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장 24-29절 예수님의 VIP(16) 회의를 극복한 사람 -이동원 목사
설교본문 : 요 20장 24-29절
설교제목 : 예수님의 VIP(16) 회의를 극복한 사람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금년(2007) 8월 23일자 타임즈 커버스토리는 “마더 테레사의 믿음의 위기)”(Mother Teresa`s Crisis of Faith)였습니다. 잘 아시는대로 마더 테레사는 1979년 12월 11일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인도 사리옷을 입고 샌들을 신고 상을 수상한 그녀는 수상 연설을 통해 이렇게 말한바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사랑할 수는 없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그는 먼저 배고픈 자, 벌거벗으신 자, 집 없는 자 중에 오신 분이셨으며, 따라서 우리는 바로 그런 이들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는 우리 마음에 계시며, 우리가 만나는 가난한 이들 가운데 계시며, 우리가 주고받는 미소 가운데도 계십니다.” 그런데 최근 마이클 반 델피트(Michael van der Peet)라는 사제에게 노벨상 수상 3개월 전까지 보낸 편지를 통해 그녀가 고백한 믿음의 고뇌가 “와서 나의 빛이 되어 주시오”(Come Be My Light)라는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여기서 마더 테레사는 이런 정직한 믿음의 회의를 털오놓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특별히 사랑하고 계신 듯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침묵과 공허가 너무 커서 그분을 보려 해도 보지 못하고 있으며 들으려 해도 듣지 못하고 있으며 기도의 혀를 움직이고자 해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발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영성학자들은 이런 “하나님의 부재”(Absence of God)의 경험을 가르쳐 “영혼의 어둔 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험하는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이런 영혼의 밤을 지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갖고 어느 정도의 시간을 지나다 보면 반드시 어떤 시점에서 믿음을 회의하는 시기를 지나게 됩니다. 어떤 회의는 매우 파괴적인 것도 있을 수 있으나 그러나 모든 회의가 다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것은 아닙니다. 어린 아기가 좀 자라게 되면 그의 입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말이 ‘왜’라는 단어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이런 ‘왜’라는 질문과 함께 자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정직한 믿음의 회의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중 하나인 도마가 이런 믿음의 회의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예수님이 눈앞에 등장하자 이것을 도마는 그의 상식적인 이성으로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믿을 수도 수용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도마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도마의 케이스를 통해서 믿음을 갖기 시작한 사람들이 조만간 반드시 부딪혀야 할 회의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믿음의 회의-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1. 회의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믿음에 대한 회의를 말하면 믿음 없는 사람으로 오해 받을 것을 두려워하는 나머지 우리들의 신앙 풍토에는 아예 회의에 대한 생각을 말하지 않는 그리고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경향이 존재합니다. 이것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저는 정직한 모든 회의는 진지한 구도적 태도를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께서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고 말씀하실 때 저는 주께서 구도적 자세를 격려하신 것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진지하게 구도하는 사람들은 결국 믿음의 해답을 얻고 믿음의 진보를 경험합니다. 여러분, 결코 질문하지 않는 학생들이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된 케이스를 보신 일이 있나요? 저는 20대초 신앙의 초기 단계에서 정말 많은 질문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의 저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정직한 의심을 표현했던 도마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12사도 중의 한 사람, 아주 소중한 예수님의 VIP가 된 것은 물론 인도까지 가서 선교하여 인도 선교의 문을 열고 순교하게 됩니다. 만일 당신이 정직한 의심에 쌓여 있다면 그것은 믿음 없음의 증거가 아니라, 유능한 전도자나 선교사가 될 징조인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25절에 나타난 도마의 솔직한 회의의 표현을 주목하십시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자, 이런 도마의 회의적 반응에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예수님은 그런 반응을 마귀적이라고 책망하셨나요? 아니지요. 주님의 대답을 27절에서 읽어 보십시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주님은 네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자신의 믿음을 검증하고 믿음의 진정성을 확인하고 네 안에 있는 회의를 극복하라는 격려가 아닙니까! 그것은 차라리 따뜻한 격려가 아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회의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믿고 있는 것이라면 진리를 두려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다시 한번 확인하십시다. 정직한 회의는 진리의 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의를 진지하게 표현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토론하십시오. 연구하십시오. 주님은 정직한 회의를 환영하는 분이십니다.
2. 말씀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개 회의를 창조적으로 극복하고 믿음에 이르는 사람들을 보면 어떤 구체적인 신앙 체험을 하거나, 말씀 연구를 통해 말씀을 신뢰하게 되는 이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특별한 체험이 가장 강력한 회의 극복의 방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회의를 극복하고 안정적인 신앙에 들어가려면 말씀에 대한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것은 성경 자체의 증언과도 일치합니다. 벧후 1장 16절 이하에 보면 사도 베드로는 그가 예수님과 함께 소위 변화산으로 알려진 산상에 올라가 예수님이 모세, 엘리야와 함께 등장하여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하시고 하늘의 문이 열리며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이 들리는 놀라운 체험의 목격자가 된 것을 회고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어서 이런 신비한 체험보다도 우리가 믿음의 근거로 붙들어야 할 더 확실한 것이 있다고 그는 증언합니다. 벧후 1:19입니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성경말씀)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다시 도마의 사건으로 돌아오십시다. 요한복음 본문에는 도마가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가락을 실제로 넣어 보았다는 증언이 없습니다. 유명한 화가 카라바지오(Caravaggio)는 도마가 실제로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는 것으로 그렸습니다만 그것은 성경의 기록과 다릅니다. 가장 성경적인 화가였던 거장 렘브란트(Rambrandt)는 오히려 도마와 제자들이 놀라와하는 모습만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에 더 가깝습니다. 자,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십시다. 예수님께서 내 옆구리에 손을 넣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실 때 도마가 보인 반응이 무엇입니까? 28절입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결국 도마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또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2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도마는 처음 신앙의 증거와 체험을 요구하는 제자였지만, 그는 마지막 단계에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만으로’ 믿는 제자가 되어 다시 일어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에 믿음의 닻을 내리는 사람만이 견고한 믿음의 항해를 계속할 것입니다. 회의를 극복하고자 하십니까? 그러면 무엇보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고 나서 40년 동안 성경을 연구해 왔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면 할수록 성경은 ‘사실의 책’이라는 확신이 더해 갑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서 성지순례 프로그램을 연례적으로 운영하는 이유도 성경의 기록이 사실이란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기회를 드리고자 함인 것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사실 아닌 것을 사실처럼 오해하고 믿는 것이 미신입니다. 분명한 사실을 거부하고 안 믿는 것은 불신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성경의 사실에 믿음의 뿌리를 내리고 사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이번 이웃사랑축제에 믿음의 삶을 살기로 결단한 모든 분들이 새생명반에서부터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되시기를 간절할 맘으로 권면하고 싶습니다.
3. 공동체를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회의는 극복할 수 있지만 모든 회의가 반드시 유용하고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회의는 불필하게 우리가 만들어 직면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도마가 회의에 빠지게 된 계기를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도마가 공동체를 소홀히 한 까닭이었습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24절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열두 제자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만일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 자신을 나타내셨을 때 거기 있었다면 다른 제자들과 달리 혼자 회의에 빠질 이유가 있었을까요? 그러나 불행하게 그때 도마는 어떤 이유인지 제자들의 모임에서 이탈해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은 공동체를 통해서만 성숙하도록 하나님은 디자인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고 말씀합니다. 예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성도의 교제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우리 교회 가장 중요한 교제의 장인 목장 교회에 꼭 참여 하십시오. 그곳이 우리가 진정한 믿음의 가족들을 경험하며 서로가 영적으로 자라가는 성숙의 마당인 것입니다.
과거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가장 찬란한 빛을 발하던 계절인 청교도 시대에 청교도들은 이런 신앙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일 예배를 성수한다. 가능한 주간 성도의 교제 모임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가 성경적인 명령 때문이기도 했지만, 거기에는 그들 나름의 아주 실용적인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그들은 서로 서로 이렇게 모임 참석을 격려했다고 전해집니다. “당신이 빠진 그날 모임에 주님이 특별하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부흥이 일어났다면 형제 자매여, 당신의 영적 손해를 상상해보라”고. 만일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고 주님의 기대를 성취하기 위한 거룩한 모임들을 세상에서 친구들과 약속한 모임보다도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떻게 우리가 ‘Again 1907’부흥을 기대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미국의 유명한 루스벨트 대통령 당시 그가 출석하던 워싱톤의 한 교회에 토요일 이런 전화가 걸려 왔다고 합니다. “내일 주일에 루스벨트 대통령께서 교회 예배에 참석하시겠습니까?” 이때 그 교회의 행정을 담당하던 분이 아주 기막힌 전설적인 명답을 한 것으로 전해옵니다.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참석을 불확실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께서는 예배에 반드시 참석하실 것입니다. 그분을 만나러 오시면 좋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분의 충고처럼 우리의 주일 모임에 올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기대하고 예배를 드린다면 그리고 목장 모임에 참여한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위대한 영적 부흥을 체험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믿음의 회의는 눈 녹듯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견고하게 자라 갈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찬란한 빛을 발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