 입장에서는 이해 할 수 없는 게 있어요. 아버지의 태 도입니다. 세상에 저럴 수가 있나 그 말이요. 울화통이 터져도 몇 번 이라도 터질 수 있을 만큼 형으로서 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 렇기 때문에 화를 낸 것입니다. 중 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이 형이 바 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 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모습이예 요.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 자신보다 더 악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 대 해서 숨겨진 분노를 가슴에 품고 있 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처럼 차 가운 도덕적인 눈을 가지고 그들을 평가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전도를 해도 골라잡아 전도하지 창녀다 세 리다 흔히 사회적으로 백안시 되는 사람들을 찾아가려고 하지를 않아 요. 그리고 그런 자들이 어쩌다가 예수 믿고 돌아와서 구원받았다 하 면 마음이 편치를 않아요. 내 마음 이 편치를 않는 그들을 놓고 기뻐하 시는 하나님은 더 이해가 안되는 거 예요. 바로 이게 우리 모습입니다.
한 5년 전에 미국의 텔레비전에 서 방송되어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 었던 내용인데요. 제프리 다머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이 사람은 열 일곱 명의 여자를 욕보이고 죽인 다음에 시체를 토막 내서 냉장고에 넣어 두고 인육을 먹었던 아주 흉악 한 인간이예요. 잡혀 가지고 사형 언도를 받고 지금 사형수로 복역을 하고 있었는데, 94년도 같이 복역 중인 동료들과 싸움이 붙어 가지고 그 동료 죄수가 휘두른 빗자루에 맞 아 가지고 죽었어요. 하도 흉악한 사람이 그렇게 죽으니까 텔레비전에 뉴스 거리가 되었습니다. 그가 죽었 다는 말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말을 했는데, 반응이 다 달랐 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다수는 뭐라 고 느끼느냐? '너무 빨리 죽었다. 너무 편안하게 죽었다. 그 놈 고생 좀 더 해야 되는데 왜 그렇게 빨리 죽었냐?' 이런 생각이고, 그런데 하 나 더 기가 차는 게 뭐냐 하면 이 다머라는 흉악범이 감옥에 있으면서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는 감옥 욕조 안에서 침례 세례를 받았고 날마다 성경을 읽으며 신앙 서적을 읽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를 개종시킨 목사는 텔레비전 인터 뷰에서 다머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증거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편하지를 않 았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건 이거요. 예수 믿는 사람 중에서도 많은 사람 들이 '저거 순 엉터리다. 감옥에 가 놓으니까 저렇게 위선한다. 저런 흉 악한 놈이 무슨 구원을 받냐?' 이렇 게 반응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이 받을 수도 있을지 모르지.' 하는 약간 동 정적인 그런 태도를 취하기도 했는 데, 뉴스를 진행하던 아나운서가 마 지막으로 한 코멘트가 중요한 것입 니다. '오늘 저녁 편안한 마음으로 텔레비전 앞을 뜬 사람은 아무도 없 을 것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그 사람이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게 오히려 불쾌한 거요. 마음이 편 치를 않는 거요. 기분이 나쁜 거요. 어떤 사람은 화가 나는 거요. 이것 이 바로 형님이라고 하는 사람이 보 인 반응이예요. 우리의 반응이예요. 우리의 모습이예요.
우리 모두가 대부분이 이런 마음 가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한한 자비를 가지고 세상을 보시는 하나 님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탕자와 같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 아오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시는 하 나님을 이해 할 수가 없는 것입니 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우리 자신의 모습은 오히려 바리새인들 편으로 더 기울어지고 있고 큰아들과 유사 한 쪽이 더 많다고 봐야 하겠지요. 오늘날 사랑의교회를 위시해서 한국 교회가 던지는 이미지가 뭐냐? 창녀 를 찾으시는 예수님의 이미지냐? 아 닙니다. 저는 자신 있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러면 돌아온 탕자 를 끌어안고 기뻐하고 춤을 추는 아 버지의 이미지냐? 절대 그렇지 않다 고 봅니다. 사랑의교회도 그런 이미 지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바리새 인의 이미지요, 큰아들의 이미지지, 창녀를 구원하기 위해서 수 만리 길 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이미지가 아니예요.
제가 필립 얀시라고 하는 아주 탁월한 기독교 저술가의 글을 읽으 면서 저 자신이 이 문제를 깊이 생 각하면서 가슴앓이를 한 일이 있어 요. 그 필립 얀시에게 시카고에 있 는 어느 창녀가 찾아 왔습니다. 집 도 없습니다. 몸은 병이 들어 제대 로 돈을 벌 수가 없어요. 찢어지게 가난해서 두 살 먹은 딸아이 하나 먹여 살릴 수가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녀가 울먹이며 하는 이야기가 참 기가 찰 말을 하고 있어요. 2살 먹 은 자기 딸을 변태 성욕자들인 남자 들에게 돈을 받고 판다는 것입니다. 딸의 몸을 한 시간만 팔면 자기가 하룻밤 버는 것 보다 수입이 좋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 돈이 자기가 마약을 먹는데 그래도 좀 도움이 된 다는 거요. 세상에 이렇게 비참한 이야기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필 립 얀시가 그녀에게 이런 말을 했다 고 합니다. '교회 가서 도움을 좀 받아 볼 생각이 없습니까?' 교회 가 서 상담 좀 해보라 그 이야기지요. 그랬더니 그 여자의 표정이 갑자기 달라지더니 이렇게 내 뱉었습니다. '교회요? 거긴 뭐 하러 가요? 그렇 지 않아도 비참해 죽겠는데 거기 가 면 그 사람들 때문에 나는 더 비참 해져요. 거기 왜 가요?' 이 말 한 마디가 저의 가슴에 비수처럼 찔리 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요. '그 렇지 않아도 비참한데 거기 가면 그 사람들 때문에 더 비참해져요. 교회 를 왜 가요?' 왜 이런 이야기가 가 능합니까? 오늘날 교회가 사회에 주 는 이미지가 바로 그렇다는 것입니 다. 자기 보다 선한 사람들은 다 받 아들이지만 자기 보다 좀 악하다고 하는 사람은 받아들이지를 않는 것 이 오늘날 교회라 그 말입니다.
사랑의교회 예외가 아니예요. 사 랑의교회는 주변에 좋은 주거지도 있지만 나쁜 환경도 있지 않습니까? 우물가 선교회를 통해서 지난 10여 동안 유흥가에서 종사하던 사람들이 여러 명 예수 믿고 이 교회로 들어 왔고 심지어 까페니 술집이니 하면 서 아주 좋지 못한 영업을 했던 사 람들도 까페 문 닫고 회개하고 교회 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 은 다락방에 들어가서 함께 성경 공 부를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부인은 제자훈련반에도 들어갔지만 한 사람 도 그곳에 정착을 한 사람이 없어 요. 대부분이 왕따를 당해 다 나갔 어요. 여러분 이유를 알겠어요? 받 아 주지를 않는 거요. 겉으로는 웃 지만 받아 주지를 않아. 그 사람 없 는 곳에서는 수근수근, 손가락질 견 딜 수가 없는 거요. 그러므로 한 두 명씩 눈물을 흘리고 다 떠났어요. 나에게 너무나 비참한 편지를 써 보 내고는 떠난 사람도 있어요. 우리의 모습은 탕자가 돌아왔다고 춤을 추 는 아버지의 이미지가 아니예요. 사 랑의교회 천만예요. 우리는 바리새 인의 이미지를 갖고 있어요. 우리는 큰형의 이미지를 갖고 있어요. 그런 사람이 오면 오히려 속이 분이 나는 감정이 있어요. 그 사람들 은혜 받 고 좋아서 두 손 들고 찬송하면 오 히려 비웃는 그런 감정이 있어요. 저나 여러분이나 비슷해요.
우리는 하나님을 몰라도 한참 모 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기 독교의 복음을 변질시키고 있는 것 이 아닐까? 기독교가 뭡니까? 기독 교를 가장 잘 설명하는 내용 중에 하나가 마태복음1장에 나오는 예수 님의 족보입니다. 여러분 마태복음1 장 보면 '낳고 낳고' 라고 하는 유 명한 족보가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참 희한하게도 여자 네명이 끼어 있 는데, 예수님의 조상 가운데 여자 네 명이 있어요. 그런데 그 여자가 대단한 어떤 성녀라고 할 만한 추앙 될 만한 인물이 아니고, 그 여자의 이야기를 들으면 복통을 칠 노릇입 니다.
다말이라고 하는 여자 있지요. 과 부입니다. 애를 얻고 싶은데 어떻게 할 도리가 없으니까 창녀의 옷을 입 고 나가 가지고 시아버지를 유혹해 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예수님이 그 아들 후손이래요. 그래서 태어난 사 람이 예수님의 조상이래요. 여러분 믿어집니까? 믿어지세요? 라합이라 고 하는 여자는 여리고성에서 이름 난 기생이었습니다. 그 기생이 나중 에 결혼했어요. 거기서 태어난 남자 가 예수님의 조상입니다. 예수님은 기생의 혈통을 타고 내려오는 가정 에서 태어났어요. 믿어지세요, 여러 분? 밧세바라고 하는 여자는 한참 권력을 가지고 휘두르는 다윗 왕의 성적 욕구를 채워 주는 노리개감으 로 전락한 여자입니다. 그런 두 사 람 사이에서 나온, 어떤 면에서는 불의의 자녀에게서 예수님의 조상이 태어났대요.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조상을 가진 혈통에서 이 세상에 오 셨어요. 여러분 믿어지세요?
족보가 부끄러우면 오히려 공개 를 하지 말 것이지 그리고 족보를 내놓고 오히려 스캔들 때문에 남에 게 비웃음을 살 정도가 되면 차라리 적당히 미화를 하던지 삭제를 하던 지 그래야지. 예수님을 핍박했던 헤 롯왕 같은 사람은 자기 족보가 너무 나 형편없으니까 나중에는 그 족보 를 다 불태워 버렸잖아요. 원래 천 민 출신이거든요. 차리라 그래서 공 개를 하지 말든지. 무엇 때문에 거 룩하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시는 그 족보를 이야기하면서 입에 담기 도 어려운 그런 여자들의 이야기를 다 담아 놓느냐 그 말이요. 이게 기 독교입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어 떤 사람이라도 더 악하다는 이유 때 문에 구원에서 제외될 수가 없다는 메시지를 거기에 담고 있어요. 예수 님의 혈통 보세요. 그 사람들보다 더 악한 자가 어디 있습니까? 없어 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그 혈통을 선택하신 것이 무엇이냐? 이 세상에는 악해서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은 없다 하는 것입니다. 이 기 독교의 본질입니다. 덜 악하고 더 악하고를 차별하지 않고 구원하시는 하나님, 복음의 본질입니다. 더 악한 자일수록 그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덜 악한 자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 보다 거 기뻐하시는 하나님, 이 하 나님이 기독교 복음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이 본질을 변질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거기는 왜 가요? 그러지 않아도 비 참한데. 내가 거기 가면 나는 그들 때문에 나는 더 비참해져요.' 그런 말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본질이 잘못 되 있어요.
히틀러요? 여러분 히틀러 이름만 입에 담는 것도 기분 나쁘잖아요. 가서 입을 다시 씻어야지. 세상에 그런 악질이 어디 있습니까? 악마의 사신이지요. 6백만 명 가까운 유대 인들이 가스실에서 죽었잖아요. 그 것은 새 발의 피예요. 그가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서 그 아까운 젊은이 들이 얼마나 많이 피를 흘렸습니까?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눈에서 얼마 나 피 눈물을 뽑았습니까? 그 악질 이라 말이요. 그러므로 그런 악질,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끼치지요. 우 리는 히틀러 같은 사람을 놓고 구원 이고 그런 사치스러운 이야기를 하 고 싶지 않아요. 저도 한번도 생각 해 본 일이 없어요. 그런데 보세요. 히틀러에게 핍박을 당해서 망명을 다니던 유명한 신학자가 하나 있었 습니다. 칼 바르트, 기독교에 대해서 좀 아시는 분들은 들은 이름일 거예 요. 그 칼 바르트가 망명을 하는 중 에 어느 신학생이 찾아와서 물었어 요. '목사님, 만약에 목사님이 지금 이라도 히틀러를 만난다면 무슨 말 씀을 하고 싶습니까?' 칼 바르트가 엄숙하게, 진지하게 이렇게 말했습 니다. '히틀러 총통, 예수님은 당신 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 말 하고 싶대요. 무슨 뜻이예요? 히틀러라도 그 사람의 죄가 악해서 구원받지 못하는 일은 없다는 것입 니다. 이게 기독교의 본질이예요.
저는 사랑의교회에 대해서 지나 친 과대 포장된 말을 자주 듣습니 다. 그리고 우리 목사님들끼리 만나 면 저를 부러워하면서 이런 이야기 를 자주 합니다. '참, 옥목사님은 목 회 재미있고 행복하겠어요. 강남 서 초동 지역은 다 그래도 생활 수준이 좋다지요. 대부분이 대학 출신들이 라지요. 그리고 교인들이 그렇게 교 양이 있으니까 목회가 재미있지 않 겠어요? 거기에 비하면 제가 목회하 는 자리는 너무 형편없어요.' 이러 면서 말을 하는 소리 들으면 제 마 음이 얼마나 아픈 지 모릅니다. 이 거 교회 잘못 본 거요. 사랑의교회 가 사람 골라잡아서 들이나요? 대학 출신들만 받아들여요? 서초동 일대 에 전부다 내 놓으라 하는 사람들만 삽니까? 밑바닥에서 꼭대기까지 다 살고 있잖아요. 그런데 마땅히 하나 님이 찾는 창녀나 하나님이 찾는 탕 자나 하나님이 찾는 세리는 보이지 않고 전부다 수준 이하의 사람, 소 위 말해서 덜 악한 사람들만 모이니 까 모든 사람이 우리 교회를 그렇게 보고 있어요. 이것은 뭔가 우리 교 회가 잘못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 는 것입니다. 제 마음이 괴로워요.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숨겨 진 분노를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나 보다 더 악한 사람에 대해서 숨 겨진 분노가 있어요. 차가운 도덕의 눈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무자비함을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은혜로 치 유된 눈을 가져야 됩니다. 은혜로 치유 받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 주변을 돌아보세 요. 예수님이 찾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거기에는 바리새 교인들 과 같은 도덕적으로 상당히 수준 높 은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창녀와 같 은 자도 있고 세리와 같은 자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차별하면 서 전도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가 정에 너무 밉고, '저런 것이 구원받 아?'하는 생각 때문에 전도 한번 하 지 아니하고 제쳐놓은 사람 있습니 까? 하나님이 슬퍼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꼭 기억하세요. 우리 속에 있 는 이 분노를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 님의 사랑을 우리의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전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아버 지가 사랑하는 사람을 내가 사랑하 는 것입니다. 전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아버지가 찾고 있는 자들을 찾아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 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한없이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러므로 전도 할 때 내 기분에 따라 전도하면 안돼 요.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무엇을 기뻐하시는가를 염두에 두고 전도해 야 됩니다.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을 전도 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설 혹 마음이 내키지 않고 상대하고 싶 지도 않지만 '하나님이 이 사람을 얼마나 좋아 하실까? 예수 믿고 돌 아오기만 하면 이 사람 때문에 하나 님이 아마 춤을 추실 꺼야.' 하는 생각이 들면 우리는 그를 찾아야 되 고 그에게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 앞 으로 인도해야 됩니다. 이게 전도입 니다.
여러분 추석 전에 제가 텔레비전 에서 한번 보니까 굴비 조그마한 한 상자에 50만원이라고 그러대요. 야, 여러분 대단하지요. 세상에 누가 굴 비 몇 마리를 50만원에 사겠습니까? 그런데도 불티가 난다고 그러더라구 요. 우리 나라 확실히 잘 살아요, 지 금. 그런데 그래도 좀 돈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그 굴비 몇 마리를 50 만원 주고 사 먹겠어요? 그러나 보 세요. 1년에 한번 찾아가는 연로하 신 아버지를 생각하는 아들이 있다 고 해 봅시다. 아버지가 제일 좋아 하시는 음식이 굴비요. 상품을 살려 고 하니까 50만원이야.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결국은 우리 아버지 1년에 한번 사 들이는 것인데 좀 비싸도 아버지가 좋아하시니까 사야지 하고 눈 딱 감 고 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구워 드렸습니다. '야, 이거 어디서 생겼 냐? 내가 지금까지 먹은 것 중에 이 렇게 맛있는 것 처음 봤다.' 이러면 서 혼자 다 잡수네. 자, 여러분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아들이 얼 마나 흐뭇하겠어요. 50만원 쓴 것이 절대 아깝지 않지요. 전도는 그런 심정으로 하는 거예요.
우리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들 있어요. 물론 우리도 좋아하시죠. 그 러나 우리 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게 누구냐? 창녀요, 세리 요, 세상 사람들이 개처럼 취급하시 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회개하고 눈물 흘리면서 하나님을 향해 돌아 오면 우리 아버지 정신을 못 차립니 다. 그거 알면 우리 하나님 기쁘게 하기 위한 전도가 어떤 것인가를 우 리가 깨닫게 됩니다.
대각성 전도집회가 이제 두 주간 앞으로 다가옵니다. 우리 자신을 점 검합시다. 나는 나보다 더 악한 자 들에 대해 은근히 분노하고 있지 않 는가? 나는 창녀나 흉악범들이 구원 받는 것을 불편해 하거나 달갑지 않 게 여기는 사람이 아닌가? 나는 전 도하기 싫어 젖혀놓고 있는 사람들 이 없는가? 나는 하나님처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보기보다 바리새인들처럼 차가운 도덕적 눈을 가지고 보지 않는가? 나는 둘째 아 들과 같은 죄인과 세리와 창녀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보고 춤을 추듯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불편한 심기로 쳐다보고 있지 않는가? 만약 에 우리에게 이와 같은 문제가 있으 면 오늘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여 시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우리의 심령을 치유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눈을 갖는 새 사람으로 바 꾸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자, 끝으로 한 마디 합니다. 하나 님 보시기에는 나보다 더 악한 사람 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 비해서 덜 악하다고 생각 할 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눈에, 거 룩하신 그 분의 눈에는 나보다 더 악한 사람 없어요. 그러므로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을 차별하지 말고 가리지 말고 복음을 전합시다. 그리고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 합시다. 우리 하나님 좋아 춤추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좋아하 시는 일이라면 왜 못하겠습니까? 우 리 모두 예수님처럼 식사하는 것 다 잊어버리고 창녀 하나를 놓고 그가 구원받은 것을 보고 너무 즐거워하 시던, 좋아하시던 예수님처럼 우리 하나님의 품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다가가면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위대한 축복들이 이 자리에서 일어 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와 같은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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