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서 1장 5절 상반절 창세기 본문 재독 - 백영희 목사
설교본문 : 유다서 1장 5절 상반절
설교제목 : 창세기 본문 재독
설교자 : 백영희 목사님
유다서 5 상반절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다시 한번 읽습니다.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서론)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은 다 인본대로 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욕심도 기쁨도 평가도 전부는 다 인간 지식 생각대로 되니, 그것은 다 멸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합니다.
(현실마다 해당된 하나님의 말씀)
그러나 여기 말씀하시기를 범사를 알지만은 자기가 현실 현실을 당해 갈 때에 거기에 해당된 하나님의 말씀도 있는데, 거기에 해당된 하나님의 말씀이 그때에 생각나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간단명료하지만은 우리에게 필요한대로는 빠짐이 없이 다 구비해 놓은 말씀입니다. 이는 이 말씀을 이렇게 구비시켜 놓으신 이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빠짐이 없이 다 구비해 놓았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하루도 수많은 현실을 만나고 뭐 일 년을 둔다면 생각도 못했던 그런 일들을 만납니다. 그러나 현실 현실 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이 현실을 만나거든 이렇게 하라’, 또 저 사람에게 대해서는 ‘네가 이런 현실을 만나거든 이렇게 하라’. 믿는 사람이 얼마가 되든지, 그 사람들이 수많은 현실을 만나는 현실 현실마다 하나님께서 거기에 대한 말씀을 성경에 기록해 주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어떤 현실을 만나든지 그 현실에서 어리석게, 이 현실에 어떻게 하면 내 소원이 이루어지나, 또 내 소원이 실패가 되어지나. 어떻게 하면 돈이 유익이 되나 손해가 가나, 어떻게 하면 내가 당면한 일이 잘 되나 또 못되나, 그런 것을 생각하는 것이 천하에 있는 성령 없는 모든 사람들 전부입니다.
현실을 만나면 그 현실에 자기와 자기에게 대한 것을 생각하는 그것이 천하의 인간 전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공로로 중생된 사람으로 성신의 감화 감동을 받아서 사는 사람은 현실을 만났을 때에 이 현실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느냐? 그 현실에 대해서 말씀하신 이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것이, 이것이 성령의 사람입니다. 고요히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많은 말을 들어 우리 기분을 흥분시키고, 우리 속의 부패한 부패성을 취미있게 만들고, 아무 소용없습니다. 암만 해봤자 아무 소용없습니다. 뭐 좋아서 자물시도 소용이 없소. 그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인 진리, 이 둘 외에는 우리의 소망이 없는 것이요, 또 생명과 평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시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고요히 생각해 봐요. 내가 현실 현실에서 우리가 걸어왔는데, 현실이라는 이 문을 통해서 우리가 지금까지 왔는데, 그러면 수많은 현실을 내가 통과해 오면서 그 현실에 무엇 무엇을 내가 생각하고 움직였던가 이것을 생각해 봐야 됩니다.
그러면 나는 현실에 돈을 생각하고 그대로 움직였더냐? 어떤 인간을 생각하고 그대로 움직였더냐? 내 현재에 있는 감정에 되어 있는 이 감정, 이것을 생각해서 이대로 움직였더냐? 뭐 권세에 따라서 움직였더냐? 어쨋더냐? 내가 수많은 현실을 지내왔는데, 그 현실을 무엇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움직여 나왔는가 그걸 모르면 소용없습니다. 그걸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천언 만언을 들어도 소용없고, 오늘 밤에 이 말씀을 본데에서 이것 한번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면 나는 과거에 내가 현실을 만났을 때에,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대로 내가 움직여 왔나 그걸 좀 생각해 보십시오.
이 실지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것을 이 시간 알아야지, 이 말씀을 할 때도 모르는데 이 말씀 지나가 버리면 그 생각이 납니까? 고요히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그때에 내가 아는 대로의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이것이 현실의 첫 생각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을 생각하는 것 외에 자기 당면한 이런것 저런것 사정, 자기, 자기 사정, 그리 안하면 물질, 또 누구의 사정, 인간이나 어떤 피조물이나 자기나 무엇이나, 그것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생각지 안했다면, 그만 두말 할 것 없이 그 생활은 신앙을 떠난 죽은 생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를 써도 몸으로 산 제사를 드려야 되고,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하여 마음이 새로워지고 이래야 하나님의 뜻을 겨우 찾을 수 있는 것인데, 현실을 당할 때 마다 자기에게 가득찬 자기나, 어떤 인간이나, 어떤 피조물 무엇이나, 그 가득찬 그것만 급급하고 그것만 생각하는데 어떻게 자기에게 대해서 그 현실에 바로 행할 하나님의 뜻을 제가 찾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천부당 만부당입니다.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되면 신앙생활이 안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말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공연히 허영과 허욕을 가지고 날뛰지 말고, 요것 하나만 가져도 ‘아 나는, 이제 앞으로 별별 현실을 닥칠터인데, 그 현실에 나도 인간도 물질도 무엇도 먼저 생각지 안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인 이 진리 이것을 나는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서 나는 현실생활을 하겠다.’ 요것 하나만 거머쥐어도 삽니다. 이것을 하나 거머쥐고 자기가 이대로 행하려고 하면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안하십니다. 비로서 여기에서 바른 길을 걸어갈 수가 있는 일이 시작이 되는 것인데, 이것 없이 무슨 신앙생활이 시작되겠습니까? 어쩌든지 말세가 되면 자기 귀를 즐겁게 하는 많은 스승을 둔다 했습니다. 귀를 즐겁게 하는 스승을 둬서 귀를 즐겁게 하는 데만 찾아 돌아다닙니다. 암만 돌아다녀 봤자 소용없습니다.
그저 간단하게 내가 닥치는 현실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어떻게 하라하는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 거기서부터 생명생활이 시작되는 것이고, 자기 만난 현실에 어떤 영광스럽고 존귀하고 권세있고, 귀하고 중한 무엇을 생각한다 할찌라도 현실에서 하나님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뜻 잊어버리고 다른 것 생각했으면 그것 사망으로 벌써 빠져 있는 것입니다. 사망으로 벌써 탈선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망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온갖 기적으로 인도해 내셨지만은, 인도해 내심을 받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순종치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지도 안하고, 의지 하지도 안하고, 인정하지도 안하고 그대로 행동도 안하고 이러니까 이스라엘이 전부 광야에서 다 멸망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온갖 애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사람을 만들어 우리가 세상에서 나오는 데에는 어떤 파란을 겪겠습니까? 참 무시무시한 그런 다 경우를 지냈고, 참 사람이 여물어 그렇지, 아주 벌써 녹아서 없어질만한 그런 여러 애로들을 거쳐가지고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되지 안했습니까? 이렇지만은 자기 현실에서 하나님 생각지 안하고 하나님이 지은 피조물, 하나님의 뜻 생각지 안하고 제뜻 어떤 인간의 뜻, 이것을 먼저 생각하면, 자기는 몇 십 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찌라도 이스라엘의 시체가 광야에서 다 매장된 것 처럼 몇 십 년 신앙생활 해도 세상이라고 하는 것에게 완전히 매장되고 말지, 세상에게 완전히 파묻혀서 이 세상 놀음하다가 멸망 받고 말지 세상을 초월한 심판너머의 하늘나라의 수입이라는 것은 하나도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재독의 필요성)
그래 제가 오늘 저녁에 말씀 증거하는 것을 요한계시록 13장에 말세에 믿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굉장한 역사가 땅위에 일어나는 그런 것을 말을 할려고 하다가, 뭐 그거야 그렇건 저렇건 그 보다도 우리에게 당면한 구원성취하는 이것을 증거해야 되겠다 해서 바꿨습니다.
얼마 전에 엑스포74 운동, 빌리그라함 목사 와서 운동, 굉장한 숫자들이 많이 모았지만은서도, 거기서 과연 우리에게 구원이 될만한 그 길을 가르쳐주더냐? 나는 거기서 길을 얻지 못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디다. 어리석게 눈에 보이는 크고 많은 것, 피조물, 이것만 보고, 눈에 보이지 안하는 은밀히 계시는 하나님은 무시하고 보지 않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앞으로 판단하십니다. 보이는 모든 것 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크게 여기고, 더 참되게 여기고 더 두려워하고 더 의지하고 더 바라보고 그를 상대하는 이 사람을 뽑으려고 지금 이 창세후 6천년 역사를 하나님이 지금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 제가 누워서 깨닫고 생각하는 데는, 이제는 세상에 인간의 귀를 즐겁게 하는 것, 그의 심령들, 감정들을 배불리는 것, 또 이러면 망한다 어쩐다 하는 그것, 그런 것 다 증거할 여가 없고, 구원 이루는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간단간단하게 증거해서, 마치 나사로를 무덤 속에 넣어놓고, 앞에 돌로 돌담을 쌓아서 가리워 놓고 한, 그 나사로를 살려내는 것 처럼, 주님과 우리 사이의 돌담 같이 가리워져 있는 이 죄악을 하나씩 둘씩 헐어, 헐어야 시체같이 죽어 있는, 나사로 시체 같이 되어 있는 우리들과 하나님 사이가 차차 가까워지고 소리도 들려질 것이고, 또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왔지만은 서도, 베로 꽁꽁 묶어 놓으니까 팔을 펼 수가 있소? 다리를 펼 수가 있소? 숨을 쉴 수가 있소? 마구 들이 동여놓았는데.. 이것을 하나씩 둘씩 풀어주면, 주니까 나중에 말도 하고 뛰기도 하고 사람 노릇을 한 것 처럼, 이제는 시급하니까, 하나씩 둘씩 이 지금 모든 세상 밧줄로 매어놓은 이런 것을 풀어야 되겠다 하는 그것이 생각나서 창세기 1장부터 지금 계속 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새벽기도에서 계속하고, 듣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또 들은 사람들도 그동안에 다 잊어버렸을 것이기 때문에, 잊어버리지 말고 이것을 평생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 생각나도록 하기 위해서 창세기 처음부터 한 것을 지금 다시 한번 재독을 합니다.
(본론)
(1.자기의 현실은 에덴동산)
창세기 2장 15-17까지에 에덴동산에 대해서 간단하게 5가지를 말씀했습니다.
아담 하와에게 너희는 딴데 가면 다 저주 사망의 곳이요, 에덴동산 여기만 너희들은 하나님 나와 같이 있고, 영생할 수 있다. 처소로 정해준 것과 같이 이것은 하나, 어렸을 때에 형식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우리에게 문서계시로 해주신 것은 우리의 에덴동산은 무엇인가? 우리 현실입니다. 우리 현실은 각자 자기에게 닥친 현실은 자기의 에덴동산이요 자기의 처소라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천하에 좋은 현실들을 만난 사람이 많다고, 좋은 현실들을 자기가 많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은, 자기에게는 자기현실 그것이 온 천하에 자기에게 있어서는 제일 좋은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거처할 곳으로 준 현실이라는 것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저 해석이 필요 없어. 이걸 믿으십시오. 자기가 어떤 현실을 만나든지 이 현실은 주님이 나를 사랑하므로 만들어서 천하에 내게는 제일 좋은 현실로 주셨으니 이 현실은 내가 살 곳이라 하는 요것을 잡는 것이 위대합니다. 대개는 현실이라는 이 현실의 가치와 중요성과 자기에게 중요한 이 관련성을 깨닫고 느끼는 사람 되기가 심히 어렵습니다. 구원은 여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천만마디 해봐야 소용없어. 구원은 실지로 또박또박 하나씩 되어가는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붕 떠가지고, 어찌하든지 귀를 즐겁게 해서 사람들의 마음이 붕 떠가지고서 정신차리지 못하도록.. 다른 것 없소. 첫째 이것 가르치는 방편입니다.
자기가 어떤 현실을 만나든지, 자기에게는 이 현실이 천하에서 자기에게 있어서는 제일 좋은 처소라. 여기에서 지금 살고 죽는 것이 결정되는 중요한 이 현실이라 이것을 인정할 때에 성신의 사람입니다. 이것은 천하를 점령하는 것보다 큽니다. 이게 믿음이요. 이게 능력입니다. 이것이 믿어지는 것이, 이대로 자기가 감각하고 이 현실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되나 하는 요것을 생각해 아담 하와와 같이 멸망 받는 그 길 걷지 안하고 구원 얻는 이 길을 걷도록, 여기에다가 마음을 두고, 결심을 가지고 날뛰면 사단은 근방에 오지를 못해, 사단이 근방에 오지를 못해, 그 다음에 에덴동산에서 할 일 네 가지 아니오? 네 가지.
(1.동산을 다스리라)
하나는 동산을 다스리라. 동산을 지배해라. 현실을 네가 다스리고 현실에게 피동되지 말아라. 현실에 대해서 어떤 현실이든지 하나님이 너에게 명한 그대로 현실에게 해라 그 말입니다. 이것이 승리입니다. 칼을 들고 섰든지, 돈을 들고 섰든지, 딱한 사정이 부딪혀왔든지, 어떤 영광이 왔든지, 자기 현실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그대로 현실에 행할 것.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오. 이것이 세상을 점령하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 다른 복잡한 방편을 말할 것 없소. 쉬워요. 현실에 하나님의 명령대로 할려고 하니 돈이 거리끼고, 인간이 거리끼고, 권세가 어떻고, 무엇이 거리끼는 것이 많아도, 이래도, 에덴동산을 다스리라 했으니까 내가 현실 환경에 피동되지 말고 현실에 대해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그대로 내가 하라 했으니까 내가 그대로 행해야지. 말하라 하면 말하고, 말하지 말라 하면 말 안하고,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 거절하라면 거절하고, 호통치라면 호통치고, 취하라면 취하고, 버리라면 버리고, 이것이 지극히 큰 능력입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에 가서 영원히 역사하는 능력입니다. 이게 능력이요. 자기 현실을 다스리는 이것이 천하를 영계를 모든 피조물을 점령하는 권세요, 방편입니다. 현실을 다스리면 하나님의 피조물은 다 그 사람에게 다스림을 받아야 됩니다. 내가 이 현실을 다스리는 것은 모든 피조물을 내가 통치할 수 있는 통치권을 받는 것이요.
이래도 우리 서부교회도 아예 그 사람이 춤추는 것을 좋아하는 그 사람은 춤추는 이야기를 해야 기분이 나지 다른 말을 해야 기분이 안나. 어떻게 하면 돈벌이 할까 하는 그 사람은 돈벌이 하는 말을 해야 귀에 쏙쏙 들어오지. 교회는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으로 부요해지며,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에게 기쁨이 될수 있는 사람이 되며, 어떻게 하면 하늘나라를 내가 잘 준비해 가며, 어떻게 하면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영원을 위해서 이것을 비용으로 써서 투자할까, 다시 쉽게 말하면 어떻게 하면 내가 내 대로, 내 좋은 대로 살지 안하고 하나님 좋은 대로 살수 있는 사람이 될까?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는 사람이 될까? 어떻게 하면 솔박 다 이 구원을 위해서 투자하고 가는 사람 될까? 이게 예수 믿는 사람인데, 그런 소원이 하나도 없는 사람에게 이 설교를 하니까 오랑캐 같이 들린다 말이오, 귀에 오랑캐 같이, 원수같이 들려. 아예 들으면 속에 구역질이 나고 부애가 나고, 그만 과민이 나고, 강단에 있는 설교하는 사람이 보기 밉고 아주 밉상스러워 견디지 못하는 그런 미운 것입니다. 그것은, 마귀는 마귀 좋을 일을 말해야 마귀가 좋아하지 마귀 때려 잡는 말이 나오면 마귀가 좋아할 턱이 있습니까? 우리가 속에 근본 목적을 바꿔야 됩니다. 우리는 이 현실을 어떻게 내가 팔방미인 모양으로 이 현실에는 요렇게 착 붙이고, 조렇게 착 붙여서 이 현실에서 창기같이 해서 현실에서 모든 것을 인해서 수입을 볼까하는 그것 아니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할 사람이 볼 때는 미련하게 보여지는, 현실에 아 요리하면, 지금 돈도 생길건데, 요리하면 권세도 얻을 건데, 아 요리 하면 사람도 얻을 건데, 아 저게 미련하게 현실에 하나님의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만 그대로만 뿍뿍 하고 있으니 미련해 보이지, 그것이 천상천하의 모든 피조물을 점령하는 점령권입니다. 그게 점령하는 것이요. 그것이 무궁세계에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서 모든 피조물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시킬수있는 그 능력을 지금 배양하는 것입니다.
(2.동산을 지키라)
에덴동산에서 할 일 이제 둘째로, 그러면 순서는 셋째인데, 둘째로, 동산을 지키라, 하나님이 허락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못들어오게 하라. 네가 못들어오게 해라. 요것도 참 알기 어렵습니다. 자기 현실에 하나님이 허락지 않는 것, 하나님이 원치 않는 것을 네가 용납지 말아라. 그게 지키는 것입니다. 용납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이야 내 현실에 이렇게 생각하든지 저렇게 행동하든지 그것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내게 하는 그것은 그것이 내 현실입니다.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용납지 안하는 것을 내가 지켜서 용납지 않는 것은 내 행동이요. 내 행동. 내 언행심사의 내 행동. 그것을 내가 용납지 안하면 안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용납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이 내 환경에 하는 것은 그것이 내 현실이 되는 것이라, 내 환경이 되는 것이라, 그건 내 처소라, 원수가 칼을 들어도 칼든 거기에 나는, 내가 살곳이라. 거긴 내 좋은 처소라. 아무나따나 두루뭉실 뚤뚤 뭉쳐서 그래가지고는 구원을 못 이룹니다. 이러기 때문에 환난이 오면 요 진리를 바로 드는 사람들은 그때 승리를 하는데 이것 없이 범벅으로 귀나 즐겁게 해서 하던 그런 신앙들은 내나 이 세상같이 좋은 곳을, 세상 좋은 것이 오면 좋아하지만은 서도, 하늘나라 좋은 것이 오면 삶아놓은 채소 모양으로 턱 늘어져서 자기 일생 산 생활이 다 헛된 것으로 고백하고 마지막에 패전하고 맙니다. 우리는 우리 현실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은 용납을 안해야 됩니다. 내가 용납안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용납하는 것은 내 현실되는 것이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생각, 마음, 뜻, 소원 성질 행동 말 이런 것은 내가 용납지 안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것만 내 현실에서 용납하면 이것이 우주를 영계를 파수할 수 있는 실력입니다.
(3.일반 과실은 먹으라)
그 다음에는, 일반 과실은 먹으라 우리 현실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사업도 명예도 지위도 권세도 출세도 행락도 쾌락도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이 금하지 안하는 것은 우리 현실에서 취할 수 있는, 힘 있는 대로는 취해. 취하면 그것이 내게는 양식도 되고, 내게 힘도 되고, 내가 그것으로 자라기도 하고. 그래 에덴동산에 선악과 그것 아니라도 먹고 실컫 사는데, 선악과 그것 마귀가 미혹을 주고 나니까 그것 먹으면 좋을 줄 알았지만 먹고 난 다음에 뭐가 좋습니까? 이것 모양으로 우리 현실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 그것이면 족합니다.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리 현실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쾌락, 하나님이 허락하신 업, 하나님이 허락하신 출세, 하나님이 허락하신 인명, 하나님이 허락하신 모든 경영, 그것이면 우리에게 족하요, 부족함이 하나도 없습니다.
(4.선악과는 먹지말라)
그러나 내가 금하는 것이면 먹지말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우리 현실에서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사업이든지, 취직이든지, 하나님 말씀에 거리끼는 죄가 되는 취직, 죄가 되는 사업, 죄가 되는 말, 죄가 되는 수단, 죄가 되는 교제, 죄가 되는 방편, 죄가 되는 운동, 죄가 되는 열심, 죄가 되는 활동 그것은 저 보기에는 해와에게 꼭 필요한 것 같이 보여지는 것 처럼, 현실에 하나님에게 거리끼는, 하나님 법에 위반되는 고것은 꼭 해야 좋을 것 같이, 요것만 하면 해결되는데, 요걸 못해서 안된다, 하나님 때문에 나는 참 낭패다. 예수 때문에, 예수 안믿으면 당장 요것만 하면 되는데, 요것만 하면 되는데, 내가 믿기 때문에 요것 못하네.. 이래 가지고 못해도, 그렇게 못하는가 싶으지만은 해보지? 고것이 들어서 인간을 망치는 것입니다.
뻐떡 뻐떡 하고 말겠습니다.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의 전투)
3장 15절에는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이 서로 싸운다 했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이겼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동안 밤이나 낮이나 언제든지 악령으로 더불어 나는 싸우는 전투는 쉬지 않습니다. 전투는 밤이나 낮이나 계속 전투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은 사랑하는 내 가족끼리 있으니까 여기는 전투가 아니겠지.. 아니오, 원수가 네 집안 식구리라 했습니다. 이것도 어려운 일이요. 우리는 여인의 후손이요, 불택자는 뱀의 후손이요,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사단에게 속한 이 역사와 성령에 속한 우리와의 관계는 쉬지 않는 전투가 있다 이것도 참 어려운 일이요 위대한 일입니다. 가족끼리 있어도, 주여 여기에도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의 전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도우시옵소서. 어디를 가도, 아주 자기 친밀한 친구, 친밀한 부부, 친밀한 형제, 친밀한 동지 있으니까 여기야 상관없겠지? 주여 여기도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투가 있습니다. 아 이제는 나 혼자 앉았으니까 여기야 아무런 이런 것이 없지. 주여 나 혼자 있는 줄 알았지만은서도, 내 속에 뱀의 후손이 있고 또 여인의 후손이 있습니다. 옛사람과 새사람이 있습니다. 이 전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여 도우시옵소서 이것이 자기에게 끊임없이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투가 계속된다는 요것을 명심해서 이 일을 해도 요 전투에 관심을 가지고 이 전투는 반드시 힘만 쓰면 이긴다고 말씀했기 때문에, 이 전투가 있는 것과 이 전투에 반드시 이긴다는 이 필연성을 가지고 자기가 이 전투를 할 때에 성령은 그 사람에게 충만합니다. 하나님은 기뻐합니다. 이제 눈을 깼다. 너는 내가 모든 것을 맡길만하다 여기에서 큰 능력을 얻고 큰 은혜를 입는 것이지 뭐 야단스러운 곳에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뭐 몸이 뜨끈뜨끈하고 불이 뜨끈하고 다 그것 불파가 많이 말하지만은 서도, 실은 헛됩니다. 헛돼. 여러분들.
성령은 지금 어떤 역사를 하고 있느냐?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정해서 그대로 지켜야 되겠다는 이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서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요.
언제 어디 가니까, 내가 그 원장에게, 기도원 원장인데, 원장님은 불을 어떻게 받았습니까? 아 나는 그때 성신의 불이 왔는데, 이 배에 왔더랍니다. 막 배가 뜨거워서 이거 막 쇳덩어리가 왔는가 고꾸라져서 공구러져서 후후 이렇게 했다고...
그래 거기서 집회를 할 때에 이러니까 진리를 말하니까, 그 분도 깨닫고 이러더니만은, 저희끼리 얼마동안 있더니만은 그만 그대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그겁니다.
성령의 역사가 무엇입니까?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이 밤낮 계속된다. 요것이 긍정되고, 혼자 있어도 주여 여기도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싸움이 계속되는 것을 알아, 아 요놈하고 지금 내가 싸우고 있는구나, 나를 잊어버렸구나, 요것을 찾아가지고서 주님 앞에 도움을 구해서, 요 싸움있는 줄을 알고 싸워서 반드시 이긴다는 확신을 가지고서 달라들어서 이길때에 그것이 성신의 충만입니다.
(가정교회의 목적)
그 다음에 3장 16절-17절에는 여자에게 세 가지, 남자에게 세 가지, 독신하는 이는 여기 한하지 않았지만은서도 여자는 해산함으로 구원 얻는다 했습니다. 하나님이 타락한 값으로 이 타락에서 구원을 이루는데에는 이만한 애로가 없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여인이 해산의 수고를 하는 것이 그것이 성경이요. 또 남편을 사모하는 것이 마치 교회가 주님을 사모하듯이 이렇게 사모해야 됩니다. 그러면 여인의 의무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자기 남편을 하나님 처럼 사모할 수 있는 그런 남편이 되기까지 대우해서 노력해서 이것이 되어야 됩니다. 그것이 되야 가정구원은 완성이 된 것입니다. 그 전에는 완성이 아닙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다스림 받는 것, 다스림 받는 것. 남편이 자기에게 하나님이 교회를 다스리듯이 그 남편이 자기를 완전성, 온전성으로 통치해 주는 데까지 나아가는 이것이 아내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입니다. 이 다스린다는 것은 여인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 하나님이라 했습니다. 남편이 하나님에게 다스림 받는 그 다스림 받는 그것 가지고, 아내를 다스릴 때, 아내가 남편에게 다스림 받으니까 아내가 남편에게 다스림 받으나 하나님께 다스림 받으나 꼭 같은 것이라, 하나 남편이 중보자로 끼이기만 끼었지, 이것이 가정교회입니다. 결혼의 목적은 흠 없는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 결혼해라 하는 이 제도를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남편이 하나님만을 사모해서, 다시 말하면, 그에게만 온전히 소망을 가지는 남편이 되었으면, 아내는 그 남편에게 소망을 가졌으면 되었습니다. 이것이 가정교회입니다. 남편이 하나님께 완전히 다스림을 받았으면, 다스림 받는 그 남편에게 아내가 다스림 받았으면 내나 그것이 하나님에게 다스림 받은 것이요. 이것이 흠 없는 교회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 남편은 아내의 사모의 대상이 되어서 아내가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 주님 바라보는 것과 꼭 같이 되는 이것이 결혼했으면 가정교회의 완성이요.
또 자기는 아내에 대해서 다스릴 수 있는 하나님에게 다스림 받았으면 그대로 아내를 다스리게 되는 것으로 다스려야 그것이 가정교회가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남편은 수고해서 먹을 것을 담당한다 이랬습니다. 그래 간단하지만은 가정에 대해서는 요것이 되면, 천국 가정이요, 이것이 가정교회입니다. 이것을 떠나서 인간끼리 암만 재미있어봤자 소용이 없어. 부부의 목적이 하나님 앞에 흠 없는 교회를 일으키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남편을 완전히 점령하고, 하나님께 완전히 점령당해서 하나님으로 동하고 정하는 그 남편에게 아내는 완전히 점령을 당해서 아내는 남편에게 절대 자유가 없고, 완전히 점령을 당해서 피동이고, 남편은 하나님에게 완전히 점령 당해서 절대 피동일 때에 요것이 흠 없는 교회, 깨끗한 가정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 뭐...
(가인과 아벨의 투쟁)
창세기 4장에는 가인의 믿음과 아벨의 믿음이 있는데, 가인은 자기의 생애의 거기서 발생된 감정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자기가 접촉하는 자기 주위 환경, 거기에 피동된 것으로 하나님 섬겼고, 아벨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섬겼습니다. 우리 그렇기 쉽습니다. 교훈의 풍조와 시대, 이 세대에 물들지 말라 했는데, 우리 교회들이 이 세상적인 교회요, 세상이 어떻게 하나, 세상의 하는, 그 세상을 교회 안에 끌어들여가지고 지금 되어가고 있습니다.
가인은 자기 업이 농업이기 때문에, 거기서 생각이 나가지고, 이것 참 보배이고 이러니까 하나님 섬기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 그래 섬겼어. 자기와 자기 환경과 둘이 합쳐서 기독자가 자기와 세상하고 합작이 되어가지고 거기에서 연구되어서 발명된 그것으로 하나님 섬기는 이것은 가인의 자손입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껍데기는 성경이요 그 다음에는 영감이요, 위로부터 내려오는 거기에 따라서 피동되어서 섬겨야 돼. 가인과 아벨이 교리와 신조의 투쟁은, 형제간이지만은서도, 생명이 끊어지는데까지 투쟁 했습니다. 다른 것은 다 양보해요. 어떤 것이든 양보하지만은서도, 교리와 신조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진리이기 때문에, 이것은 가장 가까운 형제끼리에 원수가 되어져도, 자기 목이 끊어져도, 이 교리와 신조는 팔 수 없고, 양보할수 없는 것이 기독자입니다.
그보다 뭐 교리신조가 어디 있소? 이 사람이 이러면 그것도 좋다, 저것도 좋다, 오늘에는 인본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인본주의, 인본주의 신본주의, 세상주의 천국주의, 유물주의 신앙주의, 사회주의 교회주의, 정치주의 복음주의, 이것이 앞서고 뒤서는 것인데, 이것을 보면 아는데, 신본주의도 하나님-사람 있고, 신본주의는 사람을 안 생각하는 줄 압니까? 사람 말합니다. 인본주의도 사람 하나님 있습니다. 있는데, 옆으로 보면 다 하나님 사람 다 있어. 앞뒤로 보면 틀려. 하나님을 먼저 두느냐 인간을 먼저 두느냐, 하나님을 더 중하게 생각하느냐 인간을 중하게 생각하느냐 고것이 죽고 망하는 것입니다.
어느 설교를 들어보든 그것을 들어야 돼요. 아 여기는 지금 하나님 좋은 것을 중점으로 하고 있느냐 인간 좋은 것을 중점으로 하고 있느냐, 하나님 기뻐하시는 그것을 중점으로 하고 있느냐 인간 기뻐하는 그걸 중점으로 하고 있느냐, 여기는 천국에 대한 준비가 중점이냐, 이 세상에 예수 믿는 사람 잘사는 그것이 중점이냐. 이것은 성경의 도리를 하나 또박또박 성경을 근거해서 이렇게 하느냐 이제 모든 세상 문체있는, 광채있는 말로 가지고 하느냐 이걸 따져보면 알 수 있어.
(에녹의 하나님과의 동행)
5장 22-24절에는 거기 보면, 다 나가지고 몇 해 커가지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아이 낳고 몇해 살다가 죽었다 그것만 기록해 놓았어. 5장에는 그것만 기록해 놓았어. 해놓았는데, 에녹은 하나님과 300년을 동행하면서 자녀를 낳고 살다가 하나님이 데려가서 세상에 맛이 없어서 산채로 승천했습니다. 그 에녹은 우리에게 하나님 동행은 사망이 없다는 영생하는 것을 우리에게 계시해주신 계시의 인물입니다. 계시교회이요. 다르게 해석하면 안돼. 암만 해봤자 고꾸라집니다. 이러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에는 수입이 있지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것은 어떻게 번뜩거리고 좋아도 다 멸망선 이하에 있습니다. 멸망을 꿰뚫고 올라가는 것은 많이 했든지, 적게 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고것 뿐이요. 고것만이 다 멸망을 꿰뚫은 생명에 속하는 것입니다.
(노아의 준행)
6장에 보면, 노아는 세상에 무엇이 좋으냐. 하나님이 좋으냐 세상에 무엇이 좋으냐, 거기 보면 보다 뭘 좋아하느냐 그걸 결정짓고 있어. 보다 뭘 좋아하느냐. 네가 돈보다 하나님을 좋아하나 하나님보다 돈 좋아하나? 네가 가정보다 하나님을 좋아하나 하나님 보다 네 가정 좋아하나? 네 생명보다 하나님을 좋아하나 하나님 보다 네 생명을 좋아하나? 무엇보다 무엇을 제일 좋아하나? 또 네가 하나님 좋아하는 것을 네가 하느냐 너 좋아 하는 것을 하느냐? 하나님 좋아하는 대로 하느냐 너 좋아하는 대로 하느냐? 노아는 이게 달랐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다 하나님 보다 세상에 좋은 게 있었어. 하나님이 제일 좋지 안하고 하나님 보다 좋은 게 있었어. 좋지만은 하나님을 제일 좋아하고 아무리 좋은거라도 하나님 다음으로 하는 것과, 노아 여덟식구 뿐이었소. 하나님 좋은 것 저 좋은 것 둘이 딱 마주 했을 때에는 하나님 좋은 것 보다 저 좋은 대로 취합니다. 그것이 홍수 속에 망한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이대로 심판입니다. 우리가 현실을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노아는 천하에 그 여덟식구만 빠졌으니까 얼마나 외로왔소? 얼마나 독보적인 걸음입니까? 이렇게 외로와도 그는 세상을 따라가지 안했습니다. 이렇게 외로와도. 우리는 앞으로 신앙생활 해 나갈 때에 아 서부교회 교인들이 다 떨어지고 다 달아났구나, 자기는 그래도, 노아는 온 천하 인간이 다 속화되어서 나가도 노아 혼자 고독의 걸음을, 독보의 걸음을 걸었다. 온 천하 사람 다 어떻게 될찌라도 나 혼자만이라도 나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지 않겠다 하는 요것을 노아에서 배워서 우리가 단단히 결심해야 됩니다. 그래 노아는 거기서 준비하면서도 자기가 벌써 천하사람 다 배반하고 나갔는데 자기 혼자 있으니까 우쭐해지고 이만하면 여기서야, 여기서야 뭐 어지간해도 될 것 아닌가 했지만은, 준비하는데 하나님 명령한 고대로 다 준행했다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고대로 준행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30분동안 고요히 생각합시다. 냉정스럽게, 냉정스럽게, 10시가 넘어가면 안면방해가 되기때문에 그때는 큰소리가 안되지만은 10시 까지는 어떤 고함을 질러서라도 어쩌든지 마음에 속이 확 풀리도록 여기에 대해서 확정짓는 기도를 합시다. 차든지 더웁든지 해야되지, 내가 잘못지켜 죄인이면 죄인이고 잘못되었으면 잘못됐고, 바로되었으면 바로되고 이래야 되지 흐리멍덩하게 이래서는 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