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복음

요한복음 13장 31-35절 지금은 서로 사랑할 때 - 옥한흠 목사

재영구리 2023. 3. 3.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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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지금은 서로 사랑할 때
설교본문 : 요한복음 13:31-35
설교자 : 옥한흠 목사님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 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 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 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 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새 계 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 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 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 시간 예수님께서는 우 리 모두를 향하여

"지금은 서로 사랑할 때"라고 말씀하 십니다. 예수님의 이 음성을 한 분도 예외 없이 다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또 사랑 이야기 야?' 라고 하면서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분이 계실 지 도 모릅니다. 사랑에 대해서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제 웬만 한 이야기에는 별로 감동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사랑보 다 더 위대한 것이 무엇이겠 습니까? 사랑보다 더 강하 고,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겠 습니까? 저는 에멧트 팍스라 고 하는 분이 사랑의 위대함 과 아름다움에 대해 시적으 로 멋지게 표현해 놓은 글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충분한 사랑이 정복할 수 없는 어려움이란 없습니다. 충분한 사랑이 치료할 수 없 는 병도 없고, 충분한 사랑 이 열 수 없는 문도 없고, 충분한 사랑이 건널 수 없는 해협도 없고, 충분한 사랑이 무너뜨릴 수 없는 벽도 없 고, 충분한 사랑이 뉘우치게 할 수 없는 죄도 없습니다. 근심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 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앞날이 얼마나 절망적으로 보이는 지도, 매듭이 얼마나 단단한 지도, 저지른 실수가 얼마나 거대한 지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충분한 사랑 은 이 모든 것을 녹여버릴 것입니다. 충분히 사랑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이 세상 에서 제일 행복하고 강한 사 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사랑은 정말 위대 한 것입니다.

모 신문사의 주필이 쓴 글을 여러분이 읽어 보셨으 리라 생각합니다. 그분이 말 한 것처럼, 우리는 이미 생 활의 풍요가 주는 단맛을 얼 마 동안 경험해 보았습니다. 쉽게 말하면 잘 사는 재미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이미 맛 보았다는 말입니다. 그 러므로 이미 단맛을 경험한 우리가 보릿고개로 되돌아간 다는 것은, 기름 보일러 대 신 연탄을 떼는 시대로 돌아 간다는 것은 고통 그 자체일 수 있습니다.

이승은, 허헌선 두 부부가 '엄마 어렸을 적엔'이라는 인 형 작품을 전국을 순회하며 전시하여 수십만 명의 사람 들을 감동시킨 일이 있습니 다. 저는 가 봐야지 가 봐야 지 하면서도 한번도 못 가보 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서점 에 나가 책을 사서 보았습니 다. 저는 그 책을 보면서 얼 마나 눈시울을 붉혔는 지 모 릅니다. 불과 4,50년 전에 직 접 겪었던 어려운 시절의 추 억이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 는 것을 보자 마음에 뭔가 울컥하고 와서 닿았던 것입 니다. 엄마가 어렸을 적에 고생하던 것들을 우리가 달 콤한 추억으로 되씹는 것은 낭만입니다. 그러나 다시 그 시대로 돌아가는 것은 차원 이 다른 문제입니다. 그것은 낭만이라기보다 오히려 낭패 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이종택이라는 동요 작가 가 쓴 동요 중에 '새 고무신'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읍 내 장 십리 길 솔 갈비 한 짐 팔아/ 새 고무신 사고 맨 발로 돌아가는 시골 사는 돌 이/ 돌다리 넘어서서 또 한 번 신어보고/ 저 고갯마루부 터 정말 신고 가야지/ 돌이 는 맨발/ 타박타박 맨발"

여 러분이 어렸을 때 신었던 고 무신을 떠올려 보십시오. 새 고무신이 생기던 날의 흥분 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고 무신을 얼마나 애지중지했습 니까? 딱 한번 발에 잘 맞나 신어보고는 고무신이 혹시라 도 닳을까봐, 때라도 묻을까 봐 걱정이 되어 신고 다니지 도 못하고 두 손에 들고 집 으로 돌아가는 돌이의 모습 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었지 않습니까? 그 당시에는 고무 신을 신고 다녀도 그것을 고 통이라 여기지 않았습니다. 새 고무신이라도 생길라치면 천하를 얻은 것처럼 행복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완 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런 것 들로는 더 이상 행복을 느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 은 대단한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어렵던 시절처 럼 살라고 한다면 살기야 하 겠지만 그 때의 행복을 회복 한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가슴을 찢는 무서운 고통을 몇 고비 넘어야 할 지도 모릅니다. 삶이 주는 고통이 우리를 옥죄어 오는 바로 이러한 때 우리에게 무 엇보다 필요한 것은 사랑입 니다. 이와 같은 고통의 때 에 우리를 사람답게 만들어 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예수 님이 지금은 서로 사랑할 때 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보다 실감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의 배경을 자세히 살펴 볼 필요 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 들과 함께 마지막 성만찬을 들고 계시던 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식사 도중에 가룟 유다에게

"네 하는 일을 속 히 하라"(27절)고 말씀하셨 습니다. 그러자 가룟 유다는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 버렸습니다. 그가 나가는 모 습을 보고 예수님은 십자가 의 죽음이 이제 목전에 다가 오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습 니다. 주님은 얼마 후에 가 룟 유다가 몽둥이와 창을 든 대제사장의 군사들을 이끌고 자신을 잡으려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몰려 올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 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금 후 에 당할 그 참혹한 십자가의 죽음을 '영광'이라는 말로 표 현하고 있습니다. 31절을 보 십시오.

"가룟 유다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 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예 수님 자신이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예수님을 통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예수님 도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영광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를 앞에 놓고 영광을 얻으셨다고 말 씀하셨을까요? 요한복음 17 장 4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 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 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 롭게 하였사오니."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를 원했습니 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 까? 세상을 죄와 죽음의 속 박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주 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는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몸은 병으로 쓰러지 거나 무덤에 갈 수밖에 없지 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 수 있도록 축복을 안겨 주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 나님이 자기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바로 이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였 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 사람들의 죄를 지고 십자가 에 죽지 않고서는 이 뜻은 결코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 문입니다.

드디어 예수님 앞에 그 십자가를 져야 할 순간이 다 가왔습니다. 이 십자가를 지 고 나면 온 세상을 구원하시 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이 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 님이 십자가를 바라보시며 하나님이 영광을 얻으셨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 에 있습니다.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룸으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영화 롭게 하는 일이었던 것입니 다.

하나님은 자기를 영화롭 게 한 예수님을 그대로 내버 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 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시어 부활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그를 이 세상 모든 인류를 구원할 영원한 구원자로 높 이 세우셨으며 하나님 오른 편에 앉히사 온 천하가 그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주 곧 하나님이라 고백하게 만 들었습니다(빌2:9-11). 예수 님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 종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자 하나님은 그를 높이 들 어 세우심으로 영화롭게 하 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님에게 있어 십자가의 죽음 은 부들부들 떨면서 억지로 끌려가는 비참한 처형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을 영 화롭게 하고 자기 이름이 영 화롭게 되는 계시의 사건이 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서로 사 랑하라고 말씀하기 시작한 것이 십자가의 죽음을 피부 로 느끼게 된 그런 긴장된 순간부터였음을 기억할 필요 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사랑하라'는 말은 56회 나옵 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제자들 에게 고별 설교하시는 13장 에서 21장 사이에 44회나 나온다는 사실은 매우 특별 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라'는 예수님이 이 세 상을 떠나시기 전에 그의 제 자들을 앉혀 놓고 마지막으 로 하고 싶었던 말씀들 가운 데 가장 핵심 되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34-5절을 보십시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 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 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 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리 라."

예수님이 이와 같이 마 지막 떠나는 장면에서 서로 사랑하라고 제자들에게 당부 하실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제자들은 예수님 이 메시야인 줄 믿고 보란 듯이 3년을 따라다니지 않았 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그 예수님이 너무 맥없이 처참 하게 십자가에서 처형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얼 마나 큰 충격을 받았겠습니 까? 그런 절망적인 상황 앞 에서는 그들의 믿음도 파산 하고, 인격도 파산하고, 꿈도 파산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나중에 제자 들 중에서 내노라 하던 베드 로마저 공공연히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 하고 말았지 않습니까? 급하 면 스승도 버릴 수 있고, 믿 음도 팽개칠 수 있는 초라한 자신들의 모습을 서로 바라 보며 제자들이 얼마나 실의 와 절망에 빠졌겠습니까? 그 들이 이후에 겪게될 허탈감 이나 좌절감, 공포는 우리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 의 것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절망 적인 상황이 그들에게 닥쳐 오고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 다.

여러분, 이런 정신적인 위 기와 영적인 위기의 때에, 모든 위기의 총체라고 할 수 있는 이 상황을 만날 때 그 들로 하여금 꿋꿋하게 버틸 수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이겠 습니까? 그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끈이 무엇이겠습니 까? 돈이겠습니까? 명예겠 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보셨습니 다. 제자들로 하여금 살아남 게 할 수 있는 것은 사랑밖 에 없다고 보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강조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 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목전에도 사 랑만이 우리를 붙들어주고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그런 상황이 다가오고 있습 니다. 이런 때일수록 사랑하 기에 힘써야 합니다. 사랑의 진가는 어려울 때에야 비로 소 나타나는 법입니다. 만사 가 잘 되고 형통할 때 다정 하게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 고 다니는 잉꼬 부부들을 보 면 아름다운 장미 같습니다. 그러나 향기 없는 장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미의 진 짜 향기는 깊은 밤중에야 비 로소 맡을 수 있다고 합니 다. 부부가 정말 사랑합니 까? 그 사랑의 향기를 맡고 싶습니까? 생의 위기를 만나 가족이 험하고 좁은 길을 함 께 걸을 때 맡을 수 있습니 다.

우리 주변을 봅시다. 벌써 부터 난리들이 아닙니까? 그 렇게 잘 살 때는 검은머리가 흰 파뿌리처럼 될 때까지 당 신만을 영원토록 사랑하겠다 던 사람들이 생활이 조금 어 려워지고 남편이 직장에서 쫓겨나게 되어 무능한 남자 로 보이기 시작하니까 서로 의 사이가 금이 가고 티격태 격하다가 나중엔 별 것 아닌 것 가지고 싸우다가 갈라서 고 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 게 합니까? 그 동안의 사랑 이 가짜였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 서 저는 지금이야말로 우리 가 진짜 사랑을 할 때가 되 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표준-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은 먼저 우리에게 사랑의 표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 한 것 같이"가 그 표준입니 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 셨습니다. 어떻게 사랑하셨 습니까? 아무 조건 없이 사 랑하셨습니다. 잘 살 때나 못 살 때나 건강할 때나 병 들었을 때나 그 어느 때든지 무조건 사랑하시는 것이 바 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희 생하는 사랑입니다. 변함없 는 사랑입니다. 한번 사랑하 고 끝나는 사랑이 아닙니다. 한번 마음을 주셨으면 끝까 지 변함없이 사랑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 니다. 주님은 바로 이 사랑 의 표준에 맞추어서 서로 사 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 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듣 다가 보면 정말 사랑할 자신 감을 잃어버립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목사의 입장에 서도 사랑한다는 것만큼 어 려운 게 없습니다. 미워하지 말라는 말은 그래도 쉽습니 다. 그것은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안 미 워하면 그만이니까요. 그러 나 사랑하라는 말씀은 정말 부담스럽습니다. 목사 같으 면 절로 될 것 같지 않습니 까? 그러나 그게 그렇게 쉽 게 안되더라고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서로 사랑 의 표준이기 때문에 표준이 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 서 사랑하라는 말만 들으면 기가 질려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실천하기 어렵다고 포기해 버립니까? '교회에서 늘 하 는 소리 아니냐? 하지만 마 음은 원이로되 육신도 약하 고 손발도 약하고 입도 약하 고 다 약한데 어떻게 하냐?' 하며 실천하지 못하는 자신 을 위로하는 것으로 만족합 니까?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아주 심각 한 문제가 우리를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을 알 수 없게 된다는 것입 니다. 카렐이라고 하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 님은 이해할 줄 아는 사람보 다는 사랑할 줄 아는 사람에 게 그의 참 모습을 드러내신 다."

하나님이 자기의 참 모 습을 드러내시는 사람은 성 경을 열심히 연구하고, 제자 훈련도 받고, 크로스웨이 성 경 대학도 다니고 해서 하나 님의 말씀을 줄줄이 꿰며 외 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사람도 하나님을 조금 알 수는 있지만 진짜 하나님 의 참 모습을 발견하는 사람 은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나 님처럼 사랑해 보려고 할 때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자기 모습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 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 를 사랑하신 것처럼 하기가 어렵다 하여 사랑하기를 포 기해서는 안됩니다. 머리로 는 알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알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예수님을 안다고 할 지 모르지만 우리의 모습은 예수님을 닮아갈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을 알리라."

제자는 선생을 알아야 합니다. 제자는 선생 을 닮아야 합니다. 제자는 선생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 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반드 시 예수님처럼 사랑해봐야 합니다. 그 어떤 변명을 늘 어놓든지 간에 사랑하지 않 으면 절대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는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 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라는 이 표준에 맞추어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

다음으로 예수님은 사랑 의 대상을 정해 주셨습니다. 누구를 사랑하라고 하십니 까? 서로를 사랑하라고 하십 니다. 서로가 누구입니까? 일차적으로는 제자들끼리입 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 한 제자들 말입니다. 예 수님은 거창한 인류를 사랑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 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 니다. 주님이 서로 사랑하라 할 때 서로는 내 아내요, 내 남편이요, 내 자식이요, 함께 예배드리는 옆에 있는 사랑 하는 믿음의 형제 자매들입 니다. 멀리 있는 사람을 이 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알 지도 못하는 사람을 마음에 두고 사랑하라는 문제를 가 지고 고민할 것 없습니다.

C. S. 루이스가 이런 말 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남자 나 여자로서의 개개인을 사 랑하는 것보다 인류를 사랑 한다고 하는 거창한 타이틀 을 들고 나오는 사람들은 대 개가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 는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가까운 데 있는 사람 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도 말했 습니다.

"내가 진실로 한 사 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전 세계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는 것 입니다."

내가 옆에 있는 남 편을 보고

"여보, 내가 당신 을 사랑해요."

라고 말한다 면 나는 그를 통해 전세계를 사랑하는 것이 되고, 동시에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된 다는 말입니다. 옳은 말이라 고 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 지 않습니까?

"보이는 사람 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어떻 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 랑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너무나 논리적인 이야기입니 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 라"의 '서로'는 나와 가장 가 까이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 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사랑 해야 합니다.

삶이 어렵고 고통스러운 이와 같은 때에 우리가 예수 님의 명령을 따라 서로 사랑 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항을 꼭 실천에 옮겨야 됩니다. 막연히 사랑 해야지 하고 생각만 하고 있 다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 다. 사랑은 행동입니다. 사랑 은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우 리가 실천해야 될 것들이 경 우에 따라 더 많을 수 있습 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세 가 지만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위로하라

첫째로, 우리가 서로 사랑 하기 위해서는 서로 위로해 야 합니다. 골고다 현장에서 넋을 잃고 돌아온 제자들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너나 가릴 것 없이 그들은 다 실 패자요, 배신자요, 비겁자였 습니다. 자신을 지탱하기 어 려울 정도로 심한 상처와 좌 절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들 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 엇이었을까요? 따뜻한 위로 의 말 한마디였을 것입니다. 그들을 주저앉지 않도록 하 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 면 격려의 말 한마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사랑입니 다. 사랑은 무슨 값을 많이 지불해야 되는 것이 아닙니 다. 위로의 말, 격려의 말 한 마디가 사랑을 대변할 수 있 을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세상은 너무 경쟁적이고 폭력적입니다. 직장에서 돌 아오는 남편의 모습을 떠올 려 보십시오. 하루 종일 실 컷 두들겨 맞고 들어오는 사 람같이 보일 때가 얼마나 많 습니까? 상대를 죽이지 않으 면 내가 죽게되는 무서운 생 존 경쟁 사회에서 남보다 어 쨌든 더 앞서야 한다는 절박 한 경쟁 의식 속에서 하루 종일 이리 저리 뛰어다니다 보면 이 무서운 정신적인 폭 력 때문에 온 몸이 주눅이 들어서 가정으로 돌아오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입니다. 그래서 감정의 날이 시퍼렇 게 서 있을 때가 많이 있습 니다. 상처도 많이 입고 들 어옵니다. 너무 고독합니다.

얼마 전에 제자 훈련이 시작되었지 않습니까? 그런 데 어느 남자 제자 반에서 훈련을 받고 있던 한 형제가 지나가는 말로 이런 말을 하 더군요.

"참 이상해요. 목사 님, 남자들끼리 모인 곳이면 그렇지 않을 것 같은데, 남 자들끼리 모여 있으면 눈물 이 참 많아요."

여자들이 옆 에 있을 때는 남자로서의 자 존심 때문에 체면을 차리고 서 눈물이 나도 참고 견디지 만 남자들끼리 있으면 자기 도 모르게 우는 사람이 많다 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절 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게 남자입니다. 한편 아내 는 집에서 하루 종일 얼마나 애간장을 태웁니까? '오늘 남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 지는 않았나? 만약에 어떤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살아 가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하루 종일 손에 일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안절부절 하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저녁에 남편이 들어오면 조마조마한 가슴으로 남편의 표정부터 먼저 살피는 것이 아내의 심 정이 아닙니까? 또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경쟁에 시달리며 늘 긴장된 모습으로 살아가 고 있습니다. 이럴 때 식구 끼리 서로가 나누는 한마디 의 위로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입니 다.

헨리 나우웬이라고 하는 분은 위대한 학자요, 위대한 성인,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저술가입니다. 그분은 '위로'라고 하는 말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위로라고 하 는 것은 외로운 사람과 함께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위 로한다는 것은 마음을 쓰며 돌보는 일 가운데 중요한 것 입니다. 위로한다는 것은 고 통을 가져 가 버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위로는 함께 있으면서 '당신은 혼자 가 아닙니다. 내가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고통을 감당할 수 있어요. 두려워하지 마세요.'라는 의 미의 말 한마디를 하는 것입 니다."

우리 모두가 바로 이 와 같은 위로가 필요한 때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험 적으로 보면 가족끼리 위로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예 멀리 있는 사람이나 잘 모르 는 사람을 만나면

"걱정하지 말게. 곧 지나갈 태풍이야."

라며 위로의 말을 건네기가 그래도 쉬울 것입니다. 그러 나 가정에서 날마다 함께 사 는 식구들에게는 위로의 말 을 한다는 것이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설사 위로한다 하더라도 한두 번 정도야 할 수 있겠지만 일마 다 때마다 변함없이 위로하 고 격려해주기란 지극히 어 렵습니다. 더욱이 일이 꼬이 고 잘못되는 통에 신경이 날 카로워져 있을 때나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을 느낄 때 생의 한 동반자로서 자기를 비우 고 전신을 바쳐 남편을 격려 하고 위로하는 아내가 되기 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닙니 다.

저는 우리 교회 모 집사 님 가정의 이야기를 들은 적 이 있습니다. 이 집사님의 남편은 그래도 꽤 괜찮은 중 소 기업의 대표 이사로 계시 던 분입니다. 그 동안 그가 경영하는 회사가 잘되고 있 었는데 최근의 IMF 한파를 맞아 그만 부도가 나고 말았 습니다. 흑자 부도가 난 것 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는 자기가 갖고 있던 것도 다 직원들에게 나누어 줘버렸습 니다. 그리고 지금 살고 있 는 아파트도 며칠 후에는 경 매에 붙여진다고 합니다. 이 제는 더 이상 갈 곳도 없어 지는 그런 상황이 되고 만 것입니다. 남자는 하루 종일 집안에 멍하니 앉아 있습니 다. 그러니 그 집안 분위기 가 어떠했겠습니까? 생기라 고는 찾아보기 어렵고, 숨쉬 는 것조차 힘들만큼 답답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눈이 많이 왔지 않습니까? 그때 부인되는 집사님이 남편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 다.

"여보, 눈 오는 것 봐요.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어요. 우리 이러고 앉아 있지 말고 우리 같이 카메라 들고 밖에 나가요. 나가서 눈 오는 사 진 좀 같이 찍어요."

남편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해서는 그런 아이디어가 필요하다고 느꼈던 모양입니다. 그랬더 니 감사하게도 평생 처음으 로 남편이 그러면 나가볼까 하며 일어서더라는 것입니 다. 그러니까 고등학교 다니 는 애도 같이 따라 나섰습니 다. 밖으로 나오니 함박눈이 마구 쏟아져 내리는 것이 아 닙니까? 함박눈을 보자 어느 누구부터라고 할 것 없이 모 두들 동심으로 돌아가서는 눈이 쌓인 나무를 흔들기도 하고, 눈싸움도 하고, 사진도 찍고 하면서 신나게 한 순간 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집사님이 그렇게 했다는 말을 듣고 '참 훌륭한 아내 구나. 위대한 여인이구나.'하 고 생각을 했습니다. 큰 일 을 해서 위대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이 못하는 작은 일을 할 때 위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위로가 필요한 때입니다. 가정에 돌아가서 위로합시다. 격려합시다.

용서하라

둘째로, 우리가 서로 사랑 하기 위해서는 서로 용서해 야 합니다. 한번 제자들의 입장을 상상해 보십시오. 예 수님이 십자가에서 수모의 죽음을 당하는 것을 지켜본 그들은 누가 자기들도 붙들 려 오지 않을까 여간 불안하 지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열 한 제자는 다락방 문을 닫아걸고 두문불출하고 들어 앉아 있었습니다. 이럴 때 마태가 갑자기 베드로를 보 고

"당신은 수제자가 아닌 가? 그런데 어떻게 사람들 앞에서 세 번이나 주님을 모 른다고 부인하여 우리를 망 신시킬 수 있느냐?"

하며 대 든다고 해 봅시다. 그리고 다른 제자는 요한에게

"자네 는 말이야. 예수님이 십자가 에 못 박힐 때 바로 옆에까 지 가서 서 있었지 않은가? 거기서 뭐하고 있었는가? 대 제사장과 좀 안다면서 왜 그 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수 를 쓰지 못했나?"

라며 불평 을 하고, 안드레는 누군가에 게

"네가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그물을 버리고 좇아가지 않았으면 나도 안 따라갔을 거야. 그랬더라면 갈릴리에서 고기를 잘 잡고 있었을 텐데 지금 내 꼴이 뭔가? 네가 괜히 흥분해 가 지고 나서는 통에 오늘 내가 이 꼴이 됐잖아."

하며 서로 를 탓하고만 있다고 해 보십 시오. 그 분위기가 어떠했겠 습니까?

잘못하면 우리도 그렇게 되기 쉽습니다. 우리가 가정 을 서로 탓만 할 뿐 용서하 지 못하는 그런 살벌한 분위 기로 몰아넣을 수 있는 것입 니다. 누군가 용서를 공동체 생활의 접착제라고 말했습니 다. 옳은 말이라고 봅니다. 용서는 가정이라는 공동체가 깨어지지 않도록 하나로 묶 어주는 접착제입니다. 용서 하면 공동체가 절대 흩어지 지 않습니다. 가정이 흩어지 지 않습니다. 부부가 나누어 지지 않습니다. 자녀들이 튀 어 나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용서하지 못하면 이 접착제 가 끊어지기 때문에 결국 모 든 것이 흩어지고 맙니다. 우리 모두는 완전한 사랑을 갈구하고 있지만 그런 사랑 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 도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피차 용서해 주 어야 할 빚을 지고 있는 자 들입니다. 가정 식구들을 용 서하는 것은 특별히 더 중요 합니다. 마음의 상처는 보통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오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먼데 있는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입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습 니다. 대개가 식구들로 인해 서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나을 만하면 또 상처를 받습니다. 나 자신도 모르게 상대방의 상처를 또 긁어 피를 냅니다. 우리가 이러면서 한 가정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평안하고 형통할 때는 상처를 주거나 받거나 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처를 받는다 해도 쉽게 아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어 려워지고 세상살이가 빠듯해 지고 여러 가지 면에서 긴장 이 고조되면 나도 모르게 가 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상처 를 주기 쉽습니다. 옛날 시 골에서 농사 지을 때야 화가 나면 밖에 나가 강아지라도 두들겨 패면 되었지만 지금 은 스트레스를 풀 강아지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게 가까이 있는 아내에 게 마구 화풀이를 하고 애들 을 들볶으며 상처를 주는 것 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어 떻게 해야 합니까?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사랑입 니다. 용서란 자기를 해방시 키는 행위라는 말이 있습니 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 면 그에게 감정이 상했다는 정신적 부담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반면 용서 하지 않으면 자기의 감정을 상하게 한 그 사람들을 늘 마음속에 데리고 다녀야 하 는 부담을 질 수밖에 없습니 다. 그러나 용서하면 그런 부담에서 자유 할 수 있습니 다. 그럴 때 나도 살고, 내 가까이 있는 가족과 사랑하 는 이웃들도 삽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용서하 고 있는 지, 그렇지 못한 지 는 어려운 위기를 만났을 때 에야 비로소 분명하게 드러 납니다. 평소에는 용서했다 고 생각했는데 어려운 경제 사정 때문에 가정에서 웃음 이 사라져 버리거나 갑자기 어떤 문제가 터지자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 이 드러나는 때가 많습니다. 갑자기 터져 나온 문제를 빌 미로 삼아 남편을 괴롭히고, 아내를 괴롭히는 것은 아직 상한 감정이 그대로 남아 있 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경 제적인 위기를 만났다고 파 산되는 많은 가정들을 보십 시오. 그 가정의 문제가 정 말 돈의 문제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평소에 용 서한 줄 알고 덮어두었는데 사실은 용서하지 못하고 있 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의 응어리 때문에 가정 이 상처투성이가 되고, 깨어 지고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 러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못나고 무능한 남편 이라도 용서하시기 바랍니 다. 평소에 돈 잘 벌어 줄 때 흥청망청 쓰기에 바빴던 아내도 용서하시기 바랍니 다. 서로가 용서하고 끌어안 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어 려운 위기를 함께 웃으면서 대처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용서가 곧 사랑인 것입니다.

인내하라

셋째로, 우리가 서로 사랑 하기 위해서는 서로 인내해 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에 보면 진정한 사랑이 무엇 인가를 이야기하면서 인내를 여러 번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옛 속담에

"참을 인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이 있습 니다. 우리의 삶에서 참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 입니다. 험하고 가파른 길을 오르면서 함께 참는 것만큼 큰사랑이 없습니다.

코리텐 붐이라고 하는 위 대한 여성은 참는 것에 대해 서 이런 비유를 들었습니다. 스위스에 있는 알프스 터널 을 한번 통과하려면 30분 이 상 걸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차가 연기를 품으면서 달 리던 시절에는 일단 터널 속 에 들어가면 모두들 손수건 을 가지고 코를 막아야 했습 니다. 아무리 문을 꽉꽉 닫 아놓아도 한 30분을 연기로 가득 찬 터널 속을 달리다보 면 객차 안에 연기가 가득 찰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만 있어도 코 안이 새까매지고 숨이 탁탁 막힐 정도니 터널 을 지나는 그 시간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러나 그 렇다고 해서 기차표를 찢어 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 을 열고 뛰어 내리는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코를 손수 건으로 틀어막고 숨을 아끼 며 참습니다. '조금 있으면 밝은 햇살이 찬란하게 비치 는 입구가 나올 거야. 이제 한 10분만 더 가면 돼.' 하며 이겨내는 것입니다. 이게 바 로 인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IMF 한파가 우리 나라를 스쳐 지나가는 동안 은 우리가 추워도 참아야 됩 니다. 먹고 싶은 대로 먹지 못하고, 쓰고 싶은 것도 절 제해야 하고, 여러 가지 불 편한 것도 겪는다 해도 참아 야 합니다.

"아빠, 우린 참을 수 있어요. 염려하지 마세 요."

"여보, 나 괜찮아요. 전 의 옷 다시 손질해 가지고 입으니까 이렇게 예쁘지 않 아요? 보세요."

"아빠 직장 못 가는 것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한두 달 푹 쉬세요. 그 다음에 기도한 다음에 하 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 무엇 이든지 한번 해보자 구요. 기껏 해 봐야 한 2년 이렇게 고생하면 되지 않겠어요?"

이러면서 서로 참는 모습을 보여 주는 이것이 오늘날 우 리 가정을 위기 속에서 행복 하게 만드는 비결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 분, 저는 오늘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꼭 실천할 일 세 가지를 말씀드렸습니 다. 서로 위로하고, 용서하 고, 참자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한두 번 실천하는 것 을 그치지 말고 한평생 동안 계속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식구끼리 나누는 사랑은 끝 까지 가는 사랑이어야 합니 다. 무조건적인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은 은혜 없이는 안 되는 사 랑입니다. 은혜를 받아야만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습니 다. 예수님이 서로 사랑하라 는 명령을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바로 여기 에 있습니다(34절). 은혜를 받아서 하는 사랑이기 때문 입니다. 사실 서로 사랑하라 고 하는 것은 구약에도 있는 옛 계명입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주님께서 '새 계명'이 라고 이름 붙이신 것은 은혜 받아야만 할 수 있는 사랑이 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앞에 서 은혜를 받으면 우리가 서 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 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묵상하며 감격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서로 사랑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왕 서로 사랑해야 된다면 흠뻑 젖을 때까지 합시다. 적당히 사랑 하지 맙시다. 잠깐 사랑하다 가 중단하지 맙시다. 흠뻑 젖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온 집안이 사랑의 홍수가 나서 전부 떠내려갈 정도로 실컷 사랑해 봅시다. 저는 작은 정원을 가지고 있는 어떤 사 람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 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저녁 으로 정원에 나가서 나무에 물을 주고 가꾸는 일을 즐기 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나무가 생 기를 잃고 점점 시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것 때문에 며칠을 고민하 다가 자기 회사 동료 가운데 나무에 관한 한 도사라고 하 는 사람을 찾아가서 자기 집 나무를 봐달라고 부탁을 했 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나 무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이 런 진단을 내렸습니다. 토질 이 척박해서라거나 나무에 무슨 병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라 물을 너무 적게 줘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가 아 침저녁으로 물을 주긴 했지 만 너무 적게 줬기 때문에 나무가 더 갈급증이 나서 죽 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양 을 마음껏 주지 않으면 나무 가 오히려 물을 줌으로써 더 병이 듭니다. 물을 대충대충 주면 안됩니다. 큰 나무는 물이 뿌리 깊이까지 푹 스며 들도록 잔뜩 부어 주어야 합 니다. 그저 호수를 가지고 잎사귀에 물을 조금 뿌리는 정도로는 어림도 없는 것입 니다. 물을 주어도 흠뻑 주 어야 잘 자랄 수 있는 것입 니다. 어디 나무만 그렇겠습 니까? 사람도 마찬가지입니 다. 마음이 공허하게 비어있 는데 날마다

"사랑해요"라며 간지럼만 태우고 있다면 어 떻게 되겠습니까? 그 빈자리 가 더 커지지 않겠습니까? 사랑이 속에서부터 물씬물씬 하게 품어 나오도록 나중에 는

"아이고 그만 사랑해요. 나 못살겠어요."라고 행복에 겨운 비명을 지를 정도로 마 음껏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아무리 어려 운 일이 많이 일어나도 범사 에 감사하며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 받고 있다는 감정보다 마력적인 것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 랑 받고 있다는 감정은 어깨 에 하나님의 손길이 닿는 것 을 느끼는 것과 같다는 것입 니다. 크고 부드럽고 따뜻한 하나님의 손길이 내 어깨에 와서 놓인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감동적이 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부드럽고 따뜻한 손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사 랑하는 아내는 남편의 축 쳐 진 어깨에 얹는 하나님의 큰 손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 하는 남편은 불안해하는 아 내의 어깨에 조용히 얹어 주 시는 하나님의 부드럽고 큰 손이 될 수 있습니다. 남편 은 아내에게, 또 아내는 남 편에게, 아빠는 자녀에게, 자 녀는 아빠에게 하나님의 큰 손이 됩시다. 그럴 때 우리 는 아무리 어려운 고통이 가 정을 향하여 물밀듯이 닥쳐 온다 해도 주안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 안에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안에서 건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 는 이와 같은 놀라운 사랑의 은혜를 우리 모두 한 사람도 놓치지 않고 실천할 수 있기 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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