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1장 1-14절 갈릴리 바닷가에 서 계신 부활의 주님 - 옥한흠 목사
설교제목 : 갈릴리 바닷가에 서 계신 부활의 주님
설교본문 : 요한복음 21:1-14
설교자 : 옥한음 목사님
오늘은 전 세계 교회가 기뻐하는 부활 주일입니다. 무덤을 찾은 여인 들을 향해서 천사들은 이렇게 외쳤 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 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 라"(막16:6). 얼마나 놀라운 복음입 니까?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5장 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 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 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느니 라"(3,4절).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 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 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 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 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 라"(16,17절).
"아담 안에서 모든 사 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22절). 이 얼마나 장엄한 부활 선언입니까? 우리는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듣고 믿어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 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자녀 된 것 을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되겠습니 다.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신 예수님 은 40여일 동안 제자들과 자주 만나 셨는데, 21장은 제자들을 공적으로 만나신 세 번째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들이나 베 드로를 개인적으로 만난 것 외에 열 제자들과 한꺼번에 만나셨고, 나중 에는 도마까지 포함한 열 한 제자들 과 함께 만나셨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 보면 다시 일곱 제자를 찾아 오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읽은 이 본문 말씀의 내용을 읽을 때마다 참 마음이 따뜻 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어떤 의미에 서 저는 이 본문을 참 사랑합니다. 읽고 묵상 할 때마다 참 좋다 하는 생각을 합니다. 왜 그런지 압니까? 우리 생각에는 예수님이 새 몸으로 부활을 하셨으니 그리고 그는 몹시 영광스럽고 거룩하신 존재가 되셨으 니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같은 사 람하고는 상당히 거리가 있을 것이 라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바닷가에 찾아오신 예수님, 고기 잡는 제자들을 만나신 예수님 을 보면 너무나 인간적이시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 답지 않게 너무나 인간적이다 느낌 을 받습니다. 저는 이게 좋은 거예 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과 함 께 웃을 수 있고 울 수 있는 주님이 바로 부활의 주님이시다. 부활하셨 다고 해서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그 런 자리에 계시는 분이 아니고 역시 우리와 함께 웃을 수 있고 울 수 있 는 인간적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가 이 이야기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 다. 그러니까 자연히 진한 감동이 몰려오는 것이지요. 아마 여러분도 그러리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와 다른 6명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예루살렘에서 만 나 뵌 후에 고향인 갈릴리로 돌아 왔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보고 갈 릴리에 가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와서 그 들은 여러 날을 아마 무료하게 보내 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날 오겠다 약속을 안 하셨으니 까 주님이 나타나실 때까지는 기다 려야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여러 날 보내다 보니 자연이 아마 좀 적 적했던 것도 사실이고 또 다른 이유 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어느 날 베드로가 갑자기 '나는 오늘밤 고기를 좀 잡으러 가야 되겠 어.' 이렇게 말을 던지니까 다른 6 명의 제자들도 '우리도 따라 갈게.' 그래 가지고 이 7명의 제자가 바다 로 가서 배를 타고 고기 잡으러 밤 에 나갔습니다. 왜 갑자기 베드로가 고기 잡으러 가려고 했을까? 이것을 놓고 성경을 해석하는 분들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요. 어떤 분은 '3 년 전에 예수님을 따라 가느라고 인 정사정 없이 다 내 버리고 갔던 배 요, 그물을 다시 베드로가 손에 들 고 배를 타고 갈릴리로 나갔다는 것 은 그는 영적으로 이미 잘못되어 있 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영적으로 병이 들었고 타 락했는지도 모른다. 베드로는 지금 잘못하고 있다.' 이렇게 해석을 하 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해석을 받아들이 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 미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 차례 만 났기 때문에 예수님을 의심한다든지 타락했다든지 하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런 해 석이 우리에게는 공감을 느끼게 합 니다. '베드로와 그 제자들은 갈릴 리에 와서 여러 날을 있으면서 생활 비를 충당해야 될 어려움이 직면했 을지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 입니다. 황소 같은 장정 7명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매일 빈둥거리는 것, 이것은 쉬운 일 아닙니다. 그리 고 조그마한 시골의 정서상 그것은 용납되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또 고 향에 있는 형제, 친지들 앞에서는 그것은 바람직한 행동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언제 오 실 지 잘 모르는 판국이니까 '주님 이 오실 때까지 뭔가 일을 해서 먹 고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그러니 나 는 고기 잡아 와서 그걸 팔아서라도 살겠다.' 아마 베드로가 이렇게 생 각했던 것이 틀림이 없다고 생각합 니다. 저는 이 해석이 어떤 면에는 매우 합리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교회 안에서 신앙은 참 좋 아 보이는데 자기 생활에 무책임한 사람들, 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일 하기 싫으니까 날마다 기도하네, 전 도하네, 그런 데 관심을 가지고 매 일 소일하는 사람, 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가족들은 어떻게 해서라 도 살아 보겠다고 고생을 하고 있는 데 자기는 날마다 교회에 와서 빙빙 도는 사람, 저는 정상이라고 보지 않아요. 남의 신세를 많이 지고 있 는 딱한 처지에 있으면서, 3D든 4D 든 가리지 아니하고 소매 걷어붙이 고 일할 생각을 해야지, '이 일은 힘들다, 저 일은 남의 눈에 망신스 럽다' 하면서 일은 별로 하지 아니 하고 성경공부 열심히 좇아 다니는 사람, 나는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생 각합니다.
베드로와 여섯 제자들도 그들의 생활은 그들이 책임을 져야 하지 않 습니까? 그러므로 배를 탔다고 보 고, 또 잘 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 들은 3년만에 다시 그물을 싣고 바 다로 나갔기 때문에 아마 처음에는 손발이 잘 맞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잘하던 일이라도 한 3년 가 까이 손을 떼고 있다가 다시 잡으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지요. 그래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갈릴리 고기잡 이는 야간 작업인데 그날 따라 이상 하게 고기가 잡히지를 않았습니다. 밤새도록 땀을 흘리며 그들을 열심 히 그물을 던졌다 당겼다 해 보았지 만 허탕이었습니다. 얼마나 그들의 심정이 착잡했을까요?
아침이면 만선의 깃발을 펄럭이 며 항구로 돌아가리라 기대했던 꿈 이 물거품처럼 사라질 새벽녘에 멀 리 떨어진 해안에서 누군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애들아 너희에 게 고기가 있느냐?' 요사이 우리말 로 말하면 '고기 좀 잡았느냐?' 이 런 소리를 지르는 분이 할 분 서 계 셨습니다. 제자들은 맥 빠진 소리로 '아무 것도 못 잡았소.'하고 대답했 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의 사랑을 특 별히 받고 있던 요한이 알아차렸습 니다. 물가에서 소리를 지르고 계시 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 그리고는 옆에 있는 동료들에게 '주님이 서 계신다.' 이렇게 알려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 으면서 여러 가지 느끼는 것이 많습 니다. 제자들이 밤새도록 빈 그물을 던지고 있는 갈릴리 바닷가에 와서 서 계신 부활의 주님, 상상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습니까? 얼마 나 감동적입니까? 밤새도록 허탕만 치고 있던 제자들이 구슬땀을 흘리 고 있는 그 바닷가에 오셔서 조용히 지켜보고 서 계시는 부활의 주님, 여러분, 영적인 상상력이 있으면 최 대로 동원해서 한번 그 아름다운 장 면, 그 감동적인 장면을 한번 그려 보세요. 언제부터 부활의 주님은 그 바닷가에 와서 서 계셨을까? 초저녁 부터일까? 밤중부터였을까? 아니면 새벽 바로 그 때 오셨을까? 저는 밤 새도록 주님이 그 자리에 계셨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밤 에 계셔도 어두워서 제자들이 볼 수 없었을 것은 당연합니다. 또 날이 새어서 제자들이 누가 서 있는 것을 보아도 예수님이 자기를 그들에게 나타내지 아니하였다면 제자들은 절 대로 발견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예를 갖고 있지 않 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와 함께 한 십 리 길을 같이 동행한 일이 있었 지요. 두 제자는 낯선 사람이 옆에 다가 오기 때문에 같이 동행할 사람 인가 보다 생각하고는 같이 가기로 하고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걸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그들은 성경 말씀을 들었고, 그 말 씀을 들을 때 가슴이 뜨거워지는 감 동도 느꼈습니다만 그분이 예수님인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은 주님께서 눈을 열어 주는 자만이 발견하게 되 있어요. 나중에 그들이 그 예수님을 발견했을 때, 주님은 그 앞에 계시 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예수님이 꼭 그 시간에 오셨다 그렇게 말하고 싶 지 않아요. 이미 그물을 던지고 끌 어올리고 한 마리도 못 잡은 허탈감 을 가지고 또 던지고 아주 힘든 수 고를 밤새도록 하고 있는 그 갈릴리 바닷가에 주님은 오래 전에 와서 계 셨고 밤새도록 일하고 있는 제자들 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 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믿으셔도 전 혀 잘못된 것 아닙니다. 한번 물어 볼까요? 이 자리에 주님이 계셔요? 안 계셔요? 부활하신 주님 이 자리 에 계셔요? 안 계셔요? 언제부터 계시나요? 예배 시작한 10시부터 계 시나요?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그물을 던지는 바닷가에 와 서 계십니다.
제자들이 아무 것도 잡은 것이 없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배의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그 리하면 잡으리라.'고 지시하셨습니 다. 그 말씀대로 했더니 큰 고기 153마리가 잡혔어요. 조그마한 그물 에 153의 고기가 바동거리는 것을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신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물 은 찢어지지 아니했습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은 밤새도록 빈 그물을 가지고 고생한 것은 나중에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 생각하니 헛수고가 아니었습니 다. 빈 그물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홍해 가 앞을 가로막는 위기가 있었기에 바다가 갈라지는 체험을 할 수 있었 습니다. 목이 타는 갈증을 경험했기 에 큰 바위가 갈라지면서 생수가 솟 는 놀라운 일을 볼 수가 있었습니 다. 먹을 것이 없이 고생을 했기에 떡 5덩이,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을 먹이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을 그 들은 볼 수 있었습니다. 12년을 혈 루증으로 고생을 하였기에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자마자 낫게 되는 기 적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빈 그물을 가지고 밤새도록 고통하고 고생하는 것, 부 활의 주님을 만나는 사람에게는 절 대로 헛수고가 아님을 믿습니다. 일 시적인 고통은 될 수 있고, 한동안 의 눈물과 한동안의 어려움은 되었 을지 모르지만 부활의 주님 만나면 그것은 영광스러운 고통이라고 우리 는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당신의 그물이 비어 있습니까? 밤새도록 수 고를 하였지만 얻은 것이 없습니까? 이럴 때 중요한 것은 우리 인생 바 닷가에 서 계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무엇 이라고 하시는지 들을 수 있어야 합 니다. 기도하면 여러분의 마음에 주 님의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하나님 의 말씀을 아침 일찍 일어나서 조용 히 펴놓고 눈을 감고 묵상하면서 읽 어보십시오. '아, 이 말씀이 바로 나 에게 주시는 주의 말씀이구나. 주의 음성이구나.' 하는 것을 여러분이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빈 그물을 가진 자는 그 음성을 더 빨리 들을 수 있습니다. 다른 형제들과 다락방 에서 말씀을 나누는 중에 다른 형제 들의 입을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들 려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렇구나. 저 이야기는 나를 위한 이야기야.' 손을 털고 배에서 내리라고 하시는 지, 아니면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고 하시는지,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그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의 빈 그물을 채우는 비결입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고기 잘 잡는 자기 능력을 너무 과신한 나머 지 그래서는 안될 사람이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자신 있게 세상을 살 다가 갑자기 어느 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빈 그물의 인생을 체험 하는 되는 사람이 왕왕이 있습니다. 아마 '내가 그런 사람이다'하고 마 음에 짚이는 분들은 귀를 기울이세 요. 또 나도 그럴 위험이 있다 하는 분들도 귀를 기울이세요. 빈 그물의 인생이 된 다음에 부활의 주님이 옆 에 서 계시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 리고 그 분을 통해서 과거의 돈으로 도 명예로도 살 수 없었던 하늘의 부활을 그 빈 그물에 가득히 채우는 새로운 인생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분들이 교회 안에 많아요.
저는 좀 극단적인 예가 될 지 모 르지만, 한 사람의 예를 여러분에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제가 대학을 다 니고 있었을 때, 4년 동안 많은 강 의를 들었습니다. 영문학을 했기 때 문에 들어도 될 강의, 들을 필요도 없는 강의, 이것저것 주어서 들었는 데 그 많은 강의 중에서, 지금도 몇 십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제 마음에 서 깊은 자국을 남긴 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강의가 있어요. 그러 므로 '대학에서 당신 제일 감동 있 게 들은 강의가 뭐냐?' 하면 저는 주저하지 않습니다. 딱 이것이다 하 고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수로 서 강의를 하시는 분들 강의 잘하면 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세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있 던 오화섭 교수가 한 학기 동안 제 가 다니는 성균관대학교에 와서 희 곡을 가르쳤습니다. drama를 가르 쳤어요. 영문 drama를 가르쳤는데 그 당시 강의 제목이 Arthur Miller 가 쓴 'Death of a Salesman' 즉, ' 세일즈맨의 죽음'이라고 하는 유명 한 희곡을 한 학기 동안 강의했어 요. 저는 자랄 때부터 청교도적인 분위기에서 자랐기 때문에 연극하면 귀를 막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마귀가 작당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자랐어요. 연극이다, 드 라마다, 춤이다 이런 소리하면 이것 은 완전히 타락된 예술이라고 생각 을 하고 자랐기 때문에 아주 흥미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 교수가 와서 강의를 하는데 저는 완전히 매료되 어 버렸습니다. '야, 드라마가 이런 것이구나. 음악이라는 것이 이런 것 이구나. 예술이라는 것이 이렇게 파 워가 있구나.' 하는 것을 제가 비로 소 알게 됐지요. 그래 가지고 한 학 기 동안 그 시간은 정말로 제 정신 다 빼앗기고 들었어요. 참 감동적인 강의였습니다. 명강의였어요.
그래서 그 분을 늘 기억하고 있 는데 그 분에게 그 당시 아주 총명 한 딸이 한 분 계셨어요. 연세대를 나오고 그리고 이화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딸인데 '성야'라고 하 는 희곡을 발표해서 데뷔를 했고, 그 후로 작가로 배우로 방송인으로 또 수필 작가로서 활동을 아주 활발 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숱한 소녀들 의 편지나 엽서에 그녀의 글귀가 인 용될 정도로 사랑 받는 작가였습니 다. 그런데 이 오혜령 씨가 최근에 '당신 없는 인생은 빈 그물이오니' 라는 책을 내 놓았어요. 그래서 제 가 관심이 있어 가지고 사서 보았습 니다. 오래 전에 그가 30대의 젊은 나이에 암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소 식을 한번 들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 분이 지금까지 살아 계시는구 나.' 하고는 제가 그 책을 사 보았 어요. 그는 미션 스쿨을 다녔기 때 문에 기독교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요. 그러나 흔히 똑똑한 지성인들이 잘 빠지는 길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살아 계심 을 안 믿으려 하고 신앙생활은 인생 의 실패자들이나 매달리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곁길로 가는 그런 사례들 이 많이 있어요. 교만한 거지요. '나 는 그물을 던지면 얼마든지 많은 고 기를 잡을 수 있다'고 하는 자기 과 신 때문에 이 오혜령 씨도 예수 없 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갑 자기 지금부터 한 20여 년 전 위암 과 임파선 암을 진단 받고 3개월 시 한부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날마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 람이 되었습니다. 매일 달력의 숫자 에 빨간 색연필로 빗금을 쳐나가면 서 죽을 날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 고 있었습니다. 예정된 죽음의 날자 가 며칠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물만 먹어도 토하고 혈변을 보는 고 통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매 주마다 꽃을 보내주는 사람이 있었 다고 합니다. 그날도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메모와 함께 백합50송이를 보내왔습니다. 그는 반시간 가까이 꽃에 얼굴을 파묻고 가만히 있었다 고 합니다.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 했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갑자기 그 녀의 목덜미를 낚아채는 강한 손길 을 느꼈습니다. 순간 그는 정신없이 방바닥에 나동그라졌습니다. 직감적 으로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 기를 찾아 오셨다는 것을 느꼈습니 다. 그의 그물이 텅 비어 있을 때 주님께서 실패의 현장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는 반사적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당신은 대체 누굽니 까? 왜 죽음의 한복판에까지 따라 오시는 것입니까?' 그 말을 내 뱉고 나자 그 동안 주님을 나 몰라라 하 면서 마음대로 살았던 자기 죄에 대 한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어디서 부터 회개해야 할지 몰라 눈물만 쏟 아졌습니다. 며칠동안 화선지에 붓 글씨로 자기 죄를 회개했습니다. 수 십 개의 양초가 녹아 내릴 때까지 회개하고 또 했습니다. 그렇게 회개 하기를 반년 가까이 지난 어느 날이 었습니다. 그날도 기도와 찬양을 하 며 예배를 혼자 드리고 있었는데 온 몸의 오한이 덮쳐 왔습니다. '이제 죽는 시간이 다가 왔구나.' 죽음을 예감했습니다. 너무 추워서 이불깃 을 잡아당기는데 겨드랑이에 잡히던 임파선 암 덩어리가 만져지지 아니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깨에 복숭아 씨만 하던 멍울도 사라져 버렸습니 다. 또 복수로 차 올랐던 배가 꺼져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살아 계신 주님이 자기를 찾으신 것을 알았습 니다. 그의 그물은 고기로 가득 차 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지금 그는 경기도 어느 조그마한 마을에 서 버림받은 노인들을 돌보는 평화 의 집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는 하루 9시간을 기도하는 시간에 바친다고 합니다.
그가 쓴 글을 제가 읽다가 아주 감동적인 내용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당신 없는 생의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물고기가 잡히기를 바랐던 지난 나날들은 죽은 시간이었습니 다. 오 주님, 이제 당신께서 그물을 채워 주소서. 그러면 저는 비로소 살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자리에 서 계신 부활의 주님, 당신 없이 한평 생 수고해 보아야 우리 인생은 빈 그물이옵니다. . 비록 저희 인생의 가장자리에 서 계신 당신을 지금 당 장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저 희의 계획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당 신께 대한 신뢰 속에서 새로 시작하 려는 각오가 설 때 저희 행위에 방 향과 성취가 부여됩니다. 당신은 가 장자리에 계시지만 늘 저희에게 그 물을 이렇게 혹은 저렇게 던지라고 분부하고 계시기 때문이옵니다. 날 마다 호숫가에서 저희를 기다리시는 당신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너무 영감 있고 아름다운 고백이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마 이와 같은 고백을 해야 될 분들이 이 자 리에 많이 계실 것입니다.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이 서 계시 는 것을 보자 급히 뭍으로 나왔습니 다. 와서 보니 숯불이 이글이글 타 고 있었고 그 위에는 떡과 생선이 향긋한 냄새를 피우며 익어가고 있 었다. 예수님은 베드로 더러 잡은 고기를 좀 더 가지고 오라고 하셨습 니다. 고기를 더 많이 숯불에 얹어 서 구웠습니다. 준비가 다 되자 예 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13 절을 한번 보세요.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예수께서 가셔서, 자 기가 직접 가 가지고 숯불 위에 있 는 떡을 가져다가 베드로에게 갖다 주고, 도마에게 갖다 주고, 요한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일일이 떡을 갖다 주시고, 그 다음에는 생선도 숯불 위에서 뜨끈뜨끈한 그 생선을 또 베 드로에게 갖다 주고, 도마에게 갖다 주고, 요한 에게 갖다 주고 일곱 제 자에게 다 갔다 주셨습니다. 이게 13절 이야기 아닙니까? 여러분 얼마 나 아름다운 장면이에요? 어린아이 를 앉혀 놓고 열심히 먹이려고 하는 어머니 같은 모습을 우리는 봅니다. 밤새도록 고기 잡다가 지치고 배고 프고 한기를 느끼는 제자들에게 이 것만큼 반가운 선물이 어디 있을까 요? 아침해가 두둥실 떠오르는 바닷 가에서 따뜻하게 데운 떡과 생선으 로 배를 불리면서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해 굳어 있던 얼굴이 서서히 풀리 고 긴장했던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 고 온유하신 부활의 주님을 조용히 지켜보면서 그 시간을 보내는 제자 들을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 오.
저는 이런 장면을 보면서 참 좋 은 예수님이시다, 부활의 주님에게 서 느끼는 인간미, 참 인간적이시다 하고 저는 감동을 받습니다. 인간적 이다. 부활하기 이 전에 우리와 똑 같은 몸을 가지신 주님이 이런 행동 을 하셨다면 조금도 이상하게 느껴 지지 않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고 기 구워서 갖다 주시고, 떡 구워서 갖다 주시고, 너무 인간적이지 않습 니까? 부활의 주님이 이런 분이라고 생각하면 그분이 지금 내 곁에 계시 고, 내 마음에 계신다는 것을 느끼 는 것,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4장15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 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그래요. 우 리의 연약함을 다 동정합니다. 배고 픈 것 아닙니다. 지친 것 압니다. 밤 새도록 잠자지 못한 것 압니다. 실 패로 인해서 마음이 가라앉아 있는 것을 압니다. 기분 좋은 것도 없고 마음이 끌리는 것도 없는 지친 인생 임을 우리 주님 너무나 잘 알고 계 십니다. 그래서 주님 이렇게 말씀하 시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 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 게 하리라."
따끈한 떡을 가지고 따 끈한 생선을 가지고 너희를 쉬게 하 리라. 고린도후서 9장 8절을 보십시 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 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얼마나 아 름다워요?
여러분 만약에 상황을 좀 바꾸어 서 예수님이 이렇게 했다고 한번 가 정해 봅시다. 밤새도록 고기를 못 잡아 녹초가 되어 가지고 지친 제자 들이 물에서 올라오는데 예수님께서 근엄한 얼굴로 '자, 전부 이리 모여. 나하고 기도하자.' 만약 그랬다면 어떨까요? 또, 충분히 그럴 수 있잖 아요. '너희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는데 한 마리도 못 잡았잖아? 분명히 이유가 있을 꺼야. 나하고 그 이유를 좀 분석하고 회개할 것은 회개하자. 전부 모여.' 아마 그랬다 면 어떻게 될까요? 얼마나 그 분위 기가 살벌할까요? 한번 생각해 보세 요. 그렇잖아요? 가뜩이나 베드로와 같이 며칠 전에 자기를 가장 중요한 순간에 3번이나 부인했던 과거를 가 지고 있는 사람을 앞에 놓고 예수님 이 할 말씀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요즈음 말로 손 좀 보아야 할 사람 아닙니까? 그러니 밤새도록 떨었던 지 못 먹었던지 상관 않고 '베드로, 이리 좀 와. 너 양심이 있냐? 없 냐?' 이 말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 요? 얼마든지 예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그 하고 싶은 모든 말 씀을 가슴에 묻어 두시고 예수님은 부지런히 떡을 떼어서 제자들을 먹 이시고 생선을 구워서 먹이시고, 추 운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따뜻한 분 위기를 만들어 주시려고 애를 쓰시 는 모습, 얼마나 인간적입니까?
여러분, 사람에게 영은 육보다 중 요합니다. 사실입니다. 영적인 문제 는 육적인 문제를 앞섭니다. 그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문제를 다루기를 원하는 사람일수록 사람들 이 인간적으로 느끼고 있는 요구에 관심을 기울어야 합니다. 배가 고픕 니까? 먹을 거 줘야 해요. 병으로 고통 합니까? 그들의 고통에 조금이 나마 동참하는 자세를 가져야 돼요. 우리가 거룩한 일을 다루면 다룰수 록 좀더 인간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문제를 성공적으로 다룰 수 있는 지혜라고 말할 수 있 습니다. 굶주린 자에게 장황한 설 교? 감동이 없을 것입니다. 잠을 자 지 못한 자에게 성경공부? 그렇게 감동적인 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는 주님으로부터 이와 같은 사실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저도 젊었을 때는 상당히 사납다는 말을 많이 들 었는데, 이런 아름다운 예수님의 모 습을 보면서 좀더 인간적이 되려고 무척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사람이지 않아요? 그러기 때문 에 주님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여유 가 있다, 정말 훈훈하다, 포근하다, 이렇게 느끼지요.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밤새 헛수고를 하고 있는 제 자들을 바닷가에 서서 지켜보신 부 활의 주님을 보았습니다.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물으시는 주님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는 빈 그물을 가득히 채워 주신 부 활의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 리라.' 지금까지 우리는 지치고 배 고픈 제자들을 위해 숯불에 떡을 굽 고 고기를 구워 일일이 먹여 주시는 부활의 주님을 보았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연약한 우리를 이 해하시기 위해 너무나 인간적인 부 활의 주님을 이제 우리는 한 평생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 은 우리가 빈 그물을 가지고 땀을 흘릴 때든지 만선의 기쁨을 안고 돌 아 올 때나 항상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분이 우리의 주님입니다. 그분이 부 활하신 주님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혼자 걸어가고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 좋으신 주님, 어떻게 말하면 너 무나 인간적인 주님, 이 분을 우리 는 모시고 이 험한 인생 길을 걸어 가고 있습니다. 외로울 필요가 없습 니다. 실패했습니까? 혼자 교통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픕니까? 혼자 흐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그 주님이 우리 곁에 계십니다. 내 빈 그물을 던지며 고생하는 그 바닷가에 서 계 십니다. 이 자리에 실패하고 빈 그 물을 계시는 분 있나요? 이 가운데 배고픈 분이 계시나요? 이 가운데 잠자지 못하고 고민에 빠져 있는 자 있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분을 만나세요. 그분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오스왈드 샌더스가 소개한 우리 가 잘 아는 시 하나 있지요? '모래 위의 발자국' 열 번, 백 번 들어도 은혜스러운 시가 되어서 제가 다시 한번 전문을 놓고 읽어보았습니다. 여러분, 눈을 조용히 감으시고 한번 감상을 해 보세요. 제가 목소리는 신통치 않지만 한번 읽어 드릴게요. 참 은혜스러운 시 아닙니까?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네/ 주와 함께 바닷가 거니는 꿈을 꾸었네/ 하늘을 가로질러 빛이 임한 그 바닷 가 모래 위에/ 두 쌍의 발자국을 보 았네/ 한 쌍은 내 것 또 한 쌍은 주 님의 것/ 거기서 내 인생의 장면들 을 보았네/ 마지막 내 발자국이 멈 춘 그 곳에서/ 내 인생의 길을 돌이 켜 보았을 때/ 자주 내 인생 길에는 오직 한 쌍의 발자국만 보였네/ 그 때는 내 인생이 가장 비참하고 슬펐 던 계절이었네/ 나는 의아해서 주님 께 물었네/ '주님 제가 당신을 따르 기로 했을 때/ 당신은 저와 항상 함 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그러 나 보세요/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 로 했던 그때 거기에는/ 한 쌍의 발 자국 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저를 떠나 계셨나요?'/ 주님께서 대답하 셨다네/ '나의 귀하고 소중한 아이 여,/ 나는 너를 사랑하였고 너를 조 금도 떠나지 않았단다./ 너의 시련 의 때 고통의 때에도/ 네가 본 오직 한 쌍의 발자국 그것은 나의 발자국 이었느니라./ 그 때 내가 너를 등에 업고 걸었노라."
너무 좋으신 주님, 부활의 주님, 영원히 살아 계신 주님, 우리 모두 와 함께 걷고 계십니다. 우리가 심 히 지쳐 걷지 못할 때에는 우리를 등에 업고 걸으시는 주님, 그분이 오늘 우리의 주님이시요, 부활의 주 님이십니다. 소망을 가집시다. 생명 을 다시 한번 가슴에 불태우면서 우 리 매일매일 승리의 삶을 살 수 있 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