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서 1장 11절 가인의 길 - 조성노 목사
설교본문 : 유다서 1장 11절
설교제목 : 가인의 길
설교자 : 조성노 목사님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상반절을 다시 봅니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가인의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는 저주입니다. 가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인류사 최초의 살인자입니다. 황순원씨의 장편소설 가운데 <카인의 후예>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해방 이후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토지개혁을 합니다. 완전히 사회가 전복됩니다. 숙청과 보복의 피비린내가 진동합니다. 황순원 씨는 이북 사람입니다. 평안남도 대동강에서 실제 일어난 사건입니다. 험악한 난세를 소설로 그렸습니다. 구약 창세기에도 가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에덴에서 추방당해 두 아들을 낳는데 가인과 아벨을 낳습니다. 두 아들이 성장해 가인은 농사짓는 농부가 되고, 아벨은 양 치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각각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이 동생 아벨의 제사만 받으신 겁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가인은 피의 제사가 아닌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기에 안 받으신 겁니까? 아닙니다. 흔히 그렇게 해석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는 아직 율법시대 이전이었기에 그들에게까지 피의 제사 원칙을 적용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가인이 곡식으로 제사를 드린 것은 그가 농부였기 때문입니다. 아벨은 목자였기에 피의 제사를 드린 겁니다. 그럼에도 왜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을까요?
신약 히브리서 11장 4절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고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다”고 합니다. 피의 제사 여부가 아니라 믿음의 제사 여부였습니다. 아벨이 드린 믿음의 제사는 구체적으로 어떤 제사였을까요?
창세기 4장 3절이하입니다.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기에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가인의 소산으로는 첫 열매라는 말이 없는데, 아벨의 제물에는 양의 첫 새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제사의 자세를 알 수 있습니다. 예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내 믿음을 온몸으로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예배는 내 믿음의 결산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보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습니다. 예배가 부실하면 그 사람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부실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배에 관심이 없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대해 소홀하다는 뜻입니다. 가인이 대충 자기 곡식으로 제물을 삼은 것은 그에게 하나님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얘깁니다. 아벨이 첫 새끼를 드렸다는 것은 자기의 소유 전부를 드렸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예배요 산 제사입니다. 예배는 통과의례가 아닙니다. 예배는 나의 모든 것, 내 믿음의 전부를 의미합니다.
예배는 한 주간의 첫 날인 주일을 지킴으로써 한 주간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겁니다. 예배는 내 수입의 첫 열매인 십일조를 바침으로 내 모든 수입과 소유를 주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은 나의 모든 노동을 오직 주를 위해 쓰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이게 예배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가인의 예배는 이런 고백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에 이런 고백을 담아야 합니다. 자기의 전 존재를 담아야 합니다. 그러나 가인에게 예배는 종교적 요식행위였습니다. 가인에게는 믿음의 제사가 없었기에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겁니다. 하나님이 양의 고기와 피에 허기진 분이 아닙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받고자 하는 것은 우리 믿음과 존재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짐승의 피와 고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거기에 담긴 우리 믿음, 우리 존재 자체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예배와 믿음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창세가 4장은 이점을 분명히 합니다. 4절 하반절 이하를 다시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여호와께서 아벨의 제물만 받으신 게 아니라,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습니다.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제사를 드리면 우리와 우리 제물을 받으십니다. 예배의 제물은 우리 자신을 드리는 행위이기에 하나님이 우리 예배를 받으셨다는 것은 우리 존재 전체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내 존재가 담긴 헌상이 아니면 하나님은 받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찬송과 기도, 헌금이 많고 성도가 차고 넘쳐도 거기에 자기 존재를 담지 않으면 그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적 쇼입니다.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가인의 제사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멀쩡합니다. 아벨의 제사와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너희는 결코 그런 가인의 길을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인류사 최초의 살인이 예배와 관련이 있습니다.
창세기 4장 7절입니다. “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고 가인의 것은 안 받으시자 가인이 화가 나서 안색이 변했다고 합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창세기 4장 7절 말씀입니다. 가인이 평소에 선하지 않고 악했다는 지적입니다. 네가 늘 선하게 살아왔다면 어찌 내게 이런 제사를 바쳤겠느냐는 겁니다. 평소 그 사람의 삶이 예배를 좌우합니다. 악하게 살던 사람이 주님 앞에 나와 산 제사를 바칠 수 없습니다. 가인이 평소에 악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도 악한 제물, 악한 제사를 바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예배는 내 삶의 결론, 열매입니다. 마태복음 23장 35절을 보면,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라고 합니다. 아벨이 어째서 주님까지 인정하신 의인이었을까요? 양의 첫 새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가? 형에게 돌에 맞아 죽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이미 형에게 죽기 전부터 의인이었습니다. 의인이었기에 그가 하나님께 의인의 제사를 드린 겁니다. 요한1서 3장 12절입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이미 가인은 악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산 제사가 아닌 죽은 제사를 드린 겁니다. 마침내 동생을 돌로 쳐죽이는 살인자가 된 겁니다. 잠언 15장 8절입니다.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아벨의 제사는 정직한 의인의 제사였기에 받으셨고, 가인의 제사는 형식적인 제사였을 뿐 아니라 악한 자에게 속한 악인의 제사였기에 받지 않으신 겁니다. 이미 가인이 제사 드리기 전에 그 손에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악에 가담하면 불행해집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그 사람의 제물을 받지 않으십니다. 결국 그 사람은 가인의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시면 불행해 집니다. 다음주일이 맥추감사주일입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가인의 제사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산 제사를 드린 아벨의 길을 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