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서 1장 17-25절 신앙의 건축 - 서명성 목사
설교본문 : 유다서 1장 17-25절
설교제목 : 신앙의 건축
설교자 : 서명성 목사님
교회 건축이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는 다소 지체가 됩니다. 세부설계가 내년 3월은 되어야 끝날 것 같고 그 후에 칼스배드 시청에 시공에 대한 허가를 받아 공사에 들어가는 것은 6월쯤 된다고 치면 입당은 내년 말쯤 예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기에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아시고 우리의 준비상황에 맞추어 일을 추진하실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당을 짓기 전에 우리의 심령 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이 먼저 지어져야 합니다. 집을 지으려면 기초를 든든해야 합니다. 아무리 외양을 그럴듯하게 지어도 구조적으로 부실하면 집이 언제 어떻게 무너질 지 알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이 든든히 서려면 신앙의 기초가 든든해야 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신앙의 기초를 어떻게 쌓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으로 선택된 유다서는 성경의 다른 책에 비하여 비교적 덜 다루어집니다. 그렇지만 한 장으로 이루어진 유다서에 복음의 귀중한 진리들이 많이 담겨져 있습니다. 유다는 교회에 가만히 들어와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도덕적 타락을 일삼는 자들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하고 신자들을 조심하라는 주의를 주기 위해 편지를 기록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들은 경건치 않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오히려 욕망의 재료로 바꾸었습니다. 창조주이시며 구원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였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이단의 일반적인 특성을 나타냅니다. 유다는 그들을 가리켜 이성이 없는 짐승들처럼 본능적인 일에 빠져 있고, 정욕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무례하고 탐욕적이라고 지적합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보다는 자신들의 꿈을 더 선호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방법과는 근본적으로 대립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위는 육체를 더럽히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유다는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궁극적으로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며 구약의 예를 들어 이단자들에 대한 경계를 하고 성도들을 권면합니다. 광야에 있던 출애굽 제일세대, 타락한 천사들,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 그리고 가인과 발람이 바로 악을 행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유다의 권면은 말세를 사는 성도들이 반드시 기억하고 실천해야 할 귀중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구원을 받으셨느냐고 물으신다면 무엇이라 대답하겠습니까? 개인적인 상태에 따라 마음이 도곤도곤하면 구원을 받은 것 같고 무슨 일을 해도 도무지 기쁨이 없고 풀리지 않으면 구원 받지 않은 것같이 느낍니까? 구원은 시제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생명의 말씀 시간에 받은 구원, 받는 구원, 받을 구원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창세기 3:8,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아담이 죽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다는 말입니다. 영적인 죽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적인 죽음에서 살아납니다. 구원의 첫 번째는 과거형으로 표현되는 구원으로 영적인 차원의 구원을 가리킵니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영생을 얻었다’라는 단어는 문법적으로 현재완료형입니다. 믿음을 고백하는 순간에 이미 영생을 소유하였고 지금도 소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고 이미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생명의 세계로 들어섰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12에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데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하니 성경이 모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의 두 번째 의미는 현재형으로 표현되며 혼적인 차원의 구원을 가리킵니다. 신학적으로는 성화라고 부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그분과 동행하며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히 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벧후 3: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하면서 성화를 이루도록 힘쓰라고 합니다. 어떻게 힘씁니까? 히브리서 4:12-13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창세기 5:4,5,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삼십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아담의 육이 죽었습니다. 구원의 세 번째 의미는 미래형으로 표현되며 육의 차원에서의 구원입니다. 로마서 13:11,“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신학적으로는 영화라고 부릅니다. 이 땅에서 죽은 육신이 예수님과 같이 부활체로 바뀌며 새 하늘과 새 땅에 살기에 적합한 몸을 입게 됩니다.
유다는 이미 영의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이 땅에 살면서 어떻게 혼적인 차원에서 구원에 이르는 성화의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1. 사도들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합니다. (17-19절)
사도행전 20장을 보면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경고합니다. 내가 떠나고 나면 사나운 이리떼 같은 거짓 선생들이 여러분 가운데 들어와 양떼를 사정없이 해칠 것이며 여러분 중에서도 그와 같은 사람들이 일어나 그릇된 것을 가르쳐서 신자들을 꾀어내어 자기들을 따르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깨어 있어서,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각 사람을 눈물로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비슷한 경고를 하였습니다.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죽은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고 사람들을 미혹할 것이라고 합니다. 유다는 베드로와 비슷한 경고를 합니다.
유다는 교회 안에서 인간의 욕심으로 쓸데없이 행하며 이간시키는 거짓 선생들을 어떻게 그리고 있습니까?
1) 당을 짓는 자
당을 짓는다는 것은 그룹을 만들어 믿는 자들을 나눈다는 의미입니다. 교회 안에 분열을 일으키고 자기사람들을 만들려고 혈안입니다.
2) 육에 속한 자
거듭나지 못하였기에 본능을 따라 행동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영향에 사로잡힌 자들입니다.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처럼 본능적으로 행동하며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과 같이 육체를 더럽힙니다. 그들은 가인의 길, 고라의 길, 발람의 길을 따라 원망하며 불만을 터뜨리며, 우쭐함과 아첨, 조롱을 일삼으며 교회 내에 분열을 조장하였습니다.
3) 성령이 없는 자
거듭남은 성령의 역사인데 성령이 없으니 당연히 구원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고린도 전서 2장과 3장에 보면 바울은 사람들을 세 부류로 나눕니다.
- 육에 속한 자 (프쉬키코스):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불신자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고전 2:14)
- 육신에 속한 자 (사르키노스) :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육신을 따라 사는 자 (3:1)
- 신령한 자 (프뉴마티코스): 성령을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고 판단하는 자 (2:15)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육신에 속한 자들 즉 신앙적인 어린아이라고 책망합니다. 그들은 분명히 예수를 믿고 거듭난 자들이었지만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하고 도리어 세속적이요 육체적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세상 기준에서 비추어 판단하고 세속적인 것을 얻기 위하여 행동합니다.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있는 분열이 그 증거입니다.
현재 교회를 괴롭히는 자들을 유다는 육에 속한 자라고 부릅니다. 이들에 대하여 유다는 신자들에게 사도들의 말을 기억하라고 권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아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들의 말은 곧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특히 사도들의 말 중에서 중요한 것은 마지막 때에 관한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미 말세에 일어날 사건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언급하였습니다. 말세의 현상은 조롱하는 자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조롱하고 영적인 세계를 조롱하고 영혼의 구원을 조롱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말씀에 비추어보며 영적인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2. 신앙으로 자신을 건축해야 합니다. (20-21절)
종말을 사는 성도들은 내적으로 자신을 든든히 세워야 합니다. 즉 자신의 영적계발에 힘을 써야 합니다.
1) 믿음 위에 자신을 건축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경험이나 업적 위에 자신을 세우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활동합니다. 주를 믿는 성도들도 이 세상 가운데 살면서 그렇게 되기 쉽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다는 성도들에게 경험보다는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구원을 얻는 믿음이 아니라 믿음의 내용을 말합니다. 사도들이 전하여 준 복음의 진리를 말합니다. 복음의 진리는 사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므로 변경될 수 없습니다. 대적자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영적인 전투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담겨져 있습니다. 성도들의 신앙생활은 단순히 복음의 진리를 신앙 고백적으로 믿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기초가 되고 그 위에 건물을 건축하듯이 자신을 지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믿음의 기초 위에 여러 가지 행함의 열매들로 자기를 건축해 나가기를 원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2) 성령으로 기도합니다.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는 길은 성령으로 기도할 때 가능합니다.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은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며 성령의 뜻을 따라 드리는 기도를 말합니다. 그럴 때 기도의 능력이 생기고 열매가 풍성해집니다. 성도들은 계속하여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초대 교회는 간절한 합심 기도를 통하여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무리들은 약속하신 성령의 강림을 기다리며 흩어지지 아니하고 다같이 한자리에 모여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오순절이 되자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 - 청각적인 효과: 온 집에 가득.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 - 시각적인 효과: 성령의 임재는 120명을 압도하였고 그들에게 능력이 임했고 그들을 변화시켰습니다. 성령이 임하자 그들은 다락방에만 앉아 있지 아니하고 길거리로 뛰쳐나와 자기들도 알지 못하던 각국 언어들로 일제히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무엇을 말하였습니까?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것, 복음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이 필요하시면 얼마든지 그런 현상들을 나타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신비스런 현상 자체가 아니라 그 현상에 나타난 성령의 임재요 성령의 능력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은 사도들을 비롯한 성도들이 계속적으로 체험하였습니다. (행 4:8, 31; 6:3,5; 7:35; 9:17; 13:9,52). 초대 교회는 무리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마음으로 전혀 기도에 힘씀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시작된 교회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간증에는 힘이 있었고, 그들의 사역에는 풍성한 열매가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초대 교회는 성장하였습니다. 불과 바람으로 임한 오순절 성령 강림의 역사가 저희 팔로마 한인 교회에도 임하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합심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3)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킵니다.
더 나아가서 신앙의 건축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킬 때 가능합니다. 거짓 선생들은 하나님의 사랑 밖으로 나간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이 느껴지면 우리의 믿음이 더욱 견고해집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향하신 당신의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9)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잘 지켜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 15:10)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부어 주셨다고 합니다. (롬 5:5) 또한 성도들이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일은 곧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요, 자신을 지키는 일입니다. 성도들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마 6:14-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엡 4: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교우들이나 이웃에게 맺힌 것들이 있습니까? 금년이 다가기 전에 반드시 풀어야 합니다.
4)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립니다.
20-21절에 동사가 여러 개 나옵니다. 세우라, 기도하라, 지키라, 기다리라. 그중에 세 개는 분사요 하나만 본동사입니다. 분사의 역할은 본동사를 수식합니다. 본동사는 명령형으로 표현된 ‘기다리라’입니다. 말세에 거짓 선생들이 판을 치는 악하고 험한 세대 속에서 성도의 바른 자세는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면서 무엇을 합니까? 자신을 믿음 위에 세우고 성령으로 기도하고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면서 재림의 주를 기다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기 위함입니다. 성도들은 주님 앞에 설 준비를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은 재림을 맞이할 성도의 자세를 가르쳐 주시면서 주인에게 충성된 종과 불충한 종을 대조하여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라고 하십니다. 계 2: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고전 4:2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그리스도 안의 수많은 성도들이 주님의 재림의 영광에 함께 참예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의 건축은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가짐으로 이루어집니다. 영생에 이를 것을 기대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립니다. 롬 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합니다.
3.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22-23절)
성도는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물들지 않고 세상을 위하여 사명을 감당하는 자들입니다. 성도의 삶은 세상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들어가 살면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참된 성도는 자기 발전에만 관심을 갖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가집니다.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운다는 것은 아주 적극적인 삶을 표현합니다.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에 많은 신자들이 미혹되었습니다. 특히 유다는 성도들이 세 종류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라고 합니다. 이들을 비판하거나 중상하지 말고 사랑과 긍휼로 대하라고 합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비판이 아니라 격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구원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권합니다.
1) 의심하는 사람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사람들을 멸시하지 말고 도리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면서 그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품어야 합니다.
2) 불 속에 있는 사람들
불은 심판을 가리킵니다. 구원 받지 않은 이들은 지옥불 속에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이 불 속에 빠지지 않았기에 그들을 구해내야 합니다. 주님의 강한 손길을 의지하면서 그들을 구원해야 합니다.
3) 육신의 정욕으로 더럽혀진 사람들
육체로 더러워진 옷이란 육체의 정욕을 따르는 생활을 가리킵니다. 이들 또한 거짓 선생들에게 깊이 빠진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너무 부패하여서 타락한 육체의 악취가 옷까지 배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에도 긍휼히 여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물들지 않도록 조심스런 태도로 대하여야 합니다. 성도가 먼저 구별된 삶을 살아야 영적으로 부정한 다른 사람들을 살려낼 수 있습니다. 범죄한 자들을 볼 때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 시험받지 않도록 유의하고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들을 대하여야 합니다. (갈 6:1)
4.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24-25절)
거짓된 가르침이 난무하고 각종 죄와 허물로 가득찬 세상에서 성도들이 과연 주님이 다시 오는 날까지 온전히 버틸 수 있습니까? 이미 20-21절에 말세를 사는 성도들이 재림의 주를 온전히 기다리는 것은 성도의 노력만으로 되지 않기에 유다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언급하였니다. 성령의 기도.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긍휼.
이제 유다는 24-2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편지를 마무리 짓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온 우주에 하나님은 한 분만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성도들을 넘어지지 않게 지켜 주셔서 자기의 영광 앞에 흠 없이 큰 기쁨으로 서게 하십니다.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시 37:24) 성도들도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릅니다. 그러나 아주 망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끈질긴 사랑으로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그분을 가리켜 ‘우리의 구주’라고 부릅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사랑과 은혜와 영광을 가지고 계십니다. 모든 성도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은 은혜 가운데 베푸신 믿음을 붙들어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유다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분을 떠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원 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영원토록 영광과 위엄과 능력과 권세가 하나님께 돌려져야 합니다.
유다서 기자는 말세를 사는 성도가 신앙의 건축을 하는 비결을 제시합니다. 믿음과 사랑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영적으로 깨어 있어 신실하고 거룩한 삶을 살라고 권면합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 이웃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소망 중에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우리를 사랑으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다 이루어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분별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팔로마한인교회 모든 교우들이 각자 성장하고 성숙해져야 합니다. 그와 더불어 우리의 시선을 아직도 믿음이 연약하거나 주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돌리며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 귀한 사역에 동참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의 일원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