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고후 8:1-9
설교제목 : 우리가 본받을 헌금정신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기를 꺼려하는 원인을 조사해 보면 1순위가 언제나 "교회에 나가면 돈 이야기를 많이 하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나옵니다. 그런데 오래전 종교 개혁자인 칼빈은 당시의 교회를 가르쳐 "오늘의 교회의 문제는 돈에 대해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돈에 대해 바른 이야기를 안하는 것이 문제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비유를 연구해 보면 그 비유의 절반이상이 돈과 관련된 것들임을 알수 있습니다. 그만큼 돈은 절실한 인간 현실의 한 부분인 것입니다. 유머작가인 마크 퉤인이 한말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인생에는 돈보다 중요한 것들이 훨씬 더 많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들을 얻기 위해서는 돈이 든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인간 사고의 절반에 가까운것이 돈에 대한 것이라고 지적한 심리학자도 있었습니다.--"돈을 어떻게 벌것인가? 어떻게 쓸것인가? 어떻게 저축할 것인가? 어떻게 지출할 것인가? 등등" 따라서 돈을 쓰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 사람을 알수가 있습니다.
영국의 한 작가가 웰링톤 제독에 대한 전기물 집필을 의뢰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작가는 상당한 시간을 웰링톤 제독의 평소 돈 씀씀이를 조사하고 연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를 의뢰한 재단에서 "아니, 무엇 때문에 그런 본질적이 아닌일에 시간을 그렇게 많이 쓰시나요?"물었더니 유명한 속담을 인용하여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돈이 곧 사람을 만드는 것이지요."(Money makes man) 돈은 물질이지만 돈에 대한 사용은 그의 정신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헌금은 그리스도인의 돈에 대한 정신을 시험하는 가장 중요한 신앙의 표현이라고 할만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마게도냐 교회 교인들의 헌금정신을 바울사도가 칭찬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기근을 만난 예루살렘 교회의 필요를 보며 예루살렘 교회 보다 훨씬 더 나중에 생긴 마게도냐 교회의 교인들이 경제적으로 전혀 여유롭지 못한 아니 차라리 궁핍한 형편 속에서도 어떻게 헌금에 임했는가를 증언하는 기사입니다. 여기서 바울사도는 그가 마게도냐지역 그러니까 빌립보,데살로니가, 베뢰아등지를 순회하며 거기 교인들에게서 본 감동적인 헌금정신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들도 배워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또한 이들에게서 진정한 헌금정신을 배울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본받을 헌금정신-무엇일까요?
1.첫째는, 감은의 정신입니다.
감은이란 은혜에 감사한다는 말입니다. 본문에는 은혜란 단어가 5회나 나타납니다.(1,4,6,7,9절)은혜는 기독교를 기독교되게 하는 본질적인 메시지라고 할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은혜란 '받은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사랑'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주의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엡2:8) 하나님의 은혜의 깨달음은 신앙생활의 시작입니다.(골1:6) 신앙생활의 한 걸음 한 걸음은 은혜의 지속적인 여정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인생의 석양에서 걸어온 삶의 길을 돌아보며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헌금행위는 바로 이런 은혜에 대한 응답의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헌금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헌금은 구약의 율법에서부터 가르쳐진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율법이전부터 헌금의 모범이 등장합니다.
여러분, 성경에 십일조의 교훈이 처음 나오는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율법은 출애굽기 그리고 레위기에서 비로소 가르쳐지지만 율법이 시행되기 훨씬 오래전 창14장에서 벌써 십일조의 실천이 기록됩니다. 계기는 아브람이 조카 롯을 구출하기 위한 전쟁을 일으킵니다. 소수의 사병을 데리고 일종의 기습공격으로 전쟁에 승리를 거둡니다. 그가 승전 장군이 되어 개선하는 길에 멜기세덱이란 하나님의 제사장을 만납니다. 멜기세덱은 아브람을 축복하며 이런 메시지를 전합니다. 창14:20에"너의 대적을 네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고. 그때에 아브람은 자기가 얻은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드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기의 전쟁의 승리의 원인이 하나님의 도우심 그의 은혜이었음을 깨달아 알게된 순간 그는 비로소 자기의 존재의 원인, 축복의 원인, 번영의 원인이신 하나님께 드릴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감은의 정신인 것입니다.
2.둘째는, 희생의 정신입니다.
2절은 마게도냐 성도들의 희생적인 헌금상황을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의 정황은 환난과 많은 시련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극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속에는 넘치는 기쁨을 간직하고 있었고, 이런 기쁨으로 그들은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드릴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3절의 말씀처럼 힘대로 드렸고, 힘에 지나도록 드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희생이 아니겠습니까! 본래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제물이라고 불렀는데 제물을 영어로는 sacrifice 곧 희생의 제물이라고 합니다. 진정한 헌금의 성격은 어느정도 희생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은 은혜가 너무나 엄청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그것은 갚을수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때로 우리의 성의 없는 헌금행위는 우리가 받은 은혜가 마치 싸구려 은혜인 것처럼 은혜를 격하시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독일 고백교회의 순교자요 신학자였던 본 훼퍼 목사는 당시의 독일교회가 무력해진 원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싸구려 은혜'(cheap grace)로 전락시킨 것 그리고 희생정신을 상실한데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떤분들은 신앙생활이란 희생만 하다가 마는 것이냐고 물을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희생은 일종의 씨뿌림과 같은 것입니다. 씨뿌림은 땀흘림이요 희생이지만, 거기에는 열매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비밀을 안다면 희생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믿습니다. 바울은 고후9장에서는 이것을 '심음과 거둠의 법칙'이라고 말합니다. 고후9:6에 "이것이 곧 적게 심는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는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8절의 약속의 말씀을 보십시오."하나님은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희생은 결코 자학적인 희생이 아닌 기쁨의 희생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희생도 그런 관점에서 관찰할 수 있습니다. 본문9절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의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신 희생, 그러나 이 희생의 결과로 주님의 구원과 은혜를 경험할 수많은 인류의 영혼들의 열매를 바라봄--그것이 주님으로 하여금 기쁘게 희생하게 하신 비밀이었던 것입니다.
흥미있는 인도설화의 한토막 이야기를 읽은적이 있습니다. 인도에 가난한 거지 한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늘 왕궁 가까운 다리에서 구걸을 했다고 합니다. 그의 소원은 그곳을 지나가는 임금이 한번이라도 자기에게 금 한 조각만 적선을 하면 평생 거지 생횔을 안해도 되지 않겠는가?라는 기대였다고 합니다. 당시의 왕은 마하라자라는 유명한 왕이었는데 그는 위대한 정복자였을 뿐 아니라 황금을 만드는 마술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욱 그 임금을 만나보기를 고대한 것입니다. 드디어 어느날 마하라자왕이 다리를 지나다 마차를 정지하고 서더니 그를 내려다 보더랍니다. 그러더니 "넌 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더랍니다. "예, 저에게 황금 한조각만 있으면 전 다시는 거지를 안하겠습니다." 그랬더니 왕은 다시 그에게 "그러면 넌 나에게 무엇을 줄수 있는냐?"물었습니다.-물론 그는 "저는 드릴것이 없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다시 "넌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묻더랍니다. "예, 저에겐 이 밥그릇안에 밥알 몇 개 밖에 없습니다."했더니 왕은 다시 그에게 "네가 가진 밥알을 나에게 줄 수 있느냐?"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할수없이 밥알 다섯 개를 골라 드렸더니 왕이 그것을 받아가지고 가더랍니다. 그는 얼마나 실망했을까요? "아니, 나를 적선해도 부족함이 없을 그가 오히려 내 밥알을 가지고 가다니" 분하고 슬펐습니다. 그런데 그가 집에가서 다시 밥그릇을 열었더니 그 그릇안에 황금알이 정확하게 다섯 개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의 느낌이 어떠했을까요? "이렇게 될줄 알았더면 더 드리는 것이었는데--"가 아니었겠습니까! 그가 만일 왕의 마음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기쁘게 자기의 밥알을 드릴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의 헌금과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고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믿음과 인생을 부요하게 하는 하나님의 축복의 방법인 것입니다.
3.셋째는, 헌신의 정신입니다.
5절에 보면 마게도냐 교인들은 헌금하면서 "먼저 자신을 주었다"라고 기록합니다. 그들에게 헌금이란 돈이 아닌 자신을 드리는 헌신의 행위였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말씀드렸습니다만 헌금은 결코 돈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정신의 문제요, 철학의 문제인 것입니다. 비교적 가난하게 지난 세기를 살아온 우리 한민족에게는 돈을 저축하는 중요성은 어느 정도 몸에 익혔지만 아직 돈을 잘 선용하여 소비하는 철학의 훈련이 되어있지 않습니다. 가난했던 시절 우리에게 검소와 절약을 가르쳐온 대표적인 교훈은 '개미와
베짱이'이었을 것입니다. 더운 여름날 개미가 추운 겨울을 대비하여 땀흘리고 열심히 일하는 동안 베짱이는 나무 가지에 앉아 춤추고 노래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추운 겨울이 와서 베짱이는 개미집에 와서 도움을 호소했지만 문전박대 당하고 그 이튿날 추위에 얼어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현대판 '개미와 베짱이'이야기가 나온 것 아시는지요?
옛날 이야기처럼 개미는 여름에 열심히 일했습니다.--그러다가 만성 신경통을 얻었습니다. 말년에 병원 찾아다니느라 모은 재산을 다 탕진합니다. 이제 개미는 병든몸으로 병원을 다니느라 구걸하며 고독하게 말년을 보냅니다. 그런데 춤과 노래를 열심히 하던 베짱이는 연예 기획사 감독의 눈에 띄어 가수가 되었고 그의 탁월한 춤과 노래로 대박을 터트려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꾸며낸 이야기입니다만 일하고 저축하고 그것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교훈만은 분명합니다. 사실 누군가가 말하기를 일본의 경제문화는 '개미문화'였다고 지적합니다. 저축이 최대의 미덕이었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소비와 유통의 가치를 배우지 못한 일본 경제는 처음부터 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고 지적됩니다. 반면에 미국의 경제문화는 '베짱이 문화'였다고 일컫습니다. 헐리우드의 베짱이들을 훈련시켜 노래하고 춤추고 연기하게 한후 세계인들에게 '돈내라'고 요구하는 소비문화--미국문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크리스쳔 경제문화는 무엇일까요? 저축문화도, 소비 문화도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투자문화'라고 할만 합니다.--"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그의 유명한 '그리스도인의 경제관'이라는 설교에서 이것을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첫째, 열심히 일하여 돈을 버십시오. 둘째, 할수 있는한 돈을 모으고 저축하십시오. 셋째는, 할수 있는 한 모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투자하십시오. 웨슬레는 스스로 이것을 실천한 사람입니다. Matt Friedman이라는 분의 책에 보면 웨슬레가 회심한 후 그의 헌금생활에 있었던 점진적 변화를 통계로 제시하였습니다. 회심첫해에 그의 연간 수입이 30파운드였는데, 그는 생활비로 28파운드(93%)를 쓰고, 헌금은 2파운드(7%)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둘째 해에 년간 수입이 60파운드였는데, 생활비로 28파운드(47%)쓰고, 헌금은 32파운드(53%)드렸다고 합니다. 셋째 해에는 년간 수입이 90파운드, 생활비로는 28파운드(31%)사용하고, 헌금은 62파운드(69%)드렸다고 합니다. 넷째 해에는 년간 수입이 120파운드, 생활비로 28파운드(23%)사용, 헌금은 92파운드(77%)드렸다고 합니다. 말년에는 년간수입이 1,400파운드 이상이었는데, 생활비로는 30파운드(2%), 헌금은 1,400파운드(98%)를 드렸다고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웨슬레 선생의 헌신을 나타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는 돈이 아닌 자신을 주께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Dr.Alan Redpath라는 신학자요 목사님의 책에 보니까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날 어떤 교인이 와서 그에게 "목사님, 우리 교회가 교인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그때 그는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저에게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성장과정에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습니다. 눈만뜨면 우리 부부를 보기만 하면 그는 줄곧 무엇인가를 달라고 졸라댔지요. 그러나 아시는 것처럼 지난해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더 이상 그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고 합니다. "자매님, 살아있는 교회는 헌신을 요구합니다. 죽은 교회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선택은 자매님의 몫이지요." 이 글에서 래드패츠는 C.T.Studd의 말을 인용하면서 헌신의 도전을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우리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내어주신 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우리의 어떤 헌신도 결코 지나칠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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