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장 14-18절 독생자의 영광을 보라(2) - 옥한흠 목사
설교제목 : 독생자의 영광을 보라(2)
설교본문 : 요한복음 1:14-18
설교자 : 옥한흠 목사님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예수님에게 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자들이 되자는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해 봅시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요한은 그 당시에 유행하던 표현을 따라 예수님을 로고스로 소개했습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시면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의 생명의 근원이자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빛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보기에 초라한 목수에 지나지 않지만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다시 말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자는 예수님에게서 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은 자기 혼자 이 영광을 본다고 하지 않고,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데아오마이의 의미
이제 우리가 좀 더 깊게 다루어야 될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할 때 본다는 말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입니다. 흔히 본다 하면 우리는 두 눈을 가지고 살피는 것을 먼저 떠올립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 눈으로 확 인할 수 있는 어떤 형상이나 차원을 놓고 본다고 말하고, 우리 눈에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는 것을 놓고 못 본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말도 우리 눈에 보이는 그 무엇에 대한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없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야 그 당시에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의 몸을 입고 눈앞에 나타났으니까 분명히 보았지만, 우리는 그 분을 눈으로 보지 못하지 않느냐? 그런데 왜 자꾸 보자고 하느냐?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본다는 말을 이와 같이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으로만 이해하는 함정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제가 오늘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눈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보는 것이, 육신의 모습을 가지고 그 분의 외형을 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데 얼마나 치명적인 방해가 되는지를 밝혀 드리겠다는 말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눈에 나타나면 금방 믿을 수 있을 것 같고, 하나님의 영광 앞에 금방 무릎을 꿇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14절의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에서 본다는 말은 아주 독특한 단어입니다. 요한복음에는 보다, 본다 하는 말에 해당하는 단어가 다섯 가지 정도 나옵니다. 우리 한글 개역 성경에는 전부 본다는 말로 번역했습니다만 헬라어 원문에서는 상황에 따라서 단어가 수시로 달라집니다. 본 문에 나오는 보다는 헬라어로 데아오마이(theaomai)인데, 요한복음 1장 32절과 연관시켜 생각해 보면 그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가 세례를 베푸는 요단 강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단지 어떤 청년이 나와서 세례를 받으려고 한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물론 다른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 보고 요한이 이미 그분이 누구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확실한 증거는 아직 잡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 물에 들어가시자 요한은 그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는데 성령이 비둘기와 같이 예수님의 머리 위에 내려앉는 것이었습니다. 32 절을 보십시오.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요한은 예수님 위에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여기서 보다 하는 말이 14절과 마찬가지로 데아오마이로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한은 성령이 예수님의 머리 위에 비둘기처럼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수많은 사람들 이 있었음에도 요한 외에 그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현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두 눈을 가진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이 예수님 머리 위에 비둘기처럼 임하는 것은 요한이 영의 눈으로 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분명히 알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자리에 있었음에도 그것을 보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다는 말을 평범한 단어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 육신의 눈을 가지고 일일이 살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육신의 눈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과 관계없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데 장애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이것을 증명해 드리겠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신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고, 많은 이적 기사를 통해 서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똑똑 히 증거하셨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7장 5절에 보면 예수님의 형제들조차도 그가 하나님이신 것을 절대 믿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까지도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 은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보면서 자란 사람들이 아닙니까? 한 이부자리에서 자고, 같은 상에서 먹고, 눈만 뜨면 쳐다보며 살았을 텐데 왜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보지 못 했을까요? 참 희한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는 것은 그의 영광을 보는 것과 하등의 관계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안 믿기는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성장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을 만큼 예수님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지막까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13-14절 에 보면, 예수님은 마음에 섭섭함을 가지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화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심판 때에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고라신이나 가버나움은 예수님이 어린 시절부터 살았던 고향 주변 동네들이었습니다. 이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데 가장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너무 익히 보고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기가 그만큼 힘들었던 것입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면서 가족도 내버리고, 직업도 내버리고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동거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듣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 기사를 죄다 보았던 열 두 제자들조차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즈음이 되자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14장 8절에서 빌립은 제자들을 대표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님을 3년 동안 그렇게 가까이 모시고 있으면서도 아직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였다니 이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아무리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듣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이렇게 책망 했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 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 가 믿지 아니하느냐? 왜 자기를 보고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하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오히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은 잘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데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책망을 통해 이 사실을 분명히 확인해야 합니다.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합니까? 제가 세 가지로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입니다. 하나의 대상을 놓고 이쪽 저쪽에서 입체 적으로 살피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첫째로, 믿는 것이 보는 것입니다. 아니, 이거 너무 시시하잖아! 굉장한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겨우 믿는 것이 보는 것이라고? 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진리는 원래가 단순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 절을 보십시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그렇습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믿을 때 우리는 그것을 영으로 본다고 말합니다. 빌립이 예수님께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그랬을 때 예수님께서 이런 처방을 내리셨지 않습니까?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14:10-11) 보여 달라는 사람에게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으면 아버지를 보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여러분들 모두가 보는 자들임을 분명히 믿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주님을 참 하나님으로 믿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앉으셨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여러분 가운데 아직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지 못하고, 마음을 열고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이 계시다면 이 시간 마음을 열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믿으면 여러분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보는 자가 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이 단계를 거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나님의 영광 앞에 나갈 수가 없습니다.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마십시오. 믿음을 가지고 더 이상 씨름하지 마십시오. 믿으십시오. 믿으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믿는 그 자체가 보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 보는 것이다
둘째로, 아는 것이 보는 것입니다. 무엇을 아는 것입니까? 은혜와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충만한 은혜와 진리를 아는 것을 놓고 본다고 말합니다. 14절을 다시 한 번 정리합시다. 말씀이 육신 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 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 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 안에 있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을 아는 것이 곧 그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하나하나 알고 들어가는 사람은 진리 앞으로 접근하는 사람입니다. 또 은혜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나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선물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압니까? 은혜가 선물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선물인 은혜는 더욱 넘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길과 진리는 오직 예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원하면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더 깊이 알고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 진리는 너무나 그 차원이 높고, 깊고, 넓어서 우리 머리에 전부 담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좁은 마음으로 예수님에 대한 진리를 전부 포용할 수가 없습니다. 절대 안 됩니다.
우리가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충만은 우주를 채우는 충만입니다. 이 충만은 만물 가운데 있는 충만입니다. 지식에 넘치는 하나님의 충만입니다. 이것은 저울로 달 수 있는 어떤 양이 아닙니다. 넘치고 넘치는 충만 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끝이 없다는 말입니다. 진리만이 충만한 것이 아닙니다. 은혜도 충만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진리가 쌓이면 쌓일수록, 그 진리가 마음에 와 닿으면 닿을수록,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부어주시는 선물이 어떤 것인가를 마음으로 더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 은혜가 내 안에서 샘솟듯이 넘쳐 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 이런 말씀이구나. 하고 깨닫는 분도 많으시겠지만 참 어렵다. 오늘은 조금 추상적인 설교를 하시는구나. 하는 분도 계시리라 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두십시오. 예수님을 아는 데는 끝이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은혜와 진리의 충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충만은 우리가 아는 어떤 양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충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으로부터 쏟아지는 은혜 역시 더불어 충만하게 되어 있습니다. 끝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이 은혜가 얼마나 충만한 지 한번 예를 들어봅시다. 다른 사람보다 자기 죄가 더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이 구원의 은혜가 주는 감격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차고 넘치는 것 같습니다. 가장 좋은 사례가 바울입니다. 바울은 자기를 죄인 중에 괴수(딤전 1:15)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어떤 수사학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가 과거에 지은 죄를 생각하면 가장 큰 죄인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는 스데반을 죽인 죄인입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앞장 선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던 죄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세상 어떤 사람보다 하나님 앞에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였던 자기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자신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격에 벅차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죄인 의식과 감격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로마서 5장 20절에 나오는 말씀대로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진리를 날마다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지 거의 30년이 되어가던 때에도 그는 자기 과거를 떠올리며 여전히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딤전 1:14). 하나님이 그에게 얼마나 은혜를 부어주셨는지,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끝이 없었다는 것 입니다. 주의 은혜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넘쳤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그 만큼 풍성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원하면 이 충만한 진리와 은혜를 알고자 하는 간절함을 가지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서 우리에게 오신 인격이십니다. 사람과 사람이 사귀는 것은 인격적인 만남이지 않습니까? 돼지와 소를 만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돼지와 소는 한번만 만나면 됩니다. 자를 가지고 머리부터 꼬리까지 몇 미터 몇 센티인지를 재어보고, 무게를 달아 보면 그것을 끝입니다. 그 이상 알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돼지는 인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인격적인 것이기 때문에 한번 만나 가지고는 서로 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사기꾼이나 돌아다니면서 한번 만난 고위층에 있는 사람을 자기가 잘 안다는 소리를 하고 다니지, 정말로 사람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꿰뚫어보는 사람은 절대 그런 엉터리 같은 소리 하지 못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자주 만날수록 서로를 아는 깊이가 깊어집니다. 서로 마음을 열고 사귀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가까워져서 마음을 나누는 관계가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너나 나나 똑같다고 할 정도로 서로가 일체감을 느끼는 정도까지 발전합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 누구를 조금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격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통해 자기를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예수님을 통해서 분명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알기를 원한다면 인격 되신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인격은 한번 만나서 아는 것으로 그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아는 것이 곧 보는 것이기 때문에 중생 받은 사람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더 알고 싶어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더 깊게 알고 싶고, 그 은혜를 더 많이 받고 싶은 갈증이 있게 마련인 것입니다.
어린 자녀를 키우셨거나 키우고 계신 분들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아이의 본능이 무엇입니까? 가급적이면 엄마와 같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더 아빠 엄마 옆에 찰싹 달라붙습니다. 돌보아주면 돌 보아줄수록, 위해주면 위해줄수록 아이는 엄마한테서 안 떨어지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아이의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그 엄마한테서 났으니까 자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서 난자입니까? 중생을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더 알고 싶은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눈에 커 보이는 사람에게는 지대한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리고 어떻게든지 그와 가까이 사귀고 싶어합니다. 우리 눈에 들지 않는 하찮은 사람 같으면 한 번 만나고 다 잊어 버리면서도 우리가 존경하는 사람은 한번 만나는 것으로 너무 아쉬워합니다. 그만큼 관심이 있고 매력을 느끼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몇 주 전에 우리 교회 교역자들 이 수련회를 가졌습니다. 1년에 한 두 번 가는 이 수련회가 우리 교역자들에게는 참 중요합니다. 주일학교에서 일하시는 전도사님들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교역자들이 한 자리에 앉아 옥 목사와 좀 더 가까이 사 귈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되기 때 문입니다. 사실 교역자가 이제 육칠 십 명 정도 되니까 저를 만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 사무실의 문을 함부로 두드리고 들어올 수 있는 사람도 몇 사람에 불과하고, 그렇다고 전화를 함부로 걸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너무 바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처음 우리 교회에 와서 일을 하는 전도사님들에게는 이 옥 목사가 굉장히 커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커 보이니까 관심이 자꾸 가고, 무엇이든지 알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평소에 품고 있던 욕구를 수련회 때 발산을 하는 것입니다. 저녁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데 별별 자질구레한 질문까지 다 나왔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결혼하게 되셨어요? 연애입니까? 중매입니까? 목사님은 어떻게 처음에 목사가 되려고 생각 했나요? 목사님은 성경을 어떻게 공부하고 계세요? 심지어는 이런 질문도 있었습니다. 목사님, 아이디어가 번쩍번쩍 떠오를 때는 언제입니까? 또 어디에서 제일 많이 떠오릅니까? 사실 가만히 보면 안 해도 될 질문 같은데 왜 이런 질문들을 할까요? 저에 대해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뭔가 자꾸 알고 싶은 것입니다.
만일 제가 우리 교역자들에게 특별히 배려한답시고 너, 날마다 나하고 한 번씩 만나자. 내가 오전 9시에 내 사무실에서 기다릴 테니 꼭 찾아 와라. 우리 30분만 같이 이야기하자. 하고 말하면 아마 한 반년은 들떠 가지고 정신을 못 차릴지 모릅니다. 알면 알수록 좋으니까 그런 것 입니다. 이게 인격이요, 인격끼리의 만남입니다.
종착역이 없는 거룩한 여행
그렇다면 사람이 되어 우리 앞에 찾아오신 하나님을 우리가 얼마나 알아야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진정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다면 우리 속에 저 분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다. 저 분과 좀 더 친해지면 좋겠다. 하는 간절함이 생겨야 정상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반응입니다. 단순히 머리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사실을 인정할 때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가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집 문 앞에 갑자기 굉장히 높은 사람이 벨을 누르고 서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아마도 여러분은 기절초풍 할 지도 모릅니다. 그 다음부터 여러분은 그 분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아마도 정신없이 있는 정성을 다할 것입니다. 믿음이 바로 이와 같다는 말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나를 찾아오셨다는 사실에 대한 우리의 구체적인 반응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내 앞에 와서 자기를 보여주셨는데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요? 진리와 은혜가 충만하신 그 분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하는 간절한 갈증, 이것을 갖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을 더 알고 싶고, 더 가까이 하고 싶어 하는 거룩한 탐색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14절에서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할 때 보니 하는 말은 원어로는 현재 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에서 현재완료는 한번 보아서 끝나는 어떤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학습 세례 문답 받을 때 예수 믿습니다. 하고 한마디 한다고 끝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한두 번 읽었다고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제자훈련 한번 받았다고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아는 이 진리는 너무나 충만해서 그 정도 가지고 졸 업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30년을 예수 믿으며, 매주 설교를 들었다고 해서 예수님을 다 아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더욱 알기 원하고, 그 은혜를 더욱 풍성히 받기를 원하여 시작한 이 여행은 종착역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주변에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에 대해 별로 흥미가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신득의(以信得義)가 무엇 입니까?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현대 교인들 가운데는 이 말을 오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믿으면 의롭다 함을 받는다, 구원 얻는다. 고 하니까 믿는다고 고백하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 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반응입니다. 그 반응 이란 예수님을 더 알고 싶어 하고, 은혜를 더 받고 싶어 하는 욕구를 가지고 주님 앞으로 달려가는 것을 말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진정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이제부터는 허리띠를 매고, 등불을 들고 예수님을 알기 위한 새로운 여행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디로 여행을 떠날 것 입니까? 성경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또 그분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간절히 갈망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공부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얼마나 깊이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아는 일에 얼마나 관심을 두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진정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왜 그 분에 대해 그 정도의 매력밖에 느끼지 못합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그 정도로 하찮은 존재입니까? 여러분이 성경을 진열장을 채우기 위한 양서정도로 취급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진정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싶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그 분과 더 가까이 사귀기를 원한다면 성경에 대해 우리가 절대 그런 태도를 취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관심이 있는 사람과 만날 때면 시간이 없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습니다. 가령 옥 목사가 여러분 집을 잠시 방문했다고 합시다. 제가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구, 벌써 10분이나 지났네요. 너무 바쁘신 것 같은데 이제 그만 가보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대답하지 않습니까? 아이고, 목사님. 무슨 말씀이세요? 좀 더 계세요. 괜찮아요. 사실 약속이 있긴 하지만 괜찮아요. 관심이 가고, 마음이 가는 사람은 시간을 재면서 만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면, 특히 오래 믿은 사람들을 보면 성경을 펴 놓고 주님의 영광을 보는 시간을 너무 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앉는 시간을 인색하게 할당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번 솔직하게 대답해 보십시오. 진짜 바쁘십니까? 얼마나 바쁘십니까? 좀 더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마음이 가는 일에는 시간을 재지 않는 버릇이 있습니다. 골프에 미친 사람을 보면 골프 칠 시간 없다는 소리 절대로 안합니다. 거기에 마음이 온통 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쇼핑하기 좋아하는 부인들도 보면 백화점 한 번 들어갔다 하면 시간을 잊어버립니다. 1층에서 부터 2층, 3층으로 오르내리다 보면 3 시간은 금방 지나가 버립니다. 거기에 마음이 온통 가 있기 때문에 시간을 재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건강을 위해 다니는 스포렉스에 가보면 수영하러 온 부인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보면 수영을 하는데 세월아 내월아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시간을 아끼지 않고 투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펴 놓고, 공부하고, 묵상하는 데도 이와 같은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 일을 가지고 자꾸 시간을 재다 보면 결국은 우리 영혼이 병들게 되기 마련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사흘만 엄마 얼굴을 안 보면 병이 납니다. 왜냐하면 그 어머니의 아들이요, 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씀을 들고 하나님의 얼굴을 사흘만 보지 않으면 우리 영혼은 금방 병들고, 죽게 됩니다. 세상에 짓밟힙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사는 데도 병들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닐 지도 모릅니다.
오래 믿었다는 분들께 다시 한 번 경고합니다. 여러분은 정말 예수님 에 대해서 다 알고 있습니까? 거드름 피우지 마십시오.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왜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까? 그들은 예수를 오래 믿었고, 그것도 잘 믿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나중에 가서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두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매력을 잃어버렸다는 말 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불꽃 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모습이 드러나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 눈을 뜨고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소경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열심이 식어버려 입에서 토해 내리라는 주님의 책망을 받는 한심한 사람들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향해 이렇게 권고 하셨습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 무엇을 회개하라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모르면서 아는 체 한 모든 죄를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을 알면 우리가 얼마나 압니까? 우리 마음이 얼마나 그분께 가 있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과 가깝습니까? 다 알 지도 못하면서 장로가 되었다고, 혹은 안수집사가 되었다고, 순장이 되었다고 다 아는 척 거들먹거리면 안 됩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마음속으로 이런 죄를 품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회개하시 기 바랍니다.
교회 안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평신도 성경 대학이나 다락방, 제자 훈련, 새 가족 모임, 교사 훈련원 등 등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수 있는 기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순수한 열심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예수님을 더 알고 싶은 마음에서 이런 프로그램들로 달려갑니다. 그러나 배우는 일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자기 딴에는 예수를 오래 믿어서 조금 안다는 사람들입니다. 다 안다는 생각에 벌써 그 마음 문이 닫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그런 분들은 예수님에 대해 안다는 것이 무엇 인가를 잘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받는 것이 보는 것이다
셋째는, 받는 것이 보는 것입니다. 16절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여기서 받는다는 말은 쉽게 말해 체험을 의미한다 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손에 뭔가를 들고 있어야 들었다고 말하고, 손에 뭔가를 가지고 있어야 얻었다고 말합니다. 손이 텅텅 비어있는데 가졌노라고 말한다면 그는 정신 나 간 사람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알고, 또 그로부터 오는 은혜를 넘치도록 체험한다면 우리는 분명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체험이라는 말은 성령의 터치라는 말로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강하게 감동시킬 때 우리 자신에게 체험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펴 놓고 조용히 읽을 때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터치 하시면 벌써 성경을 읽는 자세가 다릅니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가집니다. 성경을 읽다가 자기도 모르게 그 말씀에 감동을 받고 무릎 꿇어 기도하는 사람이 됩니다. 불안하던 마음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그래 맞아. 예수님이 오늘도 나와 함께 계시는구나. 그분이 나의 하나님이시 구나. 하고 고백하며, 감격에 겨워 찬 송을 합니다. 이와 같은 성령의 터치를 경험할 때 우리는 은혜를 체험 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다 보면 입이 열리지 않아 답답해서 씨름만 하다가 일어나는 날도 있지만 마음이 주님을 향해 활짝 열려 속에 있는 이야기를 주님께 스스럼 없이 아뢰는 날도 있습니다. 그런 날이면 우리는 주님께서 바로 내 앞에 서서 나의 음성을 하나하나 듣고 계심을 직감적으로 느낍니다. 그때는 많은 말이 필요 없습니다. 주님과 깊이 하나 되는 황홀감과 만족, 평안을 우리가 체험하게 되면 시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5분을 기도하든, 1시간 을 기도하든 간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흐르기만 한다면 우리는 주님과의 깊은 대화를 하는 자리까지 나 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온 인격이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은혜 받았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고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부터 미국의 기독교 대학들에 이상한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휘튼 대학과 에모리 대학을 비롯한 몇몇 유수한 기독교 대학 의 학생들 사이에 회개운동이 일어 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대학에는 매일 30분 정도 예배를 드리는 채플 시간이 있습니다. 학생들 중에는 출석을 부르니까 억지 춘향격으로 할 수 없이 나와 앉아 있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제가 얼마 전에 참석했던 어떤 모임에서 휘튼 대학의 총장이 나와 자기 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흥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느 날 채플 시간에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한 학생에게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났습니 다. 성령께서 터치하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분명 히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건방지고, 하나님을 다 아는 것처럼 거드름을 피우고, 기독교 대학에 다니면서 기독교를 비판하고, 성경을 불신하고 하던 그 모든 죄를 생각하니 가슴이 울컥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앞으로 나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를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그가 눈물을 흘리며 고백하고 들어가자 이번에는 한 여학생이 나와서 자기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회개의 물결은 장장 7 시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밖으로 나가는 사람도 없었고, 왜 빨리 안 마치느냐고 항의하는 사람 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와 하나님의 영광 앞에 앉았던 것입니다. 그 거룩하신 영광 앞에 자기가 얼마나 추하고 악하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기독교 대학들 안에 이러한 회개의 역사가 지금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말씀을 정리합시다. 본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첫째로, 믿는 것이 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사람이 되어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반응입니다.
둘째로, 아는 것이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을 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더 많이 알기를 사모하고 또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 렇게 해서 깨달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더 가까이 만나면 그것이 바로 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셋째는, 받는 것이 보는 것입니다. 16절의 은혜 위에 은혜러라. 하는 말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한 가지 은혜를 받는다고 그것이 평생 있을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얼마든지 소모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은혜가 지나가면 그 다음 은혜가 찾아오고, 그것이 지나가면 또 다른 은혜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중국집에 가서 고급 요리를 시 키면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접시가 한 열 다섯 개 정도 나옵니다. 처음에는 조그마한 접시를 가지고 스프를 먹고, 그 다음에 접시가 빌 때마다 또 다른 요리가 줄이어 나옵니다. 이것을 모르고 나오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다 먹다 보면 서너 그릇 먹고 나면 배가 불러 그 뒤에 나 오는 좋은 것은 하나도 못 먹게 됩니다. 그러나 조금 아는 사람은 조 금 맛보고 젖혀놓고, 또 맛보고 젖혀놓고 하면서 조절을 합니다. 나가면 또 들어오고, 나가면 또 들어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 역시 이와 비슷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을 더 깊이 알면 알수록 예수님으로부터 임하는 은혜는 메마르지 않습니다. 한 가지 은혜가 지나가면 다른 은혜가 오고, 그 은혜가 지나가면 또 다른 은혜가 오는 것입니다. 이 맛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마 음 속에 예수님을 더 알고 싶다는, 그래서 주님 앞에 더 가까이 나가서 은혜를 받고 싶다는 거룩한 갈망을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 이러한 갈망을 품고 주님을 보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태초부터 계시면서 천지를 창조하신 광대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와 우리를 만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분께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요? 먼저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분을 더 알고 싶어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을 통해 때를 따라 도우시는 은혜를 우리가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 은혜를 체험하면 우리는 이렇게 찬송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노라! 나는 독생자의 영광을 보노라! 이 영광을 보는 눈이 환하게 열려있을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 영광의 눈이 조금이라도 흐리지는 날이면 세상의 영광이 우리 마음을 뒤덮고, 우리 눈을 가려버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목사도, 순장도, 주일학교 교사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직책이 무엇이냐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얼마나 오래 믿었느냐도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보는 눈이 흐려지면 우리가 백년을 믿어도 세상으로 빠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그 영혼이 병들고, 그 믿음이 화석화 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됩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전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 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날로 더 잘 알게 되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성령을 통해 주시는 은혜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은 은혜 속에서도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보는 황홀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평안이 넘치고 있습니까? 주님으로부터 오는 자유함을 누리고 계십니까?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만족과 담대함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사람만이 이와 같은 은혜를 마음속에 가득히 담고 이 세상 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모두 주의 영광을 바라봅시다. 날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 위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복된 삶을 삽시다. 할렐루야!