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2장 3절 피곤한 자여, 예수를 생각하라 - 옥한흠 목사
설교제목 : 피곤한 자여, 예수를 생각하라
설교본문 : 히브리서 12: 3
설교자 : 옥한흠 목사님
최근 <아버지>라는 소설이 출 간 3개월만에 무려 33만 권이라는 경이적인 판매고를 올리며 대단한 선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서기관 으로 공무원 생활을 화려하게 시작 한 어떤 남자가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가정을 이끌어 가면서 열심히 살아 보려고 하지만 진급이 뜻대로 안되고, 젊은 후배들에게조차 점점 밀려나게 되자 남 몰래 좌절하고 고민하다가 결국은 중병에 걸려 생 을 마치게 된다는 아주 소박한 이 야기입니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눈시울을 붉히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심지 어 통곡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간 큰 남자 시리즈를 이야기하며 웃고 떠들던 아내들은 남편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하고, 자녀들은 아빠를 다시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 합니다. 소박하기 그지없는 이야기 에 사람들이 이렇듯 대단한 반응들 을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피곤한 인생
저는 그 소설의 주인공인 아버 지를 보며 피곤한 인생이라는 생각 이 들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가 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자신의 꿈 을 조금이나마 이루어 보겠다며 안 간힘을 쓰다가 지쳐 두손들고 생을 마감한 초라한 남자요, 별 볼일 없 는 아버지였습니다. 피곤하기는 하 루 종일 가사 일에 시달리는 아내 나 꼭두새벽에 일어나 자정이 다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는 자녀들 역 시 마찬가지입니다. 따지고 보면 세상에서 피곤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현대인의 하루 일과는 마치 전 쟁과 같습니다. 시간을 따지지 않 고 분초를 따질 정도로 시간에 쫓 기면서 허덕입니다. 많은 약속들이 있고, 스케줄은 쉴새 없이 이어지 고, 업무량은 갈수록 태산입니다. 하루 종일 스트레스의 융단 폭격을 당하다 보면 무력감에 빠지게 되고 이러다가 실패하는 것이 아닌가 하 는 불안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 렇게 피로가 계속 쌓이다 보면 신 경이 예민해져서 별것 아닌 일에도 쉽게 상처를 받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피곤이 육체적인 것이라면 그리 문제될 것 도 없습니다. 충분히 쉬고 나면 다 풀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서 하루 종일 논을 매 거나 뗄 감을 구하느라 온 산을 헤 매고 다니는 중노동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 길러 다니느라 하루 종일 물동이를 가지고 씨름하는 사 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중노 동에서 이미 자유함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왜 이렇 게 피곤에 지쳐있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피곤이 정신적이고 영적인 피곤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드필드라는 심리학자는 <힘 의 심리>라고 하는 책에서 현대인 의 피곤을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피로는 대부분 정신적 원인에서 온 것이다. 순수 하게 육체적인 원인에서 오는 피로 는 지극히 드물다."
동의를 하든 하지 않든 간에 오늘날 현대인이 느끼는 피곤은 대부분 영적이고 정 신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피곤을 전적으로 나쁜 것이라거나 비정상 적인 것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피곤은 좋은 것이 아니지만 나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매우 한정 된 힘을 가지고 있고, 또 육신이라 고 하는 연약한 모습을 지니고 있 습니다. 한정된 육체에 과부화가 걸리면 피곤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 께서 우리 몸에 남겨 놓으신 자연 의 원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 리 인생은 원래부터 피곤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피곤은 인생의 숙명인 것입니다.
지금부터 3천년 전에 살았던 솔 로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물 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전1:8). 그는 하늘의 달과 별도 피곤하고, 수목도 피곤하고, 모든 동물과 물고기들도 피곤하다 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피곤 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 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이 만물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 피곤을 표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피곤은 다른 피조물들의 피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것입니다. 3천 년 전 사람도 말로 다 할 수 없는 피곤을 절감하며 살 았다고 한다면 숨 쉴 틈 없이 돌아 가는 현대 문명 속에서 밀려다니는 우리 인생이야 오죽하겠습니까? 피 곤한 게 정상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피곤을 그저 운 명이겠거니 하고 방치해 두겠습니 까? 그럴 수 없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피곤하 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그렇습 니다. 피곤을 그대로 쌓아 놓으면 무기력증에 걸리게 됩니다. 무기력 증에 걸리면 쉽게 낙심하게 됩니 다. 그러다 보면 만사가 귀찮아지 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집니 다. 마치 험한 파도와 싸우던 선원 이 지친 나머지 배를 버리고 바다 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런 상황이 오 래 계속되다 보면 결국 자살이라는 막다른 길로 내닫게 되는 것입니 다. 따라서 피곤이 정상적인 것이 긴 하지만 절대 그대로 내버려두어 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처방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피곤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기가 막힌 처방 한 가지를 주셨습니다.
"피곤한 자 여, 예수를 생각하라!"
참으로 동문 서답과 같은 처방이 아닐 수 없습 니다. 피곤하면 환경을 개선해 보 라든지,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을 택하라든지, 이 약을 먹고 활력을 되찾으라는 식의 그럴싸한 처방을 주셔야 할 것 같은데,
"예수를 생 각하라"는 전혀 뜻밖의 처방을 주 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말 씀으로 우리를 속이시겠습니까? 그 럴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어려운 상황이나 특별한 순간에 처 하면 누군가를 생각하는 습관이 있 습니다. 마음이 슬퍼질 때마다 생 각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피곤 에 지쳐 있을 때마다 떠올리게 되 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를 생각하 기만 해도 위로가 되고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가끔 저는 괜히 게으름을 피우 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가 있습니 다. '아, 목회를 뭐 이렇게 힘들게 하고 있냐? 좀 수월하게 하자. 교 인들도 좀 풀어주고, 설교 준비도 좀 수월하게 하자. 그래서 여유 있 게 목회 해 보자.' 이런 유혹이 들 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 마다 제 눈앞에 아른거리는 분이 한 분 계십니다. 우리 아버지십니 다. 그분은 배우지 못한 무식한 농 군이시라 저에게 유식한 말로 이런 저런 교훈을 들려주신 적이 한번도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기 의 삶을 통해서 너무 많은 것을 보 여주셨습니다. 새벽 별을 보고 나 가시면 날이 어두워서야 집으로 돌 아오셨고, 어떤 때는 밤새도록 복 통을 앓으며 괴로워하시다가 날이 새자마자 들로 나가 하루 종일 이 를 악물고 일하셨습니다. 저는 그 분을 보면서 사람은 자기 일에 부 지런해야 한다는 값진 교훈을 얻었 습니다. 그래서 게으름도 부리고 일을 조금 쉽게 해봤으면 하는 생 각이 들 때마다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월스리트 저널>이라고 하는 유명한 경제 전문지에서 보았 던 광고 한 편이 생각납니다. '유나이티드 테크놀러지'(United Technology)라는 회사의 광고였는 데, 어떤 사람의 사진과 함께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낙심해 있다면 이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학력은 국민학교를 중퇴했고, 시골에서 구 멍가게를 열었지만 그나마 파산하 였습니다. 남으로부터 빌린 돈을 갚는데 15년이 걸렸습니다. 장가를 갔지만 악처를 만나 가정생활이 행 복하지 못했습니다. 상원의원에 두 번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였고, 하 원의원 선거에도 두 번씩이나 고배 를 마셨습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유명한 연설을 했지만 그 당시의 청중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 니다. 신문은 연일 그를 비난했고 나라의 절반에서는 그를 벌레처럼 싫어했습니다. 그럼에도 전세계 곳 곳에서 이 사람 때문에 고무를 받 고 용기를 얻게 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죽은지 백 년이 훨씬 지났음에도 그의 존재는 더욱 새롭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는 아 브라함 링컨입니다."
저는 이제까 지 이보다 더 인상적인 광고를 본 적이 없습니다. 실패로 낙담해 있 는 사람에게 링컨이 얼마나 큰 위 로가 되었겠습니까?
왜 예수를 생각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피곤한 자에게 "예수를 생각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를 생각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그 이유 를 세 가지로 봅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우리가 당하 는 피곤을 똑같이 체험하신 경험자 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 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가난 과 씨름하셨으며, 하루 종일 쉴 틈 을 얻지 못하고 중노동을 해야 하 는 생활도 해 보셨습니다. 그리고 숱한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것이 얼 마나 피곤한지도 몸소 겪어 보셨습 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보십시오.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를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예수 님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 중에는 선한 사람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대부분은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들 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비판하고 대적했습니다. 예수님의 언행에서 꼬투리를 잡으 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하루 종일 시달린다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피곤하게 하기는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예 수님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말귀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 하고 엉뚱한 소리를 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팔 배반자도 끼어 있었습니다. 이런 형편없는 제자들 을 데리고 다니면서 예수님의 심신 이 얼마나 피곤하셨을까요?
"동병상련"이라는 말을 잘 아실 것입니다. 같은 병을 앓아본 사람 만이 상대방의 처지를 진심으로 동 정할 수 있습니다. 피곤에 지쳐 낙 심해 있을 때 의기양양한 사람을 만난다거나 만사형통한 사람을 만 나면 더 상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피곤과 낙심과 고통을 몸소 겪어보 신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피곤할 때 그분을 생각하면 평안과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각하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비 교해 보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묵상해 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고통을 당하거나 피곤하여 지쳐 쓰 러질 때 스스로를 예수님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아, 내가 당하는 고통과 피곤을 예수님도 다 당해 보셨구나! 내가 짊어지고 있는 인 생의 피곤을 예수님도 짊어지셨구 나.' 이 예수님을 조용히 마음에 떠 올려 볼 때 마음에 위안이 찾아오 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돕는 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모든 것을 가 지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그에 게는 불가능한 일이 하나도 없습니 다. 이사야 40장 28절 이하에 나와 있는 대로 그는 명철이 한이 없으 시며 피곤한 자에게 새 힘을 주시 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도 와주실 능력이 있는 분이시며 항상 우리를 도와주기를 원하십니다. 그 래서 때를 따라 필요한 은혜를 우 리에게 베풀어주십니다. 피곤할 때 는 피곤할 때의 은혜를 준비해 주 십니다. 고통을 당할 때는 고통 당 할 때의 은혜를 준비해 주십니다. 낙심 될 때는 낙심된 자를 위한 은 혜를 준비해 주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주님은 분명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수 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 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 라."
우리 예수님은 피곤한 자에게 쉼을 줄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피곤하여 낙심 될 때 우 리가 예수를 생각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에게는 낙심할 이 유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십 자가는 흉악무도한 죄인에게나 어 울리는 수치스럽고 비참한 죽음입 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부끄러움 을 개의치 않고 십자가를 지셨습니 다. 2절을 보십시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 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 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 니라."
예수님께서 그렇게 모욕적 인 죽음을 거절하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십자가 앞에서 절 망하지 않고 수치와 고통을 감내하 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십자 가 너머에 있는 부활의 영광을 바 라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예수님을 생각 해야 합니다. 부활하시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장차 이 세상을 심판하여 모든 인류의 불행 을 행복으로 바꾸어 놓으시고 인생 의 한숨과 원한을 풀어주실 그 주 님을 생각하면 우리가 낙심할 이유 가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경제적 으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 까? 사업이 흔들리고 있습니까? 그렇다 해도 낙심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 주님에게는 가난을 몇만 배 보상하고도 남는 부요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직장이나 학교에 서 경쟁 대열에서 뒤쳐지고 있습니 까? 물론 사람이니까 그것 때문에 마음이 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가지고 낙망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준비하신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면 우리가 세상에서 얼마나 성공했느냐 못했느냐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일이기 때문 입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다 꿈에 본 듯 잊어버리고 주님과 함 께 영원토록 영광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마 음에 안 듭니까? 자녀들이 애를 먹 입니까? 하는 일이 소원대로 잘 풀 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런 상황 에서도 예수님을 생각하면 그 낙심 이 될 만한 일 때문에 오히려 찬송 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 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현재의 가난이나 고통 은 장차 주님이 주실 영광과 비하 면 새 발의 피도 안됩니다. 인간관 계로 인해 시달리고, 뜻대로 안 되 는 가족 때문에 당하는 고통도 우 리를 위해 준비해 두신 그 영광에 비하면 꿈에 본 듯 잊을 만큼 별 것 아니라는 말입니다. 도무지 비 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의 독자들은 엄청난 핍박을 당하고 있 었습니다. 그들은 친족들로부터 따 돌림을 당하고, 이리저리 쫓겨다니 고, 예수를 믿는 믿음 때문에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더러는 붙잡혀 죽임을 당하기도 했 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기 위해 서 전부를 희생했고, 그 믿음을 지 키기 위해 생명을 걸었습니다. 그 렇다면 주님께서 그들을 핍박하는 자들을 한순간에 멸해버리시고 그 들을 핍박에서 건져주시는 것만이 위로요, 기쁨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해 주겠노라 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아무 리 핍박을 당해도, 주님이 준비한 영광을 맛보는 그 날에는 핍박당했 던 그 모든 일을 두 번 다시 생각 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은혜가 쏟아지기 때문에 핍박 당하는 성도들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마다 환난 중에서도 기뻐하는 특 별한 은혜를 체험하게 된 것입니 다.
두 가지 제안
그러면 예수를 생각하기 위해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 까요? 저는 두 가지 아이디어를 여 러분에게 제안하고 싶습니다. 첫째 로는, 하루 일과로 씨름하는 동안 피곤하여 지칠 때마다 잠시라도 예 수님을 떠올려 보자는 것입니다. 5 초도 좋고, 10초도 좋습니다. 잠깐 동안이라도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 도록 한번 노력해 보십시오. 운전 을 하고 가다가도 피곤하다는 생각 이 들고 마음이 답답해지면 잠깐동 안이라도 예수님을 생각해보라는 말입니다. '아, 예수님도 이 모든 고통을 다 경험해 보셨다고 그랬 지? 얼마든지 나를 도우실 수 있는 분이라고 그랬지? 예수 안에는 낙 심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그랬 지?'
'잠깐'이라고 하니까 쉬운 것 같 아도 사실은 참 어렵습니다. 안 믿 는 사람은 답답하거나 스트레스로 인해 피곤해지면
"포-- 후--"하면 서 담배를 연신 피워대지 않습니 까? 그들로서는 담배가 도망가는 방법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후--"
하고 스트레스를 뿜어내 본들 맥없이 사라지는 연기밖에 더 보입니까?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그럴 때 잠깐이라도 예수님 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문득문득 예수님을 생각하는 습관 을 가지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예 수님께 기도를 드리게 되고, 그 기 도 때문에 마음속에 놀라운 평안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 두 시간 정도를 확보해서 예수님과 단둘이 있는 시간을 가지자는 것입 니다. 한 주중 어느 날이라도 좋습 니다. 밤이든, 새벽이든, 낮이든 여 러분이 할 수 있는 시간을 구별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 구별한 이 한 두 시간 동안 여러분이 예수님과 단둘이 있을 수 있는 환경을 찾으 십시오. 그곳에는 삐삐나 핸드폰을 가지고 가서도 안됩니다. 부인이나 남편이 따라와도 안됩니다. 모든 것을 다 끊어버리고 한두 시간 동 안이라도 홀로 있을 수 있는 그런 기회를 만들어 보십시오.
철학자 파스칼은 이런 말을 했 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을 조용히 있는 시간을 마련하 지 못해서 놓치고 있다."
그렇습니 다. 아무리 바쁘다 해도 혼자 조용 히 예수님을 생각해보는 한두 시간 만큼은 확보하자는 것입니다. 아토 스의 성자 실루안처럼 시계도 풀어 놓고 오직 예수님을 생각하는 일에 만 집중하는 그런 시간을 가지자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내가 기도한다"는 식의 능동적인 자세를 취할 필요 가 없습니다. 자기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을 설득해 보겠다는 자세도 금물입니다.
"하나님, 이러이러한 기도에 꼭 응답해 주셔야 합니다."
하고 소리쳐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당장 하늘 문을 열고 주머니를 내 려서 우리의 구하는 것을 그 자리 에서 주실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런 자세로 기도하는 것은 피곤을 더하게 할뿐 입니다. 피곤에 지쳐 마음이 무거 운 때일 수록 수동적인 입장에 서 야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지시를 기다리며 조용히 기도하고 성경 말 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주여 말씀 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주님 내가 피곤합니다. 도와주세요."
모 든 주도권을 하나님께 맡기고 가만 히 있어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속으로 이렇게 말하는 분이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 다. '아, 이 바쁜 세상에 한 시간 내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러나 여러분, 몸이 피곤할 때 사우나에 가서 몇 시간이나 계십니까? 만사 를 제쳐놓고 뛰어가서 최소한 한 시간 이상 땀을 빼지 않습니까? 또 어떤 분은 조금 몸이 찌뿌드드하다 싶으면 골프채를 가지고 실내골프 장에 가서 열심히 스윙을 하지 않 습니까? 오가는 시간을 다 합하면 그것도 한 시간이 미니멈입니다. 또 안 믿는 사람들의 경우
"기분도 그렇지 않은데 술이나 마시자."
하 고 술집에 앉으면 한 시간은 우습 게 흘러가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예수님과 단둘이 있을 한 시간은 내기 어렵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만일 우리가 느끼는 피곤이 육 신의 피곤에 불과한 것이라면 잠을 자거나 사우나를 하거나 골프를 치 거나 등산을 하면 어느 정도 해소 될 수 있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피곤은 근본적으로 영적인 피곤입니다. 영적인 피곤은 사우나 나 골프, 등산과 같은 그런 방법 가지고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영적 인 피곤은 성경적으로 풀어야 합니 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하나님 의 말씀을 음미하며 예수를 생각해 보는 조용한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홀로 조용한 시 간을 가질 때 한 가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막연하게 눈만 감고 있 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 게 하면 공상만 하다가 끝내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그 시간 동안 예 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펴놓고 여기저기 를 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 나 성경을 편다고 하나님의 말씀이 눈에 쏙쏙 들어오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디를 읽어야 될지조차 모를 때도 많은 것입니다. 그럴 때 는 설교를 들은 말씀 중에 한 부분 을 택해서 조용히 읽으면서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아, 그 때 이런 말씀을 들었지. 아, 이 말씀은 이런 뜻이었지.' 이렇게 묵상을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 이 말씀대 로 나도 은혜를 좀 받고 싶습니다. 도와주세요."하고 기도가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묵 상하고 싶어집니다. 이것이 예수님 을 생각하는 방법입니다.
저는 어려서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소를 끌고 나가서 풀을 먹 인 적이 많았습니다. 눈만 뜨면 소 를 끌고 나가서 한시간 내지 두 시 간 동안 풀을 뜯깁니다. 그 시간에 소에게 풀을 뜯기지 않으면 소가 하루 종일 굶을 염려가 있기 때문 입니다. 아침 일찍 소롤 몰고 나가 서 논둑에서 풀을 먹이고 돌아오면 대략 아침 10시가 됩니다. 여름철 에는 그 때쯤이면 해가 벌써 뜨겁 기 때문에 소는 그늘에 앉아 되새 김질을 시작합니다. 먹었던 것을 다시 끌어내어 꼭꼭 씹어 삼키는 것입니다.
소를 먹여본 분은 잘 아시겠지 만, 소는 처음 풀을 뜯을 때는 정 신없이 뜯어먹습니다. 언제 씹는지 모르게 삼켜버립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저러다가 혹시 탈이라도 나지 않을까 하고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소는 절대 소화문 제로 탈이 나는 법이 없습니다. 허 겁지겁 삼켰던 것들을 되새김질을 통해서 되씹어 삼키기 때문입니다.
미첼이라고 하는 인도의 어떤 학자가 장시간 동안 소가 되새김질 하는 것을 시계로 재어보았다고 합 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소는 마치 몸에 타이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정확한 시간 동안 되새김질을 했다 고 합니다. 소가 한번 되새김질을 하는 데 걸린 시간은 정확하게 55 초였습니다. 장시간 동안 체크를 했는데도 1초의 오차도 나지 않았 습니다. 소는 네 개의 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되새김질을 하면 소는 일단 두 번째 위부터 채우고, 세 번째, 네 번째 위를 차례로 가득 채웁니다. 그러면 침과 잘 썩인 이 소중한 음식들이 위를 통해 흡수되 고 그 흡수된 영양분이 피를 통해 서 몸 전체에 돌면서 영양을 공급 합니다. 소가 풀만 먹고도 몸이 통 통하게 살이 찌고, 풍부한 젖을 낼 수 있는 것은 되새김질을 충분히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떻 게 보면 우리가 설교를 듣는 시간 은 소가 아침에 풀을 뜯어 삼키는 것과 비슷합니다. 목사도 삼사 십 분 동안 정신없이 이야기를 하고, 여러분도 정신없이 듣습니다. 그렇 게 정신없이 듣다보니 언제 씹을 틈이 있습니까? 그냥 닥치는 대로 삼켜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 나갈 때 생각해 보면 남는 게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아마 여 러분도 오늘 설교 듣고 나가면서 남는 것이 '아, 소가 되새김질할 때 55초 걸린다더라.' 하는 것만 남고 다른 것은 싹 잊어버리고 나갈 지 도 모릅니다. 워낙 정신없이 먹어 대다 보니 남아 있는 게 별로 없 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단둘이 만나는 한 시간을 특별히 따로 떼어 그 시 간에 주님과 만나는 사람은 다릅니 다. '아, 지난 주 히브리서 12장 3 절 말씀이었지.'하고는 그 말씀을 펴놓고 조용히 외우면서 생각해 봅 니다. 그리고 그 말씀 한마디 한마 디를 되새김질합니다. 그러면 그 시간에, 성령께서 특별히 주는 은 혜가 있습니다. 옥 목사가 깨달았 던 말씀보다 더 달콤한 말씀을 여 러분이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 말씀을 깨닫고 영혼의 위에다 가득 채울 때에야 그 말씀은 영혼의 혈 관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양분을 공 급하고 우리에게 새 힘을 주는 것 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피곤이 싹 가시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속에서 새 힘이 솟아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 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 러분은 언제 이와 같이 예수님과 단 둘이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김질하면서 예수님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적어도 한시간 동안 그렇게 해 본 때가 언제였습니까? 지난달이었습니까? 아니면 지난봄 이었습니까? 언제 그런 시간을 가 져보셨습니까? 언제 가져 보았는지 생각이 잘 안 나십니까? 그러니까 피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 음이 항상 무거운 짐으로 짓눌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잠을 자고 나도 마음은 늘 찌뿌드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하 라"고 했는데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고 인생을 사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피곤하다. 피곤하다."
말만 하지 마시고 피곤하고 낙심될 때마다 예 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우 리가 예수를 생각하라고 하신 그 말씀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주님께 서 우리 영혼과 정신의 피곤을 말 끔히 풀어주시리라고 분명히 믿습 니다. 이 시간 마음속으로 이런 결 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금 까지 너무 등한히 했구나. 그래. 잠 깐 동안이라도 예수님을 생각하는 습관을 가지자. 그리고 일주일에 한시간 정도는 한번 따로 구별해 보자. 골프를 못 치고, 사우나를 못 가는 한이 있어도 내 영혼의 피곤, 내 정신의 피곤을 풀기 위해서 주 의 말씀을 소가 되새김질하듯이 되 새김질하면서 주님 앞에 내 자신을 한번 드려보자. 그분하고 마주 앉 아서 한번 이야기해보자.' 한번 해 보십시오. 해보면 여러분의 얼굴이 훨씬 더 밝고 건강하게 될 것입니 다. 여러분의 삶이 훨씬 더 아름답 고 윤기가 흐르게 될 것입니다. 이 와 같은 주님의 명령을 우리가 순 종할 때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